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서양인들 가운데 우리는 17세기초 남해안에 표착해 들어온 벨테브레(J.J.Weltevree:박연)와 하멜(Hendrik Hamel)을 기억한다. 벨테브레가 조선에 머무르면서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전해 주었다면 거꾸로 하멜은 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 모두 네덜란드인이었다. 2000년 12월. 그들과 똑같은 碧眼의 네덜란드인이 400여년전 선조들이 인연을 맺은 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는 이 땅에서 새로운 神話를 만들었다. 자신이 30여년 동안 닦아온 유럽의 선진축구를 한국축구에 접목시켜 놀랄 만큼 강해진 한국축구를 월드컵을 통해 거꾸로 세계에 알렸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거스 히딩크(Guss Hiddink․56) 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선진 한국축구의 아버지가 되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개막을 앞두고 히딩크를 모델로 한 TV 광고에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까지 주는 카피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광고카피가 아니라 월드컵 출전 반세기 동안 한국민들이 느꼈던 갈증의 표현이었다.
지난 6월14일, 그 목마름은 거스 히딩크에 의해 해갈됐다. 그가 이끄는 한국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1승을 넘어 단숨에 16강까지 내달렸다. 취임초 만일 조국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 속하더라도 네덜란드를 꺾겠다고 말했던 그의 약속은 2승1무, 조 수위의 성적으로 지켜졌다.
월드컵 16강 진출이 확정된 뒤 국내의 한 인터넷사이트는 네티즌들에게 16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대(對) 포르투갈전 승리 요인에 대해 물었다. 인터넷 설문에서 2만여명의 응답자 가운데 3분의1 가량이 히딩크의 탁월한 전략 때문이라고 답했다. 송종국의 포르투갈 미드필더 피구 원천봉쇄(25.5%), 미드필드의 완벽한 장악(21.1%)이 그 뒤를 이었다.
승리의 원천은 히딩크사단의 컴팩트 사커였다. 거기에는 히딩크에 의해 1년6개월 동안 조련된 멀티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들은 히딩크의 모든 전략․전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체력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히딩크는 90분간 쉴새없이 뛰며 경기를 지배하라고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주문해 왔다.
지난 5월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프랑스 평가전에 이어 조 예선에서 포르투갈․폴란드․미국 등 유럽형 축구들을 무력화시킨 히딩크 축구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500일만의 신화를 창조한 거스 히딩크의 축구는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그리고 히딩크의 40년 축구인생은 한국축구에 어떻게 접목되었을까.
히딩크, 네덜란드 유소년리그 1세대
현역선수 시절 거스 히딩크는 그의 축구지도자로서의 명성에는 못미치지만 네덜란드리그에서 나름대로 상당한 활약을 한 선수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연고 구단인 그라파샤프(De Graafschap)에서 세번씩이나 선수 유니폼을 입었고, 코치로도 두차례 몸담아 그라파샤프는 그의 축구의 모태(母胎)가 됐다.
아흐트우흐크(De Achterhoek) 지방의 바스펠드(Varsseveld)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히딩크는 처음부터 축구선수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4년제 중학 과정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그는 부모와 직업상담을 하면서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아흐트우흐크 지방은 독일과 접경지역으로 네덜란드에서도 특히 농업이 번성한 지역이다. 그러나 그는 그날 부모와의 상담에서 스포츠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오버빈(Overveen)에 있는 체육교사 과정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히딩크가 본격적으로 축구화 끈을 조이기 시작할 당시는 네덜란드 왕립축구협회가 축구강국 건설을 목표로 유소년 축구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의욕적으로 실행하던 시기였다.
젊은 시절 아마추어 리그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히딩크의 아버지는 히딩크를 비롯한 아들들에게 축구를 지도했다. 아버지 히딩크는 바스펠드에서만큼은 초등학교 교장과 유소년리그 축구책임자 등 두개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히딩크는 14세에 이미 바스펠드 유소년리그의 최초 11명에 포함될 정도로 축구에 자질을 보였다. 그는 말하자면 유소년리그를 거친 네덜란드의 1세대 축구선수였다.
17세의 소년 히딩크는 오버빈에서 2년 동안 군사훈련과 같이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축구와 농구․수영․복싱 등 각종 스포츠를 익혔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히딩크가 배웠던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었을 것이다.히딩크는 체육교사 과정을 마친 뒤 그라파샤프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유소년리그 선수들을 지도했다. 체육교사학교 졸업후 한동안 선수생활을 중단했던 그에게 축구는 운명처럼 다시 찾아왔다.
그가 두틴헴(Doetinhem)에 연고를 둔 그라파샤프 클럽에 정식으로 입단한 것은 1967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라파샤프팀은 오늘날 네덜란드의 1부리그 팀으로, 그는 당시 두명의 동생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이 팀에서 뛰었다.
그라파샤프에서 히딩크가 미드필더이자 섀도 스트라이커로서 많은 골을 기록했다.히딩크가 골키퍼 보호존에서 넘어져 있는 골키퍼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게임메이커로 뛴 화려했던 선수 시절
히딩크는 프로리그 데뷔 첫해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66~67시즌 20개팀 중 18위를 차지했던 그라파샤프를 단숨에 리그 6위로 끌어올렸고 팀내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다. 특히 1968~69시즌에는 22골을 기록하면서 그라파샤프에 첫번째 리그 우승을 안겨 주기도 했다. 1969~70시즌에서도 그는 14골로 팀내 최다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 그라파샤프와의 계약금 문제로 히딩크가 PSV 아인트호벤으로 빠진 뒤 팀은 리그 최하위로 다시 떨어졌다. 그라파샤프 축구팬들과 지역 유지들은 부족한 재정 때문에 벌어진 일을 두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히딩크도 아인트호벤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히딩크의 고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거스를 위한 10길더 모으기 캠페인이 벌어졌다. 이 캠페인으로 5만길더의 거금을 모은 클럽은 히딩크를 다시 불렀다. 그것은 재정 때문에 빼앗긴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클럽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선수 히딩크에게도 이러한 고향의 손짓이 마음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히딩크는 한 인터뷰에서 그것은 엄청난 압력이었다. 사람들은 돈을 꺼냈고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유일한 해결책은 100%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압력이 내게는 자극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히딩크가 돌아온 다음해 그라파샤프의 성적은 곧바로 달라졌다. 팀은 1973년 역사상 처음으로 1부리그로 승격했다. 선수들은 이기는 법을 배웠고 그라파샤프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명성을 얻게 됐다. 그라파샤프는 그로부터 3년 동안 엄청난 평판을 얻었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구단의 돈이 다시 문제였다. 1974년 그라파샤프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주장으로 활약하던 시절, 히딩크는 스웨덴 스트라스부르(Straat-burg)와의 별도 이면계약으로 한차례 방출 소동을 겪기도 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네덜란드 출신 트레이너가 그에게 높은 연봉과 계약금을 제시하면서 일이 불거졌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히딩크는 그라파샤프가 연봉협상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계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불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히딩크가 30세가 되었을 때, 네덜란드 언론에는 그의 경력에 늘상 따라붙던 수식이 있었다.
냅킨으로 쓰기에는 너무 크고 식탁보로 쓰기에는 너무 작다.
히딩크가 당시 네덜란드 최고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에 들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고 그라파샤프에서 뛰기에는 능력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라파샤프에서는 그에게 트레이너로 남기를 바랐지만 히딩크는 결국 돈이 보장되는 외국 클럽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그는 1976년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메츠, 1977년 새너제이 얼스퀘이크에서 1년씩 뛴 뒤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 NEC 니메가(1977~1981)를 거쳐 그라파샤프(1981~1982)에서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현역 시절 내내 그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미드필더로서 그는 한국 축구대표팀을 맡은 뒤 자주 주문했던 섀도 스트라이커(2선 공격수)로도 주목받았다. 그는 경기 때면 2선에서 스트라이커로서 곧잘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는 아인트호벤 선수 시절에는 한때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현지에서도 평가받는 선수 시절 그의 창조적인 플레이는 화려한 감독 시절의 그의 팀컬러를 결정했고, 한국 대표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히딩크가 선수 시절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바 있는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메츠의 전 감독 조지 메이슨은 1998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경기를 읽는 눈이 대단했다. 공을 다룰 줄 알았고, 공을 잡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히딩크의 선수 시절 일화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다. 그것은 지금껏 그를 쫓아다니는 뼈아픈 기억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실토했다.
그라파샤프에서 프로선수로 뛸 당시의 거스 히딩크(맨 오른쪽)와 그의 동생들.아버지에게 축구를 배운 히딩크 3형제 가운데 거스의 실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스페인 빅리그 감독으로 쌓은 국제적 명성
(현역시절) 몇가지 실수를 범했다. 나는 한때 한 선수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는 경기중에 항상 나를 발로 차곤 했는데, 그날은 결국 내가 발을 너무 높이 들어 태클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지금도 듣고 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일을 크게 뉘우치고 있다.
15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접고 히딩크는 1982년 고향팀 그라파샤프에서 플레이어 트레이너로 지도자의 길로 돌아섰다. 그는 그라파샤프에서의 코치 경험을 토대로 네덜란드 최고의 프로팀인 PSV 아인트호벤에서 코치생활(1986~90년)을 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꽃을 피워갔다.
그는 1986년부터 3년 동안 리그 연속 우승 기록을 달성했고 1988년에는 네덜란드 FA컵을 거머쥐었다. 그가 트레이너로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PSV 아인트호벤이 1989년 유럽컵을 안으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브라질 출신의 최고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호마리우와 감독과 선수로 호흡을 맞춰 클럽 트레이너로는 최고의 영예인 유러피언 챔피언십을 안게 된 것이다. 상대에 따라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그의 용병술이 그때부터 대외적으로도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아인트호벤의 미드필더였던 제럴드 바넨부르(Gerald Vanenburg)와의 갈등 때문에 감독직을 벗어던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일부 언론으로부터 선수들을 장악하지 못해 팀을 자주 옮긴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는 1년 동안 터키의 페네르바체(Fenerbahce)를 거친 뒤 빅리그인 스페인리그(Primera liga)로 진출했다. 1991년부터 3년동안 발렌시아를 이끌면서 그는 톱 클라스 감독으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히딩크는 발렌시아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함으로써 남부 유럽의 축구광들을 사로잡았다.
1995년 1월1일 그는 네덜란드의 국가대표팀 감독에 올랐고, 그를 둘러싼 열정이라는 말은 네덜란드 축구에 접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네덜란드 오렌지군단을 이끌던 1996년, 히딩크는 유럽컵에서 8강에 진출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4-4-2 포메이션의 토털사커로 4강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는 베르캄프와 클루이베르트 등 네덜란드의 노․소장 선수들을 골고루 포지션에 포진시키는 등 특유의 용병술을 발휘했지만 4강에서 브라질을 맞아 아깝게 침몰했다.
프랑스월드컵 후 히딩크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면서 유럽․남미 클럽챔피언 대항전인 도요타컵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히딩크는 2000년 12월 한국 대표팀을 맡은 뒤 짧지만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의 한국축구가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이자 유럽의 명문 구단들도 명장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그가운데는 그가 과거 몸담았던 아인트호벤과 그라파샤프, 일본의 교토 퍼플상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히딩크의 적극적인 선수 장악력
선수시절과 코치시절을 통틀어 열정과 고집이라는 두 단어는 명장(名將) 히딩크를 가장 잘 수식하는 단어일 것이다. 경기중에 벤치에서 일어나 테크니컬 라인을 어슬렁거리며 선수들의 경기 내용과 컨디션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야수의 눈빛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다.
그것은 한국 국가대표팀의 훈련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선수들에게 약간은 과다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요구했다. 그는 지난 5월29일 경주에서 대표팀의 전술훈련 도중 한 선수가 몇차례 실수하자 Fucking Head(돌대가리)라는 쌍욕을 터뜨리며 화를 낼 정도로 진지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작전대로 따라주었을 때는 어김없이 Good Boy!라며 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지도자로서의 히딩크의 팀 장악력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 대표팀을 이끄는 그의 원칙주의적 카리스마는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선수 선발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집착과 원칙주의는 보는 사람들이 더 진땀날 정도다. 1988년, 히딩크가 PSV 아인트호벤 감독 시절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귀국하는 브라질의 축구선수 호마리우를 리우데자네이루 공항까지 쫓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히딩크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가 호마리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데려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1999년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그의 호마리우 영입을 구단주가 반대하자 노골적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하고야 마는 열정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눈밖에 난 선수는 앞뒤도 안가리고 과감히 쫓아냈다. 축구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벌룬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발렌시아 트레이너 시절에는 네덜란드 훈련캠프에서 불가리아 출신의 스타플레이어 루보 페네프가 한 밤중에 나이트클럽에 간 사실을 알고 그에게 짐을 싸게 했다. 그가 호텔 프런트 여직원과 데이트를 즐기다 스페인 기자 10명의 눈에 발각돼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6년 네덜란드 팀이 유럽선수권을 앞두고 있을 때 다비즈․클뤼베르트 등 수리남 출신 선수들이 흑인을 기용하지 않는 인종차별자라며 항명하자 히딩크가 다비즈를 팀에서 쫓아낸 사건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그를 다시 중용했고, 그는 골로써 그의 부름에 화답했다.
평소 영어 뿐만 아니라 독일어․스페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도 그의 커다란 무기다. 그는 스페인어를 배운 것도 감독 시절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선수들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필
생년월일:1946년 11월8일
출신지:네덜란드 위시
선수시절:데 그라파샤프(67~70년) PSV 아인트호벤(70~71년)
데 그라파샤프(71~77년촵이상 네덜란드 1부리그), 워싱턴 디플로메츠(76년), 새너제이 얼스퀘이크(77년촵이상 미국 축구리그), NEC 니메가(77~81년), 데 그라파샤프(81~82년촵이상 네덜란드 1부리그)
발렌시아(스페인 프리메가리가, 91~93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95~98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프리메가리가, 98~99년), 한국 국가대표팀(2001년~)
수상경력:네덜란드리그 3년 연속 우승(86~88년, PSV 아인트호벤)
네덜란드축구협회(FA)컵 우승 1회(1988년, PSV 아인트호벤)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88년, PSV 아인트호벤), 도요타컵 우승(99년, 레알 마드리드)
96년 유럽선수권 8강, 98년 프랑스월드컵 4강(이상 네덜란드 축구팀)
한국축구 완성한 카리스마적 원칙주의
그는 한국 대표팀의 선수 선발 과정에서도 원칙을 강조하며 외풍을 잠재우곤 했다.
히딩크는 대한축구협회의 영입 과정 때부터 이미 선수 선발과 훈련 등에 관해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의 선수 선발에 대한 고집과 원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대표팀을 이끌면서 23명의 최종 엔트리를 정하기 까지 히딩크가 대표팀 명단에 올려 실험해본 선수는 무려 63명이나 됐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특히 평가전 성적이 좋지 않자 국내 축구 전문가들은 베스트 11을 정해 전술훈련을 반복하라고 질타성 충고를 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스트 멤버는 통상적인 선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전략에 따라 구성한다고 대꾸하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해 7월에 이미 신진급 선수들을 기용하며 실험하고 있다. 뜻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꾹 참아 달라고 언론에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선수 선발과 관련한 외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히딩크는 자신이 구상하는 축구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들은 과감히 교체했다. 체력적 한계를 갖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대표팀 탈락 가능성을 비치면서 계속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히딩크는 포르투갈전에서 전 경기를 소화해낸 안정환이나 윤정환․홍명보 등을 맨투맨으로 관리하면서 엄청난 긴장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병행하면서 치러진 유럽전훈련 때는 그의 전술훈련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지난해 8월17일, 유럽전지훈련중에 치러진 대(對) 체코 평가전에서 5:0으로 대패하자 국내 언론과 축구 전문가들은 히딩크와 히딩크축구에 대해 사정없는 몰매를 가했다.
히딩크는 한국축구에 열정이 없는 것 같다. 생각부터 바꿔라.
감독이 선수를 모르는데 외국팀을 어떻게 이기는가. 감독 선정이 잘못됐다.
프랑스전에 이어 체코전 대패를 지켜본 국민들도 이런 비판 의견에 일부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히딩크는 의연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전술적으로 좋은 경험을 해 만족하기 때문에 패배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평가전과 병행된 체력강화 훈련도 예정대로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였다. 국내 감독에게 이 정도의 비난과 공격이었다면 벌써 옷을 벗어야 했을 일이었다.
그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영국의 가디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선수들은 강팀을 만나면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내가 깨지더라도 강팀과 맞붙어 보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선수들의 패배의식은 지난 5월말 스코틀랜드-잉글랜드-프랑스와의 평가전을 치르면서 히딩크가 예상했던 대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본선에서 폴란드․미국․포르투갈을 꺾거나 비기면서 선수들은 말 그대로 겁없는 선수들로 돌변했다. 대표팀에 뽑히기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대표적인 히딩크 장학생 김남일은 포르투갈을 꺾은 뒤 이렇게 말했다.
꿈만 같다. 전반 20분까지는 긴장했는데 점차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딩크 감독을 만난 뒤 터프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겼다.
히딩크 통한 한국인들의 조용한 혁명
히딩크가 그의 축구를 완성하기 위해 팀내의 연령서열을 파괴하고 자율경쟁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져온 것은 전통적 가치 속에서 자란 한국선수들에게는 당초 어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표팀 선후배 선수들은 그것을 극복했고 경기 중에서 원할하게 의사교환이 이뤄진다.
히딩크는 지난 1월 북중미 골드컵 때 해외 전지훈련에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를 동행시켰다가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에 부인과 두 아들이 있는 히딩크가(물론 별거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자친구를 공개석상에 불러내고, 전지훈련장까지 데려가는 것은 분명 한국민의 정서에는 맞지 않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170cm에 달하는 수리남 출신 흑인 여성으로 현재 네덜란드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히딩크 감독은 엘리자베스는 애인이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라면서 그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때 히딩크와 언론 사이에는 그의 여자친구에 관한 보도를 두고 험악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국내 언론들은 월드컵이 가까워 오면서 결국 히딩크를 인정하는 쪽으로 갔지만 지난 5월말 한 방송 PD로부터 여자친구와 결혼할 계획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히딩크는 내 사생활일 뿐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면서 질문자를 회견 장소에서 멀리 내쫓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 레퀴프지는 한국팀의 월드컵 승리 이후 히딩크가 한국을 18개월만에 경쟁력이 있는 팀으로 만들기 위해 전통을 뒤흔들었다며 그가 요란을 떨지 않고 한국의 정서를 인정하며 조용한 문화적 혁명을 일으켰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네덜란드라는 개방된 사회에서 살아온 히딩크는 한국의 보수적 문화습관에 대해 소리없는 시위를 펼쳐왔다. 히딩크는 월드컵 기간중에도 한국팀의 경기가 없을 때에는 틈틈이 엘리자베스와 데이트를 즐겼고, 지난 6월16일에는 스페인-아일랜드의 8강전을 함께 관람하는 광경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그의 개방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선수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월드컵 기간중 선수들에게도 지나치지 않으면 성생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의 사생활을 최대한 보장해 주고 있다.
실전이나 전술훈련 과정에서 엄격한 그는 경기장 밖에서는 한국민에 대한 애정어린 행동과 언행으로 화제를 몰고 다닌다.
그들의 순수함이 나를 들뜨게 한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대표팀을 처음 맡았을 때 고사상에서 돼지머리에 돈봉투를 꽃으면서 한국인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선물했다. 또 올초 16강 기원 북한산 등반대회 때는 사우나에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회장과 기자들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연출하면서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지난 6월14일 포르투갈전 승리를 통해 2승1무로 16강을 확정지어 4,700만명의 한국인들을 환희의 바다 속에 빠뜨렸다.
이날 결승골을 터뜨린 박지성은 특유의 골 세레머니를 하며 히딩크의 품 안으로 빨려들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누구라도 그의 넉넉한 품 안에 안기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는 언젠가 영웅이 되는 것은 싫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국인들에게 영웅이 됐다. 히딩크, 그리고 히딩크축구라는 신화도 꽃을 피웠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에 5대0이라는 치욕의 패배를 안겼던 히딩크. 그를 처음 불러올 때 왜,하필 히딩크냐?며 분노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의 이름에 환호하고,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
히딩크는 얼마전 네덜란드 신문과 가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한국축구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전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한국팀의 첫 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낮이가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고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유럽 톱 클라스 선수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강하고 개성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프로라는 의식이 있을 뿐 하나의 팀으로서, 아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로서의 사명감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이란 무대는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선수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무대에서 뛰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실력이 떨어지면 남보다 더한 노력으로 이를 보충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그러한 한국축구의 기본 잠재력은 내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내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한국 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히딩크 語錄
영웅에는 관심없다… 영원히 한국 감독으로 기억되기를 원할 뿐이다.
―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 네덜란드라도 맞붙게 되면 이기겠다.(2000년 12월 취임 기자회견) ―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내가 감독으로 있던 네덜란드에 0-5로 패했을 때 한국팀은 부분적인 전술차원에 문제가 있었다. …스피드와 체력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어느 팀 못지 않았다.(2000년 1월초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부임 직전 인터뷰) ― 한국 선수들은 마치 시종 4,000~5,000rpm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자동차가 계속 같은 속도로만 갈 수는 없다.(2001년 1월 대표팀 감독 취임 후 울산 첫 훈련장)
― 나에게 신사적이라는 평가는 선수들이 규칙과 규율을 지켰을 때는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니다. 규율과 규칙이 나를 여기까지 있게 했다.(2001년 1월 신사적이고 유머가 넘친다는 말에) ― 나는 한국 선수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하나는 유럽의 어떤 선수들보다 한국 선수들은 양발을 모두 잘 쓴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왜 한국 선수들은 볼을 잡기만 하면 그렇게 흥분하는가 하는 것이다.(2001년 3월 어느 사석에서)
― 창피하지 않다.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투쟁심을 더 길러야 한다.(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프랑스에 0-5로 패한 뒤) ― 아직 어떤 선수에게도 특별한 포지션을 정해 준 적 없다(2001년 4월 이집트 4개국대회) ― 신진급 선수들을 기용하며 실험하고 있다. 뜻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꾹 참아 달라(2001년 9월 나이지리아 평가전 때)
― 선수들끼리 형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2001년 12월 나이에 따라 지나치게 서열을 따지면 경기 중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며) ― 킬러 본능을 가진 선수가 필요하다. 이 나이에 내가 그라운드에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2002년 1월24일 북중미골드컵때 약체 쿠바전에서 골이 나오지 않자 답답하다며)
― 엘리자베스는 팀 훈련에 절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가든 그것은 그녀의 프라이버시다.(2002년 1월 미주 전지훈련중 연인 엘리자베스의 동반에 대해) ― 체력과 전술훈련을 해 가는 과정이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 순간의 결과만 보지 말아 달라(2002년 2월 골드컵 최종기자회견) ― 현재 대표팀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50%다. 앞으로 하루에 1%씩 향상시켜 월드컵 개막과 함께 100%를 만들겠다.(2002년 4월9일 D-50일 기자회견)
― 오늘과 같은 상태라면 한국은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를 얕잡아보지만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준비가 돼 있다.(5월16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 4-1 대승후) ― 제대로 하기 위해 어려운 길을 돌아왔다.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 틀리지 않았다.(2002년 5월21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 때)
― 그동안 강팀과의 경기를 통해 한국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오늘 경기에서 한국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행복하다.(5월26일 선전 끝에 프랑스에 2-3으로 패한 뒤) ― 폴란드 수비가 약하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절대 약하지 않다. 예선 때 웨일스․노르웨이 등과 맞서 전력을 다한 경기를 봤어야 그들을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5월29일 기자회견) ― 네덜란드 감독이던 1998년 프랑스대회 때도 대회 최종일까지의 계획을 세워뒀으며 그것은 한국팀을 맡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5월말 경주에서 대표팀 마무리훈련 때)
― 나는 영웅에는 관심이 없다. …영원히 한국 감독으로 기억되기를 원할 뿐이다.(6월3일 폴란드를 이기면 당신은 한국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말에) ― 솔직히 2~3개월 전만 해도 한국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성실했고, 내 훈련 방식을 믿고 따라주었다. 한국선수들의 발전 속도에 스스로 놀랄 정도다. …경기가 계속될수록 발전하는 한국 선수들을 믿었다.(6월14일 포르투갈전 승리후)
― 전국민이 열렬히 응원해 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너무 기쁘다.(6월14일 포르투갈전 승리후) ― 하나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6월15일 16강 진출 관련 기자회견)
어록으로 본 히딩크의 축구 철학
나는 한국의 작은 독재자로 만족한다
역대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은 말을 아꼈다. 아니 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말이 많으면 오히려 욕을 먹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반면 히딩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을 따라가 보면 한국축구의 현주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역시 그는 고수다. 지난 반세기를 지배해온 고정관념에 칼을 들이댔으니 말이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500일 동안의 어록을 정리했다.(편집자)
"한국선수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지금 당장 나무에 올라가라고 지시한다면 그렇게 하겠는가?
-2000년 11월 당시 대한축구협회 가삼현 국제부장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대뜸 가부장에게 질문을 던지며. 가부장이 아마 그럴 것이라고 대답하자 히딩크는 좋은 전통이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한국축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맡을 수 없다. 일단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
-2000년 11월 한국축구팀을 맡아달라는 이야기에
월드컵 유치국 감독이라는 점과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의 진지하고 프로다운 태도에 끌렸다. 한국인들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고 축구협회의 능력도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주변의 아는 분들이 큰 도전이니까 한번 해보라고 권했는데, 물론 최종 결정은 내가 내렸다.
-2000년 12월 한국축구팀을 맡은 동기에 대해
한국선수들이 하나같이 열심히 뛰는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전체적인 사기 투지 근성 등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한국팀의 가장 큰 문제는 전술이다. 공격-미드필드-수비진의 관계설정과 선수들간의 관계수립을 통해 팀의 역량을 최고조로 올리는 일이 중요하다.
-2000년 1월8일 네덜란드에서 한국으로 부임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난 프로다. 그래서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 돈은 다음 문제다. 중요한 것은 축구인으로서 또다른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과 한국 국민과 함께 월드컵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2001년 1월초 한국에 부임하기 전 인터뷰에서
한국축구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전술적인 면이다. 축구감독으로서 일반적인 목표는 90분 동안 통제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이다. 곧 팀을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2001년 1월 한국에 부임하기 전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를 원하나. 머리라도 빡빡 밀어버릴까.
-2000년 12월18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1998년 도요타컵 우승 후 수염을 깎았는데 한국을 월드컵 16강에 진출시킨 뒤엔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고 묻자
나는 직업이 취미다
한국선수들은 마치 시종 4000~5000rpm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계속 같은 속도로만 갈 수는 없다. 패스할 때도 리듬과 템포를 살려 강할 땐 강하게, 약할 땐 약하게 차는 것을 잊지 말아라.
-2001년 1월 울산 훈련장에서
뭐든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국이 월드컵에 많이 나가 인지도는 높지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한 습관을 깨고 싶다.
-2001년 1월 울산 첫 훈련회견에서
내 취미는 음악과 축구다. 남들은 직업이 어떻게 취미일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날 훈련한 내용을 비디오로 분석해 정리하고 다음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2001년 2월 두바이 4개국대회 회견
왜 가운데 길로만 가려고 하느냐. 위험성이 있지만 옆길로 가면 훨씬 더 빠른 길이 있는데, 상대 수비의 압박이 들어오는 곳에 볼을 주는 이유는 뭐냐. 한번 나한테 그 이유를 설명해보라.
-2001년 2월 두바이 4개국대회 훈련 도중 어느 선수가 아무 생각 없이 안일한 패스와 볼터치를 하자
축구의 기본은 기술이지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떤 기술도 먹히지 않는다. 운동장에서는 체력과 스피드가 앞서는 선수가 이길 수밖에 없다.
-2001년 2월 두바이 4개국대회 회견
한국팀의 강점은 운동장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100% 발휘하려는 자세와 볼에 대한 집착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보면 약점도 된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온 힘을 쏟다보면 무리하게 되고 결국 전체 밸런스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는다.
-2001년 2월 두바이 4개국대회 회견
선수나 코칭 스태프에게 똑같이 나누어달라.
-2001년 2월 두바이 4개국대회 아랍에미리트전을 4대1로 이긴 뒤 축구협회 조중연 전무가 격려금을 나눠주겠다고 하자
난 한국선수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하나는 유럽의 어떤 선수들보다 한국선수들은 양발을 모두 잘 쓴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왜 한국선수들은 볼을 잡기만 하면 그렇게 흥분하는가 하는 것이다.
-2001년 3월 어느 사석에서
여론을 수렴하다보면 내 축구철학이 흔들릴 수 있고 전술적인 완성도가 방해받을 수 있다. 나는 오로지 나의 길을 간다.
-2001년 4월 이집트 4개국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 구성에 대해 묻자 언론에 흔들리지 않겠다며
지더라도 가시밭길 걷겠다
한국팀도 세계 최강인 프랑스팀을 누를 수 있다. 프랑스를 존경하지만 결코 두려워하진 않는다.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 첫 대전 프랑스전을 앞두고
창피하지 않다.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선수들은 투쟁심을 더 길러야 한다.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서 프랑스에 0대5로 패한 뒤
반드시 이긴다는 잔인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때론 사고뭉치가 필요한데 아무도 악역을 떠맡지 않는다.
-2001년 8월15일 체코에 0대5로 대패한 뒤 우리 선수들은 너무 몸을 사리고 순진하게 플레이를 하는 등 근성이 부족하다며
머리통을 발로 차버리고 싶다.
-2001년 연인을 대동한 그에게 기자들이 꼬치꼬치 질문을 해대자
선수들끼리 형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
-2001년 12월 강연에서 나이에 따라 지나치게 서열을 따지면 경기중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
최악의 편성은 피했지만 약한 팀이 없다. 그러나 어느 팀도 겁나지 않는다. 어느 팀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2001년 12월1일 조추첨 결과를 두고
축구강국들과 격차를 좁히려면 세계적 강호들과의 대결을 피해서는 안된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시밭길을 걷겠다.
-2001년 12월1일 트루시에 일본감독과의 대담에서
한국선수들은 골문 가까이만 가면 지나치게 흥분한다. 과도하게 흥분하고 체력을 소모하면서 슛을 자주 날리다 보면 힘은 다 빠지고 집중력도 잃게 된다. 이것이 한국팀의 가장 큰 문제다.
-2002년 1월 부임 1년 KBS와의 회견에서
킬러(Killer) 본능을 가진 선수가 필요하다. 이 나이에 내가 그라운드에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2002년 1월24일 북중미 골드컵에서 약체 쿠바를 상대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0대0으로 비기자 골가물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며
엘리자베스는 팀 훈련에 절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선수단과는 함께 밥도 먹지 않을 것이다. 훈련에 관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가든 그녀의 프라이버시다.
-2002년 1월 미주전지 훈련중 연인인 엘리자베스가 선수단의 호텔에 묵거나 경기장에 동행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에
재능있는 선수와 열성적인 지도자가 있어 한국축구의 미래는 밝다. 난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환경 개선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되고 싶다.
-2002년 2월 미국 골드컵과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을 마친 뒤
월드컵 때 한국에 온다면 당신은 따뜻하고 열린 가슴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2002년 3월 유럽전지훈련 중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인정이 많다며
현재 대표팀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50%다. 앞으로 하루에 1%씩 향상시켜 월드컵 개막과 함께 100%로 만들겠다. 6월초 우리 팀의 모든 힘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2002년 4월9일 기자회견에서 월드컵 때까지 조금씩 전체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며
한국이 포르투갈을 5대0, 6대0으로 이길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2002년 4월 한국이 2대0으로 꺾은 핀란드에 포르투갈이 0대3으로 패하자 일부 사람들이 헛된 꿈을 꾼다며
체력적으로 강한 팀이 내가 바라는 한국의 색깔이다.
-2002년 4월10일 D-50 인터뷰 도중 자신이 바라는 한국축구 스타일은 체력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 팀이라며
기본적으로 고종수를 좋아하지만 자신에게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게으르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이동국도 재능있는 선수이지만 스타는 필드에서의 능력이 중요하다. 외부 요인에 의해 스타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2002년 5월1일 D-30 인터뷰에서 고종수와 이동국의 탈락에 대해
신중하지 못한 언론은 사절
신중한 언론은 환영, 신중하지 못한 언론은 사절한다.
-2002년 5월1일 D-30인터뷰에서 최종엔트리 23명 명단을 공식 발표하기 전 일부 언론이 앞질러 보도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안정환과 윤정환은 모두 창조적인 플레이메이커의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다. 안정환에게 진짜 프로라면 외모나 인기 등 경기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라운드에서의 실력으로 승부하라고 경고했고, 그는 내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 윤정환은 소속팀의 2부리그 추락으로 국제수준의 경쟁력 있는 축구를 못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훈련 모습에서 가능성을 읽었다.
-2002년 5월1일 D-30인터뷰에서 안정환 윤정환 발탁 배경을 설명하며
경기에 임할 때는 무조건 이기겠다는 생각만 한다. 다른 경우의 수는 생각 안한다. 한국축구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지만, 개인적인 자리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다. 지금은 오직 월드컵에만 전념해야 할 때다.
-2002년 5월1일 D-30 인터뷰에서 정몽준 회장이 16강에 오르면 히딩크 감독에게 계속 한국팀 감독을 맡기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현재 내 머릿속엔 수백 가지의 주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빼먹는 기자들이 없다. 축구는 창의적인 운동인 만큼 기사도 창의적인 아이템을 가지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기자들이 창의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재미있는 기사를 써서 보냈다면 왜 보스(데스크)가 1면에 안 쓰겠는가?
-2002년 5월 서귀포 훈련 인터뷰에서 오늘 아침 4개 스포츠신문 1면 톱이 모두 야구기사이던데 월드컵이 한 달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월드컵 개최국 한국의 분위기가 이해가 안된다며
베스트 멤버는 통상적인 선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전략에 따라 구성한다.
-2002년 5월16일 스코틀랜드 평가전에서 박지성의 기용에 대해
몇몇 선수는 경기운영에 가속을 주기 위해 후반에 교체 투입해야 한다. 스포츠카에서 기어를 3단 4단 5단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2년 5월16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안정환을 후반에 넣은 이유에 대해
오늘과 같은 상태라면 한국은 월드컵 이후에도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를 얕잡아보지만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준비가 돼 있다.
-2002년 5월16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4대1로 대승한 뒤
K리그는 쓰러지고 있다
한국팀은 월드컵 예선전에서 항상 동남아 약체국들과 경기를 해왔기 때문에 경기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유럽 강팀들과 친선 경기를 통해 한국팀의 경험과 자신감 향상에 노력한 것이 이만한 수준의 팀으로 변했다. 한국보다 기량과 스피드가 빠른 일본은 J리그 팀들에 대한 인기가 높아 축구 발전이 계속됐지만, 한국은 대표팀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정작 밑거름이 돼야할 K리그는 쓰러지고 있다.
-2002년 5월20일자 영국 가디언지와 회견에서
패하면 망신 당할까봐 소극적으로 경기하는 한국선수들을 개선하기 위해 선수 이름을 직접 외워 격려와 독려로 좀더 공격적인 선수들로 개조했다. 정신력과 복종심이 강한 한국선수들은 자신을 전사라고 생각하며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는 책임감이 좋다.
-2002년 5월20일자 영국 가디언지와의 회견에서
지난해 대륙간컵에서 프랑스에 0대5로 진 뒤 곧바로 멕시코 호주에 연승을 거둔 것에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선수들은 망가진 후에도 회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본선을 앞두고 약팀과 붙어서는 효과를 볼 수가 없다. 지더라도 강팀과 붙어 정신적으로 자극을 줘야 한다. 잉글랜드 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한국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을 믿기 때문이다.
-2002년 5월20일 회견에서
잉글랜드가 한국에 패하면 경기에 출전한 11명의 선수는 한국프로축구에서 뛰어야 할 것이다.
-2002년 5월20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외신기자 회견 때 한 기자가 네덜란드대표팀이 1996년 1대4로 잉글랜드에 패한 경기를 꺼내자 불편한 심기로 다른 기자를 바라보며 다른 질문(another question)이라고 말하면서
후반 우리팀은 체력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매섭게 몰아붙였으며 선수들이 이번 경기를 통해 강한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2002년 5월21일 잉글랜드와 1대1로 비긴 뒤
그래도 한국은 D조에서 객관적으로 랭킹 4위다.
-2002년 5월21일 잉글랜드와 1대1로 비긴 뒤 선수들이 지나치게 들뜨면 안된다며
마이크를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찾기를 권합니다.
-2002년 5월23일 어느 외신기자가 나이지리아 출신 애인과 결혼할 거냐고 묻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강팀을 이겨야 산다
그동안 강팀과의 경기를 통해 한국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오늘 경기에서 한국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난 행복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마지막 골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팀의 수준을 말해준다.
-2002년 5월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이 끝난 뒤
놀라운 기량을 보여준 한국선수들을 사랑한다. 외출하는 젊은 선수들이 내 승용차 열쇠를 집어갈 정도로 친해졌다. 그들의 순수함에 반했다.
-2002년 5월26일 네덜란드 드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
그라운드에서 신사는 필요없다. 반칙도 잘하면 전술이다. 기량이 뛰어난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안 보이는 반칙에 능하다.
-2002년 어느 훈련장에서
그는 현대적인 선수다. 특히 후배들에게 마음을 열어놓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주려 했던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가 비록 은퇴를 발표했지만 앞으로 몇 주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선수경력에 왕관 하나를 더하기 바란다.
-2002년 5월29일 황선홍의 은퇴 발표에 대해
한국은 내 훈련 방식에 만족해하고 있다. 월드컵 이후 나의 거취에 관해서는 아직 모른다.
나는 단지 내가 (한국을) 떠나더라도 (한국대표팀이) 내 스타일을 계속 고수하기를 바랄 뿐이다.
-2002년 5월 네덜란드 드 텔라그라프지와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관중들의 응원에 휩싸여 스스로 절제를 못하는 점이 걱정된다. 선수들의 실력에 비해 국민들의 요구가 훨씬 크다. 선수들이 응원에 도취되지 않고 마인드컨트롤할 수 있도록 정신교육을 하고 있다.
-2002년 5월29일 기자들과 인터뷰
최용수는 정말 아프다. 그가 부상에서 회복된다면 더욱 팀을 위해 기여할 것이다. 최용수는 자신에 대한 일부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 무척 화가 나 있다. 최용수는 몸싸움을 사리지 않는 등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다. 난 그가 부상에서 100% 회복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2002년 5월31일 모 스포츠신문이 최용수, 훈련거부로 히딩크에 항명이란 기사를 게재한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스포츠신문 기자는 모두 나가라. 그런 질 떨어진 기자들과는 얘기도 하지 않을 것이며 다음부터 그 신문과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겠다며
선수기용에 있어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베스트11은 의미가 없으며 누가 선발로 뛰게 되더라도 선수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3일 오후 6시부터 부산월드컵경기장에서 있을 최종훈련을 완전히 공개한다.
-2002년 6월2일 회견
한국, 네덜란드에 근접했다
개인 기량 차이만 있을 뿐 체력과 전술적인 측면에선 98프랑스월드컵에서 4위를 차지했던 네덜란드선수들에게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선수들은 내가 지도한 선수들 중 전술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2002년 6월2일 영국 옥타곤 CSIT 인터뷰
흥분된다. 이게 얼마만에 맛보는 느낌인가.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월드컵을 즐겨보자.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했다. 경험도 많이 했다. 우리가 해온 만큼만 플레이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한국선수들은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공격수와 수비수의 구분이 없는 토털사커를 연마해왔다. 우리 선수들이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컨트롤한다면 이길 수 있다. 팬들은 우리가 어떤 결과를 내는지와 상관없이 대회 끝까지 우리를 성원해줄 것으로 믿는다.
-2002년 6월4일 첫 경기인 폴란드전을 앞두고 출사표
난 영웅에는 관심이 없다. 내일을 할 뿐이고 내 일을 좋아할 뿐이다.
-2002년 6월4일 폴란드를 이기면 당신이 한국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말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우리는 경기를 주도했으며 이길 만한 경기를 했다. 우리 선수들과 팬들은 역사적인 첫승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 한국에 있어 이번 월드컵 첫 승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한국팀은 대부분 젊은 선수들로 짜여 있다. 오늘 승리의 감격은 앞으로 이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2002년 6월4일 폴란드에 2대0으로 이긴뒤
얼마전까지만 해도 스포츠기사에만 내 이름이 실렸는데 최근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에서 내 이름이 인용되는 것으로 듣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작은 독재자로 만족한다.
-2002년 6월4일 폴란드에 승리한 뒤 네덜란드 기자들과 한담에서
왜 내가 웃지 않는지 여러분은 궁금할 것이다. 서너 달의 강훈련을 통해 한국팀은 세계축구계에서 상대를 압도할 만한 팀으로 바뀌었다. 마땅히 웃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팀은 5, 6차례의 완벽한 찬스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내가 웃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다.
-2002년 6월10일 미국과 1대1로 비긴 뒤 어느 기자가 왜 오늘은 웃음을 짓지 않느냐고 묻자
포르투갈전은 아주 어렵겠지만 수비에만 치중하는 경기를 하지 않겠다.
-2002년 6월10일 미국과의 경기 후
한국 선수들은 설사 내가 대충 하라고 얘기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팀의 강점은 경기에 뛰는 선수나 그렇지 않은 선수나 모두 서로 돕는다는 사실이다. 오늘 밤은 와인 한잔 마시고 푹 자고 싶다.
히딩크號의 대약진이 가져온 국가적 파급력이 막대하다. 히딩크 리더십은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 구성원들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국가적 리더십이 부재한 시대에 히딩크 리더십과 그 신드롬이 던지는 절실한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편집자>
히딩크 축구는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뒀다. 정상의 팀 포르투갈을 꺾던 날 밤 서울 아파트단지 곳곳에서는 베란다에 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이 귀를 찢었다. 시민들은 아파트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이 일거에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역사이래 어떤 유능한 정치인도 이뤄내지 못했던 국민통합의 위대한 모습이 목격됐다. 그 통합의 중심에는 정치인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닌 국가대표팀 감독 히딩크가 우뚝 서 있었다.
국민들은 모두 네가지 대상에 도취했다. 월드컵과 국가대표 축구팀과 히딩크와 그들 자신에게 흠뻑 취했다.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문화상품 월드컵에서 우리 국민들은 히딩크의 리더십과 대표팀의 놀라운 힘과 기량, 그것으로부터 투사된 엄청난 자신감과 자부심을 발견했다. 리더의 능력이 조직을 바꾼다는 평범한 명제가 지금처럼 극명하게 입증된 적도 없었다. 히딩크처럼 하면 된다 나도 히딩크처럼 할 수 있다 히딩크 같은 인물을 믿고 따르겠다는 국민적 영웅 히딩크 신드롬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대한민국의 2002년 6월은 히딩크공화국이다. 이 순간 시민권력은 히딩크가 장악했다. 시민권력의 집권자는 히딩크이며 국가권력은 그 앞에 온순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 개념에 비춰볼 때 히딩크적 가치야말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해 마지않는 지배적 가치로 승격됐다. 축구장에서만 통했던 가치가 안방으로,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린아이는 거울을 통해 통합된 자아를 처음으로 발견한다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히딩크는 우리의 거울이다. 한 네티즌은 그 통합된 자아를 발견했을 때의 경이감을 이렇게 쓰고 있다.
지식인의 관념적 한국축구 이해
한국팀의 실력에 대한 히딩크의 평가는 정확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세계는 한국팀에 깜짝 놀랄 것이라는 발언을 무심하게 들었다. 선수들의 기를 살리는 발언으로 생각했다. 포르투갈을 꺾을 때 나는 히딩크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자만도 없고 자기비하도 없다. 그의 두뇌 속에는 냉정한 판단력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히딩크 이후에야 우리는 우리 축구와 우리 자신을 알게 됐다.
히딩크는 한국 지식인들의 자기비하적, 관념적 한국축구 이해에 일격을 가했다. 우리 나라의 축구 전문기자들은 개막전 한국의 목표는 16강이 아니라 1승이다. 16강은 과욕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홈경기의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16강이라는 목표는 다소 무리라는 것이 그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축구 칼럼니스트로 전문가에 필적하는 축구 지식을 축적한 숭실대 장원재(문예창작과) 교수의 개막전 발언은 지식인적 한국축구 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국사람으로서 나도 우리 팀이 1승을 올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16강에 올라가는 것은 정의(正義)가 아닙니다. 세계축구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투자한 것도 없고, 더욱이 축구가 생활 속으로 전혀 들어와 있지도 않은, 축구의 산업화가 진행이 안된 상태에서는 16강에 못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더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딩크는 한국 지식인들의 이런 겸손에 대해 한국팀이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장교수의 말처럼 인프라를 구축한 후 성적을 올리는 방법도 있지만 성적을 올린 후 인프라가 뒤따라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비약을 통한 성취, 그 성취가 다시 토대를 구축하는 변증법적 전진이다. 한국은 압축적 경제성장을 통해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올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선거는 항상 똑같지만 월드컵은 항상 새롭다는 말이 회자됐다. 프랑스 정권은 의연한데 프랑스 축구는 몰락했으니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그 경구의 적확함에 감탄하게 된다. 어쨌든 축구 경기는 예측불허의 결과 때문에 더욱 재미있다. 강대국과 약소국가 간의 힘의 관계가 역전되는 환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 환상의 공간, 가상현실 안에 히딩크와 축구대표팀과 우리 국민이 모여 있다.
히딩크는 이래저래 영웅이 됐다. 세계축구의 중심이 다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는 부와 명예를 약속받았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아인트 호벤,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부르고 정몽준 월드컵 조직위원장은 그를 붙잡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할 준비가 돼 있다. 만에 하나 한국에 다시 남는다면 히딩크는 올 12월 정몽준 위원장의 상징적 대선 파트너로서 한국 정치공간에 뜻하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다.
히딩크를 둘러싼 거대한 군중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정치적 변수로 성장했다. 여야 정치권 어디에서도 이 군중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전 승리가 지방선거에 미치는 영향같은 좀스러운(?) 분석에 몰두하고 있는 한 이 거대한 군중의 정치적 함의는 붙잡을 수 없다.
민주당 김성호 의원은 감동을 주는 월드컵, 분노를 야기하는 정치권이라는 말로 작금의 사태를 정리한다. 그것은 또한 국민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할 능력이 없는, 국가적 리더십의 부재를 의미한다.
히딩크의 능력, 그의 리더십은 그래서 더욱 경이롭게 느껴진다. 히딩크를 대통령으로!라는 네티즌들의 구호는 히딩크에 대한 극단적인 열광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경멸이다. 히딩크는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가장 배울 가치가 큰 인물로 급부상했다.히딩크 리더십의 요체는 합리적 카리스마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헌씨는 히딩크의 합리적 카리스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히딩크, 그가 옳았다
안티 히딩크,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지?
히딩크의 능력을 의심했던 사람들, 그의 지도 방식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일단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의 반대가 부분적으로는 옳았을지 모르지만 총체적으로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적절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힘, 그 점이 또한 한국축구를 도약시킨 동력이 됐다.<편집자 주>
히딩크의 한국 대표팀이 고전할 때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고 신랄했다. 히딩크는 일본 트루시에 감독과 종종 비교되는 수모를 겪으며 안티 히딩키스트들과 싸워야 했다. 사실 싸움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히딩크는 자신의 축구 전술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게 목표는 월드컵 본선, 그때 세계를 놀라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진지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각종 평가전에서 부진을 면치 못할 때 언론은 그가 받는 거액의 연봉과 그밖의 초특급 대우를 거론하며 부실한 산출물을 지적했다. 연봉 100백만달러(12억~13억원)와 1박 43만원짜리 롯데호텔 레지덴셜 스위트 룸, 기사 딸린 최신형 그랜저 XG 승용차가 아깝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2월 한 일간지는 히딩크 월드컵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히딩크의 폐부를 찔렀다.
히딩크가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 해도 우리 나라가 월드컵 16강에 진출할 확률은 30%도 안될 것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 나오는 러시안 룻렛 게임도 한번 방아쇠를 당길 때 살 수 있는 확률은 6분의 5다. 그런데 왜 우리는 30%도 안되는 확률에 목숨을 거는가. 2002년이 무슨 축구의 종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끈적한 감정이 묻어난 이 발언은 히딩크에게 쏟아부은 재화의 효용에 대한 회의감의 표시였다. 이 칼럼의 필자는 투입된 재화가 즉각적인 효용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간과했다.
더욱 큰 오류는 히딩크의 리더십을 16강 진출 가능성 30% 정도로밖에는 평가할 수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축구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이제 막 대표팀을 맡은 한 외국인 축구감독의 역량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었겠는가.전문가들 역시 히딩크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8월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참패(5:0)당한 후 몇몇 프로팀 감독들은 히딩크의 능력과 성실성에 불신감을 표시했다. 히딩크는 열정도, 안목도 없는 축구지도자로 내몰렸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같다.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J감독)
감독이 한국선수를 모르는데 외국팀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감독 선정이 잘못됐다. 대표팀이 겪고 있는 잇따른 실패는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의 실력이나 수준에 맞는 전술을 구사하기보다 자기의 전술에 선수들을 맞추려는 데서 생기는 불협화음이다.(K감독)
국내 가용자원은 뻔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선수 테스트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또 다른 K감독)
공격이든 수비든 뭐 이거다 싶은 것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되는 대로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C감독)
한마디로 당시 축구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팀을 월드컵까지 끌고 가는 것은 무리라면서 히딩크의 국가대표팀을 평가절하했다. 과거 국가 대표팀을 이끌었던 거의 모든 감독들이 히딩크의 지도방식을 폄하하고 질책했다.
월드컵에 열광하는 시민들에게 히딩크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정보 독점으로 카리스마 구축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최용수와 황선홍은 축구장 한번 못 밟아 봤다. 만약 이전의 감독이었다면 선수들은 항명하거나 캠프를 이탈했을 것이다. 히딩크의 카리스마는 기자가 보는 앞에서 선수의 뺨을 때리는 박종환 감독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설득적 동의를 창출해 내는 합리적 권위다.
대표팀의 훈련 시간 같은 사소한 사안도 히딩크가 입밖에 내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장 오늘의 오후 훈련이 몇시에 시작하는지는 점심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경기 당일 출전 선수 명단 같은 고급정보는 더욱이 알 도리가 없다. 권력의 원천이 되는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는 합리적 카리스마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 히딩크의 생각이었다.
히딩크의 카리스마 구축과 그것을 통한 조직 장악은 매우 신속했다.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발탁해 고참과 경쟁시키고 그런 경쟁심을 통해 경기력을 향상시켰다. 정보 독점을 통해 말의 무게를 더했고 상호 경쟁심을 유발해 팀의 긴장을 늦추지 않은 것은 합리적 카리스마의 전형적인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히딩크 조련술에 각 기업이 관심을 갖는 이유도 그 무한경쟁의 선수 관리 시스템 때문이다. 경쟁이야말로 선수들의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실력을 배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지나친 경쟁심은 선수들의 몸을 경직시킨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지만 히딩크는 이런 비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지난 6월10일 보고서 히딩크 리더십의 교훈을 펴낸 삼성경제연구소 강한수 연구원은 히딩크의 합리적 카리스마를 꿋꿋함과 소신(hardiness), 공정성(impartiality), 가치의 공유(value sharing)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꿋꿋함과 소신이야말로 모든 탁월한 지도자의 덕성이지만 히딩크야말로 그런 점에서 소신의 백미(白眉)를 보여주고 있다. 월드컵 개최 직전 네덜란드 신문 데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히딩크는 이렇게 말했다.
준비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나는 수용할 자세가 돼 있다. 당신들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6월을 기다려왔다. 지금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우리를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공정성이야말로 히딩크 축구의 핵심이자 히딩크가 남긴 교훈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히딩크는 부임할 때 선수 선발에 관한 한 전권을 행사한다는 확약을 받았고, 학연과 지연 등 과거 한국팀 선수 선발의 고질적 병폐를 완전히 뿌리뽑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협회와 매스컴의 눈치를 보며 선수를 선발했던 차범근 감독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히딩크가 발굴한 선수가 송종국․김남일․박지성․최태욱․이영표 등 젊은 엘리트들이다.
가치의 공유는 히딩크의 성숙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항목이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신뢰의 가치를 선수들과 함께 공유했다. 축구 전술과 관련해 히딩크가 선수들에게 제시한 가치는 ▷창의성에 바탕을 둔 생각하는 축구 ▷90분간 모든 선수가 적진을 압박(press)하고 주도권을 잡는(dominate) 공격 축구였다.각 포지션의 역할과 전술을 이해시키고 선수들마다 어떤 포지션이라도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기응변, 창조적 능력의 배양과 함께 월드컵 경기에서 분명하게 보여준 한국팀의 강점이다. 어떤 후속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듯한 선수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후발 주자의 숙명
하나도 잘 못하면서 두 개, 세 개의 다른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히딩크는 하나를 잘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 그것이 후발 주자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유상철․박지성․송종국․김남일 등 탁월한 멀티플레이어들은 히딩크의 이런 철학에 의해 더욱 성장했다.
압도한다(dominate)는 말은 히딩크가 가장 높은 빈도수로 사용한 단어 중 하나다.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인터뷰 때는 거의 예외없이 이 말이 등장했다. press and dominate라는 공유 가치가 극명하게 드러난 경기는 조 예선 포르투갈전 때다. 비기기 위한 작전을 하지 않겠다는 경기전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고 압박과 압도라는 공격형 축구의 전개는 경기장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활력과 자신감으로 전이(轉移)됐다.
글로벌과 로컬을 접목한 히딩크식 축구의 한국적 변용은 프랑스 축구의 일본화에 성공한 트루시에 감독의 용병술과 정확히 조응한다. 히딩크는 한국팀에 피구나 지단 같은 탁월한 플레이메이커가 없고 남미 선수와 같은 개인기가 갖춰져 있지 않음을 간파했다.
히딩크가 고민 끝에 찾아낸 한국축구의 활로는 투쟁심과 체력, 그리고 스피드였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헌씨는 한국 고유의 투쟁심이란 모든 새로운 공간을 지배하기 위해 한명 한명이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영역을 고수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투쟁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고 그래서 저 유명한 히딩크식 체력관리 프로그램, 한국 선수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지독한 체력훈련이 과학적으로 실시됐다.
히딩크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CEO의 자질로, 정치적 리더의 리더십으로, 교육현장의 교수법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펀더멘틀(기본과 체력)을 중시하며 장기적인 비전을 갖춘 리더, 합리적인 카리스마와 혁신(innovation)을 동시에 갖춘 리더십이 히딩크의 얼굴과 오버랩되어 전파되고 있다.
히딩크 리더십이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히딩크식 리더십은 리더십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잘 꾸려진 하나의 아름다운 패키지라고 볼 수 있다.
이 패키지의 핵심은 그 실행력에 있다. 예컨대 혁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 히딩크 리더십의 본질이다. 자유기업원 홍재영 연구위원이 정의한 히딩크의 실천적 리더십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히딩크식 리더십은 조직이론이나 경영사례 연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를 시종일관 변함없이 실천해 내고 그 결과를 기다려온 히딩크의 뚝심과 의지가 다른 점이다. 히딩크는 이제 바람직한 리더십의 전범이 된 것이 분명하다.
히딩크가 실력 있는 축구지도자라는 사실 이상으로 그의 업적과 리더십을 과장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도 있다. 히딩크에 대한 그 모든 열광적인 논의들이 사실은 히딩크를 빙자해 평소에 하고 싶은 얘기를 토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축구광 수학교수 강석진(한국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씨의 말은 그런 측면에서 경청할 만하다.히딩크는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발독재자처럼, 그리고 가부장처럼 행동한다. 그가 우리 나라의 학연과 지연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페어백 코치를 비롯하여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속해 있는 네트워크 안에서 선택한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력 있는 축구 지도자라는 평범한 사실이 아닐까. 한 축구 지도자가 어느 누구보다 더욱 성공하는 것은 리더십의 유형을 잘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리더십의 깊이와 완성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히딩크와 선수들의 金剛經적 결합
히딩크 리더십이 한국축구에 성공적으로 접목될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와 대표팀 선수들이 인간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이 한없이 착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흘러넘치며 순수한 열정으로 국가적 책임을 기꺼이 떠안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선수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선수들 역시 절대적인 존경심과 아울러 히딩크 감독을 할배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감독과 선수가 화학적으로 결합해 금강경적 의미로 집착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일으키는 경지에 이른 한국 대표팀은 구체적인 성적을 뛰어넘는 엄청난 자신감의 시너지를 국민에게 심어줬다.
일본열도에 부는 트루시에 열풍
고이즈미에게 한수 가르친 트루시에
개혁을 공약하고 실천하지 못한 고이즈미, 개혁을 설계하고 완성한 트루시에. 트루시에로 인해 살아난 일본축구가 암울한 일본정치, 회색빛 일본경제에 희망의 빛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편집자 주>
트루시에는 일본팀 경기 시간 내내 아주 빠른 속도로 껌을 씹었다. 껌을 씹는 표정이나 태도가 얼마나 야무진지 얄미운 생각이 들 정도다. 껌 씹는 표정만 봐도 트루시에의 성격의 반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트루시에는 껌 씹는 태도 이상으로 야무지고 부지런하며 근성이 있는 감독이다.
한 네티즌은 트루시에를 경멸하며 인터넷에 이런 글을 남겼다.트루시에는 경기 끝나고 지단한테 사인 받으러 가고, 히딩크는 경기 끝나고 피구가 안으러 온다.
그러나 트루시에가 일본팬들에게 받은 그런 비난과 모멸은 이번 조 예선 3경기를 통해 완벽하게 해소됐다.
필립 트루시에, 그는 냉혈한 승부사다. 이제는 일본 축구의 신화를 일구고 일본 국민의 영웅이 됐다. 러시아전이 끝나고 일본 대표팀의 감독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해 일본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그날밤 일본 전역에서는 그의 이름이 메아리쳤다.
특히 러시아전이 열렸던 요코하마(橫) 중심가 사쿠라키초역과 요코하마역 주변에 몰렸던 젊은이들은 토루시에 닛폰(트루시에 일본), 나카야마 닛폰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트루시에의 과감한 지도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우유부단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트루시에의 탁월한 리더십부터 살펴보자. 트루시에에게 명성이나 전력(前歷)은 선수 선발이나 기용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일본 최고의 스타 나카다에게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기적인 선수는 결코 월드컵에서 뛸 수 없다며 굴복을 종용했던 그다.
벨기에․러시아와의 1, 2차전에서 연속골을 작렬시킨 이나모토가 튀니지와의 3차전에서 부진하자 곧바로 교체해 버렸다. 이나모토는 이날 자신이 또 골을 넣겠다는 욕심에 무리한 플레이를 계속했고 패스나 돌파는 자주 끊겼다. 미우라 카즈요시와 나카무라 순스케를 대표팀에서 제외했을 때 일본 축구팬들은 흥분했다. 팬들과 언론의 강한 비판에 직면한 그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2승1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자 일본 언론과 축구팬들은 그의 결단력 있는 용병술과 리더십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러시아전을 관전했던 고이즈미는 이날 트루시에의 리더십과 자신의 실패한 개혁을 곰곰이 생각해 봤을지 모른다. 2001년 6월 발표된 고이즈미 개혁의 골자는 ▷2~3년내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신규 국채 발행을 30조엔 이내로 제한하는 재정개혁, ▷방만한 공기업의 통폐합 또는 민영화, ▷우편 관련업 민영화 등으로 요약된다.
고이즈미의 개혁정책은 올초 다나카 마키코 당시일본 외상의 경질에서부터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다나카는 올 1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부흥회의에 일본의 비정부기구(NGO)가 참석하지 못한 것은 스즈키 의원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스즈키 의원과 다나카 외상을 관련 업무에서 동시에 물러나게 한 것이 다나카 경질의 배경이다.
간결하고 힘있는 리더십
개혁의 상징 다나카가 물러나자 하시모토 류타로전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의 주류 파벌 정치인들은 고이즈미 개혁에 본격적으로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개혁안 자체의 모순도 있었지만 고이즈미의 무기력한 인사와 개혁 추진 과정의 과단성 부족은 트루시에 감독의 간결하고 힘있는 리더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국 정치권의 부패, 정실인사, 비전의 결여가 히딩크 리더십에 대조가 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어려운 일을 트루시에는 해냈고 고이즈미는 주저앉았다.
권력 내부의 압력에 굴복해 다나카를 경질한 후 개혁 저항세력에 걷잡을 수 없이 밀려버린 고이즈미는 트루시에의 소신의 리더십, 책임의 리더십으로부터 영감과 교훈을 얻어야 할지 모른다.
트루시에에게는 의외로 덕장의 이미지가 있다. 그는 대표선수로서의 최고 덕목은 인간성이라는 지론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그는 또한 세계적 축구의 흐름과 일본축구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지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른바 축구에서의 세계적 보편성과 로컬리즘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다. 집단으로서 완벽하게 기능하는 조직을 만든다는 트루시에의 전술 목표는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일본축구를 연구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본이다. 트루시에는 히딩크와 마찬가지로 당찬 포부와 강한 자신감을 리더십의 요체로 삼고 있다.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컵 대회에서 일본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트루시에는 월드사커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일월드컵의 우승후보로 일본팀을 거론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1958년 월드컵에서 주최국 스웨덴의 결승 진출을 예견했던 사람은 없었다면서 1%의 가능성이라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감독의 임무라고 말했다.
히딩크가 한국 선수들의 순수한 열정을 찬양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트루시에는 세계적인 축제인 월드컵에서는 꿈을 키우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모두 위대한 감독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고 했던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말은 한․일 두 월드컵 대표팀 감독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리더십과 정확하게 조응하고 있다
정밀분석․대표팀을 무쇠로 바꾼 체력강화 프로그램의 비밀
한국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90분 내내 미드필드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구사하는 선진축구를 선보여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압박축구는 히딩크 감독의 마지막 카드였던 체력강화 프로그램의 결과 가능했다. 히딩크 감독은 어떻게 단기간 내에 대표팀의 체력수준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거스 히딩크(56)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한국 지휘봉을 잡은 지난 2000년 12월 당시 한국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 시드니올림픽 예선탈락, 아시안컵 결승 진출 실패, 세계청소년대회 참가 좌절 등 좌초 위기에 빠진 한국축구를 살려낼 구세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히딩크 감독은 1년6개월간 한국축구의 체질개선은 물론 이후 한국축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바로 체력과 스피드였다.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처방이었지만 한국축구는 이를 무기로 2002년 월드컵에서 세계를 놀라게하고 말았다.
히딩크 감독은 왜 한국축구의 대안으로 체력과 스피드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2002년 월드컵에서 나타난 세계축구의 흐름 속에서 체력과 스피드라는 선택은 얼마나 유용했나? 만년 축구 약소국이던 한국이 히딩크 감독의 조련을 받았던 1년6개월을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 최근 세계 강호들과의 대결을 통해 보여준 경기력과 전술을 통해 한국축구가 또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본다.
히딩크 감독의 새로운 진단
히딩크 감독은 부임후 곧바로 치른 홍콩칼스버그컵(1월)과 두바이4개국대회(2월)를 마친 뒤 한국축구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깨는 분석을 내놔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본 뒤 기술은 매우 좋다. 하지만 체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동안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논할 때 체력만 앞세운 단순한 축구, 선수들의 기술력이 떨어지는 둔탁한 축구라고 지적해 오지 않았던가.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의 체력과 스피드라는 진단을 내렸을 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당시 잇따른 패배로 중병을 앓고 있던 한국축구에 대한 처방이 고작 체력과 스피드라니…. 이런 진단이라면 국내 지도자 누구든 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축구가 강점으로 내세우던 체력은 아시아권에서나 통할 수 있는 것이고 세계 수준의 선수들과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스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스피드라고 하면 100m 주파 기록을 따지지만 축구에서는 이와는 별개의 문제다. 축구에서의 스피드는 선수들의 순간 돌파력과 빠른 패스 타이밍, 꾸준히 빠른 템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과거 한국축구의 답답함은 바로 이같은 현대축구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템포의 강약 없는 밋밋한 축구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후 과감히 한국축구의 기존 관념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우선 새로운 선수 선발을 통해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히딩크 감독은 취임사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필립 코쿠(31․스페인 바르셀로나) 같은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코쿠가 누구인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막 주전 자리를 꿰찼던 무명 선수 코쿠는 히딩크 감독에 의해 전격 발탁돼 세계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로 거듭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3, 4위전까지 7경기를 뛰는 동안 최전방 공격수에서 수비수까지 3~4개 포지션을 소화하며 오렌지 군단의 20년만의 4강 진출을 견인한다.
월드컵까지 꾸준히 성장해온 송종국(23)․김남일(25)․이영표(25)․박지성(21) 등이 바로 히딩크 감독이 성장시킨 제2의 필립 코쿠라고 볼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새로운 팀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 그리기에 나선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히딩크 감독은 기술(Technique)․통찰력(Insight)․인격(Personality)․스피드(Speed), 줄여 말하면 TIPS, 즉 네덜란드의 명문 축구 클럽인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축구철학을 바탕으로 선수 선발과 함께 강팀 만들기에 돌입한다.
한편 히딩크 감독은 지난해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와의 예선 1차전과 8월 체코와의 원정 평가전에서 0-5 패배의 치욕을 겪으며 여론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히딩크의 한국식 이름은 오대영이라는 비아냥과 함께 히딩크 무용론이 들끓기 시작했지만 히딩크 감독 자신은 여유만만했다. 대패를 당한 뒤에도 좋은 경험을 했다. 경기를 치를 때마다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변명처럼만 보였다. 대패의 치욕은 히딩크 감독의 한국 선수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창조를 위한 틀 깨기
프랑스전에서 0-5 대패한 뒤 히딩크 감독을 놀라게 한 두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따뜻한 애정의 한국관중과 선수들의 결연한 모습이었다. 솔직히 히딩크 감독은 대패 직후 음료수병이나 오물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한국 관중들은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 주는 것 아닌가.
다음날 회복훈련에 나선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선수들의 훈련 태도는 전날 대패의 후유증보다 멕시코전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샘솟고 있던 것이다. 일종의 패배감에 머리가 복잡하던 히딩크 감독은 이때 이런 선수들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좀더 세계의 벽에 부딪쳐 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스코틀랜드․잉글랜드․프랑스와의 세차례 평가전에서 대패를 우려하는 여론에 대해 한국 선수들은 정신적인 회복력(mental recovery power)이 뛰어나 대패당한다 해도 24시간 안에 정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자신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때 히딩크 감독은 유럽의 강호인 프랑스와 체코에 맞서 수비 위주의 전술보다 맞불작전(tit fot tat)을 통해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발견하려 했다. 히딩크 감독은 9월부터 수비에 초점을 맞춘 블록축구(삼각형 형태의 블록을 정해 두고 자신의 위치에서 상대를 수비하는 것)를 도입한다. 이때부터 대표팀의 수비 조직력은 차츰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고 11월 크로아티아와의 두차례 평가전에서 1승1무를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실패는 반보 전진이다
하지만 또 한번의 길고 긴 위기가 찾아왔다. 북중미골드컵에 나선 대표팀이 극심한 골결정력 부족과 전력 약화를 보이며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수들의 강도높은 체력훈련을 지시했다. 경기 전날에도 쉼없이 진행된 체력훈련으로 비난의 표적이 됐지만 히딩크 감독은 굽힐 줄 몰랐다. 이때 히딩크 감독이 체력훈련을 선택한 것은 선수들에 대한 선전포고 성격이 짙었다. 히딩크 감독은 지난해 11월 선수들 각자에게 부족한 개인훈련을 지시했는데 이를 지킨 선수들이 거의 없었던 것. 히딩크 감독은 이때 전술훈련과 함께 선수들의 체력을 톱클라스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때 평가전의 승패는 히딩크 감독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북중미골드컵에서 2무3패(승부차기승 포함)로 4위에 그친 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건너가서도 당일 선수들을 해변에 모아놓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지치도록 훈련을 강행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수들은 감독의 명령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도 1-2로 패한 대표팀에 대한 믿음은 사그라들기만 했고, 그토록 염원하던 16강 진출은 요원해 보였다. 16강 진출보다 1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현실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위기감 속에 떠난 유럽 전지훈련에서 히딩크 감독은 어느날 숙소인 하얏트 리젠시 라망가 호텔 1층 룸으로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이 자리에서 히딩크 감독은 팀 만들기라는 제목의 파워포인트 화면을 보여주며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피지컬 트레이너로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하이옌 레이몬드(31)가 투입됐다. 히딩크 감독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 자리에서 2001년 1월 부임 이후 선수 선발과 팀 만들기를 병행해 왔고 9월까지 선수들에 대한 파악을 끝낸 뒤 올 1월까지 수비조직력 가다듬기에 나섰다고 밝히고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체력강화훈련을 통해 월드컵에 대비하겠다는 2002년 월드컵에서 요구하는 체력을 만들기 위한 구상(To meet the physic al demand of 2002 World Cup)을 밝힌다.
마침내 꺼내든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
히딩크 감독이 밝힌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골자는 이렇다. 현대축구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이 30초 단위로 이뤄지는 데 비해 반응속도가 느린 선수들의 경우 1분 단위로 이뤄진다는 것. 즉, 한국 선수들은 움직임의 순간집중력을 늘려야 하고(improve the explosiveness of their actions) 움직임 간의 회복시간을 줄여야 한다(decrease recovery time between the those actions)는 것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이 자리에서 월드컵에 나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빠른 템포의 경기에 적응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선수들은 순간폭발력이 있는 움직임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안정환․윤정환 등 테크니션들을 중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이같은 개념을 사용해 빠른 템포의 경기에서 버틸 체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은 아홉단계(block)의 트레이닝과 여섯번의 체력테스트, 여덟차례의 평가전을 통해 완성된다는 구체적인 실천계획도 소개했다.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은 단계별로 3일을 주기로 하되 경기 전후 2일씩은 체력훈련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즉, 1주일에 3일 동안만 체력훈련을 집중하고 여섯차례 체력테스트를 통해 선수들의 발전상황을 체크하겠다는 것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체력테스트와 평가전 자체도 강도 높은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판단했다.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내용에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모든 훈련을 폭발적인 순발력과 회복 능력을 늘리는 동시에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순간폭발력을 키우는 것은 10~15m를 달리고 30초 휴식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휴식시간을 10초 내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예를 들어 9대9 미니게임의 경우는 15분 경기 1분 휴식으로 시작해서 라운드마다 경기 시간을 1분씩 늘리는 대신 휴식시간은 10초씩 줄여가면서 훈련을 진행한다. 이때는 히딩크 감독의 구상을 펼쳐놓고 선수들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체크하는 전술훈련을 병행하게 된다.
3분간 경기를 치른 뒤 휴식시간을 3분에서 1분으로 줄여나가는 3대3, 4대4 미니게임은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절정이다. 좁은 공간에서 2명의 골키퍼를 제외한 6~8명의 선수가 뛰다 보니 회복시간 없이 줄기차게 움직여야만 한다. 히딩크 감독은 이 훈련을 통해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즉 자신이 뚫리면 곧바로 골로 연결될 수 있다는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기 시간을 6분에서 8분까지 늘리는 동시에 휴식시간을 5분에서 2분으로 줄여나가며 회복 시간을 유지하는 훈련을 추가하기도 했다.
체력테스트는 일반인들에게도 각종 보도를 통해 소개된 셔틀런(20m 달리기)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훈련은 20m의 거리를 시속 10㎞로 3~4차례 반복한 뒤 1㎞씩 속도를 높여 순간집중력을 기르는 동시에 회복속도를 5초에서부터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다. 속도가 점차 높아지다 보니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선수는 자동탈락하는 시스템이다.
출발과 도착 때는 삑소리가 난다고 해서 선수들 사이에서는 일명 삑삑이로 불리는데, 선수들은 이 테스트를 몹시 부담스러워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마치 수능고사를 보듯 수치로 기록되는 성적을 받아들기 때문에 부담이 심했던 것. 스페인 전지훈련에서 실시한 체력테스트에서는 9개월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홍명보가 체력이 약하다는 지적을 불식시키기 위해 악바리 정신을 발휘하며 합격점인 98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셔틀런의 형식은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절대적인 수치, 즉 어느 선수가 얼마나 많은 수치를 기록하느냐를 재는 것으로 이천수는 체력왕 등의 기사는 바로 이런 테스트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하나는 모든 선수들이 똑같이 67회를 달린 뒤 회복속도를 재는 것이다. 이때는 가슴에 심박측정기를 달고 뛰는데 67회를 뛴 뒤 평상시 심박수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는 것이다. 전자의 것이 순간폭발력을 재는 것이라면 후자는 회복속도가 얼마나 향상됐는지를 측정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지난해부터 여섯차례 실시한 셔틀런에서는 이천수․조병국․차두리 등의 순간폭발력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고 회복속도는 히딩크 감독의 X파일에만 저장돼 있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5월 제주 서귀포에서 실시한 셔틀런은 두가지 훈련을 병행하기도 했다.
이같은 방법은 기존의 체력훈련과는 차원이 틀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력훈련이라고 하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강도 높은 훈련을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은 축구에 필요한 근력과 지구력 등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를 보고 있는 이영표는 훈련을 할 때는 그다지 힘든 것을 모르지만 운동강도는 어느 훈련보다 세다고 말한다.
히딩크 감독은 5월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마친 며칠 뒤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과거 네덜란드나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보다 훌륭한 체력을 갖게 됐다고 자신했다. 황선홍․홍명보 등도 유럽 선수들의 평균치인 120회를 훌쩍 넘겼고, 차두리는 무려 151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은 단시간 내에 선수들의 체력이 몰라보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이에 대해 월드컵 의료지원팀장인 나영무 일산백병원 스포츠의학분과 전문의는 선수들이 집중력과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향상될 수 있다며 2~3개월 집중된 훈련이 오히려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왜 3월부터 실시했나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발전 상황을 기술, 전술, 체력, 정신력 등 4가지 항목으로 나눠 100점 만점으로 기록해 왔다. 체력의 경우는 스피드․파워․인내력 등 세가지로 다시 세분화되는데 2월 말에는 스피드 80점, 파워 50점, 인내력 60점에 머무르던 것이 3월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실시한 이후 5월 말까지 모두 100점에 근접하며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성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도 이같은 훈련방식을 택해 본선에서 한국전(5-0승), 유고와의 16강전(2-1승),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2-1승), 브라질과의 준결승전(1-1)에서 올린 대부분의 득점이 상대의 피로가 누적된 후반에 집중시켰다. 히딩크 감독으로서는 신체조건이나 기술면에서 유럽과 남미 선수들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한국 선수들로서는 체력과 스피드가 최선의 대안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이 이번 월드컵 예선 3경기에서 터뜨린 4골 중 3골을 후반에 집중시키며 2승1무로 조1위에 오른 것은 히딩크 감독이 선택한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의 효과를 100% 입증한 것이다.
단시간 동안 실시한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성공한 데는 네덜란드에서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시켜온 체계적인 프로그램이었다는 것도 이유지만 히딩크 감독의 강력한 지도력과 무엇보다 선수들 스스로 하겠다는 의지와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이들의 배우는 자세와 속도가 놀랍다고 칭찬하는 데는 한국 선수들만의 진지함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있던 기자들은 왜 이같은 프로그램을 3월에서야 시작하는지 히딩크 감독에게 질문했다. 히딩크 감독의 답은 명쾌했다. 3월 이전까지의 대표팀 훈련은 단지 경기에 맞춰 며칠 전에 소집되다 보니 이같은 프로그램을 수행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 대한축구협회가 히딩크 감독을 영입할 당시 조건으로 피지컬 트레이너를 대동할 것을 요구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거절한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였다.
히딩크 감독은 3월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바로 이때가 국내파․해외파가 모일 수 있는 첫번째 기회였고 장기 합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축구대표팀에서는 부상 경계령이 내려져 있을 만큼 부상 선수가 많았는데 히딩크 감독은 파워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약한 부위 주위 근육을 강화시켜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부가적인 효과도 노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30․레알 마드리드)으로 대표되는 공격형 미드필더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이전까지 스트라이커의 골결정력에만 의존했던 세계축구가 점차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가 좁아지다보니 밀집지역 내에서 볼을 창의적으로 배급해 줄 수 있는 선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일명 유로2000)에서는 유럽의 힘과 조직력, 남미의 기술이 합치된 퓨전축구의 흐름을 보였다.
90분 동안 쉼없이 전개되는 빠른 템포의 경기는 2002년 월드컵에서도 이어졌고, 특히 강팀들을 상대 승리하기 위한 선수비 후역습을 위한 압박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이렇다 보니 빠른 템포에서 움직임을 지속하고 쉼없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스피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판단은 옳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나타난 세계축구의 흐름을 보더라도 체력과 스피드 없이는 90분간 경기를 주도할 수 없게 됐다. 이같은 의미에서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의 대안으로 삼은 체력과 스피드의 선택은 놀라운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히딩크 효과는 지속돼야 한다
실패는 혐의만으로도 비난받지만 성공은 모든 시비를 잠재우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다. 1년반 동안 한국축구의 최대 뉴스메이커였던 히딩크 감독도 단지 영웅으로 기억하기보다 그가 남긴 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이제는 히딩크 감독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 외에 히딩크 감독이 그동안 추진해온 전략과 전술, 세계축구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과학적인 분석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냉정히 정리해야 할 때다. 최고의 족집게 과외 강사였던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에 던져줬던 갇혀 있는 새는 날지 못한다는 진리를 되새겨 옛 전략으로는 일류 팀이 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좀더 빠르고 정확하게, 좀더 예측불가능하게 흘러가고 있는 세계축구의 흐름에 한국축구가 발맞춰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히딩크 예언:『영광스러운 이별이 될 수도, 불명예스러운 퇴진이 될 수도 있을 것. 월드컵에서 한국은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 모든 것은 그때에 알 게 될 것이다』
『히딩크 혼자서 드라마를 이끌었다』
6개월 전, 한 기자가 히딩크 감독에게 질문했다. 작년 12월17일, 한국 축구팀의 2001년 한 해를 결산하는 기자회견장에서다. 장소는 대한축구협회 5층 회의실.
『16강에 진출한다고 확신했는데, 어떤 근거에 의해 그런 말을 했고, 16강에 가기 위해서 어떤 팀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나?』
히딩크 감독이 운을 뗐다.
『스포츠가 계산대로 되는 것이라면 나도 좋겠다. 특히 축구는 의외성이 많아 예측이 불가능하고 계산도 불가능하다』
그런 다음 『음』 하며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계산법을 설명했다.
『첫 경기 폴란드에 이기고 3점, 미국에 비기고 1점, 포르투갈에 비기면 1점, 합이 5점이네』
1승2무면 한국팀은 16강 진출이 가능하다. 한국이 6월14일 포르투갈 전에서 1대0으로 이겨, 그의 예측은 다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6개월 전에, 6개월 후를 계산하고 있었다.
한국이 월드컵 진출 사상 48년 만의 첫 승리와 첫 16강 진출이란 쾌거를 이룬 데 대해 축구전문 월간지 「축구 매니아」 취재부장 魚元慶(어원경촵39)씨는 『히딩크 감독 혼자서 드라마를 이끌어 갔다』고 말했다.
MBC TV 축구해설가 許丁茂씨는 『히딩크 감독은 공부를 많이 하고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큰 대회를 치른 경험이 풍부하며 승부욕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SBS TV 축구해설가 辛文善씨는 『한국 축구에 선진 축구를 접목시킨 분으로 고집이 세다』고 평했다.
서른여섯 살까지 선수 생활
히딩크 감독은 1946년생으로 올해 쉰여덟이다. 그는 독일과 국경 도시인 네덜란드 두틴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축구 선수이고, 여섯 형제 중 세 명이 축구 선수인 축구 집안이었다. 히딩크는 스물한 살 때인 1967년 네덜란드 프로 축구 1부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잠시 국가 대표 선수에 뽑히기는 했으나 이름을 날리는 유명 선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20代엔 네덜란드 국내 프로 리그에서 뛰다가 서른이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의 디플로머츠, 산호세의 어스퀘이크 팀에서 활약했다. 그는 서른여섯이 되던 1982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그 해부터 그가 선수 생활을 처음 시작한 네덜란드 「더 호라프샤프」 클럽의 코치로 발탁돼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84년에는 네덜란드 1부 리그 소속인 「PSV 아인트호번」 팀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許丁茂씨가 네덜란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팀이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6년 동안 히딩크 지휘下의 「PSV 아인트호번」은 네덜란드 1부 리그에서 4連覇(1985~1989년)란 위업을 달성했다. 1988년에는 네덜란드 리그와 FA(축구협회)컵, 유럽 최고를 가리는 유럽 챔피언스 리그 등 3개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1991년에는 약체로 평가받던 스페인 발렌시아 팀의 감독을 맡아 부임 첫 시즌과 다음 시즌에 연속해서 이 팀을 4위로 끌어올렸다. 1995년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면서 그의 축구 인생은 절정에 올랐다.
시련도 없지 않았다. 1996년 영국에서 열린 「유로 96」 대회는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으로 맞이한 첫 국제대회였다. 이 대회를 앞두고 히딩크는 『감독이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고 주장한 미들필더 에드가 다비츠 선수를 대표팀에서 방출, 선수들과 불편한 관계에 처했다.
이 대회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되었던 네덜란드는 개최국 잉글랜드와 조별 리그전에서 4대1로 패하고 겨우 8강에 진출했으나 프랑스와 승부차기 끝에 패배,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성적 부진에 따른 질책 못지않게 감독으로서의 리더십에 그는 큰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비록 브라질에 패하기는 했지만 네덜란드를 4강에 진출시켜 1996년의 부진을 씻었다는 평을 받았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그의 네덜란드 팀은 한국을 5대0으로 대파했다.
청바지 차림에 한국 땅 밟아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모여 있는 명문 구단이다.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히딩크는 1998년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기용되었다. 그 해 레알 마드리드는 도요타컵(유럽과 남미 클럽 간의 대항전) 대회에서는 우승했으나,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 머물러 히딩크는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1999년 시즌 초반에 레알 마드리드가 3連敗를 기록하자 히딩크는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그는 근 1년을 쉬었다. 그후 스페인의 레알 베티스와 감독 계약을 맺으면서 복귀에 성공했으나, 레알 베티스는 2000년 시즌에서 성적이 부진했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목표로 정했던 8강 진출에 실패한 한국은 축구 수준의 한계를 절감했다.
국내파 감독으로는 여론의 질책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대한축구협회는 본격적으로 외국인 감독 스카우트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영입 대상 1순위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에메 자케 감독이고, 그 다음이 히딩크였다. 에메 자케 감독은 영입 요청에 대해 『한국의 제의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오래 전부터 프랑스는 물론, 외국의 어느 대표팀이나 클럽팀을 맡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며 고사했다.
제의를 받은 히딩크는 수락에 앞서 두 가지를 요구했다. 선수 선발과 훈련에 일절 간섭을 하지 말 것과 월드컵 대회가 끝날 때까지 임기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그에게 「월드컵 16강 진출」과 「한국 축구의 선진화」를 요구했다. 히딩크는 독일 출신의 크라머, 러시아 출신의 비쇼베치에 이어 외국인 감독으로는 세 번째로 한국에 영입되었다.
2000년 12월17일, 히딩크는 청바지에 코트 차림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다음 날, 그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 다음날 서울 타워호텔 광장에서 열린 축구 대표팀 전용버스의 안전 운행을 비는 고사에 참석했다. 趙重衍(조중연) 축구협회 전무와 버스를 기증한 현대자동차 전현찬 부사장에 이어 세 번째 祭主로 나선 히딩크는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올라선 뒤, 주장 홍명보가 따라주는 술잔을 고사상에 올리고는 상의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고사상 위의 돼지 입에 꽂고는 다음날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히딩크와 한국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복장을 통일하고 훈련 시간을 지켜라』
히딩크 지휘하의 한국 축구 대표팀은 강추위가 몰아치던 2001년 1월12일부터 蔚山 강동구장에서 첫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 전날,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복장을 통일하고 훈련 시간을 지켜라』고 주문했다.
훈련이 끝나고 선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히딩크는 『느낌이 매우 좋다』며 짤막하게 총평하고는, 『날씨도 추운데 빨리 들어가자』며 선수들을 해산시켰다. 감독 훈시가 끝나면 코치, 주장 순으로 한 마디씩 하는 한국 축구계의 관행이 히딩크에 의해 깨졌다.
첫 훈련에서 한국 대표팀은 고려大, 울산大, 프로 팀 울산 현대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히딩크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경기 도중, 이름깨나 하는 한 고참 선수가 『숨이 찬다』며 감독에게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다. 훈련이 끝난 뒤 히딩크는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특별히 부상당한 것도 아닌데 그런 정신상태로 어떻게 대표팀에서 뛸 수 있나. 팀 분위기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능력 있는 선수라도 필요없다』는 게 히딩크의 설명이었다.
축구는 누가 먼저 상대 진영에 빨리 달려가느냐를 경쟁하는 100m 달리기가 아니다. 11명의 선수들이 머리와 가슴과 발로 볼을 주고받으며 골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경기다. 11명의 선수들 간에 호흡이 맞을 때 골은 터진다. 복장 통일과 훈련 시간 엄수는 호흡을 맞추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원칙이다.
자유 분방하고 스타 플레이어 중심으로 운영되는 유럽 축구 무대에서 히딩크가 자기만의 영역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집스럽게 이러한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모여, 같이 땀을 흘리는 데서 히딩크式 훈련은 시작되었다.
스타 플레이어를 혼내 준 히딩크
朝鮮日報 스포츠레저부에서 축구팀장을 맡고 있는 玉大桓(옥대환) 기자는 히딩크의 리더십과 관련해 이런 예를 들었다.
『히딩크가 네덜란드 프로 축구팀 「PSV 아인트호벤」 감독을 맡고 있을 때 그 팀에 호마리우라는 유명한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다. 브라질 출신의 호마리우는 현란한 드리볼을 바탕으로 개인 돌파능력이 탁월한 선수였지만 훈련에 불성실하고 감독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말썽꾸러기였다. 오전 10시부터 훈련을 하는 날이면 감독 히딩크는 10분 前에 훈련장에 나와 있으나 호마리우는 정각 10시에 나타났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히딩크는 자기 시계를 10분 빠르게 맞춰 놓고 호마리우를 기다렸다. 10시 정각에 나타난 호마리우에게 히딩크는 왜 시간을 지키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호마리우는 10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는 자기 시계를 내 보였다. 히딩크는 10시10분을 가리키고 있는 자기 시계를 보여주며, 지금부터는 감독의 시계에 시간을 맞춰라고 지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히딩크는 시즌 첫 경기에서 호마리우를 베스트 멤버에서 제외했고, 그 다음 경기에서도 뺐다. 벤치에 앉아서 두 경기를 지켜본 호마리우로서는 자존심 구기는 일이었다. 세 번째 경기를 앞두고 全선수가 모인 자리에서 히딩크는 베스트 멤버 리스트에 호마리우 이름을 올리고는 호마리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 세 번째 경기에 출전한 호마리우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선수들의 잘못을 일일이 말로 꾸짖기보다는 제제를 가해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것이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이다』
첫 훈련을 끝낸 히딩크는 작년 1월17일 감독 취임 첫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축구를 이렇게 진단했다.
『한국 선수들은 마치 4000 내지 5000 알피엠(rpm촵엔진 회전속도)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열심히 하는 것은 높이 살 부분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열심히만 하다보면 필요한 시기에 「파괴적인 플레이」가 나오기 힘들다.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을 만났을 때는 완급조절이 필요하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체력과 전술적인 면이 부족해 이 부분을 집중 보완하겠다』
축구에서는 전촵후반 90분을 지치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술과 전략도 체력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축구도 후반전에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한국팀의 골 결정력 부족이 체력에 있다는 점을 히딩크는 정확히 짚었다.
그는 대표팀 훈련의 많은 시간을 체력 훈련에 할당하고, 한 선수가 최소한 두 세 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격수는 공격에만, 수비수는 수비에만 치중한다는 고정 관념을 히딩크는 깼다. 아무리 뛰어난 공격수라도 수비 가담 능력이 없으면 대표에서 제외했다.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최전방 공격수 황선홍, 설기현 선수가 수시로 수비 진영까지 내려오고, 수비수 최진철, 이을용 선수가 상대 진영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자리든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 시절 수비형 미들필더였다. 그러나 감독으로 변신한 후 그는 공격 축구를 선보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그가 지휘한 네덜란드 팀은 세밀한 중앙 돌파와 강한 힘에 의한 측면 돌파, 그리고 과감한 중거리 슈팅을 혼합한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한국 축구는 전통적으로 3-6-1(수비 3명, 미들필더 6명, 공격 1명) 시스템을 선호했다. 許丁茂 감독 시절에 對人 방어용인 3-5-2 시스템을 사용하긴 했지만, 한 명의 공격수를 전방에 세워놓고 허리를 두텁게 한 후 역습을 노리는 것이 대체적인 전술이었다. 히딩크는 4-4-2, 4-3-3, 3-4-3, 3-5-2 시스템을 번갈아 사용, 전술 변화를 꾀했다.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한국 축구는 조직적인 수비, 미들필드에서부터의 강력한 압박, 빈 공간을 활용한 기습적인 패스,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수비의 조직력은 「스리 백」을 근간으로 한다. 「스리 백」은 수비수 세 명이 일자로 나란히 서서 상대 공격수를 오프 사이더에 빠뜨리는 전술이다. 이 전술은 그전에도 사용되었지만 히딩크 체제에서 완벽하게 구사되었다.
히딩크의 선수 관리 비결
朝鮮日報 축구팀장 玉大桓 기자의 말이다.
『축구공이 나갈 길은 앞, 뒤, 양 옆 네 가지다. 한국 선수들은 상대가 공을 잡으면 미들필드에서부터 한 명이 앞을 가로 막고 그 양 옆을 두 명이 에워싸 상대에게 우리 진영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다. 몸싸움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빈 공간을 이용한 기습 패스로 득점력을 높였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에게 체력의 중요성과 빈 공간으로 침투하고, 패스하는 생각하는 축구를 가르쳤다. 한국 선수들은 그를 통해 자신감과 창조력을 얻었다』
축구전문 월간지 「축구 매니아」에서는 히딩크의 선수 관리 비결을 다섯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선수들에게 동질감을 부여했다. 히딩크는 모든 선수들에게 형이나 선배와 같은 존칭을 쓰지 말고 이름을 부르도록 해, 선촵후배 간에 軍紀가 엄하고, 나이별, 출신 학교별로 뭉쳐 다니는 한국 축구의 고질병을 없앴다. 의사소통의 자유로움은 단체 경기인 축구에서 조직력 및 전체 경기력을 상승시켰다.
둘째는 선수들 간에 자발적인 경쟁의식을 유도했다. 월드컵 본선에 대비한 베스트 일레븐을 히딩크는 미리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선수들을 끝까지 테스트하겠다고 했다. 선수들은 자기 이름을 리스트에 올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기량 연마에 힘썼다.
셋째는 기초 체력 강화다. 전통적으로 체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던 한국 선수들의 체력을 정확히 조사, 평가함으로써 과장된 요인들을 정리하고, 선수 개개인에게 체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시켰다. 체력 훈련 강화는 선수들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넷째는 과학적 데이터에 의한 철저한 선수 분석이다. 세 번에 걸친 기초 체력 테스트 외에 전술 소화 능력, 개인기, 정신력 등을 선수별로 데이터하고 다양한 분석 기법을 통하여 해결책을 제시해, 최강의 멤버를 구성할 수 있었다.
다섯째는 강팀을 통한 테스트다. 세계적인 수준의 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통하여 大敗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쌓도록 했다」
『나는 값싼 승리를 택하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의 목표는 한국팀의 월드컵16강 진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히딩크는 수많은 실전과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능력에 대한 실험작업을 반복했다. 1년 반 동안 여덟 차례의 대표팀 선발을 통해 58명의 선수가 대표팀을 거쳐갔다. 이동국, 고종수 등 스타들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박지성, 송종국, 이천수, 김남일 등 젊은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 기간 중에 참가했던 홍콩 칼스버그 컵, 컨페더레이션 컵 등 국제대회는 우승이 목적이 아니라 월드컵에 출전시킬 최고의 멤버를 고르는 과정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시행착오들을 히딩크는 무시했다. 그가 한국팀을 맡은 1년 5개월 동안, 한국 대표팀은 A매치(국가대표 대항전)에서 4승5무5패, 승률 42.8%를 기록했다. 전임 車範根 감독의 승률(56.6%)보다 저조한 결과다. 체코에 5대0, 프랑스에 5대0으로 패배해 「오대영」감독이란 악명이 붙었지만 히딩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는 험난한 길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길이 옳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히딩크는 자신했다. 장기적 목표를 세워놓은 히딩크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첫 번째 비결은 이처럼 장기적 목표를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만 갔다는 점이다.
월드컵 개막을 며칠 앞두고 네덜란드 텔레그라프紙와 가진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준비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에도 나는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다. 당신들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6월을 기다려 왔다.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우리를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낮은 전력의 팀들을 격파하면서 얻는 값싼 승리가 아니다. 만약 그러한 길을 택했다면 그 과정에서 나오는 승리로 인해 한국 국민들은 열광하겠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세계 일류 팀이 되길 원한다면 더욱 강력한 팀과 싸워 나가야 한다. 질 때 지더라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그들과 1대 1로 부딪쳐야 한다. 한국 국민들은 그러한 준비에서 나오는 패배로 인해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패배 뒤에 오는 값진 월드컵에서의 영광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내가 원하고 또한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다>
성공의 두 번째 비결은 능력에 따른 선수 선발이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권한이다. 감독은 선수들의 人事權을 쥔, 이른바 최고경영자다. 훈련시 히딩크는 운동복에 축구화를 신고 선수들과 같이 공을 차고 『상철이』(유상철), 『남일이』(김남일) 하며 선수들의 이름을 한국말로 불렀다. 질책보다는 격려로 그는 선수들을 다독거렸다.
그러나 선발 선수 기용시 히딩크는 스타 선수나 국내 여론은 일절 의식하지 않았다. 체력과 스피드가 좋고, 어느 자리든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발탁했다. 기능을 강조하는 히딩크式 사고는 감독과 선수 간에 거리감을 두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 그런 일도 있었다.
한국이 첫 경기 폴란드와의 대결에서 전반전에 천금 같은 첫 골을 넣고 난 뒤 히딩크 감독과 선수 간에 어색한 사건이 벌어졌다. 기쁨에 겨워 일제히 감독 벤치로 달려가던 한국 선수들이 갑자기 히딩크 앞에서 방향을 바꿔 박항서 코치를 얼싸앉았다. 두 팔을 번쩍들고 달려오던 선수들을 맞이하러 나가던 히딩크는 등을 돌리고 선수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걸어가는 히딩크의 뒷모습은 TV중계에서 여러 번 방영되었다.
이런 어색한 장면은 16강 진출의 분수령이었던 對 포르투갈 전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가 두 팔을 높이 들고 히딩크 감독의 목에 매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선수들이 일제히 히딩크를 끌어안으면서 사라지긴 했으나, 그같은 쑥스러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능력 있는 선수를 발탁한 히딩크의 결정은 16강 진출을 성공시킨 하나의 비결이었다.
선수들의 능력 평가는 과학적인 데이터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춘 코치진의 몫이다. 이 부분은 코치진에게 아웃 소싱해 놓고, 최종 결정만 히딩크가 한다.
히딩크를 돕는 코치진
수석 코치 팜 베어백(44)은 히딩크가 감독직을 수락하면서 데려온 사람이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선수선발위원장을 맡고 있는 팜 베어백은 네덜란드 1부 리그 폐예누드 로테르담의 감독을 지내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일본 J리그 2부 오미야 팀 감독이었다. 그는 아시아 축구의 흐름에 밝았다.
경기분석관 압신 고트비(37)는 한국과 관련된 全경기를 비디오로 찍고, 이 비디오를 통해 상대팀의 공격 루트와 수비 형태, 한국 선수 개개인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을 제시했다. 이 모든 자료를 그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히딩크가 원하는 자료는 어떤 것이든 10초 안에 내놓는다고 한다.
예컨대 한국 對 폴란드 전에서 실점 위기를 맞이한 순간에 홍명보의 움직임이 어떠했느냐고 히딩크가 물으면 바로 설명하는 식이다. 전반전이 끝나고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10분 간 휴식을 취할 때 전반전 경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도 경기분석관의 몫이다.
이란계 미국인인 압신 고트비는 작년 홍콩 칼스버그 컵 대회 때 임시 고용되었으나 히딩크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요청해 월드컵 때까지 장기 계약 상태다.
기술분석관 얀 룰프스(39)는 네덜란드 프리 유니버시티 정치학 박사이면서 1993년부터 네덜란드 알티엘 방송에서 대표팀 경기해설을 한 축구해설가다. 대표팀의 기술과 전술을 분석하는 일과 히딩크의 인터뷰 주선, 행사 참가 일정 등을 조정한다.
한국인 코치는 정해성, 박항서, 김현태씨 세 명인데 모두 국가대표 출신이다. 정해성 코치는 수비 전담, 박항서 코치는 공격 전담이고, 골키퍼 출신인 김현태씨는 골키퍼 전담 코치다.
축구협회 국제부 대리 전한진(31)씨는 히딩크의 「입」이다. 히딩크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 5개어를 구사하지만 한국말은 못 한다. 히딩크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다니는 전씨는 中高 시절 5년 간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세 번째 성공 비결은 히딩크 감독에 대한축구협회의 전폭적인 비호다. 히딩크 이전에 영입된 두 명의 외국인 감독들도 훈련 방법이나 선수 장악력에서 한국 지도자들에 비해 한 수 위고,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히딩크의 경우는 예외였다. 축구협회는 히딩크에게 5대0 패배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았고, 베스트 일레븐 선발을 독려하지도 않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인과의 관계는 사생활이라고 鄭夢準 축구협회 회장이 앞장서서 두둔했다. 鄭夢準 회장은 축구 문외한을 자처하며 모든 권한을 히딩크에게 일임했다. 축구협회의 달라진 모습은 히딩크 본인은 물론, 히딩크號 전체를 안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년6개월 간 연봉이 약 18억
히딩크의 연봉은 정확히 얼마인지 발표되지 않았다.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와 맺은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대한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히딩크 연봉에 대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협상 당시 한국이 히딩크에게 제시한 조건은 연봉 100만 달러 선에 플러스 알파인데,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면 성과급을 주기로 했다고 한다.
축구 대표팀의 전력 강화를 위해 구성된 월드컵 필승 대책위원회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히딩크는 「2001년 1월부터 2002년 6월까지 18개월 동안 145만 달러(약 18억8500만원)」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급이 1억원인 셈이다.
그의 국내 숙소는 1박에 43만원인 특급호텔 스위트 룸이며, 운전기사가 딸린 최신형 그랜저 XG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고국 나들이를 위해 연간 네 차례의 해외 왕복 항공료(비즈니스 클래스 기준)도 축구협회가 부담한다. 히딩크는 국내 모 카드회사의 광고에 출연, 거액의 모델료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네덜란드 텔레그라프紙와의 인터뷰에서 히딩크는 그가 맡은 한국 대표팀의 첫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 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지시하고자 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유럽의 톱 클래스 선수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강하고 개성이 탁월하다. 그들 사이에는 프로라는 의식이 있을 뿐, 하나의 팀으로서, 아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로서의 사명감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이란 무대를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선수들도 많이 봐 왔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무대에서 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세를 보여 왔다.이러한 한국 선수들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실력이 떨어지면 남보다 더한 노력으로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한국 축구의 기본 잠재력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내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히딩크는 이 인터뷰에서 월드컵 이후 자신의 운명과 관련, 『영광스러운 이별이 될 수도, 불명예스러운 퇴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결론적으로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때에 알게 될 것이다』며 여운을 남겼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는 대한민국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한국인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폴란드戰 승리 후, 『당신은 한국에서 영웅입니다』라는 질문에 히딩크는 『나는 영웅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고 답했다.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 네이버에 접속해 「히딩크」라는 세 글자를 두들겼더니, 양 손을 맞잡은 히딩크가 두 눈을 부릅뜨고 다가왔다. 이에 따르면 6월15일 현재, 히딩크 관련 웹 문서는 3만5376개라고 한다. 월드컵 후, 히딩크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한국인의 가슴과 인터넷상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