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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길을 따라, 영혼의 빛을 찾아
이진엽(시인, 문학평론가)
1. 순례의 비망록 펼쳐보기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인생’이란 길을 걸어가다가 죽음이란 마지막 종착지에 도달한 후 자신의 여정을 마감한다. 이 길에서 인간은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기투企投하거나 실존의 소실점을 가늠해 보면서 삶을 영위해간다. 하지만 이 길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견인된 현세적 공간에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도달해야 할 천상 또는 초월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길은 언제나 열림을 지향한다. 현세든 내세이든 인간은 누구나 낯선 길 위에 던져져 떠돌아야 하는 존재, 즉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길 중에서 자신의 영혼의 빛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은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이 순례의 길에서 세속에 짓눌려 있던 일상인들은 신실한 신앙심과 자아의 참된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규석 작가가 이번에 펴내는 한국천주교 순교성지 순례기는 이런 의미에서 아주 주목된다. 그의 이 순례기는 참된 신앙의 여정으로 우리 모두를 인도해 주고 있다. 그는 펜데믹으로 전 세계가 위기에 처해 있을 무렵, 2020년 순교 성월(9월)부터 몇 해 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천주교 순교성지 52처를 모두 순례하는 놀라움을 보여 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가가 지닌 굳건한 신앙심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복현성당의 총회장 직책을 맡아 다년간 봉사해 왔고, 현재에도 대구가톨릭문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18세기 중엽 우리나라의 진보적 유학자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태동하고 전파된 천주교 신앙은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 복음의 맹아萌芽가 움트고 개화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박해와 탄압을 겪어야만 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고귀한 피와 거룩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 믿음의 후손들도 영원한 생명의 빛을 가슴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규석 작가는 이 빛의 순교성지를 모두 돌아보며 체험한 것들을 아직 이곳을 방문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르포르타주의 보고문 형식으로 이 책에 담고 있다. 이 소중한 여정의 비망록을 펼쳐보면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순교자의 삶이 이끄는 길
역사적 기념 장소나 문화유적지 답사에 대한 글은 일반적으로 ‘여정-견문-감상’이라는 기행문 형식을 따른다. 이런 유형의 글은 시적 비유나 상징, 상상력에 의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핍진하게 표현하고 전달해 주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작품 바깥의 세계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유형의 글은 교술 문학에 해당한다.
이규석 작가가 이번에 선보이는 이 순례기 역시 순교성지 52처를 직접 답사하여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신뢰감을 줌은 물론 신앙심도 더욱 고취할 수 있게 한다.
이 순례기 전체를 조망해 보면 몇 가지 사항에 방점이 찍힌다. 우선 이 책은 ‘차례’에서 보듯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52처 순교성지를 열다섯 곳의 교구별로 분류하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거주지 근교에 있는 대구대교구의 ‘한티 순교성지’를 시작으로 인천교구의 ‘제물진두 순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그 순례 여정을 마치 통과의례의 의식을 치르듯이 의미를 부여하며 표현하고 있다. 독자들은 작가가 각 교구별로 안내하는 순교성지의 여정을 잘 주시하기만 한다면 차후에 자신의 순례에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순교성지와 관련된 정보도 비교적 자세히 전해 주고 있다. 전국 각 순교성지의 주소와 연락처(전화번호)를 순례기 맨 앞쪽마다 제시하여 누구나 추후에 성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각 성지마다 포졸들을 피해 쫓겨 다니는 사제나 교우들의 절박한 모습, 혹독한 박해 과정과 끔찍한 처형 방법 등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①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 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순교자 가운데 일부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는 이곳에서 ‘백지사’ 라는 특이한 형벌이 시작되었다. 이 형벌은 도모지(젖은 한지)를 얼굴 에 겹겹이 붙여 숨을 못 쉬게 하여 질식시키는 형벌이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부분
② 많은 죄인들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신자들을 끌고 나와 이곳에 구 덩이를 파고 산 사람을 처넣고 흙과 돌로 메워 버렸다고 한다. 그것도 버거우면 묶은 그대로 웅덩이에 빠뜨려 죽이기까지 한 통한의 순교 터 이다. 둠벙이 건너편에는 성모님이 내려다보고 계셨다. 여기서 처형당 한 신자가 3천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해미 순교성지」 부분
조선시대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①에서 보듯 아주 잔혹했다. ‘백지사’라는 한지韓紙를 얼굴에 덮고 물을 뿜어 서서히 질식시켜 죽이는 장면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 그대로이다. 또한 포졸들에게 발각된 교우들은 ②에서처럼 “구덩이를 파고 산 사람을 처넣고 흙과 돌로 메워 버”리는 것에서 보듯 끔찍한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이밖에도 산 중턱으로 도망치는 교우들을 포졸들이 쫓아가며 목을 베기(한티성지), 자기 살을 물어뜯게 하여 죽게 하기(황새바위성지), 홀갱이에 목을 걸게 하고 개처럼 죽게 하기(연풍성지), 앵베르 주교 등 외국인 사제들과 김대건 신부의 참수(새남터 성지) 등에서처럼 잔혹한 박해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엄혹한 시대의 그늘진 프레임을 작가는 장면마다 진솔하게 제시함으로써 이 시대를 안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백색 순교의 삶을 일깨워 준다. 아무튼 이 순례기는 한국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역사적 증언과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인류는 아득한 기원전부터 기록을 중시했다. 현전하는 구약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쿰란 문서’(사해死海 두루마리)에서 보듯 인류는 태고 때부터 당시의 종교적, 역사적 자료들을 양피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는 구전口傳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이나 사건을 직접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그래서 동아시아 각국들도 일찍부터 사관들이 역대 군주들의 치세를 기록하는 것을 중시하고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 역시 사필소세史筆昭世라 하여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라고 하며 글로써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아무튼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잔혹한 박해의 상처로 점철되어 있다. 기원전 로마에서도 신자들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했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 읽혀지듯 이웃 일본에서도 17세기 막부시대에 이른바 ‘구멍 매달기’, ‘십자가 수장형水葬刑’ 등 끔찍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이 책의 부록 편에도 박해시대 당시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형벌의 종류가 잘 소개되어 있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당시 순교자들이 죽음도 불사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유는 바로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고린토 전. 15, 14)이라 하지 않았던가. 온갖 차별과 고통으로 얼룩진 현세이지만 영원한 빛의 나라에서 하느님을 만나 뵙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이 이 순교자들로 하여금 죽음도 초극하며 신앙을 지키게 한 것이다. 그 순교야말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가 처형을 앞두고 말한 것처럼 “저는 하느님의 밀이니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려는 것과 같다.
한편 이 책에는 천주교 박해와 연관된 시대적 배경이나 장소, 여러 사건들도 함께 제시되어 박해 당시의 역사적 기상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 조선시대 무과 시험 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관덕당(관덕정성지), 서해안 방어의 핵심 지역인 홍주 읍성(홍주성지), 고려시대 몽골인들의 진陣터인 ‘이진 터’(죽산성지), 조선시대 세곡을 저장한 ‘공세곶창’과 드비즈 신부(프랑스)가 전해 준 ‘이명래 고약’(공세리성지), 병인년 프랑스 극동 함대의 조선 침략(진무영성지) 등 박해 무렵의 역사적 장소나 사건, 일화도 소개되고 있어 그 시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통각統覺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든 독립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단독적으로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것도 그 근원을 응시해보면 다층적인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천주교 박해 사건 역시 그 시대의 분위기나 지배층의 정권 다툼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일본에서도 에도 막부시대에 천주교가 전파될 때 ‘카쿠레 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던 신자들의 참혹한 순교 이면에는 정쟁政爭이나 외세에 대한 경계, 전통적 민간신앙과의 갈등 등이 얽혀 있었다.
‘하느님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라는 천주교의 교리는 당시 조선이든 일본이든 신분체제를 중시하는 봉건사회에서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 순례기에서는 천주교 박해 사건과 연관된 이 같은 시대적 분위기나 표징들도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된다.
끝으로 이 순례기는 순교성지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작가의 소박한 심성과 이웃 사랑도 엿보게 한다. 작가는 성지순례 기간 동안 산속 깊이 숨어 굶주림에 허덕이며 비참하게 살아오던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자 가난한 마음을 견지하려 한다.
다음 순례 코스인 수원교구 순례를 준비하면서 아내(엘리사벳)와 나는 도시락과 주먹밥을 몇 개 만들어 고운 보자기에 쌌다. 박해시대에 포졸들에게 쫓겨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나며 싸간 주먹밥을 생각했다. 이 주먹밥을 보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아이들의 허기 채우던 주먹밥도 생각났고, 가난 때문에 왜관에서 대구로 통학하던 내가 늘 도시락을 못 싸오는 학생으로 치부되던 그때도 기억되었다. 엘리사벳과 이 도시락을 싸가서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
-「서운동 순교성지 성당」 부분
부인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작가는 ‘주먹밥’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그는 “박해시대에 포졸들에게 쫓겨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나며 싸간 주먹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주먹밥에는 작가의 학창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늘 도시락을 못 싸오는 학생으로 치부”되었던 아픈 기억이 묻어 있다. 아무튼 그는 이 소박한 음식을 통해 잠시나마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겨”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순례의 길을 통해 운수납자雲水衲子와도 같은 수행자의 삶은 아니더라도 순교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몸과 마음속에 음각陰刻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이 순례 기간 동안 이규석 작가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실천적 사랑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순례길에 전동성당 앞에 한 초라한 행색의 사람을 만났다. 성당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분은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연세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새까만 점퍼에 헤어진 옷을 입은 모습이 배고픈 사람이라는 걸 당장 알 수 있었다. …(중략)… 잠시 간식을 약간 드리고 몇 끼니 잡수실 준비를 해 드렸지만, 나로서는 갑자기 더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주머니 현금이 바닥나고 도와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고픈 건 나의 학창 시절이나 지금 이 할아버지가 사는 시대나 순교자들이 살아가던 조선시대나 매 한가지이다.
-「전동 순교성지」 부분
작가는 전주교구 전동성당 앞에서 초라한 행색을 한 채 웅크리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첫 인상에서 그분이 “새까만 점퍼에 헤어진 옷을 입은 모습이 배고픈 사람이라는 걸 당장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간식을 약간 드리고 몇 끼니 잡수실 준비를 해 드”리면서 과거 자신의 가난했던 학창시절과 순교자들이 살았던 궁핍한 시대를 떠올린다. 그는 이 가난한 할아버지를 더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주머니 현금이 바닥나고 도와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신앙인들의 삶에는 순례도 필요하고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이웃 사랑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갈라티아 5, 6),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참된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신앙의 결정체이다. 이 이웃 사랑을 작가는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묵묵히 실천하면서 자신의 순례길을 더욱 아름다운 영혼의 빛깔로 물들인다.
3. 영혼의 빛에 대한 소망
이규석 작가가 이번에 선보이는 한국천주교 순교성지 순례기는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실한 믿음과 선한 의지에서 빚어진 값진 기록물이다. 그는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2020년 순교 성월부터 우리나라 순교성지 52처를 몇 해 동안 모두 순례하는 놀라움을 보여 주었다. 이 순례의 여정에서 작가는 처참한 박해 현장에 남아 있는 순교자들의 혈흔에 자신의 가슴을 대어보면서 세속의 그늘에 가려진 영혼의 빛을 다시 회복하려는 소망을 보여 준다. 비록 참혹하게 으스러진 몸으로 땅에 묻히지만 눈부신 영체靈體로 부활하는 순교자들의 삶을 반추하며 작가는 이 순례를 통해 순결한 신앙심과 자아의 참된 동일성을 되찾고자 한다. 이규석 작가의 이런 소중한 체험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상생활에서 백색 순교의 삶을 일깨워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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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진엽 선생님, 해설을 꼼꼼이 정성껏 해주셔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