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통보를 기다리는 졸업반 학생을 둔 부모들의 심정은 흡사 우리가 한국에서 대학 입시를 치르고 기다리는 초조함이상으로 마음을 조리게 한다.
이민온 사람들이 온갖 고통을 참아내는 가장 큰 힘도 ‘자식교육’에서 나온다. 자식이 잘되면 모든 고생도 이긴 보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이 평가절하 되고 만다.
한국에서처럼 자식들 중에서 ‘사’자 직업을 가진 부모는 고개를 들고 다니고 그렇지 못한 부모는 자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꺼린다. 한국 부모들의 가치관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일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것은 순수 한국식 가치관 같은데,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들의 욕심과는 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춘기에 이 문제로 가장 첨예한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여자 아이들은 남자들에 비해 부모의 요구를 따르는 비율이 높은 편이인 것 같다.
또 한가지 다른 주로 갈것인가 아니면 그 지역의 학교로 진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 학교가 어디 있는지 물문하고 보내주게 되지만, 그만그만한 학교로 가는데 다른 주로 갈려고 하면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객지생활에 대한 염려가 앞서서 좀처럼 “그래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미국 부모들은 그만한 나이에 자신이 했던 경험을 토대로 우리보다는 쉽게 결정할수 있지만 우리 이민자들은 그 나이의 자식들이 어디로 떠난다는 것이 철부지 아이를 어디로 보내는 것 같은 불안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때가 되면 아이들은 집을 떠나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즉 독립적인 생활인으로서 성장해야 하는데 부모들이 빈둥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기때문에 아이들도 그 와중에 혼란을 겪게 되는것 같다.
지난해 우리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때 이런 우스개 소리를 들었다.
이웃사람에게 “당신 자녀가 무슨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지 묻지 말고,
4-5년 지난 다음 학교 졸업했느냐고 묻지 말고,
졸업하고 나서 무슨 일자리를 잡았느냐고 묻지 마라.”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고개를 꺼떡이며 웃겠지만, 한국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몇자 사족을 달면 이렇다.
한국 사람들에게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간판과 부모의 얼굴이 비례하기 때문에 좋은 학교로 간 자녀를 둔 사람은 기분 좋게 대답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함부로 묻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은 중간에 학교를 그만 두는 학생이 많기때문에 졸업했느냐고 묻는 것도 부모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기 쉽고, 졸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무슨무슨 회사에 입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일자리를 물어보는 것도 실례란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 학생들은 자기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 다르기때문에 졸업하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학생들을 모두 인생 낙오자라고 보는 시각도 또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부모만큼 학벌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이비리그의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대학으로 쳐 주지 않는 우리 부모들의 욕심이 자녀들에게 좋은 동기를 부여하지만, 소수의 성공적인 학생들 보다 더 많은 자녀들이 좌절과 열등감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음을 지나칠수 없다.
몇년전에 본 통계에 의하면 엠아이티 대학에서 소수민족중 중간 탈락율이 가장 높은 민족이 한국계통이라고 나왔다. 이 말은 부모의 자극과 본인의 노력에 의해 그 학교에 진학은 했는데 일학년과 이학년의 혹독한 추려내기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떨어지는 학생이 많은 모양이다. 미국 대학의 이 과정은 정상적인 학생도 위기감을 느낄정도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른다.
나도 이런 한국 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방학때 아이들을 데리고 보스톤을 방문해서 소위 좋은 학교의 냄새를 맡고 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너가 공부 열심히 해서 그런 학교에 가고자 한다면 도와 줄것이다라고 압력을 넣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해 유에스에 투데이신문에 소개된 슬픈 기사를 소개한다.
엠아이티에 다니던 한 한국 학생이 자살했다.
그 학생의 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골자는 그 학생이 기숙사에 있었는데 자살할때까지 일어났던 몇차례의 자살미수를 부모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결국 자살하게 되기까지 기숙사에서 학생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라는 내용이었다.
학교측에서는 그 학생이 입학하기전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던 기록이 있고, 자살미수를 알리지 않은 이유는 18세이상 성인이 되면 그 사람의 동의없이 개인정보를 다른사람(부모라 할지라도)에게 공개하지 못한다는 법적인 문제를 들어 학교측의 정당함을 주장했다.
신문에 의하면 이 사건이전에도 학생의 자살사건으로 인해서 학교측에서는 학생부모에게 보상하고, 죽은 학생을 추모하는 장학금을 출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가지만 엠아이티를 방문해서 받은 느낌은 사람을 품어 안는 그런 포근한 분위기가 적은 반면 어떤 차가운 연구소 또는 거대한 학교 건물이 주는 위압감이 앞섰다. 그리고 공과계통의 학문이 가지는 딱딱함도 학교생활을 건조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이 일자리를 가지기 위한 과정이지만 학교생활을 통해서 인간성이 통부해지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곳이란 관점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맞는 좋은 학교를 선택하게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아이들에게 그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한동안 아이들의 학교문제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던 뉴욕에 사는 친구는 “절대 아이들에게 어떤 학교로 가라고 강요하지 마라! 물론 좋은 학교는 분명 좋은 학교다. 그런 학교에 가서 잘 할수 있는 놈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렇지 않다. 나의 생각은 좋은 학교에서 비실거리는 것 보다는 보통학교에서 열심히 해서 나중에 대학원을 진학한다면 그때 좋은 학교로 가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자기 인생을 즐길수 있다.” 한마디로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라는 충고 였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부모에게 이런 고민을 덜어주고 이 지역의 주립대학에 들어갔다.
뉴욕 친구의 이어지는 이야기다.
자기가 대학원에서 지도하고 있을때 엠이아티에서 씨이 학점을 받고 그곳에서 의과대학을 준비하던 학생과 그 학교 학부에서 비이 학점받고 대학원에서 의과대학으로 신청한 학생이 있었는데 둘중 자기대학 출신에게만 입학허가가 왔다.
그리고 뉴욕바닥에는 명문대학 나와서 부모가하는 비니니스에서 일하는 자녀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 줬다.
그 즈음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부동산회사의 건축담당 메니저인 필립은 자기 아들이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음악중에서도 비인기분야인 타악기를 전공하고 싶다고) “음악을 전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중에 너가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은 취미로 생각하고 경제생활에 필요한 전공을 찾아보기 바란다.”하고.
자식을 이길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필립의 아들은 자기가 원하던대로 음악분야의 장학금을 받고 노스테롤라이나대학으로 갔다.
얼마전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의 아들이 음악을 전공할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넝청스레 물었다. 그랬더니 다 알면서 남의 상한 속을 더 상하게 할거냐고 되받아 쳤다.
그래서 나는 필립 아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 하다. 그 아들이 바이올린을 잘해서 조지아주의 음악선생협의회에서 선발하는 올스테이트 오케스트라멤버에도 몇차례 뽑힐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는데 이제 막상 그 아들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부모가 걱정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이 아이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궁금하다. 부모가 이길지, 아들이 이길지? 아마 99% 부모가 지게 될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국부모들은 아이들을 열심히 공부시킬수는 있지만, 그 다음은 결코 이길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대학으로 간 다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고함을 치기만 하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아버지 였던가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하고 공부해서 좋은 학교나 가라고 악악 대던 내가 얼마나 속물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흡사 아이들을 바다가에 내버려 둔 것 같은 생각이 들곤한다. 나는 또 하나의 만약이란 가정법 문장을 만들게 되었다.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울 기회가 있다면 훨씬 잘 할수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