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토요일; 2016. 4. 9
사도 6,1-7; 요한 6,16-21
서대문 본당; 강동 경희대 병원; 이기우 신부
지금으로부터 50 여 년 전 로마 바티칸에 모인 전세계 5천 여 명의 주교님들이 교황 요한 23세 그리고 바오로 6세와 함께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할 뿐이다”(사목헌장 3항).
저도 40 여 년 전쯤에 사병으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이 섬김의 의무를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었습니다. 논산 훈련소 조교와 연대장 숙소 당번병 노릇을 하면서 제가 배운 말 마디는 하나였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제 이름과 계급이 있었건만 저를 부르는 이름은 단 하나였습니다. “야!” 저는 육군 병과로 100. 즉 보병 병과로 보직을 받았고, 구보와 사격 모두 일등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연대장 숙소 당번병으로 배치되었을 때 도대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오늘 입대했다고 생각하고 살자.” “내일 제대한다고 생각하고 살자.” 이렇게 버텼습니다. 그 당시 탈영하다가 영창에 갇힌 제 동료들이 있었지만 저는 충분히 그들을 이해하고도 남았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백번 더 넘게요.
결국 제대를 앞두고 제 군대생활을 회상하고 묵상한 저의 결론은, ‘섬김의 뜻을 깨우치게 하시려는 것이었구나!’ 였습니다.
섬김은 종으로서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상대방이 기준입니다. 섬김의 교회관은 봉사자로서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섬김의 사도직으로서 세상에 봉사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위험에 처하자 기도하시다 말고 호수 위를 걸어가시면서까지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이 큰 바람 때문에 물결이 높이 일어서 위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이어받기 위해 부제 직무를 신설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사람을 골라서 교회 앞에 내세웠습니다. 이른바 '예수 추종'이 제자들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부제 직무는 사제직 그 자체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잘 났든 못 났든, 어리든 나이 들었든, 아무 상관없이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섬기라고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들과 함께 세상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교회의 이상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섬김을 받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섬기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그러기에 섬김의 사도직이 가치가 있고, 천국은 그들의 것입니다. 심지어 박해를 받으면서까지 섬김을 그만두지 않는 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섬기시는 분들이십니까, 아니면 섬김을 받으시는 분들이십니까?
천국의 월계관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천국의 탈락자로 남으시겠습니까?
세상에서 편하시렵니까, 아니면 천국에서 편하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