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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당신의 마음이리다.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종시 들리지 않습니까?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내가 미련합니까?미련하다 우십니까?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 靑馬 柳致環 시인(1908~1967)의 문학정신을 보존,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2월 1,220평의 부지에 문학관(전시관)과 생가
(본채, 아래채)를 복원, 망일봉 기슭에 개관하였다.
전시관(51평)에는 청마의 삶을 조명하는 '청마의 생애'편과 생명 추구의 시작을 감
상하고 작품의 변천,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 세계'편, 청마가 사용
하던 유품들과 청마관련 평론, 서적 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편, '시 감상 코
너'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마의 유품 100여점과 각종 문헌자료 350여점이 전시
되어 있다.
원래 청마 생가는 통영시 태평동 522번지이지만, 생가 부지에 복원의 어려움이 있
어 지금의 위치에 생가 및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3) 청마의 시
춘신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적은 멋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말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적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나다가 이 보오얀 봄길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적은 길이여 나는 학이로다
박모(博募)의 수묵색 거리를 가량이면 슬픔은 멍인 양 목줄기에 맺히어 소리도 소리도 낼 수 없누나
저마다 저마다 마음 속 적은 고향을 안고 창창(蒼蒼)한 담채화(淡彩畵) 속으로 흘러가건만 나는 향수할 가나안의 복된 길도 모르고
꿈 푸르른 솔바람 소리만 아득한 풍랑인 양 머리에 설레노니
깃은 남루하여 올배미처럼 춥고 자랑은 호을로 높으고 슬프기만 하여 내 타고남이 차라리 욕되도다
어둑한 저잣가에 지향없이 서량이면 우러러 밤 서리와 별빛을 이고 나는 한 오래기 갈대인 양
- 마르는 학이로다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청마 생가를 보고서 근처 큰누이 해물마을(632-8172)에 가서 점심식사로 해물된장을 먹었다. 담치를 넣어 맛은 있었으나 조금 짠 편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니 윗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덥다. 아침에는 제법 쌀쌀하니 요즘의 날씨는 아침은 봄, 대낮은 여름, 밤은 가을의 날씨이니 참 묘하다.
통영으로 가면서 신선 회장님의 개그 한 토막
한의원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은?
- 밥이 보약이다.
치과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 무자식이 상팔자이다.
박정선 고문의 나무의 신화에 관한 문학강좌
높은 건물이 있는 도시가 형성되기 전에 나무가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가장 키가 큰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세까지 계속된다. 나무 신화는 바다에서 나왔다. 이 논리는 다소 진화론적이다.
박정선 고문의 문학강좌를 듣다보니 통영이 가까워 왔다. 충렬로 도로에는 충렬사가 보인다.
임종성 시인가 인사를 하였다. 그는 대학 4학년 때에 시작을 하다가 시인이 되고 통영에서 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의 ‘미류나무와 남풍’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은 통영의 박목월 문학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2년 후에 남성여자고등학교로 옮겨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었단다.
언덕에서 내려가 다리 아래의 바다와 통영시내를 바라보니 과연 ‘한국의 나폴리’라는 말대로 너무 아름답다. 홍콩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 본 바다도, 이탈리아의 나폴리, 그리스의 밧모섬에서 본 경치도 이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2. 박경리 문학관
버스는 우리를 싣고 농촌과 다름없는 통영 교외의 어느 언덕 아래의 한적한 박경리 문학관 앞에 데리고 갔다. 작은 언덕 위에 선 문학관의 뜰에는 태양광 발전시설들이 서 있다. 이것들에서 발전된 전기는 박경리 선생의 동상 아래에 집전이 되어 이 문학관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실컨 사진을 찍고 있는데, 키가 크고 잘 생긴 이곳 문학관장이 직접 설명을 하셨다. 그는 시조시인인데, 임종성 박사의 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제자라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이 문학관은 25살에 좌익사상을 지닌 남편과 사별한 박경리 선생은 고향을 떠나 사위 김지하 씨가 아버지를 따라 잠시 지냈던 원주에서 딸과 같이 살다가 만년에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작고하여 문학관 위에 묻히고 재봉틀, 장롱, 한복 두루막, 후배가 준 누비 한복 상의를 전시해 두고 있다.
1) 박경리 작품세계
박경리는 1955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래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1969년부터 연재를 시작, 26년에 걸친, 4만 여장 분량의 '토지'는 박경리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작품에 대한 여러 논의들, 즉 역사소설인가 아닌가가 문제시 되었다거나 농민소설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거나 총괄체 소설, 가족사 소설, 민족사 소설, 총체소설 등의 다양한 장르로 규정되어 온 것은 곧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서사구조, 다양한 층위의 세계가 중층적인 구조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지'는 거대한 원고지 분량에 걸맞게 7백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시간적으로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라는 한국사회의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격동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동학혁명에서 외세의 침략, 신분질서의 와해, 개화와 수구, 국권 침탈,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종적인 축으로 하여 진주와 간도(만주), 경성, 일본 등으로 삶의 영역이 확대되고 윤 씨 부인과 최치수, 최서희로 이어지는 최 참판 댁과 연결되어 삶을 엮어가는 평사리의 주민들, 김길상이나 김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에 투신하는 인물들, 최 참판 댁의 전이과정 속에서 부침하는 신지식인들 등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박경리의 문학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소외문제, 낭만적 사랑에서 생명사상으로의 흐름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 생명사상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바로 '토지'이다. 박경리에 의하면 '존엄성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가장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파시 제1권, 131면, 1993)인데 박경리는 그의 작품에서 이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생명본능 이상으로 중요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바로 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장 강한 의지의 인물로 등장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 있어서 존엄성의 문제는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 및 권력과 집단에 대한 비판, 욕망의 노예가 되어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존엄성을 상실할 때에 바로 한이 등장하는 것이며 이 한을 풀어가는 과정이 곧 박경리 문학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토지'를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생명사상은 바로 이 존엄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은철 상지대 국문과 교수)
2) 박경리 생애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 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 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시인 김지하가 사위이다. 박경리 선생은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2008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김춘수 생가
박경리문학관을 나와 김춘수 생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이곳은 통영이라기보다 농촌이다. 새파란 마늘은 제법 자라 마늘쫑다리를 뽑아내기 직전이다. 버스는 푸르고 싱싱하여 노익장을 자랑하듯 서있는 표구나무 숲을 지나 산으로 오른다. 간간이 나타나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무찔렀던 통영 앞바다 푸른 바다가 보인다. 우리들은 너무 아름다워 탄성을 질렀다. 작은 어선들은 바둑판과 같은 굴 양식장 곁에서 하얀 바둑알처럼 여럿이 떠서 靜中動 하고 있다. 이 버스도 고독을 즐길 줄 아는지 호젓한 산길로 골라 달린다.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 과연 한국의 나폴리로 탄성을 지를 만도 하다.
도심으로 내려왔다. 이곳은 1966년 이후 몇 차례 왔기에 낯이 익다. 신선한 해산물과 생선이 있는 중앙시장 앞에서 조금 더 나아가 우리가 닿으니 꿀빵을 선전을 하는 이도 보인다. 이곳에는 작은 조선소, 등대, 유람선, 작은 섬들 몇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의 아름다운 부두가 점차 사람의 손을 많이 타고 있어 마치 한 때에 한 인물값을 하였으나, 지금은 얼굴을 뜯어 고쳐 짙은 화장을 한 주모와 같다. 표지석만 남아 이곳에 김춘수가 살았던 곳으로 확인된 곳인데 시인의 생가에는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나보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인정샷을 찍고서 그곳을 떠났다. 시간의 제약으로 그의 문학관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우리들은 김춘수 생가 앞에서 백성기 장로님께서 거리의 호떡을 사서 우리들에게 나눠주었다. 우리들의 모습은 불난 호떡집 앞에 선 것 같다. 배가 좀 출출할 때에 인지라 맛이 있었다.
김춘수(1922~2004년) 생가는 통영시 동호동 남망산공원 입구에 위치한 동산약국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골목길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옛날 김춘수 선생이 살았던 자리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거주하는 사람이 있으나 옛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008년 3월에는 봉평동 옛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4층에 ‘김춘수 선생 유품전시관’으로 ‘꽃의 시인’ 김춘수선생의 유품전시관을 개관하였다
1) 김춘수 시 계계 김춘수의 시 세계는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와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 탈이미지의 세계,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강조되던 시기가 있다.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 태생.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 ‧마산고 교사, 마산대 ‧ 경북대‧ 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거쳐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경남문학상, 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柳致環)‧ 윤이상‧ 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고, 1946년부터 조향(趙鄕)‧ 김수돈(金洙敦) 등과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했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유치환(柳致環)‧ 송욱(宋稶)‧ 고석규(高錫珪)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다.
2) 작품집 가. 시집 :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 등이 있다.
나. 시론집 :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1958), 『시의 이해』(1972),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과 수상집 『빛 속의 그늘』(1976), 『오지 않는 저녁』(1979),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1980)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6년 『김춘수 전집』(1권 시, 2권 시론)을 간행하였다. 김춘수의 시 세계는 크게 4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이때에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이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곧 묘사를 지향하는 세계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진 「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셋째 시기는 「처용단장」 제2부를 중심으로 하여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넷째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로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강조되며, 그후 1990년대 초에는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3) 김춘수의 시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4. 동피랑길
그곳에서 골목을 따라 한국전쟁 중에 통영까지 내려온 피난민들이 남망산 언덕 위 동호동에 집을 짓고 살았던 ‘동피랑길’을 올랐다. 그곳의 언덕 마을의 벽에는 감천문화마을처럼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있다. 그림은 부산의 벽화에 비해 색감도 밝고 테마도 좋은 것을 선택하여 잘 그려져 있다. 그곳에서 보면 통영의 푸른 바다가 바로 보이기 때문에 그림의 색상은 바다와 닮아 파란색이 많고 어린이들조차 즐거워할 만한 꿈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동피랑 마을 통영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 언덕에 있는 마을로, ‘동피랑’이란 이름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다.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길을 따라 강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피랑마을에 오르면 담벼락마다 그려진 형형색색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統制營)의 동포루(東砲樓)가 있던 자리로,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여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자 2007년 10월 ‘푸른통영21’이라는 시민단체가 공공미술의 기치를 들고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18개 팀이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로 꾸며진 동피랑마을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자 통영시는 마침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헐고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철거 대상이었던 동네는 벽화로 인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였다. |
골목을 따라 아래에 내려오니 서호시장(중앙시장) 앞이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보였다. 버스에 도넛을 팔러온 할머니가 있었다. 부두의 플래카드에는 ‘멸치와 소금으로 대통령 만들기’라고 적혀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멸치 어장의 김홍조 장로의 아들인 김영삼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많이 사달라는 뜻일 것이다.
최훈조 목사님께서 가족과 약속시간 때문에 먼저 부산으로 가게 되어 아쉬웠다. 목사님, 오늘 이곳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이순신 공원으로 갔다. 언덕을 오르니 푸른 바다와 30m 정도 높이의 좌대와 동상이 있다. 조선시대의 대포인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그 앞에 펼쳐진 바다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동상은 올려다보지 않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는다고 여념이 없다. 그러나 동상 아래에 적힌 글자 한자 한자 꼼꼼히 읽는 이들은 허성욱 목사님 외 부크문 회원들이었다.
우리들은 사진을 찍다가 잔디밭으로 된 넓은 언덕 아래의 바다가로 내려갔다. 파도가 좀 있는 바다와 널찍한 바위로 가다가 접근을 막는 것 같다. 우리들은 언덕 위로 올라와 수다를 떨었다. 언덕을 오르니 안유환 목사 사모님, 최경희 권사, 전진경 권사 3인방이 명곡을 부르고 있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앞으로 부크문 합창팀을 발족하여 병원의 공연 등 활동했으면 어떨까 한다.
양윤형 시인은 충무김밥을 주문하고서 거가대교 휴게소에서 먹기로 했다. 버스에 올라 허성욱 목사의 기도로 공식일정을 마쳤다.
버스가 움직이니 금방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바람이 조금 남아 있는 그곳의 벤치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제법 잘 먹힌다. 김밥을 좀 먹고 기름장을 바르기도 하고, 오징어 깍두기로 밥을 다 먹고 절인 무를 먹기도 하였다.
오다가 탄성을 지르며 맞은 붉게 불타며 넘어가는 아폴로의 불마차가 서편하늘로 넘어가며 낙동강에 비친 저녁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명지 을숙도 하구언, 만덕을 둘러 부산에 왔다.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던 부크문의 춘계문학기행이었다.
첫댓글 공기화 교수님이 벌써 문학기행문을 보내주셨는데 제 사진을 군데 군데 넣어서 편집해서 올리려 했는데
제가 요즘 너무 업무가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혹시 기행후기의 느낌이 사라질까봐 이렇게 먼저 기행문만 올립니다
참으로 귀한 글입니다. 모든 분들 한번 보십시오. 그 느낌 오롯이 전해져 올겁니다
공기화 교수님~ 장로님~ 부크문 전 회장님~
선배님~~~ 소상한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데이~ 감사합니다. -예닮-올림
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글을 읽고 있습니다. 유익한. 기행이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