마천면 삼정리(三丁里)에서 연하천산장까지 8㎞ 정도의 지름길이다. 당일 산행 코스로
혹은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 가끔 찾을 수 있다. 거의 절반쯤은 벽소령 작전도로를 따라 가므
로 길은 편하고 뚜렷한 편이다. 1989년 5월 5일 필자가 이 코스를 오를 때는 한창 봄나물들
이 솟아날 때라 마침 하정(下丁)마을{삼정리하는 지명은 곧 양정(陽丁), 음정(陰丁), 하정(下
丁) 이 세 마을을 합해서 부르는 말이다}에서 아침 일찍 나물 뜯으러 떠난 아주머니 두 분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인걸과 아미 선녀의 애틋한 이야기
두 아주머니가 가끔씩 '우~~우~~'하고 마치 가축몰이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도회지 사
람들이 산 정상에서 외치는 '야호~~'소리와는 달리 긴 여운을 남기며 광대골을 울리고 있었
다. 지리산 인근 사람들은 '야호~~' 소리 대신 '우~~우~~'하는,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이
일종의 신호방법으로 혹은 감탄사격의 외침소리로 즐겨 사용하던 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
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천박한(?)느낌이 드는 '야호~~' 소리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또 폐부
깊숙이서 날숨 소리로 내는 것이라 소리의 파장도 길게 뻗어나가는 듯했다.
벽소령 도로를 따라 취나물, 개발딱주, 두릅 등이 많이 보였다. 잎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는 취나물은 무척 많은데 무쳐 먹거나 혹은 말려서 기름에 튀겨 먹는데 맛이 고소하고 향긋
하다. 마치 잎이 개(犬)발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부르는 개발딱주도 뽀송뽀송한 어린 잎
줄기를 역시 무쳐 먹으면 맛이 그만인데 좀더 자라 잎이 나오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이때가
제철이라고 한다. 역시 이때 새순이 튼 것을 꺾는 것으로 두릅이 있다. "와 옻나무는 붙잽고
있는기라요? 그건 두릅이 아니라요." 두릅나물 꺾어주겠다고 어설프게 나섰던 필자에게 한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외친다.
꾸불꾸불 산비탈을 깎아내린 작전도로는 계속된다. 도중 두서너 번 우측에서 물이 흐르는
개울을 만나고 사태난 듯한 인조너덜을 보고 산모퉁이를 돌자 주능선 쪽에 바위군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저기가 어딘가요?" "부자(父子)바위라고 하데요. 아부지가 지 자슥
들을 데리꼬 가는 모습이랍디더."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
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
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
다.
그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
위를 하사해주었다(이 쌀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
부터 1남2녀를 낳아 하늘 아래 첫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
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버렸다. 그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石門岩)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벽소령에는 부자바위가 솟아 올랐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
라고 한다.
벽소령에 있는 부자바위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세 자녀가 걷는 모습이다. 한 아주머니는
벽소령 도로공사 때 마천 주둔 공병대 병사들이 몇 명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주민
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위를 잘못 건드려서 라고 설명한다. 쌀바위를 얘기하는지 알 길은
없다.
봄나물과 지리산 산불 사이의 묘한 함수관계
오곡밥을 싸온 아주머니들과 함께 요기를 하고 나서 당일 노고단까지 달려야 하는 필자의
일정 때문에 작전도로를 벗어나 우측 가파른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여담이지만 1950, 1960
년대에는 지리산에 큰 산불이 몇 건 있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는데 1957, 1958년경
세석에서 써리봉, 대원사 부근까지 무려 20여 일간 산불이 계속된 적이 있었다. 당시는 6?
25 때의 각종 포탄들이 산속에 남아 있어서 이들 불발탄들이 불속에서 터지는 바람에 진화작
없도 그만큼 어려웠다고 하는데 결국 비가 와서 겨우 꺼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 20여 년
전과 15년 전에도 장당골과 한판골 일대에서 각각 보름간 계속된 산불이 있었다. 이들 산불
들은 흔히 산불이 난 곳에는 그 이듬해 봄나물이 많이 난다고 믿은 사람들 때문에 종종 일어
나기도 했다는 얘기인데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벽소령 작전도로에서 경사 급한 비탈길로 접어드는 곳에는 리본들이 많이 매달려 있으므
로 삼정리에서 1시간 이상 오른 곳부터는 우측을 유심히 살피며 오르길 바란다. 고목이 많이
쓰러져 있는 돌밭 비탈길을 따라 선명한 길을 한참 오르면 우측에 샘이 있고 앞에 텐트 한
동을 칠 수 있다. 여기서 바위 옆으로 다시 오르면 산죽이 짙어지면서 능선 위로 올라선다.
중북부능선이라고 불리는 일명 삼정리 능선길 위에 올라선 것이다. 참나무와 잣나무숲이
울창한 산죽 소로길을 평탄하게 남쪽으로 따라 오르면 진달래도 많이 보이고, 인적 드문 한적
한 길이라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약 20여 분 가면 이정표가 나오고 다시 주능선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다시 20여 분 가면 연하천 산장이 나온다. 이 코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작전도로에서 우측 비탈길로 접어드는 것이 문제이고 또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도 중북부능선
길을 따라가다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좀 까다롭다. 특이한 지형지물이 없는 데다가
안개 낀 날에는 방향감각마저 잃기 쉬우므로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1㎞ 주능선을 타고 오다
가 여기 이정표에서 다시 20여 분 거리를 가면 우측으로 산죽 소로길이 보인다.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인데 연하천산장 물품을 져나르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다닌 흔적이 뚜렷
하다.
교통과 숙박
마천에서 삼정리행 완행버스가 08:20~20:30 사이에 5차례 있다. 20여 분 소요되는데
최근에 2차선 확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서 앞으로 더욱 편리해질 것 같다. 마천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4,000원 정도 한다.
아직은 삼정리 쪽에 민박집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마천에서 민박을 해야 한다. 야영
할 만한 곳으로는 삼정리 앞 솔밭과 벽소령 도로변에 많이 있고 역시 물도 넉넉하다.
* 지리산과 문학 *
지리산이 포괄하고 있는 드넓은 삶의 영역과 지리산이 가지는 역사적 내용으로 인하여,
지리산을 매개로 한 문학은 고금을 통틀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 하여 지리산과 덕유산 중간의 육십령 통로에
할거하고 있던 도적떼들을 문학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김시습의[만복사저포기]는 다소 허황
된 듯하지만 중세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남원의 만복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 중기 김종직, 김일손, 이륙의 지리산 기행문들은 모두 우리나라 기행 수필문학의 명
작들로 평가된다. 여기서 김종직의 [유두듀록]은 사실적 산문 형식의 기술을 통해 지리산의
해동청 잡는 모습을 비롯 몇몇 풍물들을 적고 있으며 김일손의 기행문은 섬세한 필치와 수사
적 표현양식이 단연 돋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 등도
넓은 의미에서 지리산을 무대로 한 것들이다. 익히 아는 [춘향전]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변학도가 잔치를 벌일 때 유독 운봉현감만이 춘향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점이다.
지리산을 가까이 하고 있는 운봉현감의 이러한 처신은 아마도 지리산 속의 잠재적 변혁세력
과 결코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흥부전]의 무대가 운봉 여원치에서 함양 팔랑재까지라
는 것은 책 속의 지명이 말해주고 있으며, 남원군 동면 성산리는 흥부전의 원고장이라고 자부
하고 있기도 하다. 변강쇠타령은 거의 등구?마천을 그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근대로 와서 지리산 문학을 살펴보면 몰락 양반가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
적 삶을 내용으로 한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박경리의 '토지'도 악양
면 평사리가 작품의 배경이다. 김동리는 '역마'에서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 낀 주인
공의 떠돌이 생활을 그리며 일제의 자본침탈로 붕괴되어가는 조선시재 장터의 모습을 애환깊
게 다루고 있다.
6?25와 빨치산 투쟁이라는 비극적 역사가 휩쓸고 간 다음 지리산 문학은 곧 분단문학의
선상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지리산 문학의 잉태과정은
이데오롤기적 제약 때문에 진통을 겪는다.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은 바로 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라며 최초
로 산사람들의 얘기를 진혼곡 형식으로 읊고 잇다. 뱀사골 마뜰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과 철쭉제, 김주영의 '천둥소리', 박경리의 '천둥소리'도 모두 지리산
의 비극적 역사를 그 테마나 소재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지리산'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픽션으로의 한계와 지식인적 관점
에 머물고 말았다. 이에 비해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 씨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
한 빨치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의 역사 기록물인 '남부군'은 바로
1980년대가 말해야 할 지리산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여순반란사건에
서부터 휴전 성립 시기까지 전남지방과 지리산을 무대로 입산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특히 이 책은 이제껏 지리산과 관련된 분단문학이 갖고 있던
역사허무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분단된 역사 속에서의 민중들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그리고 사랑과 분노를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0:30분) 의신마을 (절터에서 의신마을이 아닌 대성교로 빠지는 길도 있으며
(0:40분) 시간은 의신마을에 오르내리는 시간과 비슷하다.)
총거리 12㎞ 등정시간 5시간 00분
하산시간 3시간 30분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정갈한 맛의 협곡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힌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
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순덕(정순덕)이 가늠하기에도 1만 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
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 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
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종일 퍼부어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추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
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발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 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燒夷彈)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
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정충제 기록, [실록 정순덕], 상권, 272~276쪽 발췌?인
용)
쫓겨 지친 대원, 소대, 비무장이 속속 박다내골(일명 의신골, 하동군 화개면)로
모여들었다.
박다내골은 험한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험상궂은 골짝
저마다 배낭을 털어 비상 쌀알을 씹는다 나눠준다.
지휘관들은 수군수군 머리를 짰다.
박다내골을 눈치챈 토벌대는
사단병력을 총동원
박다내골을 몽땅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태세
포탄과 총알이 나무뿌리를 날리고 바위를 쪼갰다.
악, 악, 여기 저기서 육박전
아, 처참한 비명 아우성
굉음
눈보라
흙보라
피보라
비행기는 가끔 소이탄을 떨어뜨려
빨치산을 태워 죽인다.
포위 나흘째
올가미는 바작바작 좁혀왔다.
박다내골 마지막은 비장해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팔로군 출신 인민군 장교 5연대장 김모는
'조국과 인민이 주는 마지막 훈장'이라며
동료 여섯을 그들 소원대로 차례로 쏘고
남은 한 방으로 자기의 심장을 쐈다.
1952년 1월 18일의 일이다.
죽은 자 가운데는
노영호 사령관을 따라
짧은 생애나마 노사령관을 그렇게도 사모해마지 않던 구빨치 허귀연이 끼어 있었다.
이때 단 한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으니
5연대장의 연락병 임창해(당시 20세)다.
허리에 총을 맞고 신음중 국군에 구출되었다.
이 '죽음의 골'에서
이영회와 노영호 두 지휘관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약간의 대원을 이끌고
필사적,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1952년 9월 광주형무소에서
노영호의 동생 노영수는
우연히도 임창해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허리부상을 앓고 있었다.
둘은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예, 수백 명은 죽었을기라요."
"경냄이 녹아난기가......비무장까지 합치모온 8백은 넘을끼더."
(이기형 지음, {죽음의 골}, [실록 연작시 지리산], 일부 인용)
대성골 참극의 진상은?
이상의 기록은 1952년 1월 18일 소위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제3기 토벌작전 때 이곳
대성골에 사면초가격으로 몰린 빨치산 수백 명이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을 적은 것이
다. 의신마을 정윤균(鄭允均, 59세) 씨는 전후 대성골은 마치 숫더미와 같았는데 여기에
서캐가 낀 것처럼 하얀 인골들이 널려 있었다고 증언하고 후에 나병환자들이 몰려와 나병에
인골이 어떤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스려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성골 상류인 '폭포수골'과 세석 서쪽 병풍바위 아래쪽 일대에서 인골을
목격한 사람은 많다. 당시 아비규환의 협곡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빨치산들의 유해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대성골을 등반하다보면 큰 거목이 별로 눈에 안 띄고 대체로 팔뚝 굵기의
잡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당시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빨치
산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을 이룬 백야전 사령부의 강력한 토벌작전 중 가장 큰 작전이
자 전투였던 이 대성골에서의 '빨치산 몰살 사건'은 이처럼 여로모로 확인된다.
그런데 '실록 정순덕'에서는 대성골이 그후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고 적으면서 빨치산
들의 대화형식을 빌어 약 칠팔천 명이 몰살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정순덕이 약 만 명
정도의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는 얘기와 함께 이것은 상당한 의문이 따른다. 과연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을까? 부질없는 숫자놀음 같지만 기록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한번 검토해보기로 한다.
우선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을 군경측 기록인 '공비연혁'을 보면 1952년 1월 5일 현재,
즉 대성골 참극이 벌어지기 전 지리산 일대 잔존 공비수를 1,250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사건 두 달 후인 3월 31일 현재에 잔존 공비수를 332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1,000명
정도의 인원감소를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도 대성골에서 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역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실록 정순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제 군경측 기록을 보면
대성골 참극이 과연 있었는지조차 의문시될 정도로 대성골에서의 지대한 전공기록에 무관심
한 듯한데 이런 분위기는 '남부군'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부군' 하권을 보면 당시(남부군에서는 백야전 사령부가 3기 작전기간을 1952년 1월
9일~31일까지로 잡고 있어 시기적 차이가 있다) 남부군 주력부대가 대성골에서 크게 벗어난
곳을 이동하지 않았는데도(중산리 - 삼신봉 - 한신골 - 벽송사골 - 백무골 - 중산리골 -
세석 - 칠선봉 - 대성골 - 삼정골 - 빗점골)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획을 그은 대성골의 비극
에 대해서는 따로 적고 있지 않다('남부군' 하권, 138~166쪽 참조). 다만 백야전 사령부가
설치될 때, 즉 1951년 11월 지리산을 포함한 소백산맥 일대의 잔존 빨치산 수를
1,500~1,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역시 같은 빨치산 기록인 '실록 정순덕'과 상당한 차이
를 나타내고 있다. 그 숫자도 그나마 악양보투 때와 수도사단 제1차 대공세 때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록 정순덕'에서는 엄청남 과장과 착각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기형 씨의 '죽음의 골'이란 시에서 나오는 수백 명(혹은 800명 이상)의 사망자 수가 그런
대로 정확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박다내골'과 '대성골'은 지명상으로나 실제상으로 다소
차이가 있음은 굳이 생략하기로 한다.
영험한 대성골 등반은 의신마을에서부터
위와 같은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의 등반은 대성교나 의신(義信)마을에서 시작된다.
세석까지는 계곡과 능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 짙푸른 수해(樹海) 속으로 파묻히다가 다시
탁 트인 전망으로 이어지는 등반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세석까지는 12㎞이고, 대성동계곡에 큰 폭포나 소가 별로 눈에 안띄어 경관은 뒤떨어진
다. 그렇지만 그래도 때묻지 않은 느낌을 주는 계곡 중의 하나이다. 하동?구례방면에서
화개(花開)를 거쳐 진입하게 되므로 시간만 주어진다면 화개동천(花開洞川) 주변의 명승과
역사의 숨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등반기점은 두 곳이지만 대성교에서 가파른 지능선을 오르는 것보다 의신마을에서 출발하
는 것이 다소 수월한 편이다. 옛날 의신사(義神寺, 1478년경 건립되고 서산대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전한다)라는 절이 있었던 지금의 의신마을은 임진란 당시 전란을 피해 모여든 3성씨
(姓氏)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와 한때는 이곳 산골 오지마울
이 130여 호에 달하기도 했으나 6?25를 거치면서 마을이 전소당하고 또 이농현상 등으로
인해 지금은 40여 가구 170여 명의 주민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의신마을에서 동남방향으로 자갈 깔린 넓직한 길을 가노라면 산비탈을 일궈 놓은 밤나무
등 과수단지가 나온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전망 트인 길이 계속된다. 남부능선에서 화개천
방향으로 주름치마폭처럼 첩첩이 흘러내린 산자락이 장관이다. 뒤돌아보면 명선봉 - 토끼봉
연릉이 위엄있게 가늠되고 의신마을과 주변 논배미가 선명하다.
야산지대 특유의 소나무숲 오솔길을 따라 몇 번인가 산구비를 감돌아 오르면 평지길로
나오고 감나무 몇 그루가 잡초더미 속에 덩그랗게 서 있는 절터에 도착한다. 대성교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ㅇ 능인사(能仁寺)터이다. 샘물도 흐르고 평지도 얼마간 보인다.
계곡과 멀리 떨어진 등반로는 완만하고 뚜렷하다. 한참 가다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하던 길이 다소의 오르막 돌길을 거쳐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에 이른다. 주변에 논밭터
가 보이고 민박집 건물과 상점도 두서너 집 있다.
지금의 대성동(大成洞)마을은 원래 원(愿)대성리에 있던 마을이 1960년 후반 이곳으로
옮겨와 형성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 4㎞ 더 들어간 산골에 있던 원대성리 마울주민들의
불편을 감안하여 정부의 배려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성교 위쪽 협곡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세운다는 개발 계획도 있었지만 그후 유야무야된 듯하다. 대성동에서 오던
길을 바라보면 사방이 온통 꽉 막힌 느낌이 드는 게 그런 소리가 나왔음직하다.
옛 원대성마을은 잡초더미에 묻히고
대성동 이정표에서 바위벼랑 사이로 비껴 올라서면 계곡과 멀어진 완만한 오르막길이 한
동안 계속되다가 곳곳에 논밭터, 집터 흔적이 무성한 원대성마을터에 도착한다. 좌측 산비탈
위쪽에 너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서울에서 기도객 한 명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원대성마을에서 조금 가면 좌측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와 만나는 곳인 작은 세개골이 나오
고 여기를 건너서 산죽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옛 움막터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큰세개골까지
는 어렵지 않은 길이다. 좌우측 산비탈이 깎아지른 듯 협곡을 이룬 곳에 비교적 넓다란 공터
도 보이는 곳이 큰세개골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 미끄런 흙길을 오르게 되는데
경사도 있고 비가 올 때면 여간 질퍽거리지 않는 곳이다.
잠시 평탄한 곳을 지나가 돌밭길로 올라서면 좌측으로 작은 지류를 끼고 가게 된다. 여기
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동쪽으로 휘어진 듯한 길을 따라 힘든 비탈길에 올라서면 지능선 평지
가 나온다. 여기서 동북방향으로 꺾어서 지능선에 올라붙어야 하는데 다소 까다로운 오르막
길이 계속된다. 무덤 있는 곳을 지나서 참나무가 무성하고 큼지막한 기암이 솟구친 오르막길
은 그칠 줄 모르다가 잠시 후 한숨 돌릴 수 있는 평편한 반석이 우측에 나온다. 10여 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곳이고 전망도 후련하다. 여기서 남부능선의 고사목과 기암들의
아기자기한 맛도 훌륭하지만 대성골의 깊고 넓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은 더욱 일품이다.
산사태 난 곳을 조심스레 비껴 오르면 해발 1,400m 갈림길이 바로 나오고 이제는 별 어려
운 오르막길이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진다. 이곳 갈림길에서 남쪽길이 청학동, 불일폭포 등으
로 이어지는 남부능선길이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오르면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고 보통사람 한 키 정도의 참나무숲이 펼쳐지는 능선길이 마냥 즐겁다.
협곡을 오르면 세석의 전모가 드러나
멀리 촛대봉이 당당하게 그 위용을 뽐내듯 서 있고, 완만하고 드넓게 흘러 내린 세석의
지세가 대파노라마를 연출해낸다. 거림골 상류의 물소리도 정겨운 하모니를 이루는 경관이
아주 멋진 곳인데 세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도 단연 최고다.
잠시 밑으로 내려가던 길은 어느덧 완만한 평지를 지나게 되며 속속에 옛 집터 흔적이
무성하다. 구한말 일제시대부터 세석을 청학동이라 믿은 비결장이들이 찾아들어 이 일대에
서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의 세석고원이 근대 이후 나타난 모습이기 때문에(몇 백 년
전의 큰 산불 때문이라고) 청학동으로서의 구비요건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춘 이곳으로 몰
려들었으리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일제시대 정신대를 피해 이곳에 숨어 지냈다는
신흥(伸興)의 어느 할머니 얘기로는 당시 번듯한 기와집에 장독, 절구통까지 갖추고 근처
평지를 일궈 감자 등도 심으며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 흔히 청학동에 관한 말로 떠도는
"처음 들어온 사람은 망해 돌아가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흥하며 늦게야 들어온 사람은
터가 없다"(先入者還 中入者興 未入者不及)는 얘기와는 달리 그 후 전란통에 이곳은 폐허로
변한 듯하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낭만의 신년만필'에서 말했듯이 "온 조선 사람
이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살면 그만이다는 식의 피난심리를 조장하는 짓들이나
벌이던" 이들 청학동행(行) 비결파 사람들의 행적이 과연 일제시대 식민치하에 놓여 있던
당시 상황에서 어떠했는가 하는 가치판단은 유보하기로 하자.
한편 '남부군'에서 이태 씨가 말하는 세석고원의 토담집의 위치도 이곳에서동쪽으로 얼마
큼 내려간 곳인 것 같다. 지금은 '세석입구'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거림골에서 올라오는 등반
로가 나 있지만 과거에는 음양수샘 밑 이곳 평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옛 허우천 씨
초막이 있던 곳으로 희미한 옛길이 있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비하고 멋진 음양수샘
이곳 옛 집터에서 조금 오른 곳에 음양수(陰陽水)샘이 있다. 완만한 평지에 거대한 돌출바
위가 있고 그 밑에서 신묘하게도 두 줄기의 샘물이 흘러나온다. 지리산의 여타의 샘보다
운치도 있고 신비한 느낌이 드는 석간수(石間水)샘인데도 예로부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간이천막을 치고 주변에서
기원하며 지냈다고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 각종 천막들이 철거되어 지금은 그
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 햇볕이 드는 곳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의 의미처럼 한 군데로 합쳐진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여름철에도
물맛이 아주 시원한 이 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대성골에는 호야(乎也)와 연진(蓮眞)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
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알려주었
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
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음양수샘에서는 참나무숲을 지나 구상나무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랑물이 군데군데 흐
르고 편한 길이다. 세석 입구 이정표에서 거림골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고 세석 중앙을 흐르
는 개울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세석산장에 도착한다.
교통과 숙박
화개에서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버스가 10:30, 12:35, 14:30, 18:20 등 하루 네 차례 정도
있고, 의신마을에서 화개로 나오는 차는 07:30, 11:20, 14:30, 17:50분 경에 있으며 약 30여
분 소요된다(차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변동될 수도 있다).
의신마을과 대성동에서 민박이 가능하며 일반적으로 5,000~8,000원 정도 한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대성교 주변과 큰세개골, 음양수샘 등에 군데군데 있고, 장마철만 피한다면
계곡가에서도 가능하다.
100여 리의 지리산 주능선이 동서로 길게 누워 있고 여기에서 다시 T자형을 이루며 세석
연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를 뻗어내린 험준한 능선이 바로 남부 능선이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가 2차원직 선(線)이라 한다면 남부능선 등반은 가히 대지리의 3차원적 입체감마저도
느끼게 하는 지리산의 또다른 자랑이요 긍지라 말할 수 있다.
세석에서 삼신봉까지는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을 경계를 이루고 삼신봉에서는 다시 아쉬운
듯 청학동을 품에 안고서 좌우로 능선이 갈라져 내려간다. 등반기점을 어느 곳에서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4~20㎞가 보통이고, 100여 리가 넘는 장거리산행 코스도 잡아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까지의 짧은 코스가 부담없이 등반할
수 있는 곳이고,삼신봉에서 생불재, 쌍계사로 빠지는 20㎞ 남짓한 코스 또한 남부릉의 진가
를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코스로 손꼽을 수 있다.
석문까지는 어렵지 않은 기암 능선길
갖가지 기암과 전망이 일품이고, 그리고 스릴과 아기자기한 산행의 묘미가 뒤따르기는 한
데 역시 식수가 부족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닌 관계로 일기가 불순한 날에 초행자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7~8년 전 겨울에 석문 위쪽 능선에서 눈에 파묻혀 동사한 사건
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여기에서는 세석에서 쌍계사까지 20㎞ 코스를 소개하며 세석산장에서 하산하는 과정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세석산장에서 세석입구 이정표와 음양수샘을 지나 대성동계곡 코스와의 갈림길(1,400m)
이정표까지는 40여 분 남짓 소요되는 평탄한 내리막길이다(이 부분에 관한 자세한 것은 대성
동계곡편을 참조바람). 갈림길 이정표에서 남쪽 능선길로 직진하면 진달래, 철쭉, 참나무가
우거진 길을 동쪽?서쪽 사면으로 왔다갔다 하며 가게 된다. 산죽도 눈에 많이 띄고 전망도
시원한 길인데 얼마 안 가서 석문(石門)에 이르게 된다. 높이 10여m, 폭 3~4m 정도의 운치
와 위엄까지 갖춘 관통문이다. 대성골에서 불어 올라온 바람이 한기마저 느껴지는 석문을
지나 잠시 오르면 거림골이 훤히 열리면서 전망 좋은 바위 반석이 나온다.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경치도 멋지지만 뒤돌아보면 석문 너머로 백운대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바위군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시 오른쪽으로 휘어지던 길을 몇 번 오르내리면 산죽이 빽빽하게 우거진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기억(ㄱ)자형 비박지를 지난다. 바닥이 평편하여 야영한 흔적도 남아 있다. 산죽을
헤치며 계속 나가다보면 소나무, 잣나무도 몇 그루 보이는 잡목지대를 거쳐 드디어 평지 능선
길이 나온다. 진달래와 싸리나무가 무성하고 오른쪽으로 뚫린 완만한 흙길인데 이제껏 고되
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차라리 오솔길을 걷는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길 양쪽에는 수많은
구덩이가 패어 있는 것이[옛 참호 흔적(?)] 생생하다.
지리산을 보았노라!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오고 길은 왼편으로 꺾이면서 내려가 한벗샘 이정표가 있는 능선안부
(수곡재, 박단재로 불림)에 도착한다. 세석과 삼신봉의 중간지 점에 해당되는 이 일대는 '세
석의 축소판'다운 남향의 완만한 초원?관목 지대가 펼쳐지는데 거림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자빠진 골'(혹은 '엎어진 뜰')이라 부른다. 한벗샘(달리 수곡샘, 박단샘이로도 부른다)은 이
정표에서 거림골 쪽으로 200m쯤 내려간 곳에 위치하며 주위에는 옛 집터 흔적도 보이고
야영할 수 있는 평지도 있다(여기서 거림골로 내려가는 옛 길이 있다). 한벗샘은 남부능선에
서 유일한 샘이기 때문에 여기서 생불재 아래까지 약 12㎞분의 충분한 식수를 준비해야 한
다.
한벗샘 이정표에서 삼신봉까지는 허리께 차는 산죽숲이 아주 장관을 이룬 능선길이 이어
진다.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다소 힘에 벅차기도 한데 뒤돌아보면
일출봉 능선(중산릉) 너머로 천왕봉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동쪽사면의 참나무숲 터널을 지나서 다시 단천골이 내려다보이는 서편으로 넘어오면 외삼
신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앞에는 암봉이 하나 버텨선다. 삼신봉(三神峰, 1.284m)이다.
매년 곡우절 청학동 사람들이 삼신제를 올리는 돌 제단이 갖춰져 있는 비교적 넓직한 정상에
올라와보면 전망이 장쾌하여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서쪽 멀리 왕시루봉에서 동쪽 써리봉까
지 장대한 캐러반 행렬을 연상시키듯 대(大)지리의 맥이 살아 굼틀댄다. 180도로 의연한
기개를 뽐내듯 펼쳐진 지리연봉,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리의 산자락뿐인데 어찌 지리산
을 보았노라고 소리치고 싶지 않으리오. 지리연릉의 전망대, 삼신봉에서 남쪽을 발보면 백운
산, 형제봉이 가늠되고 주변 야산이 잔물결 일렁이듯 펼쳐지며 그 너머로 남해의 바닷가의
섬들도 아스라이 보인다.
송정골과 아찔한 암봉들이 앞다투어 나타나
삼신봉 아래 산불감시초소 가건물에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곧바로 내려가는 길은 청학동
으로 빠지는 길이고, 여기서는 오른쪽 능선을 따라 계속 등반하게 되는데 평탄한 오르막길
좌우로 가느다란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무성하다. 점차 기암 괴봉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다가
높이 10여m의 미륵바위가 보이고 얼마 후 거대한 바위 옆으로 오르면 길이 남쪽방향으로
꺾이다가 송정굴을 만난다. 등반로 오른편으로 10여m 옆에 위치하는데 페인트로 송정굴이
라 씌여 있다. 길이 20m, 폭 10여m, 높이 1.5~2m의 비교적 넓직한 관통굴인데 북쪽으로
경사져 있다.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선생의 피난처였다고 전하며 비박, 야영지로 손색
없는 굴이다.
송정굴에서 다시 나와 경사진 길을 조금 내려가면 아찔한 암봉들이 솟구쳐 있는 곳을 지난
다. 처음 만나는 것이 높이 100m쯤 됨직한 신선대(神仙臺)이다. 여기가 내삼신봉(內三神
峰)으로 불리는 곳이며 주변에 거대한 바위군들이 우뚝우뚝 서있어 마치 설악산의 어느 한
면을 보는 것 같다. 신선대 옆 경사 급한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얼마 안 가서 쇠통바
위를 보게 된다.
높이 30~40m의 바위 위에 자물쇠가 얹혀 있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청학동 도인
들은 학동마을에 있는 어가정(御軻亭) 위의 자물쇠 바위로 열어야(즉, 양 바위가 서로 만나
야) 세계평화가 온다고 전설화되는 바위다. 지금까지 말한 이들 바위들과 또 조금 후에 나오
는 독바위 등은 주변에 숱한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고 별도의 안내판이 없으므로 그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 구별할 필요가 있다.
쓰러진 거목도 나뒹구는 경사 급한 서쪽사면을 내려오면 다시 잡목과 산죽 우거진 오르막
길로 접어들어 넓다란 공터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위쪽 작은 봉우리에 올라와보면 전망
이 시원하여 신흥, 의신마을 등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곳 공터에서 산죽과 관목숲 지대의
경사진 흙비탈길을 쏜살같이 내려오면 생불재삼거리 이정표가 나오고 길은 오른쪽 지능선으
로 휘어진다.
다른 말로 성불재(成佛峙)라고도 하는 생불재(生佛峙)에서 청학동은 3㎞, 쌍계사는 6㎞
이다.
불일폭포 포말음에 피곤과 갈증을 떨어내고
조금 가다 다시 오른쪽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내려서면 불일폭포 상류의 계곡물과 만나
는 곳인데 곳곳에 옛 집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계류 왼편으로
건너서 흙비탈을 내려와 다시 계류를 건너면 새로 조림된 듯한 잣나무 단지 사이로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서나무, 노각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눈에 띄는 숲길을 청량
감 있는 계류소리와 함께 편하게 걸으면 다시 옛 움막터, 숯굴 가마터 흔적이 간간이 눈에
띄고 작은 합수골을 지난다. 계류와 멀리 떨어진 산비탈을 가로지르며 얼마 후 오른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작은 지류와 만나 산대숲 사이로 잡초가 무성한 옛 논밭터가 나온다.
불일폭포의 웅장한 포말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오고 눈길을 좌측으로 돌리면 옛 불일암터가
숲속으로 넓직하게 보이며 불일폭포로 가는 길과 만난다. 약 200여 미터 쯤 좌측 가파른
벼랑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높이 60m 지리산 최대의 불일폭포가 나온다. 2단폭포로서
비말로 흩어지며 쏟아져내린 물은 중간의 학연(鶴淵)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우렁찬 포말음을
토해내며 쏟아지는데 하늘마저 간신히 얼굴을 내밀 만치 사방을 빙 둘러친 원통형 수직 석벽
때문에 구슬처럼 알알이 튕기며 떨어지는 물줄기는 천지를 진동시킬 듯 요란하다. 깎아지른
절벽 곁에 고고하게서 있는 노송 어느 가지엔가 청학이 날아올 것만 같은 환상에 젖기도 한
다.
불일폭포는 한편으로 볼 때 폭포 하단에 깊은 소가 발달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지난
1964년 당시 하동군수 한(韓)모씨가 엉뚱한 미의식을 발휘하여 치마폭처럼 여러 갈래로 층
층이 흘러 내리던 물줄기를 단순화시킨다고 폭포 상단을 정으로 쪼았는데 하물며 그 공적을
기린다고 기념비까지 세웠던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불일폭포에서 되돌아 나오면 불일폭포 휴게소가 있는 넓다란 공터가 나온다. 산죽지붕의
집 한 채가 있어 작설차와 불로주 등도 팔고 있는데 좌측에는 돌들을 겹겹이 쌓아올린 소망탑
이 눈길을 끈다. 앞뜰에는 갖가지 과실수가 심어져 있고 작은 연못도 갖춘 아늑한 평지다.
근처에서 야영은 가능하지만 민박은 할 수 없다. 이곳이 그 옛날 청학동이라 한동안 회자되
던 곳인데 사방이 산자락에 감싸여 있고 비교적 넓은 공터인 점에서 수긍이 가기도 한다('지
리산 청학동'편 참고 바람).
오솔길 따라 대사찰 쌍계사로 하산
불일폭포 휴게소에서 쌍계사까지는 2㎞, 지도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은 개울물이 쉼없이
졸졸졸 흐르는 그 옆을 따라 넓은 오솔길을 가게 된다. 도중에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다는 전설을 지닌 환학대(喚鶴臺)가 있지만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국사암
이정표에서 200m쯤 오른쪽으로 가면 진감선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큰 사천왕수(四天王樹)
가 국사암에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하체를 닮았다고 수군대근 특이한 나무
이다.
쌍계사는 원래 신라 성덕왕 22년(서기 723년)에 대비, 삼법 등 세 스님이 당나라에서 남선
종(南禪宗) 6대 조사(祖師) 혜능(慧能)의 머리뼈(頂相)을 가져다 모신 후 옥천사(玉泉寺)라
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그후 문성왕 2년(서기 896년) '옥천사'를 쌍계사(雙谿寺)로 이름
을 바꾸었다. 쌍계란 절 앞에 두 개의 시내가 합쳐 흐른다는 지형적 특색에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도 쌍계사 들머리 입구에는 양쪽에 각각 '雙谿' '石門'이라는 각자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
며 이 글씨는 왕명(정강왕이 쌍계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함)을 기념하기 위해 최치원이 쓴
친필이라고 전한다.
삼법화상(三法和尙)이 당으로부터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봉안해 왔을 때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모시라는 꿈의 계시(康州智山下 雪裡葛花處)를 받았다는데 그곳
이 바로 지금 쌍계사 금당(金堂)자리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눈이 와도 쌓이지 않고 곧
녹아버리는 신통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의미로 오늘의 '화개'(花
開)라는 지명이 유래되기도 했다.
고운과 추사의 필체가 전해 내려와
쌍계사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처럼 전란을 맞아 폐허로 변해 지금의 금강문, 천왕문, 대웅
전, 명부전, 적묵당 등 건물 대부분은 임진란 후 벽암(碧巖)대사에 의해 중수된 것들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뜰에는 최치원이 짓고 친필로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47호)
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비를 세긴 사람은 환영(奐榮) 스님이라고. 이 비는 우리나라
현존의 몇 개 안되는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데 총 2,417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높이 약 2m의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임진란 때 왜병에 의해 파괴되어 금이
가 있고 또 6?25 동란 때 한 외국 군인이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힌 흔적도 남아 있지만 그런
대로 온전하다. 1620년에 세워진 대웅전(보물 500호)을 비롯하여 각 부속건물이 아늑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웅전의 '世界-花祖宗六葉'이란 현판 글씨와 육조 정상탑이 있는
법당의 '六祖頂相塔'이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다.
한편 쌍계사(옥천사 시절)는 진감선사 헤조에 의해 범패음곡의 원류를 이루고 신라에 범패
음곡을 널리 보급시킨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혜조는 당나라에 가서 그곳의 신감(神鑑)에게
범패의 음곡과 창법을 배워와 12년 동안 옥천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 경내의 팔영루(八泳樓)는 혜조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써 범패
를 작곡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쌍계사에서 나오면 상가와 음식점, 민박집이 줄지어 서
있는 운수리 석문(石門)마을에 이르고 용강교 위로 화개천(花開川)을 건너오면 쌍계사 집단
시설지구가 나와 직행버스, 완행버스가 연결된다.
교통과 숙박
쌍계사 집단시설지구에는 부산, 마산, 광주 등지로 연결되는 직행버스가 많고 구례행 완행
버스가 역시 수시로 연결된다. 화개에서 갈아타면 더욱 편리하다. 민박집도 운수리와 용강
리 쪽에 많고 불일폭포 휴게소에서는 민박은 되지 않고 야영만 가능하다. 청학동으로 해서
오르려면 하동에서 08:00, 10:20, 15:00에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완행버스가 있고 요금은
800원,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청학동 4㎞ 못 미쳐 묵계리까지 들어가는 버스도
08:00~19:00까지 6회 정도 있으므로 이것을 타고 조금 걸어 올라가도 무방하다. 청학동에
민박집이 여러 군데 있다. 남부능선 중간에서 야영할 만한 곳은 박단샘(수곡샘, 한벗샘) 부근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