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세태 (마르 10,1-12)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마르 10,2)라고 물었다. 질문 자체가 참으로 고약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전후부터 오랫동안 여성과 아내는 그저 남성과 남편의 재산목록 정도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무지와 야만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사람을 남녀로 만들고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부모를 떠나 결합) 결혼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러니 이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인연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마르 10,1-12)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교회는 혼인에 대해 ‘단일성’, ‘불가해소성’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혼인 생활의 위기를 겪거나 이혼 및 재혼자들은 그 나름대로 다 불가피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교회의 이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면서 힘들어 하거나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과 그 이전의 모든 세대는 긴 역사 동안 거의 중매 결혼이다.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 부모님 일가친척 지인들의 소개로 중매 결혼했지만 척박하기 짝이 없는 환경 속에서도 여러 명의 자녀를 낳고 무한 책임감으로 부모와 결혼의 사명에 끝까지 성실했다. 아마도 시대와 공간의 환경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이 역사의 무대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거의다 이렇게 살았다. 나의 부모님도 그랬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알았는데 다른 세상이 와서 살다 보니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고인이 되신 두 분 부모님께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 아버지는 1997년 어머니 2009년에 차례로 세상을 떠나시고 부모 자녀 간 관계를 정산해보았다. 부부 해로와 평생 부모로 깊은 강 큰 산처럼 존재와 정서의 요람이 되어 주셨다. 이것은 만만치 않은 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이제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영원히 감사할 일이다.
21세기인 요즘 세대 거의 연애 결혼이 대세지만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이혼율과 결손 가정, 또 고아들, 숫제 결혼을 피하거나 결혼을 해도 자녀를 원치 않는 세태, 원인은 무엇이고 대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자녀를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하였지만 기대만큼 되지 못한 어떤 어머니가 하신 고백이 크게 기억된다. “나는 엄마가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몰랐어요.” 이것은 실로 아프고 솔직하며 중요한 고백이다. 사실 우리는 잘 모른다. 부모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를 겪어보면 겨우 희미하게 알 수도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하고, 후회한들 때로는 영영 복구 불가한 참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결혼을 위한 만남에서 결혼까지도 공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면 좋겠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를 위해 ‘가나 혼인 강좌’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상대에 대한 나의 기대 못지않게, 상대를 위한 배려와 희생, 가족관계와 처신, 경제 관념, 생활 습관, 건강, 가치관, 취미 등의 공부들을...
결혼을 위해 외적인 준비들인 상견례 특히 연예인 커플을 무색하게 하는 화려한 결혼사진 촬영 등엔 정열을 다 쏟으면서, 정작 더 필요하고 투자를 해야 할 이러한 공부엔 관심도 열정도 없거나 약하다. 오래전 친구 딸 미선이의 성당결혼식, 삼촌 신부님이 주례를 섰다. 삼촌 신부가 물었다. 결혼을 앞두고 ‘기도는 얼마만큼 했느냐?’라고. 당황해서인지 잠시 결혼식 분위기가 썰렁했고, 두 부부는 침묵했으며, 미선이는 삼촌 신부님의 질문에 야속해서인지 찔끔 눈물까지 흘렸었다. 그런데 참으로 마땅하고 당연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당시는 찔끔 울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녀가 삼촌의 질문을 깊이 이해할 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벌써 저 멀리 호주로 이민 가서 남편과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면서 세 자녀를 낳고 잘살고 있다. 혼인을 앞두고 특히 기도에 주목한다. 구약성경 토빗트기,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였다. 결혼 첫 날, 그 밤으로 전남편들이 다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라는 여덟 번째 토비야와 혼인하였다. 그런데 이번 신랑 토비야는 특별한 행동을 하였다. 사라의 부모가 신방을 차려주고 나가자 토비야는 사라를 재촉하여 기도에 돌입하자고 한 것이다. “여보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당신과 나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조상들의 하느님,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기도한 후 사라와 토비야는 “아멘,아멘”하고 함께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그리고 토비야와 사라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참조:토빗기 8,1-18) 기도는 그저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닌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귀결시키는 원천이 된다.
덧붙임:
결혼 무경험자에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고, 공부가 짧아 뒤돌아 보면 부끄러울 것도...
그러나 미선이 결혼식 이야기는 꼭 나누고 싶었다.
입력:최성옥 마리 에스텔(20220813:PM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