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부두 vs 국제시장에 얽힌 이야기(구기차 올인코리아 네티즌 논객)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어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 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위 가사는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다. 이 가사에서 보듯 ‘흥남부두’와 ‘국제시장’이 떡하니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흥남부두에 얽힌 비화를 간략히 들어보자.
세계 전사(戰史)상 빛나는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압록강까지 쳐 올라갔던 미군과 국군은 압록강 물로 밥을 지어먹고 있었다. 하여 인민군이 괴멸되자 북괴 괴수 김일성은 중공의 주석인 모택동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병력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자 소련의 공중지원과 군사물자원조를 조건으로 하여 1950년 10월 19일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공군은 이른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활용한다며 밤에만 북을 뚜드리고 꽹과리를 치며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물밀 듯 기습침투하며 미군과 국군을 괴롭혔다. 영하 20도를 넘는 살을 에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밤잠까지 설쳐야하고 콩 볶듯 쏴대는 다발총소리는 그야말로 귀신의 곡(哭)소리보다도 더 무서웠을 것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때 중공군이 개입만 안했더라면 38선이 그어지지도 안했고 남북통일이 이루어졌을 텐데 천추(千秋)의 한(恨)이라 생각하며 사실상 중국과 소련이 남북통일을 훼방 놓은 훼방꾼인 셈이다.
이렇게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군 10군단과 국군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 10만 여명과 함께 선박 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 바로 세기(世紀)의 흥남철수작전(興南撤收作戰)이었던 것이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선 그때의 긴박한 순간과 가족 간의 처절한 이별과 슬픔을 담아낸 노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철수작전 시 동원됐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이었던 미국인 로버트 러니는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배안의 실상을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갑판에는 쓰레기와 사람들의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물도 화장실도 없는 화물선에 1만4.000명이 들끓는 급조도시(急造都市)의 불결함을 상상해 보세요… 영하 20도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아이들을 품속에 넣은 부부가 서로 껴안고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이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참상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시장’하면 떠오르는 것이 피난민들이 주로 정착하여 삶의 터전이 되었던 곳이다.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위치한 재래시장인데 1945년 광복 후 전시 물자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던 상인들이 지금의 국제시장 자리를 장소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여기서 장사를 하며 활기를 띠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을 통해서 전국으로 공급되며 국제시장은 그야말로 ‘사람 빼고 다 외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요즘 ‘국제시장’ 영화가 극장가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고 눈물로 벗을 삼고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 즉 1950~60년대에 오직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우리들의 부모님세대를 그려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면, 1950년 6.25한국전쟁 후 부산으로 피란 온 ‘덕수’(황정민 분)의 다섯 식구가 등장하는데, 전쟁 통에 헤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덕수’는 고모가 운영하는 부산 국제시장의 수입 잡화점 ‘꽃분이네’서 고모를 도우며 일한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남동생의 대학교 입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 독일에 광부로 떠난 ‘덕수’는 그곳에서 첫사랑이자 평생의 동반자 ‘영자’(김윤진 분)를 만나게 된다. 그는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 ‘꽃분이네’ 가게를 지키기 위해 선장(船長)이 되고 싶었던 오랜 꿈을 접어야만 했고 다시 한 번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건너가 기술 근로자로 일하게 된다.(이하생략)
이렇게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고초가 컸던 피난민시절, 돈을 벌기위해 남의 나라 3D업종도 마다않고 기꺼이 투신해야했던 파독광부와 간호사시절. 베트남 전쟁까지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된 우리 부모세대들의 산업화 전 과정을 그린 감동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문재인이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영화 ‘국제시장’대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관람했다고 해서 정치권에서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많다. 영화선택이나 관람은 개인의 자유의사라지만 구설수에 오른 것은 그가 공인(公人)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국제시장’ 영화 속에는 흥남철수작전 배경이 나오는데 문의원은 이 작전에 사실상 도움을 받은 인물이다. 그 작전 때 흥남부두에서 부모와 배를 탔던 피난민 10만 명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즉 어머니의 뱃속에 들은 채 영하 20도의 강추위를 견디며 월남하여 피난민들이 정착했던 거제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흥남철수작전 배경이 담긴 영화 ‘국제시장’을 당연히 보고 옛날을 회상할 줄 알았더니 굳이 외면했다는 것에 그 의도가 의아스럽고 의구심이 가는 것이다. 전쟁사상 가장 참혹하고 처절했던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까운 군사 장비를 버리면서까지 적(敵)국의 난민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휴머니즘으로 미국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부모와 더불어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온 피난민이 바로 문의원이다. 그런 문의원이 미국의 도움을 잊은 채 미군철수를 주장하거나 NLL을 부정하고 한미FTA에 반대해 왔으며 노무현 정부시절 사면복권을 통해 내란음모 대역죄인 이석기를 탄생케 한 ‘종북숙주’라는 의심을 받고 있고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문의원이 그때 월남하지 안했더라면 북한식 사회주의독재정권 통치하에서 어떻게 편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는지 매우 궁금할 따름이다. 자유를 찾아 월남했기 때문에 변호사도 됐고 대통령비서실장도 지냈고 대통령후보에 출마했고 국회의원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나서면서 서울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달랑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에만 참배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참배를 외면한 것과 자기와 관련된 이번 ‘국제시장’ 영화 관람을 피하고 ‘님아, 그강을 건너지마오’ 영화 관람을 했다는 것이 그의 정체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구설수에 오르고도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문의원이 2017년 대선에 재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이어 6.25전쟁 후 산업화세대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새정연 대표직을 놓고 DJ비서실장 출신 박지원 의원과 당권도전에 나서고 있다. 옛정권의 비서실장들의 한판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김일성일가가 꿈속에서 나타나 손짓한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거나 정부가 방북을 불허할 만큼 비중이 큰 친북인사다. 그들이 있는 한, 그들이 전향하지 않는 한, 이념전쟁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영화,"국제시장, 평론가를 평론한다(세인애비 수컷닷컴 회원) http://sookut.com/481535807235 2014-12-29 간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만났고 눈물도 맘껏 흘려보고 나온 영화 ‘국제시장’... 평론가를 평론한다. 요즘 예능프로에 나와 연예인들과 히히덕거리기나 하는 몇몇 평론가들의 평론이 하도 같잖지가 않아 그들에 평론을 평론해본다. 먼저 김태훈 왈 “늙은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를 영화로 꼭 다시 봐야 되나?”라고 했는데. 이 친구는 평상시 방송에서도 자신에 아버지를 늙은 노인네 취급 하길래 그저 방송소재 개그 였겠거니 했는데, 아버지의 늙음에 경륜이 진짜 받아드릴 수 없는 거부 대상이었던가 보다. 그리고 허지웅이라는 친구는 “책임지지도 못하는 시니어 세대의 반동으로... 토 나오는 영화”라며 비평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악평을 해댔다. 고급스런 언어로 포장해서 그렇지 “시니어 반동”이란 말을 직설로 풀이하자면 “늙은 수구들의 꼴통짓”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 영화를 혹평, 비판 대상에 올리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했다는 이유인데, 이 영화 어디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박’자도 나온 것을 못 봤다. 솔직히 미화시킨 영화로 치면 광주사태를 미화한 ‘화려한 외출’이나 노무현을 노골적으로 미화시킨 ‘변호인’만한 영화가 더 있었을까? 그 두 영화는 일본의 대동아전쟁 미화에 버금가는 픽션의 극치 미화 영화이다. 아버지 세대의 가슴 아팠던 실상과 핏줄 혈육의 이산가족 아픔이 토 나올 정도의 영화 일까? 난 그 영화를 보고 토보다 눈물이 나와 미치겠더만... 그리고 김태훈이나 허지웅, 이들은 평론가 자격조차 가질 수 없다. 이들의 망언 주저리에서 보듯 이들은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조차 보지 않은 채 막연히 박대통령을 미화했을 거라는 단정으로 비평을 한 것이다. 역시나! 같은 과 진중권이 이 영화를 이렇게 비아냥댄다. ‘이 영화를 보고 비판을 하면 호로자식이냐’고... 어차피 비평을 안 해도 타고난 ㅎㄹ과들이지만 영화조차 보지 않고 비평을 해대는 것들이야 말로 진짜 ㅎㄹ의 후손들 아닐까?
국제시장(궝키스칸 조갑제닷컴 회원)
감독 윤제균, 황정민/김윤진 주연, CJ엔터테인먼트, 2014.12.17(수)개봉
이 영화는 한 마디로 한국현대사를 부산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사람의 인생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영화이다. 눈물 나는 희극이고, 일종의 微視史이다. 영화의 의미도 가족을 위한 희생, 역사 축소판, 개인의 인생역정, 성장신화에 대한 추억, 평범한 아버지의 위대한 이야기,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 차원이 높은 가족영화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와 어미니를 생각하면서 제작했고, 실제 극중 주인공 이름은 부모님 이름이다. 실제 주연 황정민도 윤제균 감독이 아버지 이야기라고 하니 각본도 보지 않고 주연배우를 수락했다.
국제시장은 부산에 갈때마다 자갈치시장으로 갈 때마다 지나왔던 생기가 넘치는 곳이고, 주변에 Biff광장, 초량동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있는 영도다리와 어울려 즐겨 찾던 곳이다. 국제시장은 부산중구 신창동 1-4가에 있는 대규모 시장으로, 1945년 광복이후 형성되었고, 1950년 미군군용물자와 밀수입이 증가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1953년 1월 대화재가 있었지만, 그 이후 재건되었고,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도때기 시장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고, 사고 싶은것이 참 많은 시장이고, 없는것이 없는 도깨비같기도 하다. 지금도 자갈치시장, 롯데백화점과 함께 광역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는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흥남철수작전, 파독, 베트남전 등 현대사의 큰 사건을 주인공에 투영시킨다. 그리고 현대사의 큰 인물인 정주영, 앙드레 김, 남진 등 유명인사들이 지나가면서 사실감을 더한다. 덕수의 이야기로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한다. 보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렀다. 물론 과거의 추억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수 있지만, 현대사의 희극과 성공을 보면서 운 사람도 많다. 또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영화는 有史이래 가장 인도적인 철수작전인 흥남철수작전으로 시작된다. 흥남철수작전 장면만 해도 그래픽으로 잘 처리하여, 블록버스터로 손색이 없었고, 아름다웠다. 병력 105,000명, 차량 17,000대, 피난민 98,000명을 성공리에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그 과정이 너무 간략하게 나와서 개인적으로 아쉽지만, 그것은 감독의 영역이기에. 아몬드장군, 현봉학박사, 레너드 라루 선장이 피난민을 승선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현봉학 박사와 포니대령은 Almond장군에게 강력하게 건의했다. 후에 아몬드 장군이 현봉학박사의 고향이 함흥인 것을 확인하고 "저 사람은 98,000명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여기에 온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주인공(43년생)은 승선과정에서 동생(막순 45년생)을 놓치고 33년동안 못 보게 된다. 동생을 찾으러 간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덕수에게 맡기고(네가 이제 가장이다), 동생 막순이를 찾으러 간다. 그는 아마 거기서 죽거나 중공이나 빨갱이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배는 동생과 아버지를 싣지 못한 채 12월 23일 출항한다. 그들이 탔던 Meridith Victory호는 부산에서 입항거부되고,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도착하면서, 성탄의 선물이 된다.
여담이지만, 2차 대전당시 수면 아래에는 잠수함, 수면에는 빙하, 공중에는 독일군 폭격기가 돌다다녔던 공포의 북해에서 무사고 운항을 햇던 Leonard Larue선장은 흥남철수작전 성공 후, "God's own hand was at the helm of my little ship"이라 되뇌면서 베네딕트회 수도사가 되었다. 그에게도 저 작전은 불가능해보인 것이었고,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였다(Brother Marinus). 그래도 1993년 메러디스빅토리호가 폐철이 되었을 때 우리가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개조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선장이 꿈인 덕수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정주영을 만난다. 정주영은 덕수에게 배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 한다. 물론 덕수는 차라리 국내에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한다. 나중에 정주영은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통해 두 가지 꿈을 다 이룬다. 그러던 중 덕수의 동생 승규는 서울대에 합격한다. 그는 동생학비를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는 거기서 평생의 베필인 영자를 만난다. 그는 1967년 의무복무 3년을 끝내고 한국에 귀국한다. 그 사이 집을 마련했다. 그들의 인생이나 다름없는 "꽃분이네(현 3공구 영신상회"에는 앙드레김이 와서 감격하고 돌아간다. 앙드레김의 국내파 신화는 부산국제시장에서 시작했을까?
끝순이 결혼할 무렵, 고모부가 주인공의 일생인 "꽃분이네"를 처분할 무렵, 영자가 반대했지만, 그는 해양대에 합격하며, 선장의 꿈을 포기한 채 월남으로 간다.(영화에서는 74년이라고 하지만 한국군은 73년에 철수했다. 그리고 중동으로 생산기반을 옮기고 있었다)그는 평생지기 달구와 함께 한진그룹의 트럭을 타면서 전쟁물자를 배송했다. 그러면서 그가 준 초콜렛을 받은 아이의 도움으로 폭탄테러를 피한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월남민을 태우고 철수한다. 철수중에 해병출신 남진을 만났다. 1975년 월남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그는 다리가 다친 채 국제시장으로 돌아오고, 끝순은 결혼하고, 친구 달수는 그가 구조했던 월남여인과 국제결혼하여 다문화가정을 꾸렸다.
1983년 그는 이산가족찾기프로그램을 통해 LA에 있는 동생 막순을 찾는다. 어린 시절 입양되어 한국말과 이름을 잊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운동장이 아니야"란 마지막 말과 팔이 찢겨진 배넷저고리를 보여주면서 가족임을 확인한다. 아마 철수하는 미3사단이나 해병1사단이 구해주지 않았을까한다. 덕수는 아버지의 유훈을 실천하고, 어머니는 이제 여한이 없어지면서 1984년 세상을 등졌다. 참 다행이란 것을 느꼈다. 영화지만,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라루선장이 생명을 긍정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많은 가족들이 모인 것을 보면서 덕수와 영자는 보람찬 인생을 살은 것 같다. 세대간 소통이 단절된 것은 아쉽지만. 비록 덕수는 마도로스는 되지 못했지만, 가장으로서 훌륭했다. 영화가 과거의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산업화세대의 땀을 인정하고, 대한민국을 긍정한 영화이다. 일부 영화처럼 편집이나 왜곡 없이 Fact만 그려냈다. Fact만 그려내도 훌륭한 영화이다. 그래서 2030부터 남녀노소 골고루 영화를 보았다.
"서독 꼭 가고 싶습니다", "쪼콜레토 기브 미" 같은 아버지 세대의 패기도 배우고 싶다. "수난을 우리자식이 아니고 우리가 겪은 게 다행",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여, 이만하면 잘 살았지여, 근데 내 진짜 정말 힘들었거든요"란 대사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외에 나갔지만, 우리 세대는 산업화(아버지)세대가 구축해 놓은 기반을 발판으로 꿈을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나간다. 그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목숨 걸고 견인한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영화와 지역상권 활성화의 창조경제로 연결되기를. 참고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28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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