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서원
자산서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곤재 정개청(1529~1590)선생과 참봉을 지낸 그의 동생 정대청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자산서원은 곤재 정개청 선생이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정개청 선생을 봉사하는 서원을 설립하여, 미수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의 상소로 1677년(숙종 3)에 복원되었으며, 1678년 <자산(紫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훼철되었다가, 1689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정대청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조정으로부터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원을 되풀이하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하였고 8.15 해방 이후 1957년 복설된 뒤 1988년 대규모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정개청 선생의 호는 곤재,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1529년(중종24년) 현재의 나주시 금성산 밑 대곡동(현재 경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1570년경에 함평군 엄다면에 정착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강의가 가깝고 먼 곳에까지 알려져 수많은 선비들이 제자로서 선생을 받들었으며 현달한 제자로는 나덕준(나주인 현감) 나덕윤(나주인 감찰), 나덕현(나주인), 나덕수(나주인), 나덕원(금성인 현감), 정지함(예조좌랑), 안중묵(보성, 직장), 최홍우(화순, 별좌), 남이공(좌의정) 등 헤아릴 수 없는데, 선생의 저서인 우득록(愚得錄)에는 나덕준 등과의 서답 내용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곤재선생이 1590년 4월 기축옥사에 연루되었을 때 저서를 포함한 1천 여 권의 책을 압수당하였는데 선조가 우득록을 읽어 보고 「이 책은 옛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로다. 모두 본가에 돌려주도록 하라」하여 되돌려 보냈으나 우득록만 본가에 돌아오고 나머지는 분실하였다.
정대청 선생은 정개청 선생의 죽음 뒤 동생 대청은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또 그 스스로 14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으며, "형께서 도를 지키시다 원한을 머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능히 설욕을 못했으니 내가 죽은 뒤에는 제사에 어육(魚肉)을 쓰지 말라"는 한스런 유언을 남겼다.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에도 곤재 정개청선생 제자들과 정대청 선생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이순신 장군을 적극 협조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곳 자산서원에는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생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집인 곤재 우득록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중기 호남유림의 종장이라 일컫는 정개청을 모시는 자산서원을 2020년 11월 30일 함평군에서는 향토문화유산로 지정하였다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에 위치한 자산서원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조화로운 전통 건축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 유학 정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