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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진산인 백두산
영가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이 있는데, 산이 3층으로 되어 있다. 정수리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 기록된 백두산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자 성산(聖山)이라 불린 백두산이 역사 속에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삼국유사』를 보면 백두산의 옛 이름은 개마산(蓋馬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마’는 천마(天馬)를 가리킨다. 『산해경』에는 백두산이 불함산(不咸山)으로 실려 있다. “넓은 평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 이름 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라고 기록된 불함을 두고 육당 최남선은 ‘붉은’의 역음(譯音)으로 천주, 즉 신명(神明)을 뜻한다고 하였다.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 서문에는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이니 3층으로 된 높이가 200리요, 가로로 퍼져 1000리에 걸쳐 있고, 그 정수리에 못이 있어 달문이라 일컫는데 둘레가 800리라,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나뉜다. 그 분수령에서 구불거려서는 연지봉, 소백산, 설한등령, 철령을 일구고, 그 한 갈래가 동남으로 뻗어 도봉산, 삼각산이 되었다”라고 실려 있다.『택리지』에 실린 백두산을 보자.
백두산은 여진(女眞)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며 온 나라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 산 위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0리가 되고, 그 못에서 서쪽으로 흐른 물이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른 물이 두만강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흐른 물은 혼동강(混同江)인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곧 우리나라다.
조선 후기 조선의 국토 상황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서영보, 심상규 등이 1808년 왕명으로 지은 책)에 보면 “백두산이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황막한 들로 내려와 솟아올랐는데, 몇천만 길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꼭대기의 못은 사람의 숨구멍 같고 빛깔이 검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때는 첫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였고 바라보면 아득한 은바다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백두산은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화산이다. 본래 이 지역은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된 흔히 볼 수 있는 산지였으나 화산이 용암을 분출했을 때 처음에는 현무암 용암이 솟구쳐나와 수많은 골짜기들을 메우면서 넓게 퍼져서 현무암 지대를 이루어놓았다. 그다음 알칼리조면암과 흐름무늬암 등의 용암이 흘러나왔는데 그 흐름이 약해져 멀리 흘러내리지 못하고 식어 덧쌓이면서 오늘날과 같은 백두산의 형태를 이루었다. 백두산 꼭대기 가운데 분화구에 물이 고여 생긴 자연 호수를 천지(天池)라고 부른다. 천지는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천지를 중심으로 병사봉(2744미터)을 비롯하여 망천후(2712미터), 백암봉(2741미터), 차일봉(2596미터), 백운봉(2691미터), 청석봉(2662미터) 등 해발 2500미터 이상의 날카로운 산봉우리들이 수없이 솟아 있다. 백두산의 산마루는 급한 비탈을 이루면서 급격히 높아졌으나 그 기슭에는 넓고 평탄한 용암 지대가 펼쳐진다. 이렇게 큰 현무암 지대는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백두산 둘레에는 대연지봉, 소백산, 무두봉, 대로은산, 청봉 등 백두산의 기생화산들이 있다.백두산의 기후는 찬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백두산 정상 부근에서 봄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5월 말이며, 5월 하순에야 0도가 된다. 이때부터 50일이 지난 7월 중순에야 영상 10도가 된다. 한여름에도 산정(山頂)의 기온은 영상 20도를 넘지 못한다. 하루 평균 영상 15~22도 이상 되는 날이 3~4일인데 이는 7월 하순에서 8월 상순 사이다.연평균 강수량은 1500밀리미터로 우리나라에서 한 해 강수량이 제일 많은 지역에 속한다. 여름철 장마 기간에 많은 비가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소나기는 6월에 집중되며 우박은 6월과 9월에 내린다. 이곳에 눈이 내리는 기간은 9월 10일에서 이듬해 6월 10일경까지인데, 눈이 쌓이는 기간이 257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천지 호반 그늘진 골짜기들에는 가장 더운 7월 하순에도 여러 해 묵은 눈이 0.5~1.5미터 두께로 쌓여 있고 그 밑으로 굳은 얼음들이 깔려 있다.여름철에는 안개가 많이 끼고 그 지속 시간이 길고 바람이 세게 부는 것이 특징이다. 백두산 마루에는 낮과 밤 할 것 없이 주로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분다. 평균 바람 속도는 초당 6.3미터, 최대 속도는 초당 59.8미터다. 이곳의 날씨는 신기할 정도로 변화가 극심하다. 난데없이 구름이 몰려와 비가 억수로 쏟아지다가도 갑자기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기도 하며 다시 순식간에 비구름에 휩싸이기도 한다. 때로는 구름이 산꼭대기까지 닿지 못하고 산중턱에서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거나, 산중턱에서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며 벼락이 내려 바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몇 년 전 백두산 천지를 방문한 필자에게 그곳 안내원이 “백두산 천지는 조선 처녀의 마음을 닮아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변덕을 부려 천지를 보기가 쉽지 않습네다.
특히 백두산 천지는 해돋이가 좋은데 심장을 달구고 손과 발을 얼구어봐야 그 진면목을 느낄 수 있습네다”라고 말해준 기억이 난다.천지를 뒤덮었던 짙은 구름이 불현듯 한쪽으로 밀리면 햇빛에 반짝이는 백두산 봉우리들이 맑은 천지 물에 그대로 찬란하게 비치는데,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절경이다. 특히 산마루에 서린 새벽안개가 산기슭으로 내려와 어둠을 거두어가고 눈부신 햇빛이 부챗살처럼 퍼지기 시작할 때면 천지의 모든 것이 영롱하게 천만 가지 빛을 발하는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킨다.정상의 천지는 넓이 9165제곱킬로미터, 둘레 1만 4399킬로미터, 평균 수심 213.3미터, 최대 수심 384.05미터, 물의 부피 19억 5500만 세제곱미터, 수면의 해발 높이 2190미터다. 천지의 물 온도는 7월의 경우 수면이 9.4도, 연중 물 아래쪽은 4도다. 빗물과 눈 녹은 물로 채워지는 천지의 물은 짙은 푸른색이며 대단히 맑다. 물속에 하등식물은 조금 있으나 물고기는 없었는데 김일성의 지시로 송어를 양식하고 있다. 북측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1미터가 넘는 송어가 잡히기도 한다. 따라서 가끔 천지 속의 괴물 출현 보도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천지의 북동쪽 호안에는 온천이 있다. 백두산의 남서쪽 비탈면에서 압록강이, 남동쪽 비탈면에서 두만강이 시작된다. 또한 북쪽으로 천지의 물이 흘러나가 송화강이 된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서려 있는데, 삼지연 부근에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神市), 즉 천평(천리천평(千里千坪))이 있다고 한다. ‘하늘처럼 높은 곳에 있는 광활한 땅’이라는 뜻을 지닌 천리천평이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1)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두산이 오지랖을 벌리고 북포태산이 오른쪽 깃이 되고 증산이 왼쪽 깃이 된다. 둘레 몇백, 몇천 리가 실상 커다란 한 벌판을 이루어, 백두산으로 하여금 높음과 한가지로 크고 넓음이 임자가 되게 하니, 이것이 예로부터 천평이라 하여 신비로운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어떤 책에 말한 대로 백두산 둘레의 기슭을 다 천평이라 한다면 시방 서간도, 북간도도 다 여기 들 것이니 그 넓이를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잎갈나무 숲으로 장관이다. 그리고 잎갈나무 숲이 끝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후련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천생 나라 하나 만들게 생긴 땅이다”, “그 벌 하나만 해도 나라 하나를 만들기에는 너무 넓겠다”라는 말을 들었던 곳이 천리천평이다.허항령(虛項嶺, 함경남도 보천군과 함경북도 무산군ㆍ삼장면 경계에 있는 고개)에 올라서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천리천평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하루 종일 가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그 평원도 전해내려오는 천평의 한 자락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조선 선조 때인 1597년 8월 26일에는 “백두산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묽은 흙불이 솟아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668년과 1702년에는 정상인 천지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그 뒤에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백두산 주변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분쟁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의 산삼을 캐는 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외교 문제가 일어났으며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중국인이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따라서 1711년에는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인 목극등이 압록강 대안 현지에 와서 조선의 참핵사(參覈使, 죄인을 공동 심사하는 사절)와 함께 범법 월경 현장을 검핵(檢覈)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월경 사건을 문제 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여기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그해 2월에 목극등을 장백산(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조선에 보냈으며,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은 접반사(接伴使, 외국 대표를 맞는 조정의 대표) 박권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와 함께 부근에 가서 맞이하여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하여 5월 15일 백두산 천지 가에 이르게 되었으며,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지점인 해발 2200미터 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그 백두산 바로 아래에 대연지봉(2360미터)과 소연지봉(2123미터)이 있고 소백산(2174미터)이 있으며 허항령 아래에 삼지연군이 있다. 필자가 2003년 가을 삼지연에 갔을 때 그곳은 가을의 향연이 펼쳐지는 별천지였다. 원시림의 마지막 숲을 이루는 사스래나무 숲을 지나 가을 단풍이 들어 노란 잎갈나무 숲과 가문비나무 그리고 자작나무가 드문드문 병풍처럼 드리워진 삼지연은 바라보기가 처연할 만큼 비장미가 있었다. 세 개의 연못이 푸르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이 환히 보이는 정경과 어쩌다 찾는 길손의 가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잎갈나무의 노란 아우성은 한마디로 압권이었다. 그 잎갈나무에 관한 글이 조선 성종 때의 학자인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 제4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함경(咸鏡) 육진(六鎭)에 한 종류의 나무가 있다. 그 잎이 전나무와 같은데 그 지방 사람들이 잎갈나무라고 한다. 그 기름을 취하여 종기에 붙이면 곧 낫고, 등창이 처음 시작될 때에 더욱 잘 듣는다. 정덕(正德) 중에 비로소 해마다 서울에 공(貢) 바치기를 명령하고, 가정(嘉靖) 계사(癸巳)에 그 나뭇가지를 갑 속에 넣어서 의관을 시켜 중국에 가서 질문하게 하였다. 여러 어의(御醫)에게 물어도 모두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그 나무가 중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본초강목(本草綱目)』 등 여러 방서에 빠져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인가, 혹은 방서 밖에 따로 이 나무가 있는데, 이름은 있어도 쓰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시험하지 않은 것인가, 혹은 중국에서 이미 알고 있는데, 갑 속에 넣어 잔가지가 말라서 분변하기 어렵기 때문인가. 종기를 다스리는 데 그렇게 묘하다면, 방서에 실리고 실리지 않은 것과 중국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다.
중국에서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실리지 않았다고 물을 필요가 없다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중국에 대한 그러한 생각이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대부가 품었던 일반적인 통념이었다.삼지연에는 15미터쯤 되는 김일성의 대형 동상이 소백산을 등지고 서 있다. 김일성이 항일 유격 활동을 할 때 잠시 쉬어간 곳이라 하여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지는 삼지연을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여기는 삼지라 하여 옛날부터 이름이 들린 곳이니 크고 작은 여러 늪이 느런히 놓인 가운데 셋이 가장 뚜렷한 고로 삼지라 일컫는 것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니 혹 칠성지라는 이름이 있음은 필시 일곱으로 보이던 시절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세 호수 중에서 크기로나 아름다움으로나 으뜸이 되는 것은 가운데 있는 것이니 둘레가 7~8리에 파란 물이 잠자는 것처럼 고요한데, 동쪽과 북쪽에는 속돌 부스러진 무게 없는 모래가 백사장을 이룬 밖으로 나직나직한 잎갈나무 숲이 병풍처럼 에두르고 서쪽으로 들어가면서 얽은 구멍 숭숭한 돌들이 운치 있게 꾸민 정원처럼 물가에 깔리다가 그것이 거의 다할 만하여서 잘록한 목장이가 되고 둥글 우뚝한 조그만 섬 하나가 바로 소담스럽게 호수 가운데 솟아, 나무가 우거지고 돌 모양이 운치 있다.그러나 삼지의 아름다움은 삼지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일면으로는 백두산 이하 간백(間白), 소백(小白), 포태(胞胎), 장군(將軍) 등 7000~8000척의 높고 험한 산들이 멀리서 둘러싸고 일면으로는 천리천(백두산 중턱의 엄청나게 넓은 들)이라고 하는 큰 들의 깊은 수풀이 끝없이 터져나가서 웅장하고 호쾌한 갖은 요소를 다 드러내 보였으니, 이러한 외곽을 얻어서 삼지의 아름다움은 다시 몇백 배의 가치를 더하여 다른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는 천하의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것은 어쩌다가 한 번 있을 일이요, 어쩌다가 한 군데 생길 것일 만큼, 그 신기하고 소중함이 여간일 수 없다.삼지를 초점으로 하여 나타난 미의 한 서클은 백두산 아름다움의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실로 조화의 가장 자신 있는 대걸작이요, 인류의 가장 의의 있는 한 재산일 것이다. (······) 삼지는 세계적 절경이요, 또 두드러진 특색과 특별한 맛을 가졌기 때문이다.
백두산기행문
고려시대 이전의 백두산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이 처음이 될 것이다. 이 유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당주집(鐺洲集)》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영조 40) 여름, 5월 14일 경성군(鏡城郡)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 · 무산(茂山) · 임강대(臨江臺) · 풍파(豊坡) · 천평(天坪) · 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18일이 걸렸고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백두산유록>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 · 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保晩齋集)》속에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있다.
근래의 자료로는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기행문학으로서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가 처음이 될 것이다.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한국지(韓國誌)》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지리>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 등정기에서는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10㎞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은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보기에 백두산은 바위가 많고 외떨어져 있는 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약2,000피트 솟아 있었으며 평평한 책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윗 부분이 약간 잘려져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지점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분명 화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 않았다. 대체로 산의 빛깔은 회색빛이 나는 희뿌연 색이었으나 햇빛이 미치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옆면의 경사를 따라 가늘고 밝은 하얀 산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하여 백두산의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일본의 백두산 탐구등행대 대장인 시로야마(城山正三)의 《비경백두산천지(祕境白頭山天池)》라는 탐행기록이 1970년 6월, 동경에서 발행되었다.이 책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백두산을 등반한 것은 제1차 탐행이 1942년 여름이었고, 제2차 탐행이 1943년 여름이었다. 제1차에는 총 75명의 대원으로 혜산(惠山)에서 출발하였고, 제2차에는 총 85명의 대원으로 주대(主隊)는 무산에서 출발하고, 지대(支隊)는 혜산에서 출발하여 신무성(神武城)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에 등반하였다.
이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 · 천도(千島: 쿠릴열도) · 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참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白頭山探險飛行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비록 필자의 표현대로 주마간산도 아닌 비행간산(飛行看山)이지만, 필자의 유려한 필치로 과거 어떤 백두산 기행보다도 기행문학으로서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역시 시 속에 나타난 백두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작품만 보면 고려시대 이색(字穡)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 라는 시제 속에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리에 가로놓여 있으니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 가히 넘나들 수 없다…(長白山穹窿鐵嶺關峰山岏橫亘幾千里天險不可越‥‥‥"라는 한시가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시조로는 김종서의 "장백산에 기
또 남이(南恰)의 시로 "장검을
진태하(陳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 이라는 시로써 토로했다. "민족도/국토도/분단된 슬픈 역사속에/통일의 그 날을 기다려/하마 하마 사십년/세월의 기만(欺瞞)에/분노는 열화처럼/이역(異域)길 돌아 돌아/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신들린 걸음으로/민족의 성지(聖地), 국토의 시원(始原)/백두산을 찾아/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잃어버린 우리의 땅/만주(滿洲)벌 수만리(하략)."최근 백두산에 대한 장편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백두산》이 있다. 이 시는 전체 4부로서 8권을 출간할 예정인데, 현재 1부 2권이 발간되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그런데 시의 시발인 백두산은 정작 자료와 상상의 세계로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백두산을 등반해보지 못하고 작자의 상상과 동경 속에서 백두산을 묘사하였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라고 쓰여 있다.북한에서도 <백두산>이라는 장편 서사시가 발표된바 있으나 백두산을 무대로 한 김일성의 행적을 미화한 것으로, 문학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北間島)>를 들 수 있다. 1959년 4월 《사상계(恩想界)》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이 소설에 대하여 "해방 뒤 10여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북간도>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북간도>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있으나, 백두산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있다. 이외에 이미륵(李彌勤)도 그의 저서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백두산은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탓이겠지만,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수집하여 발간한 전설고사집 속에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 · <백두산의 사냥군과 호랑이> · <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드문가? >· <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육대조 호경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백두산은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설화도 얽혀 있다.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의 조상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상하여,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覺羅式穆訥)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탐사하였으며,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옹정제(雍正帝) 이후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리하에 춘추로 중월(仲月)에 제사를 지냈다. 《개국방략(開國方略)》이라는 책에 청제(淸帝)의 탄생설화가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哩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 선녀의 우의(羽衣)위에 놓았다. 셋째 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로서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 · 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작품으로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조선일보》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애국가(愛國歌)로부터 적지않은 노래가 있다.
이 가운데 <조선유람가>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한울을 버틔고선 백두의 성산/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아!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흥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이처럼 우리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히 아로새겨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하고, 바다멀리 제주도 · 울릉도까지도 국토의 맥이 이곳으로 줄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왔기 때문에, 반만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면면히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개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전설 · 설화 · 시 · 소설 · 수필 등 우리민족의 전통문학과 관련지어지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의 맥을 잇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을 '백두산족'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의 가슴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비유컨대 조선 사람이 백두산 속에 있음을 잊어버린 것은 물속에 고기가 물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할까요." 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세계 도처에 퍼져 살면서, 때로는 이미 국적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백두산' 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국을 생각하게 되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하였던 민족항일기에도 백두산은 곧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곧 V0A(미국의 소리) 우리말 방송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될 때, 그 방송의 시작을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세번 낸 다음 아나운서가 "백두산 호랑이" 하면서 "여기는 자유의 소리 우리말 방송입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방송하였다. 일제침략하에 방송도 마음대로 못 듣던 시절,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우리 동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 독립심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 방송에서 '백두산' 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면 그처럼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국가(國歌)의 가사는 아직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볼리어진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곧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이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단순히 조국의 영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 말자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이다. 백두산은 일찍이 그 명칭이 '불함(不咸)' 곧 신(神)의 산으로 일컬어온 것처럼 한결같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신성시되어있는 점이 세계 어떤 산과도 다른 점이다.
그 실증으로 《북사》와 《봉천통지(奉天通志)》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간 그릇에 담아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한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괄지지(括地志)》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서명응의 《유백두산기》에 실려 있는 제문을 보면 "높다란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으로 온 백성들이 우러러봅니다. 진작부터 전모를 근참하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왔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찬 바람 찬 이슬 맞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왔습니다. 산신령께서는 이런 정성을 살피셔서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어 마음대로 근참하게 하소서. 하늘에는 해와 별이 환하여 감추는게 없사온데, 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백두산을 등정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제문에 공감할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는 천변만화로 삽시간에 변모하는 가공할 날씨에 누구나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하늘에 의지하여 빌 수밖에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으며.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