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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40코스
천하마을-편백숲임도-나비생태공원-바람흔적미술관-내산-봉화-독일마을-물건마을
20211207
1.화천 고향의 강과 독일마을의 바람흔적, Glück Auf!(글뤽 아우프!)
남해군 미조면 송정리 국도 19번 남해대로의 천하(川下, 내아래)마을 표석에서 오른쪽에 남파랑길 40코스 끝지점이며 41코스 시작지점에 남파랑길 41코스 시작점 알림표지와 남해바래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남파랑길 40코스는 '화전별곡길'로 명명된 남해바래길 7코스와 병행한다.
임도를 따라 오르면서 왼쪽으로 바라보니 푸른 마늘밭 너머 능선 뒤쪽에 상주면 상주리 금산(錦山)의 암릉이 보인다. 금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보광산에서 수도하며 기원할 때 자신이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침내 기원한 대로 왕좌에 오른 뒤 보광산 전체를 감싸줄 비단이 부족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자 비단 대신에 산이름을 비단 錦자를 써서 錦山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시멘트 임도를 따라오르는데 언덕에 세워진 집 입구에 '잔 다르크와 말'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조각상의 의미가 무엇일까? 17세의 농촌 소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神의 계시를 받아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조국 프랑스를 구하였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잔 다르크 조각상을 집 입구에 설치한 주인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 잔 다르크의 용맹심과 조국애를 본받으며 늘 神의 뜻에 살겠다는 의미일까?
초겨울의 바람은 싸늘하게 불어오지만 햇볕은 따스하다. 억새풀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머리를 하늘하늘 풀어헤친다. 초겨울 숲길 풍경이 스산하지만 숲길에서 조망하는 풍경이 마음을 열어준다. 천하몽돌해변과 천하마을, 천하저수지를 내려보며 돌탑들이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르면 금산의 보리암을 조망할 수 있다. 왕좌에 오르게 해 달라고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전설이 있는 기도처가 금산 보리암 옆에 있다. 기도 덕분에 왕이 되었는지 이성계는 왕이 되자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어주는 대신 錦山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성계의 기도처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듯하다. 전북 장수의 신무산 아래 뜬봉샘도 이성계의 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이성계가 기도를 마치자 봉황새가 날아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숲길을 따라올라 넓은 쉼터의 고개에 이르렀다. 고개에는 '한려정(閑麗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한려정(閑麗亭)' 전망정자에 올라 미조면 송정리 일대를 내려보았다. 천하몽돌해안과 한려수도(閑麗水道) 풍경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바다에 배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묘박지(錨泊地) 풍경이 평화롭다. 아마도 왼쪽 미조항에 들어가기 위해 배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듯하다.
'한려정(閑麗亭)'에서 동북쪽을 내려보면 걸어가야 할 삼동면 봉화리 일대가 조망된다. 내산저수지는 하나의 징표가 되어서 위치를 가늠해 준다. '한려정(閑麗亭)' 아래 벤치에 앉아 한려수도(閑麗水道) 풍경을 바라보면 점심을 먹었다. 초겨울의 햇볕이 따스하여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서 편백숲 임도를 따라 나비생태공원과 바람흔적미술관을 거쳐 내산저수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다.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뒤 금산 산줄기. 정면의 안테나가 세워진 산봉의 이름이 궁금하다.
편백자연휴양림 이정목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2.4km 지점의 이정목으로, 직진 방향은 휴양림 0.7km, 오른쪽 위 방향은 '임도순환도로'라고 적혀 있다. 남파랑길 표지는 임도순환도로 방향으로 붙어 있다. 남파랑길을 따라 빙 돌아갔지만, 편백자연휴양림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좋았을 듯싶다.
임도순환도로를 따라내려오면 작업임도 연도 표시 이정목에 이르는데 2014년 작업한 임도와 2015년 작업한 임도의 경계점에 설치되어 있다. 금산의 산줄기에 속하는 순천바위를 어림하고, 그 아래 붉은 지붕의 나비생태공원을 바라보며 임도순환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시내를 건너 내산저수지 북쪽 금암로를 따라 내려가면 나비생태공원 입구를 거쳐 금암로의 바람흔적미술관 입구에 이른다. 바람흔적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바람흔적미술관은 평면공간, 입체공간, 조각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실은 닫혀 있었다. 바람흔적미술관 옥상에 올라서 내산저수지 서쪽 상류를 올려보니 산줄기 움푹 파인 곳에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이 보인다. 저곳에서 이곳을 내려보며 걸어갈 길을 예측하며 풍경을 상상했는데 이제 이곳에서 저곳을 올려보며 걸어온 길을 추억한다. 옥상에서 눈을 돌려 내산저수지를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이 펼쳐져 있다. 그 언덕에는 설치미술가 최영호 작가가 바람을 주제로 바람개비들을 설치하였다. 호수처럼 펼쳐진 내산저수지에 바람이 불어 파문을 일으키면 바람개비는 응답하여 살랑살랑 풍차 돌아가듯 날개를 펄럭인다. 바람은 바람개비 날갯짓과 호수의 그림자로 흔적이 된다. 기차가 연기를 날리며 바람의 시간을 달린다. 시간의 흔적을 바람이 실어온다. 바람흔적이란 곧 세월흔적이다.
바람흔적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금암로를 따라 남파랑길을 이어간다. 내산저수지 제방의 내산지 표석을 지나서 곧 금암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금암로469번길을 따라 내려간다. 마을 민가의 예쁘장한 돌담을 보고 골목길을 나오면 마을 입구의 멋진 소나무 2그루가 길손을 환영하는 듯 환송하는 듯 마을의 안내자처럼 솟아 있다. 소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 밖으로 나와 길 위에서 내려보니 내산저수지의 물이 흘러내리는 시내 옆 터에 소나무들을 옮겨심고 조성한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남파랑길을 잠시 벗어나 공원으로 내려가 보았다. 이 시내가 꽃내 花川이며 이곳에서부터 '화천 고향의 강'이라 명명된 곳이 시작되는 것임을 설명안내판을 보고서 알았다.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점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이고, 오른쪽은 금산, 그 사이로 봉내와 고내가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빼어나 호걸과 준사들이 모였나니, 인물들이 번성했네.
아! 하늘 남쪽 경치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아! 나까지 포함하여 몇 분입니까!
-김구(金絿, 1488~1534)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중 제1장 현대어 번역
조선 중종 때 南海島로 유배온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가 지은 '화전별곡(花田別曲)'은 南海(花田)를 예찬한 작품이다. 남해군에서는 남해바래길을 조성하면서 화천을 따라가는 이 코스를 자암(自庵) 김구(金絿) 선생의 작품 이름을 따서 '화전별곡길'로 명명하였으며, 花川(꽃내)에 '화천 고향의 강' 이름을 붙이고 두 구간으로 나누어 조성사업을 하였다. 첫 구간은 '배움별곡'길(내산저수지~제림방보)로 명명하여 생태학습공간, 둘째 구간은 '웃음별곡'길(제림방보~타지막골보)로 명명하여 친수문화공간이라 하여 각 공간에 적합한 여러 설명안내판을 설치하여 놓았다.
"자연을 벗삼아 다양한 것들을 보고 배우던 선비들의 모습과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는 생태학습공간"인 '배움별곡'길을 따라간다. 꽃내 화천에 사는 대표 어종과 대표식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이 화천의 동식물을 살펴보라고 안내하지만 꽃내로 들어갈 수도 없고, 꽃들이 없는 빈 들녘길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빈 들판의 허허로운 가을날 봄날의 꽃 떨어져 흘러내리는 꽃내를 상상하며 화천 둑방길을 따라 화천과 함께 내려간다. 중볼교 다리를 건넌다. 중볼? 무슨 뜻일까? 왼쪽으로 내산마을회관과 그 오른쪽에 '내산분교'가 보인다. '내산분교'는 폐교된 내산초등학교(1964~1994)를 리모델링하여 브런치카페로 탈바꿈하였다고 한다. 화천의 내산교 주변 들녘에 까마귀들이 많다. 소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화천 하늘 위에 가득하다.
화천은 금암교 아래를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휘돌아나가며 그 왼쪽에 섬 같은 넓은 땅을 형성해 놓았다. 그곳에 조성한 수변공원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사랑해 행복해 전화해. 소중한 사람에게 금산의 정기를 담아 안부를 전하세요.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린 후 나라를 세운 금산 보리암! 금산 보리암의 좋은 기운이 내산을 지나 이곳 화천을 지나갑니다."라고 적혀 있다. 뎈(deck) 다리를 건너 수변공원으로 들어가니 공원 한쪽에 붉은 색 공중전화부스가 설치되어 있다. 뎈(deck) 입구 안내판의 문구대로 실행하라는 목표가 있어 보인다.
수변공원 설명안내판을 읽고서 이곳에서부터 '화천 고향의 강' 두 번째 구간 '웃음별곡'길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이 제림방보로 지금까지 걸어온 내산저수지~제림방보는 '배움별곡'길이며, 이제 여기부터 타지막골보까지는 두 번째 구간 '웃음별곡'길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지역의 전설과 이야기, 시를 읊고 즐겼던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친수공간"이라는 '웃음별곡'길에는 그래서 '물개바위 이야기', '들돌 이야기', '꽃내바위 이야기', '거북이산 이야기' 등 이야기들이 적힌 안내판들이 '웃음별곡'길을 따라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제림방보 아래 화천 건너편에 있는 양떼목장&양마르뜨언덕을 바라보며 내려가면 수변공원이 또 나타난다. 수변공원 입구에서화천을 가로지르는 교량공사가 진행중이다. 공사개요를 살펴보니, 태양광 발전시설과 진입도로 및 교량 건설공사였다. 화천 건너 산비탈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공사하기 위해 진입도로와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다. 수변공원에 설치된 '준공 표지석'에 '화천 고향의 강 조성사업' 개요가 적혀 있다. '화천 고향의 강' 조성은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일원에, 2013년 11월~2018년 9월까지 사업비 183억원을 들여 하천 5.3km를 정비하고, 친수공원 5개소와 교량 4개소를 설치하였음을 알았다.
수변공원에는 '남해별천지 프롬나드 안내도'가 멋지게 세워져 있다. 이 명칭은 또 무엇인가? 너무 복잡하다. 남해바래길 7코스는 '화전별곡길'로 명명되어 있다. 그 중 내산저수지 아래부터는 '화천 고향의 강'으로 명명되어 있고, 다시 '배움별곡길'과 '웃음별곡길'로 나누어진다. '화전별곡길'과 '남해 별천지 프롬나드(promenade산책)'는 똑같은 경로이며 마지막 물건마을에서 남해군 요트학교가 있는 물건리해안이 조금 추가되는 것만이 차이가 난다. 또 '화천 고향의 강'은 위 코스의 일부에 해당한다. 명칭을 이리저리 붙이는 것에 현기증이 일어난다.
프롬나드 안내도를 보니 이 수변공원 이름이 윤슬마당이다. 왜 윤슬마당이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사전을 찾아보고,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 이른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과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화천의 잔물결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윤슬마당 명칭을 붙였군. 윤슬마당에 토끼와 사슴, 가방을 멘 두 어린이, 배낭을 멘 두 젊은이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조형물 모두 화천을 바라보지 않고 도로쪽 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윤슬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을 관찰하는 꼴이 된다. 햇빛과 별빛이 반짝이는 화천의 잔물결을 감상하도록 조형물 방향을 바꾸면 더 좋지 않을까?
화천 둑방길을 계속 걸어서 봉화마을을 바라보며 음지교를 건넜다. 멀리 언덕 위에 케이프타운펜션이 보인다. 남파랑길은 케이프타운펜션 입구를 지나 독일마을로 이어진다. 화천 남쪽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보니 화천 북쪽 봉화마을 입구에 신성스러워 보이는 당산나무가 손짓한다. 당산나무를 보기 위해 남파랑길을 벗어나 화천을 다시 건너 당산나무를 찾아간다. 당산나무에는 돌탑이 세워져 있고 쉼터에 평상이 놓여 있다. 쉼터 뒤쪽에 3면에 난간석을 세우고, 그 중앙에 작은 3층석탑, 그 좌우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고 금줄이 쳐져 있는 제당과 제단이 있다. 봉화마을 당산나무 설명안내판을 보니, 당산나무 수종은 느티나무로 수령 340년이다. 이 당산나무 옆에 삼층석탑이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고 한다.
봉암로에서 화천의 화암교를 건너 독일로를 따라 독일마을로 향한다. 왼쪽 산 위에 케이프타운펜션이 솟아있고, 독일마을 오르는 고개에서 뒤돌아보면 기우는 햇살을 받아 봉화마을이 반짝이고 마을 입구에서 당산나무는 수호신처럼 의젓하다. 고개에서 왼쪽 동쪽 방향을 바라보면, 다리 건너편 동천보건진료소, 동천공설시장, 삼동초등학교, 꽃내중학교가 있는 동천리 중심지가 들어온다. 꽃내 화천은 동천중심지 옆을 거쳐 금암마을 입구에서 남해로 흘러든다.
케이프타운펜션 입구에 모딜리아니風으로 그려진 케이프타운펜션 광고 그림이 흥미롭다. 아마도 모딜리아니의 여인 잔느 에뷔테른을 흉내낸 그림 같다. 언덕을 오르면 왼쪽은 원예예술촌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파독전시관 가는 길이다. 파독전시관 방향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독일마을 안내도와 독일마을 안내표석을 지나 Deutscher Platz(독일광장) 입구에 높이 솟은 무지개사각문을 통과하여 독일광장(Deutscher Platz) 서쪽 언덕 아래 파독전시관(탄광의 수레바퀴 모형)으로 향한다.
남해 파독전시관 입구 안내문을 읽으면 아픔이 밀려온다. "국가도 국민도 가난했던 1960년~70년대, 가난을 극복한다는 일념으로 이역만리 독일로 떠난 광부, 간호사들의 이야기. 그리움을 따라 돌아온 남해 독일마을." 은어가 떠나간 고향을 찾아 거슬러오르듯 머나먼 이역 땅에서 몸부림친 광부와 간호사들이 노후를 위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조성된 독일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인생의 노후를 장식하려는 그들의 아팠던 이국에서의 삶의 추억을 파독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파독광부 이야기(지하 1200m 갱도에서), 파독간호사 이야기(병원생활, 독일생활), 그리움의 종착역(독일마을로), 영상물(Glück Auf!글뤽아우프! 살아서 돌아오라!)로 구성되어 있다. 생사가 순간에 갈리는 지하 1200m 막장에서의 노동을 시작하면서 Glück Auf!(글뤽 아우프!, 살아서 돌아오라!) 그리고 노동을 마치고 막장에서 지상에 올라왔을 때 살아서 돌아왔음의 환희와 신음, 그 소리들이 전시실에 울리고 있다. 희망을 찾아 독일에서 나이팅게일이 되기까지의 험난함과 독일에서 결혼하여 생활한 일상의 모습을 담은 간호사들의 추억이 아련하다. 전시실 출구복도의 게시물, 파독광부 이병종이 쓴 "지금도 그때 받았던 봉급표를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 내 젊음이 있기 때문에."를 읽으며 독일광장으로 나왔다.
파독전시관 뒤 언덕에는 파독 광부·간호사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파독 광부·간호사 추모공원 입구 왼쪽 벽에 "독일마을은 1960~70년대 파독되었던 광부·간호사분들의 남은 삶을 고국에서 보내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또한 이곳에 거주하시는 파독 광부·간호사분들의 연세가 고령화되어 돌아가신 후에도 독일마을에서 편히 잠들기를 희망하여 그분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게도 그 고마움을 전하고자 이곳에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추모공원에서 故석숙자 묘비에 적힌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좌우명을 읽으며 희망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며 그녀를 추모했다.
독일광장(Deutscher Platz)으로 내려왔다. '바이로이트' 레스토랑이 눈길을 끌었다. 레스토랑 이름 '바이로이트'가 잊고 있던 바그너 음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도시 바이로이트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과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 번도 바이로이트에 가보지 못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여 DVD로 그의 작품들을 감상했을 뿐이다. 그중 최고의 역작은 <니벨룽겐의 반지>라고 생각한다. 과연 바이로이트에 가볼 수 있을까? 바이로이트 음악축제 기간에 가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을 꼭 감상해 보고 싶다.
독일광장을 빠져나와 전망대에서 독일마을과 물건리 방조어부림, 방파제 그리고 멀리 사량도를 조망한다. 독일양식의 주택들이 오밀조밀 세워진 독일마을이 이국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혹시 상업적 목적으로 저 주택을 건립한 것은 아니겠지? 전망대 옆 안내판에 소개한 독일마을 골자를 간추리면 이렇다. "1960년대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거주 교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정착할 수 있도록 2001년 남해군이 조성한 마을이다. 독일마을은 독일 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가져와 전통적인 독일양식의 주택으로 건립했는데, 2013년 33동의 주택이 완공되어 있다. 독일마을 주택들은 독일 교포들의 안락한 노후생활을 위한 주거지 또는 관광객을 위한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다." 독일교포를 이용한 관광용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독일마을길로 내려섰다. 각 주택 앞에는 그 집에 대한 사연이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중 파독의 집 '프랑크푸르트' 주인의 안내글판을 읽어 본다. "이승준/ 파독 1965년 6월, 보훔 만네스만 광산 근무, 박군자/ 파독 1970년 1월, 하나우 시립병원 근무. 우리 부부는 2007년 3월에 남해 독일마을에 정착해서 지은 집의 이름을 푸랑크푸르트라 하였습니다. 푸랑크푸르트의 풀네임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Furankfurt am Main)입니다. am Main은 '마인강 옆'이라는 의미이며 푸랑크푸르트는 증권거래소나 핵심은행들의 본점이 자리잡고 있는 독일경제의 중심지로 푸랑크푸르트 대성당, 뢰머광장, 괴테생가가 있는 도시입니다. 따뜻한 남해에서 독일마을 입주민들과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독일마을 푸랑크푸르트 집에서 두 분이 평안하게 노후를 즐기시기를 바라며 길손은 길을 떠난다.
독일마을 표석 앞을 거쳐간다. 2006년 3월 9일에 세워진 표석에는 독일마을을 건립한 공덕을 기려 남해군 전임 김두관 군수를 칭송하는 내용이 행간에 들어 있다. 독일마을은 과연 "조국근대화에 큰 위상을 담당했던 우리 교포들이 고국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게 정착할 수 있는 삶의 터전 독일교포 정착마을"일까? 몇 개의 단어는 지금 시점에서는 맞지 않아 보인다. 독일마을을 내려와 상업지구를 지난다.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유명 카페 이름을 따온 카페 'KRANZLER'(크란츠러) 전망대에서 풍경을 조망하고 물건마을 버스정류소 옆 남해바래길 안내도와 남파랑길 안내도가 있는 남파랑길 40코스 출발지에 이르렀다. 남파랑길 40코스를 이렇게 역방향으로 끝낸다. 해는 이미 기울었다. 걸어온 길과 풍경들이 가슴에서 바람으로 일어나 불어온다. 바람흔적이 가슴에 새겨진다.
2.걸은 과정
남해군 미조면 송정리 국도 19번 남해대로의 '천하마을' 표석과 버스정류소. 천하마을은 天下마을이 아니라 내아랫마을이다.
천하몽돌해변과 그 위 천하마을, 걸어온 임도, 천하저수지가 모두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금산의 보리암이 조망된다.
'천하저수지'는 보이지 않고, 그 위에 또 하나의 저수지 '천하일저수지'와 천하마을, 천하몽돌해안과 閑麗水道가 조망된다.
남파랑길은 편백숲 임도를 따라 내려가서 나비생태공원과 바람흔적미술관을 거쳐 내산저수지 제방 앞으로 이어진다.
천하몽돌해안과 閑麗水道 바다의 묘박지(錨泊地) 풍경이 평화롭다. 배들이 왼쪽 미조항에 들어가기 위해 머물고 있는 듯.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0.4km 내려온 지점의 이정목에 왼쪽 방향은 휴양림1.0km, 직진 방향은 휴양림2.7km 표시가 적혀 있다. 남파랑길 표지는 직진 방향으로 되어 있다.
천연 상태의 황무지가 아니겠지? 저곳에도 편백숲을 육림하려는 것일까?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오른쪽)에서 빙 돌아 이곳으로 내려왔다.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뒤 금산 산줄기. 정면의 안테나가 세워진 산봉의 이름이 궁금하다.
앞에 보이는 산봉은 가마봉인 듯.
지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면 안테나 산봉에서 이어지는 정면의 바위는 순천바위인 듯.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2.4km 지점의 이정목으로, 직진 방향은 휴양림 0.7km, 오른쪽 위 방향은 '임도순환도로'라고 적혀 있다. 남파랑길 표지는 임도순환도로 방향으로 붙어 있다. 남파랑길을 따라 빙 돌아갔지만, 편백자연휴양림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좋았을 듯싶다.
이정목에 임도순환도로 작업연도를 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임도는 2014년 작업한 임도이고 지금부터는 2015년 작업한 임도이다. 나무 뒤쪽에 내산저수지가 있고 뒤쪽은 금산 산줄기의 순천바위라고 어림한다.
앞쪽에 보이는 암봉이 순천바위일 것이라고 어림한다. 그 아래 나비생태공원의 붉은 지붕이 보인다.
남파랑길 표지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시냇물을 건너야 한다. 앞서가는 회원을 불러 이쪽 방향으로 안내하였다.
이 시내를 건너와서 내산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간다.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이 뒤쪽 움푹 파인 곳에 있다. 저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곳을 내려보았다.
앞쪽의 산봉은 대기산인 듯. 대기산 아래를 걸어 내려와 내산저수지 남쪽을 빙 돌아서 서쪽에서 꺾어 이곳으로 내려왔다.
바람흔적미술관 옥상에 올라서 내산저수지와 뒤쪽 능선 움푹 파인 곳에 있는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을 조망했다.
호수처럼 펼쳐진 내산저수지에 파문을 일으키며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개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응답한다.
설치미술가 최영호 작가가 바람을 주제로 설치한 큰 키의 바람개비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풍차 돌아가듯 돌아간다.
맨 뒤 능선의 움푹 파인 곳의 전망대 '한려정(閑麗亭)'에서 편백숲 임도를 따라 내려와서 내산저수지 왼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아 나비생태공원 입구를 거쳐 바람흔적미술관에 들렀다. 바로 앞 바람흔적미술관 옥상에 올라가서 풍경을 조망했다.
금암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금암로469번길을 따라 내려간다.
폐교된 내산초등학교(1964~1994)를 리모델링하여 탈바꿈한 브런치카페 '내산분교'가 보인다.
화천 내산교를 건너 맞은편 화천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맨 끝에 금산 산줄기 부드럽게 오른쪽으로 흐른다. 그 아래쪽에 내산저수지 제방이 보인다.
화천 왼쪽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앞에 보이는 화천의 금암교 뒤 뎈(deck)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부터 '화천 고향의 강' 두 번째 구간 '웃음별곡'길이 시작된다.
남해바래길 7코스는 화전별곡길로 명명되어 있다. 그 중 내산저수지 아래부터는 '화천 고향의 강'으로 명명되어 있고, 그 첫 구간 '배움별곡길'은 내산저수지부터 여기(제림방보)까지다. 이제 여기부터 타지막골보까지는 두 번째 구간 '웃음별곡길'이다.
안내도에 게시된 남해12경을 살피니 모두 탐방한 곳이다.
왜 윤슬마당이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그런데 화천을 바라보지 않고 그 반대편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음지교를 건너 화천 맞은편 둑방길로 넘어간다.
당산나무를 보기 위해 남파랑길을 벗어나 화천을 다시 건너 당산나무를 찾아간다.
당산나무 수종은 느티나무로 수령 340년이다. 이 당산나무 옆에 삼층석탑이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고 한다.
봉암로에서 화천의 화암교를 건너 독일로를 따라 독일마을로 향한다. 왼쪽 산 위에 케이프타운펜션이 보인다.
독일마을 오르는 고개에서 왼쪽으로 바라보았다. 왼쪽은 봉화리에 속하고, 오른쪽 다리 건너편이 동천리 중심지로 동천보건진료소, 동천공설시장, 삼동초등학교, 꽃내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모딜리아니風 여인이 빈객들을 맞이한다.
1960년대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되어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거주 교포들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정착할 수 있도록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독일의 이국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남해군이 조성한 마을이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약 100,000㎡의 부지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독일마을은 독일 교포들이 직접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가져와 전통적인 독일양식의 주택으로 건립했는데, 2013년 33동의 주택이 완공되어 있다.
독일마을 주택들은 독일 교포들의 안락한 노후생활을 위한 주거지 또는 관광객을 위한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2006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드라마 <환상의 커플>과 인기 버라이어티 <1박 2일>을 통해 독일마을이 소개되면서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파독전시관 뒤 언덕에는 파독 광부·간호사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도 그때 받았던 봉급표를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 내 젊음이 있기 때문에." - 파독광부 이병종
추모공원 입구 왼쪽 벽에 "독일마을은 1960~70년대 파독되었던 광부·간호사분들의 남은 삶을 고국에서 보내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또한 이곳에 거주하시는 파독 광부·간호사분들의 연세가 고령화되어 돌아가신 후에도 독일마을에서 편히 잠들기를 희망하여 그분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게도 그 고마움을 전하고자 이곳에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 - 故석숙자의 좌우명
독일마을과 물건리 방조어부림, 방파제 그리고 왼쪽 뒤에 사량도 섬이 보인다.
여기는 독일마을 <특정지역>입니다. <Hier ist ein Deutsches Dorf.>
남해군 전임 김두관 군수님께서 행정자치부, 문화관광부, 경상남도의 지원을 받아 1960-1975년에 간호사와 광부로 머나먼 이국 땅 독일로 건너가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조국근대화에 큰 위상을 담당했던 우리 교포들이 고국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게 정착할 수 있는 삶의 터전 독일교포 정착마을입니다. 서기 2006년 3월 9일 입.
보이는 섬은 사량도와 두미도일 것이라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