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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허왕후 도래(渡來) 설화(說話)의 재검토
:부산-경남 지역 불교 사찰 설화를 중심으로 (글; 이광수)
Ⅰ. 머리말
Ⅱ. 허왕후 설화의 형성과 '아유타'
Ⅲ. '장유화상'과 허왕후 설화의 본격적 확대
Ⅳ. 결론
Ⅰ. 머리말
가야는 한국 고대 국가 가운데 유독 신비의 이미지로 덧칠이 많이 되어 있고, 비(非)전문가들에 의한 연구가 눈에 많이 띠는 편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그러한 연구들이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허왕후가 (西域의) 아유타로부터 수로(首露)에게 시집왔다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설화를 가장 중요한 근거로 연구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가야의 건국 신화만이 인도와 관련된 모티프를 가졌고, 왜 그 인도와의 관련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설화만이 유독 신비스럽게 덧칠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설화가 활발하게 성장 변모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은 그 성격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수로왕 신화는 수로왕이 활동하였던 당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상당한 부분이 가락국의 늦은 시기, 또는 멸망 후에 만들어진 설화나 지방 전승들이 불교나 인도에 의탁되어 쓰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전하는 여러 설화에 나타나는 인도와의 인연에 대한 모티프와 그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허왕후 설화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허왕후 설화는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처음 등장한 이래 최근까지 다른 민속 신앙의 여러 요소들과 끊임없이 섞이면서 확대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그것은 항상 특정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특정 집단에 대한 역사적 의미 분석이 이 글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임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한국의 다른 고대 건국 신화와는 달리 허왕후 설화만 유독 왕성한 확대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는 이유와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왜 이 설화가 항상 사찰 연기 설화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와 연계되는 문제이다. 즉 이 글은 허왕후 설화가 확대 재생산 과정과 불교와의 상관성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확대 재생산된 허왕후 설화는 1970년대 이후 일부 학자들의 무책임한 가설 남발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연구의 양산 그리고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인 띄우기 등의 영향으로 인해 보다 심화되었다. 비록 최근 가야사를 전공하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가 나옴으로써 그렇게 알려진 것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었지만 아동 문학가 이종기 이후 매우 오랜 동안 진행되어 온 '역사 만들기'의 효과를 불식시키기에는 아직도 그 힘이 부족한 것 같다. 이종기의 작품은 김해부터 인도 아요디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현지를 직접 답사하고 조사한 노작임에도 분명하지만 전적으로 아동 문학가의 상상력에 입각한 문학 창작물이다. 그런데 이 분야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학계에서는 변변한 반론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뒤를 이어 김해의 한 병원 원장으로 있는 허명철은 허왕후가 중국의 허국(許國) 출신으로 일찍이 대월씨(大月氏)가 중국으로부터 인도로 건너가 꾸샨국을 세우면서 그 일파가 아요디아 지방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전란으로 인해 중국 내륙의 보주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가야로 건너왔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했다. 또 고고학자 김병모는 허명철의 주장을 답습하고 더욱 정교하게 꾸며 신문과 방송에 적극 알림으로써 '역사 만들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후 일부 학자들은 이종기나 김병모의 가설을 아무런 검증 없이 따르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를 그것이 다루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오해하여 설화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경향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취지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인도와의 인연을 나타내는 허왕후 설화는 역사적 변화에 따라 형성된 매우 많은 층위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원형의 일부 역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표현이 비역사적 사실의 허구임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 글은 설화를 사료로 삼은 역사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글이다. 그런데 설화는 형성과 전승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모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역사성을 추출해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화를 사료로 삼아 역사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은 설화가 문헌사료가 담지 못하는 어떤 특정 의미의 역사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화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성장하면서 특정 시기의 특정집단이 갖는 역사관을 또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사실의 역사'와 함께 '의식의 역사'를 보여 준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 경남 지역의 인도와의 관련 모티프를 갖는 사찰 연기 설화들이 형성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그 설화 속에 용해되어 있는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이 갖는 역사관을 파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연구는 부산 경남 지역의 사찰들이 인도와의 관련 모티프를 이용해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 만들기'를 하였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Ⅱ. 허왕후 설화의 형성과 '아유타'
허왕후 설화가 실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줄여서 채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가락국기』는 8세기 혜공왕대의 이른바 미추왕릉(味鄒王陵) 사건(事件) 이후에 김유신 가문의 후예들이 현실적 목적에서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개황력(開皇曆)』 혹은 『개황록(開皇錄)』을 참고로 하였고, 9세기의 최치원이 『석리정전(釋利貞傳)』을 편찬하면서 가락국(駕洛國)에 관련된 『가라국기(駕洛國記)』이전에 그와 유사한 어떤 고기(古記)를 참고한 것으로 보아 8∼9세기 경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고려 문종 31년(1076)경에 편찬되었다. 그리고 그 200년 후에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줄여서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안에 채록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안에 있는 허왕후 설화에는 여러 시기를 거쳐오면서 형성된 중국 문화, 불교 문화, 무교 문화 등의 혼합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것은 허왕후 설화가 -그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지만 - 처음 만들어진 이후 그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또 다른 설화를 확대시키기 때문이다. 설화는 일단 한 번 만들어지면 그것이 또 다른 문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설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원형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타난 바와 같이 허왕후의 도래 경로와 관련지어 민속놀이가 만들어지거나 설화 속 합혼(合婚)한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운 것이 좋은 예이다. 일연(一然)이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서 주석을 통해 왕후사를 가락국 질지왕 대와 관련을 짓고 나아가 그 일이 법흥왕 이전의 일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 스스로가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던 설화가 몇 개의 층으로 형성되었음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가락 불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고령군 고아동 벽화 고분과 합천군 옥전 M3호분, 함안군 도항리 8호분 등에서 출토된 연화문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가야 제국에 불교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 불교가 존재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전하는 설화 즉 허왕후와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허왕후 설화는 가락불교의 존재와는 아무런 관련을 보여 주지 못하고 다만 수로 신화의 원형에 후대의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섞이면서 그것을 편찬한 고려 문종 대에 가서는 이미 여러 층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층위가 몇 개이고 각각의 층위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이다.
허왕후 설화의 중심 모티프는 수로왕과의 결혼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허왕후의 정체나 그 이동 경로 혹은 합혼 과정 등이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어 많은 부분이 여러 차례에 걸쳐 후대에 첨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결혼 모티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 중대 시기로 보인다. 그것은 이 시기에 김유신, 문명왕후 등 가야계 후손의 정치적 비중이 절정에 달하고 금관 소경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들의 위상 제고 차원에서 가락국 건국 신화의 정당화 작업을 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수로 신화를 비롯한 가락국의 역사가 문자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수로왕묘에 대한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린 것이나, 무열왕 대의 사륜계가 금관 가야계의 가계를 고양시키려 한 것 그리고 『개황록(開皇錄)』이 수로왕을 중심으로 편찬되었다는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문무왕-무열왕 당시의 왕실은 자신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자신들과 중첩된 혼인 관계에 있었던 금관가야의 가계를 고양하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왕후의 결혼 모티프의 얼개가 만들어진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의 중요한 실마리이자 허왕후 설화의 중심인 '아유타'모티프는 이 당시에 삽입된 것일까 아니면 이 시기와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최종 편찬한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활동한 고려 문종대 사이의 어느 시기에 삽입된 것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외에 나타나는 허왕후 설화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라국기 외에 있는 허왕후 설화는 가락국기 안에 있는 허왕후 설화 이후에 확대 재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를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의 파사 석탑 설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사 석탑 설화는 그 구조와 표현이 황룡사장육상(皇龍寺丈六像) 설화와 매우 유사하다. 그것은 두 신화가 모두 인도와의 관련성을 통해 불국토(佛國土) 관념이 주제로 나타나 있고, 모두 배를 타고 온 모티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법의 도움으로 福을 이룬다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라 중대 이후 당시 한국 사회에 '인도'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알려진 '인도'는 사실적 실체로서가 아닌 불교를 통해 채색 혹은 왜곡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불국토 관념은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발전한 불교의 고유한 역사 인식으로 종교를 통해 권력의 정당화를 꾀한 국가 중심의 정치적 역사 인식의 일환이다. 따라서 그러한 불국토 관념에 입각한 설화를 만드는 일은 사찰이 담당하였지만 그 일이 널리 가능하였던 것은 그러한 역할을 하는 불교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후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호계사(虎溪寺)가 파사 석탑 설화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런 상황 즉 국가는 불교 교단으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지원을 받고 교단은 국가로부터 물질의 후원을 받는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설화를 만든 곳은 다름 아닌 김해 호계사(虎溪寺)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상황에서 허왕후가 이유타로부터 바다를 통해 왔다는 설화가 민간에 널리 알려진 위에서 파사 석탑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수로왕을 세조(世祖)라고 하고 왕비를 황후(皇后)라 하였던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는 고려 초기 이전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왔다는 모티프가 형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아유타'의 정체성에 대해 우선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아유타'는 힌두 최고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타난 사라유(Sarayu) 강안에 위치한 힌두 제1의 정치적 성도(聖都) 아요디야(Ayodhya)의 음차이다. 그런데 『라마야나』의 성도(聖都) 아요디야는 신화 상으로는 존재하지만, 5세기 이전에는 실제 역사상 존재하지 않은 도시다. 따라서 『라마야나』안에 나타난 아요디아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특정한 도시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모델은 사라유 강안에 위치한 사께따(Saketa)였다. 이 사께따는 부처가 활동하던 기원전 6세기 경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 번성했던 20여개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당시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던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사께따는 슈라와스띠(Sravasti)와 쁘라티슈타나(Pratisthana)를 잇고 라자그리하(Rajagrha)와 바라나시(Varanasi) 그리고 딱샤실라(Taksasila)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에 형성된 큰 시장 도시였다. 따라서 많은 군주들은 물론이고 부처나 마하위라(Mahavira)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포교상 이 곳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이후 기원 전 3세기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까도 이 도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거기에는 불법 홍포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아요디야가 갖는 정치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아쇼까 이후부터 기원 초기의 꾸샤나(Kusana) 시대를 거치면서까지 사께따는 중국과 로마 사이의 실크로드 무역이 성행하면서 그 무역선상에 위치한 뿌루샤뿌라(Purusapura), 마투라(Mathura), 간다라(Gandhara), 딱샤쉴라 등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였는데 특히 대승 불교가 크게 성행하던 곳이었다. 이에 반해 갠지스 강 유역에 있던 사께따는 상대적으로 불교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고 도시로서도 크게 성하던 곳은 아니었다. 5∼6세기 경 굽따(Gupta) 말 이후부터는 많은 도시가 몰락하였는데 사께따 또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가 바로 『라마야나』의 최종 편찬이 이루어지던 떄 였는데 사께따가 신화 속 성도(聖都) 아요디야의 이름으로 치환되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 중세 이후 '아요디야'라는 이름의 도시는 범인도적 힌두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기원 후 5세기 초에 인도를 다녀 와 남긴 법현의 『불국기』에는 '사께따'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지만 '아요디야'에 대한 언급이 없고, 기원 후 7세기 중반에 인도를 다녀 온 현장은 '아요디야'라는 이름의 도시에 대해 -그 위치가 사께따와 동일하다-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요디야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성도(聖都)로 자리 잡은 것이 5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
『라마야나』는 갠지스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즉 16 영역 국가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꼬샬라의 영역 내에서 만들어진 영웅담을 근간으로 하여 성장한 서사시이다. 갠지스 강 문명 즉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그리고 카스트 혈통 사회의 요체 위에서 형성된 『라마야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힌두 최고의 신 비슈누의 화신으로 통합되면서 신성화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라마야나』는 기원 후 5세기 경 굽따 시대에 이르면서는 힌두 사회와 문화를 구성하는 제 1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 그 안에서 라마는 이상(理想) 군주(君主)로서 그리고 아요디야는 그 이상 정치가 펼쳐지는 이상향으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그곳이 갠지스 강 유역을 벗어난 인도아대륙 내이든 그 밖 동남아이든 관계없이『라마야나』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널리 읽혀진 사회는 힌두 문명의 요체인 농경·카스트·남성·대가족 중심의 사회 구도와 권선징악·효·형제애·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보호 등을 보편법으로 하는 문화를 사회 구조와 가치 체계로 수용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그러한 '아요디야'가『라마야나』에 담긴 사회 문화적 의미는 물론이고 그 이야기조차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실리게 된 것일까?
가락국기(駕洛國記)의 허왕후는 박혁거세 신화의 알영과 같은 고대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왕비로 나타나면서 다산 숭배를 구성하는 지모신이다. 그렇지만 알영 설화가 신성족(神性族) 개념을 도입하여 신화의 원형 상태를 가지고 있음에 반해 허왕후 설화는 불교로 윤색된 채 수로 신화 속에 부수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면 허왕후 설화의 '아유타'는 원형이 불교로 윤색되는 과정 중에 삽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유타'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원전(原典)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7∼8세기 이후의 어느 한 시기에 원래의 수신(水神)의 모티프에 '아유타'가 추가되면서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모신으로서 '물'을 상징하는 다산의 구조는 변하지 않고 다만 '아유타'가 갖는 정치 문화적 상징성만 추가됨으로써 훨씬 세련된 형태의 인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유타'가 추가된 것은 7∼8세기 이후의 어느 시기일까?
그것은 '아요디야'라는 이름이 언제 어떻게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라마야나』는 힌두 문화의 총체로써 어디든 힌두문화가 전파되면 반드시 그것이 전령의 역할을 한다. 『라마야나』는 기원 후 4∼5세기부터 진행된 힌두 문화의 확산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산스끄리뜨 판본 『라마야나』는 자바의 732년의 것이다. 따라서 5세기와 8세기 사이에 『라마야나』는 그 특유의 구전 신화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에서는 그것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에는 이미 독자적인 문명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라마야나』와 힌두 문화가 특별히 의미를 가질만한 공간이 있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 또한 그 범주에 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과 한국에서 『라마야나』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마야나』는 788년 당(唐)에서 번역된 불교경전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密多經)에 삽입되어 일본에까지 그 번역본이 소개되었지만 한국에는 그 번역본이나 설화의 일부라도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입릉가경(入楞伽經) 그리고 몇 몇 본생담(本生潭)과 같은 불경에 그 설화가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라마야나』나 '아요디야' 가 고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아요디야'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 설화가 문화 동력의 요체로써가 아니고 일부 불교 승려나 불교에 바탕을 둔 라말려초(羅末麗初)의 지식인이 불경을 통해 얻은 지식의 말단에 대한 표현으로써 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라 중대 이후 고려 초기에 이어지느니 왕성한 불학 연구의 분위기와 중국과의 학문 문화적 교류를 고려해 볼 때 사찰에서 고래로 전해 오는 허왕후 설화에 불경에서 새로이 획득한 '인도'라는 의미로 알려진 '아유타'를 삽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것은 '아유타'가 불경을 연구하는 사찰 아닌 다른 곳에서 알려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 그리고 사찰은 인도와의 관련 모티프를 통해 끊임없이 설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작업을 한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아요디야는 이렇게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인도 즉 불교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윤색 삽입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이해는 뒤따르지 못한 반면에 2차 변질은 매우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 들어 와서 허왕후의 출신지로써의 아요디야가 잘못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맥락 아래에서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조선 세종 6년 1524년 경상감사 하연(河演) 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전거에 의하면 허황후는 아유타가 아닌 남천축국(南天竺國)의 공주로 되어 있다. 무슨 연유로 허왕후의 출자가 아유타에서 남천축으로 바뀌었을까? 아요디야는 인도 북부의 갠지스강 지류인 사라유 강안에 위치한 도시로 기원전 6세기에 발달한 갠지스강 문명을 이루는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조차 세종 당시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요디야는 남천축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천축일까? 지금으로써는 더 자세한 단서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중화 세계의 개념으로 볼 때 인도가 남만(南蠻)에 속한다는 사실에서 천축국의 방위 개념이 남쪽이 익숙해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纂地理志)』에도 허왕후는 남천축국에서 왔다고 언급이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허왕후의 시호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주태후'는 그 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도 나타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허왕후를 아유타국 왕녀 혹은 남천축국 왕녀라고 불리는 것으로 소개하면서 특별한 설명 없이 그 시호를 '보주태후'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보주(普州)'의 태후일까? 일단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허왕후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정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며 한자의 의미상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왕후는 당시 사람들에게 설화 속의 인물로서 인도 - 그곳이 아유타국이든 남천축국이든 간에 -에서 왔다는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보주태후'의 '보주'는 '인도'라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에게 인도는 -그 역사적 실제와는 관계없이- 불교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보주'는 '불교의 나라 인도' 정도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을까 한다. '보(普)'자는 불교에서 널리 사용하는 보편적 진리를 뜻하는 '보'의 의미일 것으로 추정된다. '보'는 산스끄리뜨 어휘 비슈와(visva)의 의역으로 보편적 진리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보지자(普知者) 라 하고 불법을 보법(普法)이라고 하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을 보례(普禮) 라고 한다. 따라서 '보주(普州)'는, '불교의 땅'의 의미가 될 것이다.
Ⅲ. '장유화상'과 허왕후 설화의 본격적 확대
허왕후는 15세기에 들어오면서 설화 속 인물이 아닌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된다. 그것은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纂地理志)』에 처음으로 그의 능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허왕후릉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纂地理志)』이전까지는 그 능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인지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는 이전까지는 설화 속에 있던 인물이 후손들에 의해, 무슨 특정한 연유로 인하여, 구체성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왕후릉이 구체적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시 어떤 세력에 의해 허왕후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어떤 세력은 누구일까? 이 문제는 허왕후 설화가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허왕후 설화의 확대는 조선 초기 이후 허왕후가 수로와의 사이에서 열 아들을 낳았다는 새로운 모티프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허왕후가 열 아들을 낳았다는 모티프는 송인(宋寅)의 『이암집(이庵集)』에 처음 나타난다. 그런데 현전하는 여러 허왕후 설화에는 허왕후는 열 아들을 낳았고 그 가운데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이 하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암집(이菴集)』에는 세 아들에게 허씨 성이 하사되었다고 나타난다. 『이암집(이庵集)』에 의하면 허엽의 아들 허봉이 자신의 조부의 비문을 얻으려 당대의 명문 학자인 송인에게 부탁하러 간 사실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허봉이 비문 작성에 필요한 자료로 자신의 조상에 대한 문안(文案)을 가지고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열 아들의 이야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족보라는 것이 공간(公刊)의 두려움을 강조하는 당시의 뿌리깊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 정확성에 대해 극도로 엄격한 기준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열 아들 이야기는 허봉이 날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고 허봉 당시에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그러한 설화가 이미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왕자의 숫자에 관해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본이 있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당시로부터 얼마 오래지 않은 이전 시기에 만들어져서 아직 하나로 완전히 고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허씨 성을 두 왕자 혹은 세 왕자에게 하사하였다면 나머지 여섯 혹은 일곱 왕자는 설화에서 어떻게 정리되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후대의 자료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7세기 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진양지(晋陽誌)』에는 칠불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유래와 관련하여 신라의 어느 왕이 옥부선인(玉浮仙人)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서 일곱 왕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 그 선인과 놀다가 칠왕자가 성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34)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가락삼왕사적고(駕洛三王事蹟考)』에는 허왕후의 일곱왕자가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승선(昇仙)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七'이라는 숫자는 불교나 무교 혹은 다른 종교 할 것 없이 '7성(七聖)', '7현(七賢)', '7선(七仙)' 등의 의미와 연계되는 숫자다. 따라서 원래는 열 왕자에서 거등왕을 제외하고 허씨 왕자를 셋을 제외하면 나머지 왕자의 숫자가 여섯이 되는데 나머지 왕자가 주변의 7불 혹은 7선과 관련된 민속 신앙과 혼합하면서 승선(昇仙) 혹은 성불(成佛)하는 존재로 자리 잡기 때문에 허씨 성을 하사 받는 수가 둘로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허왕후 설화의 열 왕자 모티프는 시간이 흐르면서 민간에 널리 전해져 오는 불교와 도교의 7불(七佛) / 7선(七仙) 모티프를 적극 수용하여 보다 본격적인 대중화의 구조를 갖추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 왕자' 모티프가 설화에 자리 잡는 것 그리고 7왕자가 성불하게 되는 것은 곧 두 왕자가 허씨 성을 받음으로써 허왕후가 시조로서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그것은 16세기 두 명의 허씨 관찰사의 행적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허엽(1517∼1580)은 경상도 관찰사 재임 중인 1580년에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이후 또 다른 양천 허씨 관찰사인 허적(1610∼1680)도 마찬가지로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한다. 왜 양천 허씨 관찰사가 왜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릉을 보수하였을까? 경상도 관찰사로서 관할 지역에 속해 있는 한 왕릉을 보수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신라의 다른 왕릉보다 수로에 대해 유독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이 시기에 들어 허씨들이 수로를 허왕후와 관련지어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허적은 1647년 허왕후릉을 또 보수하면서 세운 『보주태후허씨릉비음기(普州太后許氏陵碑陰記)』를 통해 수로왕이 열 아들을 낳고 그 가운데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하사한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자료인 1671년 허묵이 쓴 『양천허씨족보서(陽川許氏族譜序)에 의하면 양천 허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 허선문이었어나 이제 허왕후가 그 시조와 연계됨을 알 수 있다.
족보라는 것이 그 편찬자들이 갖는 씨족 집단에 대한 배타성과 유림 특유의 순결성에 의해 허위 기사를 창조할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족보가 적어도 시조에 관해서는 역부환조(易父換租)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신들의 시조를 이미 만들어진 설화를 끌어 당겨 고대의 한 개국자의 부인에 연결시키는 일은 그리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이른바 이단적 풍조가 한층 풍미하게 되던 시기다. 이는 보편적 중화 질서로부터 민족의 발견, 사화 당쟁의 와중에 소외된 인사들의 개아(個我) 와 개아(個我) 의 집합체에 대한 자각 의식으로 연결되어 민족에 대한 자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는 양란 이후 발생한 국내의 무질서로 인한 씨족의 확산으로도 연결되고 이로 인해 많은 족보가 만들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시조 윤색의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허적이 숙종 전대부터 지패 대신 호패의 시행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인물로 그 의도는 신분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당시에 시조 윤색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양천 허씨가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족보와 연계함으로써 보다 대중화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허왕후는 설화 속에 나오는 수로의 비(妃)로서가 아닌 역사 속의 수로의 비로서 그리고 실질적인 허씨의 시조로 인식된 것이다. 그것은 허왕후릉을 처음 언급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纂地理志)』가 편찬된 1469년 당시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양천 허씨의 족보 연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허왕후 설화는 18∼19 세기를 거치면서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장유화상'이라는 허왕후의 형제의 등장이다. '장유화상'이 처음 등장한 현존 자료는 김해에 있는 지금은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옛 명월사의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에 의해서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전략) 왕이 그 신령스럽고 다름에 감동하여 산 이름을 명월이라 짓고, 뒤에 절을 세 곳에 세우도록 명령하고, 흥(興), 진(鎭), 신(新) 세 글자로 국(國) 자(字) 위에 얹어 편액하여 길이 나라를 위하여 축원하고 다스리는 장소로 했다. (중략) 절을 중수 할 때 또 하나의 기와를 무너진 담 아래에서 얻으니 그 뒷면에 "건강원년갑신삼월남색(建康元年甲申三月藍色)"등의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받들어 와 왕이 중(重)히 숭불하였던 것을 역시 가히 체험할 것이다.
이 비문에 대해 김태식은 그 내용이 '국가의 번영'을 위한다는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현대적 개념을 빌러 조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비문을 직접 확인해 보면 건립연대는 숭정병자(崇禎丙子) 후 72년 즉 1708년에 증원(證元)이라는 승려가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이야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의 조작이지만 그 시기가 그다지 현대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찰의 연기 설화를 고증하기 위해 중수 과정에서 오래된 기와가 나왔다고 하는 비기(秘記) 의존의 방식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기와나 고서 등을 통한 비기 의존 방식은 사찰들이 자신의 고색창연함을 드러내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이러한 예는 다른 사찰 설화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이 글의 주제와 비슷한 예로 경남 산청에 있는 왕산사(王山寺) 연기 설화를 살펴 볼 수 있다. 현재 경남 산청에 있는 왕산사는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능을 수호하는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그 근거를 1650년 승(僧) 탄영(坦瑛)이 적었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두고 있다. 그런데 그 왕산사기(王山寺記)』는 『홍박사의영왕산심능기(洪博士儀泳王山尋陵記)』에 의하면 1798년 왕산사에 한 선비가 체류하면서 그 오래된 신비한 나무 궤짝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열어 보니 승(僧) 탄영(坦瑛)이 그로부터 150년 전에 적어 보관해 놓은 기록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왕산사 앞에 있는 능이 구형왕릉이라 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승 탄영이 왕산사가 고색창연하다고 드러내고자 인위적으로 창조한 기록을 묻어 두었고 그것이 100년 뒤에 발견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 기록 안에 있는 것을 신빙성 있는 자료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비기적 방법으로 인해 그 무덤은 구형왕릉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고, 그 무덤 주위에 있는 절은 가락국과 연계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결국 『숭선전지(崇善殿誌)』와 같은 문중의 역사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는 기록에조차, 특히 『가라국왕세계(駕洛國王世系)』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그리고 주석이라는 학문적 형식을 통해, 그 사실은 실리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사찰의 연기 설화 창조는 '역사 만들기'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허왕후 설화와 관련된 사찰의 연계 설화는 장유사(長遊寺)에서 한층 더 자세하게 만들어진다. 1915년 숭선전 참봉 허식이 찬수한 『장유화상기적비(長遊和尙紀蹟碑』에 의하면,
(전략) 화상의 성은 허씨요, 이름은 보옥(寶玉)인데 아유타국 국군(國君)의 아들이다. 우리 시조 수로왕 7년 무신년(戊申年)에 보주태후 허씨가 아유타국의 공주로 아버지의 명을 받아 배를 저어 누백유순(累百由旬)에 와서 능히 하늘이 지은 배필을 이루니 그 깃발은 적황색이요 그 탑은 바람을 진압하고 그 모시는 신하 수십 인이요, 그 일행을 호위하던 자는 화상이니 태후의 아우다. 화상이 허왕후의 친정 사람으로 부귀를 보기 뜬구름 같이 하고 드디어 진세(塵世)의 모습에 초월하여 불모산(佛母山)에 들어가 길이 놀고 돌아오지 않으니 세칭 장유화상은 이 때문이라.(중략) 만년에 가락왕자 7인으로 더불어 방장산 속에 들어 가 부처로 변하니 지금 하동군 칠불암(七佛庵)이 그 터다.
허왕후 설화는 이 비문에 의해 아주 다양한 이야기로 발전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장유(長遊)'에 대한 해석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장유(長遊)'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것으로 허왕후와 직접적 관련은 애초에 없던 것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그가 '친정사람'이라는 개념을 빌어 손 위 누이인 허왕후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속세를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이야기를 그 문자의 뜻에 짜 맞춘 것이 특이할 만하다. 그리하여 마치 후대에 만들어진 '장유(長遊)'가 원래부터 존재하였던 것처럼 만들어 버림으로써 설화가 훨씬 추동력(推動力)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는 조선 후기에 불교 사찰이 급속도로 많이 늘어난 사실과 관계가 있다. 불교 사찰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그 교세가 많이 기울면서 큰 규모의 사찰은 많이 무너졌다. 하지만 후기 들어 규모가 작은 암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니 18세기 중반의 통계를 보면 전체 사찰 가운데 사(寺)가 차지하는 비율이 68.7%인 반면 암(庵)이 차지하는 비율은 31.3%로 전체 사찰 가운데 암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았다.44) 이러한 현상은 영정조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미 정부가 통제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증가하여 정부로서는 현황 파악과 관리를 위해 『범우고(梵宇攷)』를 편찬할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의 작은 사찰들은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사찰의 연기 설화 창조에 적극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교는 특유의 융합주의로 도교와 무교의 문화와 적극 절충하였다. 도교의 신선 모티프가 허왕후 설화 안에 자리 잡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명월사(明月寺)는 한국 불교 전래의 무구한 역사를 드러내고, 그것이 자신의 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유화상이라는 인물을 창조하였다. 이 대단한 창조적인 발상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모티프 즉 '성불(成佛)/승선(昇仙)'이라는 모티프가 설화의 원전인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오는 '장유(長遊)'라는 이름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허왕후 설화에 의거해 볼 때 허왕후가 배에서 내려 수로의 왕궁으로 갈 때 거쳐가는 길목에 자신의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장유화상이라는 인물을 창조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김해의 은하사 연기 설화를 보면 또 다른 방향의 사찰에 의한 설화 창조를 볼 수 있다. 은하사 대웅전 안에 있는 취운루중수기 현판은 181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의하면 자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로 허왕후가 가락국에 올 때 동행하였는데, 도착 후 수로의 명으로 은하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빠로 나타난 것은 이 기록에 의해서부터이다. 그것은 그가 허왕후의 동생이라면 그의 나이가 16세 보다 어리다는 말인데 15세 소년이 이역만리에서 불교를 가져와 전파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지다 보니 그를 오빠로 바꾼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유화상'은 인도에서 불교를 가지고 왔다는 의미로 창조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김해의 장유산에서 기인하였고 그 문자의 의미가 도교를 통해 불교의 탈속 사상과 결부되면서 산과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장유하상'은 허왕후 설화의 본거지인 김해 지방 외에 지리산, 가야산과 같은 산간 지역에서는 불교 초전자(初傳者)로서 등장하지만 다른 곳 즉 바다와 밀접한 곳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바다와 관련이 있는 사찰에서는 불교의 초전(初傳)과 관련하여 여전히 허왕후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뛴다. 이러한 설화의 좋은 예를 우리는 남해 금산사 보리암 설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보리암 관음보살상 연기 설화에 의하며,
그 법당의 관음보살상은 허씨 부인이 가져 왔다고도 알려져 있고, 원효 대사가 바다 가운데서 모셔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후자에 의하면 어느 날 원효 대사가 사시공양을 마치고 법당에 나오나 멀리 바다에 신비한 광채가 떠올라 있었다. 그곳은 세존도라는 섬인데 그곳을 원효 대사는 돌배를 타고 갔다. 세존도는 보리암에서 150∼160㎞ 정도 떨어진 섬으로 두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는 바위섬이다. 원효 스님이 그곳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인도에서 제작되어 해상 용왕의 호위를 받아 보리암까지 왔다.
이 전설은 허왕후 설화의 '인도'가 무속 신앙의 '돌배' 그리고 한국 불교 설화의 '원효'와 섞인 형태이다. '인도'는 허왕후가 바다로부터 건너왔다는 모티프에 『삼국유사(三國遺事)』 황룡사 장육상 설화와 파사 석탑 설화에 나타나는 '표류'모티프가 섞인 형태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인 '돌 배'는 허왕후 설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지역 민속인 돌 숭배와의 융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김해 용원 지방의 허왕후와 연계되어 있는 돌 배 설화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가락국기에 있는 허왕후의 바다도래 모티프가 고유 민속인 돌 신앙과 계집아이의 오줌으로 표현되는 다산 숭배와 융합된 것이다. 이 설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 사찰의 연기 설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원효의 자리에 적어도 부산 경남 지방에서는 허왕후가 대체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의미 있게 지적할 수 있다. 허왕후 설화가 고유 민속의 다산 숭배와 혼합하는 현상은 김해의 해은사(海恩寺) 설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해은사에는 바다 돌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쌀을 부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기자(祈子) 신앙이 있다. 그런데 이 절은 현존하는 여러 허왕후 영정 중 가장 오래된 것을 모시고 있는 절이다. 그리고 그 영정은 미술사가에 따르면 16∼17세기의 무녀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16∼17세기 이전까지는 무녀가 다산 숭배를 주도해 왔고, 그 이후 어느 때부터는 허왕후가 그 무녀의 역할을 대체하여 다산 숭배의 주체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볼 때 김해와 바다라는 중요한 요소를 겸비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볼 때 허왕후 설화의 확대 재생산의 역사성과 일치한다.
금산 보리암 연기 설화의 허왕후의 등장은 보리암 삼층석탑 연기 설화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보리암 3층 석탑 설화는 "이 석탑은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 월지국에서 가져 온 불사리를 원효 대사가 이곳에 모셔 세웠다"고 전한다. 여기 설화의 주인공 원효는 의상과 함께 한국 불교 설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의상의 불학(佛學), 수도(修道) 등 인민들의 신앙과 다소 거리를 두는 의미를 지닌 설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반면 원효는 대중 구제, 기복 등 인민들의 신앙 생활과 밀접한 부분에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허왕후 설화에 원효가 등장한 것은 허왕후 설화는 사찰 연기 설화로써 사찰의 정통성이나 고색창연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인민들의 기복 신앙의 중심에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설화에서 허왕후가 불교에서의 기복 신앙의 중심 매체인 불사리를 가지고 온 인물로 나타나는 것을 보더라도 이제 허왕후는 적어도 경남 지역에서는 사찰의 기복 신앙과 깊은 관련성을 맺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설화가 경남 지역에서 가장 기복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도량 중에 하나인 남해 금산사 보리암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불교 설화가 토착신앙과 적극적으로 융합하면서 확대되고 문화 변이로 발전하는 것은 결국 불교가 있는 사원 경제 구조로 인해서다. 불교 사원은 초기부터 독자적 경제 구조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기본은 재가 신자들의 기부 행위였다. 그것은 불교의 재가 신자는 더 이상 초기 불교의 탈사회(脫社會)를 통한 해탈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사회 내에서 구복과 치병을 바라고 나아가 공덕 축적을 통해 자신의 업을 개선하여 윤회의 세계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환생하는 것을 바라는 자였다. 그리고 그 구복과 공덕 축적은 철저히 승가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했으니 재가 신자들에게 제일의 종교 행위는 사찰에의 기부였다. 그리고 대상 사찰은 구복과 치병에서 보다 많은 영험과 이적의 능력을 갖춘 것일수록 유리하였다. 이로 인해 사원들은 보다 많은 재가 신자라는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앞 다투어 영통력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찰의 연기 설화를 창조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신비하고 오래된 요소와 견강부회하는 일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구복과 치병을 위해 사찰은 재가 신자들이 오랜 동안 지녀 온 토착신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밖에 없었다. 허왕후 설화가 창조되고 또 나아가 적극적으로 확대된 것이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1995년 김해에서 만들어진 가락불교장유종(駕洛佛敎長遊宗)의 예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가락불교장유종조사창건비(駕洛佛敎長遊宗佛祖寺創建碑) 에 의하면
왕은 왕비의 오라버니인 보옥조사(寶玉祖師)를 국사로 봉하였다. 보옥조사(寶玉祖師) 일명 장유화상은 성의 서쪽 불모산(佛母山)에 가람을 짓고 수도하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셨다. 수로왕과 왕비 사이에서 열 왕자와 두 공주가 태어나서(중략) 제 3왕자는 매(妹)씨 공주를 따라 왜국으로 건너가서 여왕국(女王國)을 세웠다.
장유화상이 수로왕의 국사였고, 나아가 허왕후의 공주가 일본에 가서 여왕국을 세웠다는 설화는 그 성격이 매우 국가적이다. 그것은 그 동안 불국토 관념 이래로 오랜 동안 널리 알려져 내려 온 불교의 국가적 성격과 혼합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사실 이렇게 허왕후 설화가 국가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일연(一이然)이 갖는 허왕후 설화에 대한 이해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일연(一然)은 파사 석탑을 찬하는 자리에서 주석을 통해 파사 석탑의 허왕후에 대한 비호가 결국 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왜(倭)의 노략을 막는 것과 그 본질적 의도가 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연(一然)에 의해 허왕후 설화 가 불교의 진호(鎭護) 국가(國家)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공유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예이다. 결국 이러한 전통은 계승되면서, 일연으로부터 약 900년 후 허왕후. 장유 화상에 의해 시작된 가락 불교는 김용채 가락불교 장유종단 이사장의 『창건비건립사(創建碑建立辭)』를 통해 구국(救國), 애국(愛國), 조국 통일(祖國 統一)의 사역(使役)을 담당하는 국가주의의 첨병으로 자리 잡는다.
Ⅸ.결론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처음 나오는 허왕후 설화는 고대의 다른 설화와는 달리 그 확대 재생산된 정도와 양상이 매우 크고 활발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설화 속의 '야유타국' 모티프로 인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허왕후는 원래 고대 신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물에 서 올라오는' 지모신(地母神)이었으나 '아유타' 모키프가 삽입됨으로써 설화가 크게 변화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 '아유타'는 고대 인도 최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서사시 『라마야나』의 성도(聖都)로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혈통 중심의 이상 군주 정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정치 사회적 표제어이다. 그런데 그 '아유타'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로써가 아닌 본질적으로 왜곡된 '인도'와 동일시되는 의미로 알려졌다. 그것은 신라 중대와 고려 초기 사이에 불경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불경 속에 군데군데 들어 있는 '아유타'를 '인도'와 동일시하면서 특정 사찰에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통일 신라 이후 형성된 불국토 관념 아래에서 한국이 인도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불교의 역사 인식에 의한 것으로 그 안에서는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들이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윤회 세계의 인연(因緣)의 법칙에 따르는 것만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적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에 의거하여 사료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거나 왜곡, 과장 혹은 상상을 통해 채록하고 편찬하며 만들어 낸다. '아유타'가 허왕후의 고향으로 설정된 것은 바로 이러한 불교적 역사 인식 아래 이루어진 '역사 만들기'의 일환인 것이다. 그 후 허왕후는 보다 많은 민간 신앙의 여러 요소들과 융합하면서 그 설화를 확대해 나간다. 파사 석탑 설화가 만들어지고, 허왕후가 도래한 경로를 설화의 세계에서 끄집어 내 실제의 민속놀이로 만들고,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왕후사를 세우는 등의 적극적인 문화 형성의 동력으로 역할을 한다.
'허왕후'는 조선 중기 양천 허씨의 족보 편찬 과정에서 시조로 연계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허씨 성을 하사하는 인물로 자리 잡은 '열 아들'의 모티프가 만들어지면서 역사적 인물로 자리 매김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칠 왕자'와 '장유화상'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창조되고 이후의 설화는 산에서는 '장유화상'을 중심으로 그리고 바다에서는 '허왕후'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 전파의 설화로 확대해 간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아유타', '파사 석탑', '칠불', '장유화상', '월지국' 등의 모티프가 사찰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산사기의 내력을 통해 사찰은 이러한 설화 창조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고 있다. 사찰 당국이 주도로 설화를 확대하는 작업은 주변의 민속 신앙과의 적극적 융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사찰은 민속 신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불교 안에서 구복을 추구하는 보다 많은 재가 신도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찰의 경제력 확보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러한 허왕후 설화의 확대는 불교 역사 인식의 산물이다. 고대 신화의 인물 가운데 유독 허왕후만을 중심으로 그 설화의 확대가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은 그 확대 작업이 바로 그러한 역사 인식을 갖는 곳 즉 불교 사찰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불교와 국가가 이데올로기와 물질을 상호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는 역사적 환경에서 가능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면서 허왕후 설화를 채록하고 거기에 평을 붙임으로써 자신만의 의미 부여와 가치 창출을 한 찬자 일연(一然)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좋은 에이다.
허왕후 설화가 사찰에 의해 현대까지 확대되어 이어져 왔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것은 1977년 한 아동 문학가에 의해 창작된 한 이야기가 관련 학자들의 무관심과 일부 학자들의 치열하지 못한 학문적 태도와 언론의 상업적 포퓰리즘으로 인해서였다. 그로 인해 가야의 설화는, 특히 일반인들에게 역사로 그것도 매우 신비롭게 채색되어 자리 잡았다. 이는 설화를 연구하는 학자에 의해 설화가 왜곡된 역사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거에나 지금이나 '역사 만들기'는 사제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허왕후 설화는 최근 김해김씨가락중앙종친회에 의해 설화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인도 아요디야로까지 역수출되기에 이른다. 2002년 북부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시(Uttar Pradesh) 주에 있는 아요디야시(市) 사라유 강가에는 가락중앙종친회에 의해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 비문에는 비가 서 있는 곳이 허왕후의 탄생지라는 글이 한글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고, 그 공원 입구 정문에는 허왕후 설화가 현대에 들어 대중화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쌍어문'이 그려져 있다. 허왕후 탄생비를 아요디야의 사라유 강가에 건립한 것에는 인도의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적극적 후원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인도국민당은 힌두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극우 파쇼적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정당인데 그 정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을 아요디야에 두고 있다. 인도 국민당과 그 방계 세력들은 1992년 12월 아요디야에서 신화 라마야나의 라마 사원을 복원한다면서 기존의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232명의 인명 살상을 초래하였고, 그 후로도 폭력은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살해되고 수십만 명이 가정을 잃게 되었으며 천문학적인 재산 손실을 가져 왔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금도 특히 총선과 관련된 시기에 집중적으로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도의 극우 패권주의 세력들에게 한국에서의 '아요디야에서 온 공주 허왕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권 정당성의 근거가 될 가능성 마저 있다.
2003. 9. 한국고대사학회의 『한국고대사연구 31집』에서
첫댓글 알고 시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