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색으로 표시한 곳은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 이에야스가 소유하고 있던 영지, 관동(關東) 8주(州) 255만 석이며 파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미쓰나리 소유의 영지, 오미(近江) 사와산성(佐和山城) 19만 석이다.
■ 서장 ■
케이쵸 5년(1600) 9월 15일, 이에야스(家康)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서군을 합해 20만의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열도를 나누었던 “세기의 결전”이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사후에 발생한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동요를 틈 타 정권탈취를 노리는 이에야스와 그를 저지하려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치열한 투쟁, 그리고 생사를 건 무장들의 허허실실 책모가 전개되면서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 미쓰나리의 거병을 도발시킨 너구리 이에야스의 대도박 -
케이쵸 3년(1598) 8월 18일,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천하인이 되기 위한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그에 대해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토요토미 정권을 탈취할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에야스” 라며 일찍부터 그를 경계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케이쵸 5년, 아이즈(?津)로 이주되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가로인" 나오에 카네쯔구(直江兼?)"는 계속해서 영지 내의 성벽을 보수하며 군사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를 눈여겨 보던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는 모반의 위험이 있다”며 오사카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우에스기를 토벌하기 위해 출발하게 된다.
‘그 사이에 미쓰나리가 분명 군사를 일으킨다. 그를 무찌른다면 일본열도는 토쿠가와가 차지하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를 토벌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실은 미쓰나리의 거병(擧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의 도박이었다. 한 편, 미쓰나리는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각 다이묘에게 결기를 촉구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에 응했던 인물이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이었다. 이들 다이묘들은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우선은 이에야스의 거점인 후시미성(伏見城)을 함락시키고, 미노(美濃)에 침공해 오오가키성(大垣城)으로 입성하였다. 8만 5천 여에 달하는 세력이었다. “미쓰나리 거병(擧兵)”의 소식을 이에야스가 접한 것은,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 였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쿠로다 나가마사(?田長政)”,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야마우치 카즈토요(山?一豊)” 등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와 군평정(軍評定 : 이쿠사효오죠오)을 열었다. 이에야스는 석상에서 “미쓰나리와 행동을 같이 할 자는 군사를 이끌고 미쓰나리에게 가도록 하라. 방해하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누구 하나 떠나는 다이묘가 없었다. 오히려, “토요토미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미쓰나리를 토벌해야한다”고 중의가 일치하였다. 그들은 “미쓰나리 증오”의 감정을 오랜 세월 품고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그러한 감정을 자신의 계획에 이용해 자신과 함께 행동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선봉대로 하고 미노를 향해 군사를 서두르는 한편, 차남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秀康)”는 우에스기를 봉쇄하기 위해 남겨 두고, 히데타다(秀忠)를 대장으로 하는 3만 8천의 대군을 토오산도(東山道)를 향해 진발 시켰다. 오야마(小山)의 진(陳)을 거둔 이에야스는 에도성(江?城)에 들어와서도 움직이지 않고 잠시 형세를 관망한 후, 이윽고 3만 2천 여의 병사를 이끌고 에도를 출발했다.
선봉대를 맡은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들이 정말 미쓰나리와 싸울 것인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쓰나리와 전투를 벌이며 기후성(岐阜城)을 공략하였다. 그들의 충성심에 확신을 얻은 이에야스는 도카이도(東海道)를 돌아 9월 14일 아침, 오오가키성(大垣城)의 북서쪽에 있는 아카자카(赤坂)의 선봉대와 합류, 근처의 오카야마(岡山 : 오카치야마(御勝山)에 본진을 설치하였다.
한편,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는 서군은 오오가키성을 중심으로 집결해 있었지만, 테루모토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꼐 오사카성에 농성하며 출진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휘는 필연적으로 미쓰나리가 맡게 된 것이다.
■ 9월 14일 오후■
- 세키가하라에서 사와산(佐和山), 오사카(大坂)로 향하는 동군 - 이에야스가 진을 친 사실을 알게 된 미쓰나리의 가신 "시마 사콘(島左近)은 선제공격을 통해 서군의 사기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헌책한다. "시마 사콘"과 "가모 사토이에(蒲生?舍)"의 제1대(隊) 는 오오가키성을 나와 쿠이세강(杭?川)을 건너 동군의 상부(上部)와 교전, 여기에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부가 힘을 더하면서 동군을 제압했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를 오카야마(岡山)의 본진에서 조망하고 있었으나 동군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 퇴각 명령을 내린다.
이에야스에게 14일 오후는 서군의 도발보다도 대국적인 공략법을 완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야스는 이미 서군의 제장들에 대해서 유항작전(誘降作戰)을 전개, 끈질기게 항복을 유도하거나 전투 불참가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미 난구산(南宮山)에 포진한 모리측의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와 세키가하라의 마쯔오산(松尾山)에 있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는 이에야스측으로 내응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하던 이에야스는 히로이에, 히데아키 양측 모두에게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설득하면서 결국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과 '모리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것' 이라는 키츠가와 히로이에의 확약을 받아 놓았으니, 9월 14일 오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결전 전 날 전략에 의해 이에야스는 모리군으로부터 3만의 서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만 5천 군세의 배반을 촉발시킴으로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이날 오후에 채택된 이에야스의 정략이 있었다. 이것은 “미쓰나리가 거점으로 하고 있는 오오가키성(大垣城)을 공략해야만한다”는 의견을 배제하고, “전군이 세키가하라로부터 한번에 미쓰나리의 거성인 사와산(佐和山)를 공격해, 오사카로 진출해야만 한다”는 책략을 내 놓은 것이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이 작전 내용을 일부로 서군에 흘려보내게 된다.
이에야스가 오오가키성을 통과해 오미(近江)로 진격, 오사카성으로 들어간다는 정보를 접한 미쓰나리는 급히 성을 나서 세키가하라로 이동하게 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를 결전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포진하고 있던 마쯔오산으로 히데요리(秀?)와 테루모토(輝元)를 맞이해 본진에 합류시킨다는 구상을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히데요리도 테루모토도 결국 출진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미쓰나리의 오산이었던 것이다.
■ 9월 14일 밤 서군 주력부대 세키가하라에 전진 ■
? 이에야스 본진을 야습할 것인가, 아니면 세키가하라에 전진할 것인가 ? “이에야스 서진(西進)” 이라는 정보를 접한 미쓰나리는 그 날 밤 오오가키성에서 군의(軍義)를 열었다. 석상에서 사쯔마(薩摩)의 맹장으로 유명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혹은 시마즈 이신(惟新))"는 “조용히 이에야스의 본진인 오카야마로 야습을 감행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전은 시마 사콘(島左近)의 반대로 채용되지는 않는다. 요시히로는 이에 격분하여 마음속으로 전투 불참을 결정하게 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을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오오가키성에는 7500의 병력을 남겨 두고 서군의 주력군은 세키가하라를 향해 전진하였다. 오후 7시가 조금 지난 시간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큰 비가 내렸고, 야음을 틈타 서군은 오오가키성을 조용히 출발하게 된다. 이시다 부대를 선두로 시마즈(島津) 부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등의 부대가 줄을 이었다.
오오가키로부터 세키가하라까지는 타루이(垂井)를 거쳐 나카센도(中山道)로 향하면 가까운 거리였지만 동군에게 행동을 탐지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남하하여 마키타강(牧田川)으로 나온 후 난구산(南宮山)을 거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는 길을 택했다. 약 16킬로미터에 달하는 행군으로 밤중에 내리는 호우 속에서의 행군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힘들기 그지 없었다.
미쓰나리는 행군 중, 몇몇 일행만을 데리고 난구산하의 오카가하나(岡ヶ鼻)에 있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寺惠瓊)”의 진소를 방문해 참전을 확약받았다."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풍문을 걱정하면서 키츠가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함께 봉화를 신호로 동군의 측면을 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미쓰나리는 또한 마츠오산(松尾山)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중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平岡?勝)"를 만나 같은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서군이 조심스럽게 오오가키성을 나와 세키가하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15일 새벽 두 시, 동군은 행동을 개시하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를 선봉으로 나카센도를 직진하면 약 6킬로 미터 정도였다. 후쿠시마 부대의 선두가 우키다 히데이에의 후미와 접촉할 정도의 급행군이었다.
■ 9월 15일, 오전 4시 ■
? 세키카하라(?が原)로… "유리한 포진의 서군, 독안에 든 쥐인 동군" - 15일 오전 1시경부터 4시경에 걸쳐서 서군은 꼬리를 물며 세키가하라에 도착, 바로 진을 쳤다.
우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 6000이 코세키촌(小?村) 일대에 진을 쳤고 호코쿠가도(北?街道)를 제압한 후 미쓰나리 자신은 그 북방에 있는 사사오산(笹尾山)에 진을 두게 된다. 이시다 부대의 우측에는 히데요리(秀?) 휘하 약 2000이 도열해 있었고, 호코쿠가도(北?街道)를 낀 코이케촌(小池村)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1500이 포진하였다.
시마즈 부대의 뒤를 이어 전진했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4000은, 시마즈 부대의 우측에 있는 텐마산(天?山)의 북부에 진을 쳤다. 마지막으로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 1만 7천 여는 텐마산의 앞에 오단(五段)으로 진영을 만들었다.
이 전진부대와 더불어 이미 세키가하라에 포진하고 있던 부대가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서남에 있는 나카센촌(中山村)의 토코강(藤古川)의 대목에는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 부대 1500, 토코강의 건너편 기슭의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서는 요시쯔구의 아들 요시카츠(吉勝)와 조카인 키노시타 요리쯔구(木下??)의 병력 약 2500여가 있었다.
또한 나카센도(中山道)의 남쪽에 있는 마쯔오산(松尾山)의 산기슭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쯔키 모토쯔나(朽木元綱) 등 4부대, 4000의 병력이 포진. 이 부대는 오오타니 요시쯔구의 지휘하에 있었고,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 마쯔오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만 5천이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난구산(南宮山)의 주변에는 이미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寺惠瓊),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각 부대를 합쳐 3만 여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동군이 세키가하라에 진군해 준다면 난구산에 포진하고 있는 대부대에 의해 동군은 독 안에 든 쥐가 될 형국이었다. 이에야스가 이 난구산의 부대를 중시여겨,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에게 내응을 확약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서군으로써 세키가하라에 포진한 총병력은 8만 수 천 여. 동군의 총병력보다 1만 명 이상 많았다. 한편, 동군은 4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세키가하라에 진군을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진군 도중 난구산(南宮山)의 동향을 중시여겨 타루이(垂井) 및 난구산(南宮山)의 접경지대에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야마우치 카츠도요(山?一豊), 아사노 요시나가(?野幸長) 등 1만 4천을 대치 시키면서 서군의 움직임을 억제하였다.
■ 9월 15일, 오전 5시 ■
- 이에야스 본진,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 진격 - 동군의 선봉이 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와 쿠로다 나가마사(?田長政) 부대가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오전 5시 경이었다. 후쿠시마(福島) 부대 6000은 텐마산(天?山)의 우키다(宇喜田) 부대와 대치 하였고 쿠로다(?田) 부대 5400은 텐마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있는 사사오산(笹尾)의 서군에 대비하였다.
후쿠시마 부대의 배후에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 약 2500과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 부대 3000이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테라자와 히로타카(寺??高) 부대 2400이 와 있는 상태였다.
또한 세키가하라 북쪽에서 남쪽에 걸쳐 횡일선으로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부대 5000,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부대 3000, 쯔쯔이 사다쯔구(筒井定次) 부대 2900,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부대 3000, 이에야스의 사남(四男)으로 초진(初陣)으로 참가한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義) 부대 3000과 이들을 보좌하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 부대 3600이 도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쿠로다(?田) 부대로부터 이이(井伊) 부대까지, 제 1선의 배후에는 카네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부대 1100과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 부대 1800이 제 2선을 구성하였고 오다 유라쿠(織田有?) 부대 약 500과 요시다 시게카츠(吉田重勝) 부대 1000이 제 3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진용이 형성되자, 이에야스는 난구산(南宮山)을 왼쪽 편으로 조망하면서 나카센도(中山道)를 통해서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 진출한 후 그의 부대를 본진으로 하면서 3만 여의 병력을 견고히 했다.
동군의 총병력은 약 17만 5천. 양군의 주력이 세키가하라에 대진하였지만 진형은 산을 배후로 하면서 경사면(傾斜面)으로 포진한 서군이 유리하였다. 메이지 18년에 일본으로 건너 와 육군 대학교 교관을 지낸 독일의 멕켈 참모 소좌는 동서 양군의 진형도를 보자마자 그자리에서 “서군의 승리”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서군의 포진은 동군을 완전히 둘러 싸고 있는 형태로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 오전 8시 ? 이윽고 시작된 결전 ? ■
- 토쿠가와(?川) 부대의 선공에 화가 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돌격 - 세키가하라도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6시를 넘어서서도 계속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개가 짙어 100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이윽고 비가 멈추긴 하였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시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400미터 정도 떨어져 대진하고 있는 동서 양진의 진용이 살짝 옅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최전선을 향해 이동하는 부대가 있었다. 이에야스의 넷 째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와 그의 장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였다. 불과 30여 명 뿐이었으나 그들은 선제공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군의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는 남모르게 불만을 품어오고 있었다. 이 전투는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大名)끼리의 전투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토쿠가와(?川)와 토요토미(豊臣)의 대결이었다.
토요토미 은고의 다이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선봉을 끊는다면 토쿠가와의 무위(武威)는 웃음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토쿠가와(?川)가 선제공격을 취하지 않는다면 후에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의 후견역으로서 선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이 부대는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통과해 최전선으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후쿠시마 부대의 카니 사이조(可?才?)가 이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선봉은 우리들이다. 선제 공격을 빼앗는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우선, 후쿠시마 부대가 서군의 주력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를 공격해 무력화시키고, 그 사이에 쿠로다 나가마사(?田長政) 부대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를 습격한다는 시나리오가 전 날 밤의 군사회의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이이 나오마사는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공(公)은 첫 출진이다. 후학을 위해서 견습을 하는 중” 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전진을 계속하였다. 우키다(宇喜田) 부대의 전면에 도착하자 마자 철포를 쏘면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를 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이 나오마사에게 선봉을 빼앗겨서는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라고 격노하면서 말 위에서 군배(軍配)를 휘둘렀다.
때는 오전 8시. 고요하기 그지 없었던 세키가하라가 한 순간에 총성과 함성에 휩싸이게 된 것이었다.
■ 9월 15일 오전 9시, 일진일퇴의 격전 !! ■
- 개전 1시간, 사투와 일진일퇴 ? 후쿠시마(福島) 부대가 우키다(宇喜田) 부대에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양군의 공격신호를 알리는 봉화가 올랐다. 양군의 장병들은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 같은 함성을 올리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후쿠시마 부대의 공격을 받은 우키다 히데이(宇喜田秀家)에 부대의 선봉 8000을 지휘하고 있던 아카시 테루즈미(明石全澄)는 역으로 후쿠시마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죽어서는 안된다. 공격하라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격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다시 한 번의 반격. 쌍방에 일진일퇴의 격투가 반복되었다. 이시다(石田) 부대에게도 동군의 각 부대가 쇄도하고 있었다. 우선 쿠로다 나가마사(?田長政) 부대가 이시다 부대의 좌익을 돌파하기 위해서 진격하였다. 이를 저지 하기 위해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중신인 시마 사콘(島左近)이 공격해 왔으나, 사콘이 총탄에 맞으면서 이시다 부대의 제 1선이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 카네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제장이 이시다 부대를 공격해 들어왔다.
서군 대장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목을 베는 것이 이 전투에서의 최대 공훈이라고 생각한 동군의 제장들은 이시다 부대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이시다 부대는 이들을 격퇴하면서 오히려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부대를 괴멸시키고 있었다.
또한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 부대, 테라자와 히로타카(寺??高) 부대를 맞이하여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 부대는 치열한 응전을 펼치면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루고 있었다.
오다 유라쿠(織田有?) 부대, 후루타 시게카츠(古田重勝) 부대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를 향해 돌격.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던 이이(井伊) 부대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를 향해 진격하였다. 시마즈(島津) 부대는 왠지 돌격은 감행하지 않은 채 진(陳) 안에서만 응전할 뿐이었다.
개전으로부터 한 시간 여가 지났다. 총성과 함성은 세키가하라를 뒤 덮고 있었으나 승패의 형국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난구산(南宮山)에 있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 부대가 측면에서 이에야스(家康)의 본진을 뚫으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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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5일 오전 10시, 계속되는 격전 !! ■
? 일진일퇴의 공방 - 화가난 이에야스(家康), 초조해 하는 미쓰나리(三成). 형세는 아직 불분명.
전투가 시작되서 2시간이 지난 오전 10시, 전장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투의 형세는 여전히 불명확하였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치열한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 부대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와 맞서고 있었고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또한 돌격해 오는 동군을 맞이하여 백병전을 전개하며 용전을 불사하고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도 시마 사콘(島左近)이 부상하였음에도 여전히 분전하면서 한 발자국도 물러 서지 않았다.
그러한 격전 속에서 후쿠시마(福島) 부대와 우키다(宇喜田) 부대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후쿠시마 부대는 두 번, 세 번 역공을 받으면서도 마사노리(正則)의 질타에 의해 진형을 다시 가다듬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양쪽 부대가 전진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엄청난 공방전이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파하고 전국(戰局)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서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에야스(家康)는 본진을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부터 진바노(陣馬野)로 전진시켰다. 그곳은 양쪽 군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본진을 전진시킴으로써 동군을 한 층 더 분발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화가 나 있었다. 서군은 총병력 8만 수 천 여 명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세력은 3만 수 천 여에 불과한데 비해서 동군은 6만이 넘는 군세가 전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쓰나리 역시 화가 나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시다 부대의 근처에 포진하고 있던 시마즈(島津) 부대는 전국(戰局)을 살펴보고 있을 뿐 출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시마즈 부대로 잘못 들어간 서군 병사에게 철포를 쏘기도 했다. 미쓰나리가 참전을 촉구하는 사자(史者)를 보내기도 했지만 쫓겨 나기만 했다.
서군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 정오(正午) , 히데아키(秀秋)의 배반 上 ■
- 봉화가 올랐으나 난구산(南宮山)의 모리(毛利) 일족은 움직이지 않았다 - 시마즈(島津)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미쓰나리(三成)는 즉시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이 봉화는 양군 박빙의 전국을 서군 우세로 이끌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松尾山)에 포진하고 있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 1만 5천과 난구산(南宮山)에 있는 모리(毛利) 일족 부대 약 3만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다면 서군의 승리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이 봉화가 올랐던 것이 오전 11시 경. 난구산(南宮山)에서도 이 봉화가 분명히 확인되었다. 하지만, 전 날 이미 이에야스와 내응을 약속, 전투 불참가를 맹세했던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家)는 봉화 신호를 무시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난구산(南宮山)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히로이에(?家)는 정상 가까이에 있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부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히데모토 부대는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히로이에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산을 내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봉화를 본 안코쿠지 에케이(安?寺?瓊)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는 사자(使者)를 히데모토(秀元)에게 보내어 전투참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히로이에에게 길을 완전히 차단당한 히데모토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출진하고 싶지만, 히로이에가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기에,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는 답장을 받은 에케이와 마사이에도 병력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다.
모리 일족 부대 약 3만은 전장 가까이의 난구산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 명의 병력도 출진시키지 않은 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구산의 모리 일족의 방관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귀추를 결정했지만, 전국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모리 일족이 있었다. 마츠오산에 포진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그 주인공.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처인 키타노 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로 모리 일족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양자였다.
히데아키는 이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마음은 동군 측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히데아키는 서군의 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을 내려와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한편, 이에야스(家康)에게는 기회를 틈타 서군을 배반, 동군으로 가담한다는 밀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아키가 언제쯤 동군으로 붙을 것인가. 이에야스(家康)와 미쓰나리(三成)의 시선은 마츠오산을 향해 그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 정오(正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秀秋)의 배반 下 ■
- 히데아키(秀秋)에게 위협사격을 가하라! - 그러나, 양측의 기대와는 달리 히데아키(秀秋)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군은 계속해서 사자를 보내어 출격을 촉구하고 있었다. 정오를 넘긴 시간, 이에야스(家康)의 초조함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히데아키에게 속았단 말인가..” 라고 탄식할 뿐이었다. 히데아키가 배반하지 않으면 난구산(南宮山)의 모리 일족 부대도 히데아키에게 동조해 동군에게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야스는 결단을 내렸다.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산(松尾山)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
히데아키는 그 때 까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서군은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가 겐푸쿠(元服(성년식))를 할 때 까지 관백직(?白職)을 히데아키에게 양도하고 관서(?西) 지방의 일국(一?)을 하사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한 편 이에야스는 이국(二?)을 주겠다는 서약서를 보내면서 배반을 확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아키의 중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平岡?勝)와 이나바 마사나리(?葉正成)는 이미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으나 최종 결단은 히데아키에게 있었다.
거취를 결정하기 어려웠던 히데아키에게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은 효과가 있었다. 위협사격에 놀란 히데아키는 즉시 눈 앞의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 부대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고 있던 오오타니 요시쯔구 부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전하면서 순식간에 히데아키의 부대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배반은 배반을 부르고 말았다.
그 때까지 서군으로서 활약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오카와 스케타다(小川祐忠) , 아카자 나오야스(赤座直保),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 등 5000여 명의 병력이 이에야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 돌진하였던 것이었다. 이 들의 배반은 오오타니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히데아키가 부대를 다시 정비해 반격을 시작하였고 여기에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의 부대 등 동군 제장들이 공격에 합류하였다.
이윽고 오오타니 부대가 괴멸되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도 측면을 뚫리면서 무너졌고,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도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의 배반으로부터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전국(戰局)이 크게 바뀌고 만 것이었다.
■ 9월 15일 오후 1시, 도주하는 서군 ■
- 도주하는 서군 주력 -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던 서군은 코바야카와(小早川) 부대의 참전으로 인해 동요하면서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오오타니(大谷) 부대의 괴멸에 이어 코니시(小西), 우키타(宇喜田) 부대가 무너지자 승기를 잡은 동군은 이시다(石田) 부대를 향해 노도와도 같은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야스(家康)는 코바야카와(小早川) 부대의 움직임과 함께 자신의 휘하에 있는 3만의 정예 병력을 전선으로 내보내면서 총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이미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후방의 이부키산(伊吹山)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는 “히데아키(秀秋)를 찔러 죽이고 한을 씻겠다”며 선두로 나서려고 하였으나 아카이시 테루즈미(明石全澄)의 필사적인 간언으로 결국 퇴각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부대는 점점 고립되어 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분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미 시마 사콘(島左近)도 없고, 분전하던 가모 사토이에(蒲生??)가 전사하는 등 이시다 부대도 괴멸되어 갔고 미쓰나리 역시 호코쿠가도(北?街道)를 따라 도주하였다.
오후 2시, 승패가 결정된 전장에는 시마즈(島津) 부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9월 15일 오후 2시, 시마즈(島津)의 적중돌파 ! ■
- 시마즈(島津) 부대, 적중돌파로 전장탈출 시도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미쓰나리(三成)의 출진요청도 거절하면서 자신의 진으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주전장(主?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장이탈의 기회를 놓친 시마즈(島津) 부대에게 동군이 일제히 공격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요시히로(義弘)는 결단을 피할 수 없었다.
“적의 정 중앙을 돌파해서 전장을 탈출한다”는 계획이었다. 1500여 명의 시마즈 부대 장병들이 하나가 되어 동군을 향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러한 의표를 찌르는 행동으로 작전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요시히로는 전장을 탈출해 사츠마(薩摩) 무사의 의지를 보여 줄 수 있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 ?ヶ原合?), 상황종료 ■
- “세키가하라”에서 명실공히 천하를 손에 쥔 이에야스(家康) - 6시간 남짓 계속되었던 대전투는 종결되었다. 천하를 나누는 전투는 동군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천하는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세키가하라에 전쟁의 함성이 멎자 이에야스는 본진을 텐마산(天?山) 기슭의 토코(藤古) 강가로 옮긴 후 쿠비짓켄(首?? : 베어진 적의 머리를 검사하는 행동)과 동군 제장들의 접견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제장들의 활약에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의 언행은 이미 이에야스가 천하인임을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패의 결정타가 되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는 상당 시간이 지난 후에도 접견을 오지 않았다. 이에 사자를 보내어 본진으로 히데아키를 부른 이에야스는 “히데아키 공(公)의 배반으로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었다. 제 1의 공훈은 히데아키 공(公)의 몫”이라며 추켜세웠다.
히데아키는 이 공훈으로 비젠(備前), 빗츄(備中), 미마사카(美作)의 51만석을 수여 받게 되었다.
한편, 난구산(南宮山)에서 방관으로 일관했던 키츠카와 히로이에(吉川?家)는 주인 가문인 모리씨(毛利氏)를 지키기 위해서 이에야스와 내통하였으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서군의 총대장으로서 오사카성(大阪城)에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적대시 되고 있었다. 전 후,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의 120만 여 석을 36만 석으로 삭감하면서 히로이에(?家)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방관자가 지불한 대가가 아주 컸던 것이었다.
서군의 제장 중,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영지인 사츠마(薩摩)와 토사(土佐)로 각각 도주하였다. 시마즈는 영지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쵸소카베는 소유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만다. 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는 수 년간 도망 다니던 중 결국 체포되어 하치죠지마(八丈島)에 유배되었다. 도주하였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안코쿠지 에케이(安?寺?瓊) 역시 모두 체포되어 10월 1일 쿄토(京都) 로쿠죠가와하라(六?河原)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에야스는 서군에 속했던 무장들의 영지를 몰수, 감봉하면서 총 632만 여 석에 이르는 몰수 영지를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몰수 영지를 동군에 속해 공로를 세운 다이묘(大名)들에게 은상으로써 배분하는 한편 토쿠가와 가문의 일문중(一門衆)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 자신의 직할 영지를 250만 석에서 약 400만 석으로 늘리며 토쿠가와(?川) 체제를 견고히 했다.
아직 오사카성(大阪城)에는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명실공히 천하를 손에 쥐게 되었던 것이다.
■ 전후 이에야스(家康)의 논공행상 上 ■
- 배반은 환영하지만 배반자는 필요 없다 - 1600년 9월 27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는 오사카성(大阪城)에 입성하였다. 그로부터 약 1년 동안 이에야스는 전후처리 문제에 몰두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군의 다이묘(大名)들로부터 영지를 몰수하거나 삭감해 동군 제장들의 공훈에 따라 영지를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이 때 이에야스는 서군에 속해 있던 88명에 이르는 다이묘들을 몰락시키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416만 1084석의 영지를 몰수하였으며 5명의 다이묘들에게는 영지 감봉 조치를 취하여 216만 3110석을 거두어 들였다. 모두 합쳐 93명의 다이묘, 632만 4914석에 이르는 영지였다. 이는 일본 전국의 고쿠다카(石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 중 사망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하치죠지마(八丈島)에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등의 영지는 당연히 몰수 되었으며 가문도 단절되고 만다.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도 영지를 보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오사카성에서 퇴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은 간단히 파기되었다.
테루모토는 비고(備後), 빗츄(備中), 아키(安芸), 이나바(因幡), 호오키(伯耆), 이즈모(出雲),이와미(石見), 오키(?岐) 등의 8개국을 삭감당하면서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 영지에 봉해졌다. 120만 5천석의 영지에서 36만 9천석으로 전락한 테루모토는 쇼크로 인해 출가한 후 모든 영지를 버리려고 하여 가신들이 만류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의 계기가 되었던 아이즈(?津) 120만석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요네자와(米?) 30만석으로 감봉되었고 동군, 서군 어느쪽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는 히타치(常陸), 미토(水?)에서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되었다.
그러나, 똑같이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였던 토사(土佐)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가 토사(土佐) 20만석을 모두 몰수당한 것과는 달리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영지 보전 조치를 받았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했던 것일까?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서군으로 참가하기는 하였으나, 키츠카와 히로이에(吉川?家)가 동군으로 내응했던 덕분에 참전하지는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토사(土佐)로 도주해 온 모리치카(盛親)는 선친 모토치카(元親)의 대(代)로부터 친교가 있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를 중재역으로 사죄의 뜻을 이에야스(家康)에게 표명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내분으로 인하여 서형(庶兄) 츠노 치카타다(津野親忠)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에야스는 영지 몰수를 결정하게 된다.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었던 모리치카는 테라시야(寺子屋)의 스승이 되었으나 오사카 전투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의 무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한편, 시마즈(島津)는 패색이 짙었던 세키가하라에서 적중돌파를 통한 전선이탈을 감행, 많은 피해를 내기는 했지만 그 용맹성은 동군 제장들, 특히 이에야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 전후 처리에 크게 작용하게 된다. 적중돌파를 통해 보여 준 시마즈의 강인함이 타협을 만들어 내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전후 이에야스(家康)의 논공행상 下 ■
- 배반은 환영하지만 배반자는 필요없다 - 그렇다면,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가담했던 무장들의 처우는 어떠했을까?
우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는 그의 배반이 큰 공을 세웠다는 치적과 함께 치쿠젠(筑前) 35만 7천 석에서 우키타(宇喜田)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51만 석으로 증가, 전봉되었다. 하지만, 코바야카와와 함께 배반에 가담했던 4명의 다이묘들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배반의 의지를 신속하게 이에야스에게 통고했다는 이유로 아와지(淡路) 3만 3천 석의 예전 영지를 보전 받을 수 있었고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도 2만석의 영지를 보전 받았으나 오가와 스케타다(小川祐忠)는 이마바리(今治) 7만석을 몰수 당하였고 아카자 나오야스(赤座直保)도 2만석을 몰수당하면서 다이묘(大名)의 신분에서 마에다(前田) 가문의 가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똑같이 배반에 가담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처우에는 차별이 있었던 것이었다. 배반은 환영하지만 배반자를 중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것이 이에야스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실제 논공행상은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전후 처리가 종료되었던 1602년, 코바야카와 가문은 후계자 단절을 이유로 폐절(?絶)당하게 된다. 변절자들은 결국 신용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편, 동군으로 참전하였던 토요토미계(豊臣系)의 다이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가 18만 석에서 42만 석을 받으며 아이즈(?津)로 향했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20만 석에서 45만 8천 석이 되어 히로시마(?島)로,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는 32만 5천 석으로 증가되어 야나기가와(柳川)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늘어난 그들의 영지가 관동(?東) 지방에서 먼 곳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야스는 은상을 베풀면서 동시에 유력 영주들을 중앙에서 먼 곳으로 배치하는 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토요토미계의 이들 다이묘들은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家光) 3대에 걸쳐 차례차례 폐절(?絶)당하게 된다.
출처: 삼국지 도원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