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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8:33-9:6
찬송가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욕망의 지도자 기드온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우상숭배의 소굴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33-35)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우리말성경은 원어적 의미를 살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를 ‘기드온이 죽자마자’로 번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사실 기드온이 죽기 이전부터 그들은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삿 8:27). 그리고 기드온이 죽자 섬김의 대상이 에봇에서 바알로 바뀌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음행’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타종교를 믿으며 섬기는 것이 왜 음행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미 맺은 서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신부’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제1계명에서부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며 일편단심을 요구하셨고,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결혼 관계로 맺어져 있었기에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음행 곧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알들을 따라 음행하며,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바알브릿은 바알 신의 별칭으로 ‘언약’을 뜻하는 ‘브릿’과 합쳐져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바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리하고, 우상과의 관계는 시작하는 그들의 지독한 우상숭배는 여러 증상들로 나타났습니다.
(34)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구원을 베푸신 분으로 소개했지만,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기억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갓 사랑에 빠진 연인은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하루종일 서로의 삶을 그려봅니다. 갓 자식을 낳은 부모와 조부모도 갓난아기를 반복하여 떠올립니다. 재테크나 취미 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사람도 잠을 줄여가며 머릿속을 각종 정보와 노하우로 채워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단지 이 구절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대우는 ‘기억하지 아니함’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계십니까? 하루 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생각하며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사랑을 점검하십시다. 이 관계가 고장나있으면 우리 삶은 허무한 인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또 다른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35)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만 저버렸을 뿐 아니라 기드온과 그의 집안을 향한 신실한 충성도 저버렸습니다. 앞서 기드온을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는 기드온과 더불어 그의 아들과 자손이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었지만 기드온이 죽자마자 그의 집안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 집안을 후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아비멜렉을 통해 나타납니다.
왕이 되려는 자, 아비멜렉(1-6)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지금까지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9장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왕으로 높인 ‘역사사(anti-judge)’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표대로 왕, 그것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지만 타이틀만 화려했을 뿐 그의 통치와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기드온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기드온은 이 이름을 지어줄 때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기며 사는 삶을 살기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기드온은 자신의 삶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70명의 아들을 둘 정도로 아내를 많이 두었습니다. 이는 이방 왕들이 자신의 능력과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왕으로 높이는 삶을 보인 기드온은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아닌 욕망을 좇아 우상을 섬기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머릿속으로만 신앙생활을 생각하고, 입술로만 가르치는 것은 자식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손과 발로 행하는 신앙생활을 보고 배웁니다. 부모는 자식이 세상을 보는 안경입니다. 자식은 부모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듣고 판단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통해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웁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미디안 전쟁 이후 손과 발로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간 삶의 결과입니다.
아비멜렉의 가정 배경은 독특합니다. 그는 기드온이 고향 오브라를 떠나 세겜에 머물렀을 때 한 여자를 첩으로 삼고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오브라와 세겜 양쪽을 배경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세겜은 기드온 집안을 적대시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드온 이전까지는 세겜이 종교 중심지였지만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어 자기 고향 오브라에 두어 사람들이 그리로 몰리면서 종교 중심지 역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즉, 아비멜렉은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출신 성분 때문에 세겜의 지도자들에게 바로 찾아가지 않고, 외가 친족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피력합니다. 그 뜻은 이러했습니다.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아비멜렉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 곧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함에도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세겜 사람들과 ‘골육’ 즉, 살과 피라고 소개하며, 세겜 사람들을 후대할 것처럼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욕망이 맞닿자 일이 일사천리로 이어졌습니다.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아비멜렉의 말은 외가 친척을 움직였고, 외가 친척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마침내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그는 우리 형제라’라고 말했습니다. 왕이 되고 싶었던 아비멜렉의 욕망, 종교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되찾고 싶었던 세겜 사람들의 욕망,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아비멜렉 외가의 욕망은 이렇게 불꽃을 튀며 하나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삶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우리 삶에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기다리는 빈 자리가 필요합니다. 아비멜렉에게로 마음이 기운 세겜 사람들은 그에게 재정적 지원도 서슴없이 해줍니다.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아비멜렉에게 정치 자금으로 주었습니다. 성경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 위해 후원받았던 재정의 출처를 명확히 밝힘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바알의 힘과 이름을 빌어 왕위에 오르려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기반으로 삶을 세워가는지 다 알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반석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신 주님과 주님의 말씀 위에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의 삶을 세울 때만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은 은 칠십 개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샀습니다. 그들은 돈만 주면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오브라로 간 아비멜렉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좇으며 보이고 심은 삶의 결과가 끔찍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자신의 사후에 이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면 애초에 이방 왕처럼 행동하지도, 세겜에 가서 첩을 두는 정욕적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70명이 모두 죽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지닌 막내 아들 ‘요담’은 살았습니다. 자기 형제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요담에게 자기 이름의 뜻은 가혹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과 환경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믿음으로 서는 자는 영원히 빛납니다. 이는 아비멜렉 이야기의 결론이 말해줍니다.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힌 아비멜렉은 세겜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세겜과 밀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선택했고, 세겜 사람들도 아비멜렉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결말은 불보듯 뻔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경외하는 삶으로 엮어지는 것이 왜 복 있는 삶인지를 아비멜렉 이야기가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이 왕으로 세워진 장소, 세겜은 분명 여호수아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언약을 갱신하며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다짐했던 기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세겜은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숭배 신전의 재정을 지원하며 우상숭배자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재앙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세겜은 아브라함, 야곱이 각각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예배드린 곳이었고,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의 의미가 세겜 사람들을 여호와 신앙으로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에게 맡겨주신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과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두 성지는 한국교회의 큰 영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묻힌 선교사님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우리 삶의 자리를 비추는 거울 삼으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장소는 빛바랜 유적지로 남을 뿐입니다. 장소와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세겜 사람들의 우를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반복하여 범하지 않게 해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끝 구절은 ‘삼다’라는 동사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자기 삶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신과 왕의 자리에 우상과 우상숭배자를 둔 결과의 잔을 그들 스스로 마십니다. 누구를 왕으로 삼느냐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삼다’라는 동사로 우리 삶의 자리, 특히 마음을 비추어 봅니다. 우리는 누구를 진정한 신으로 그리고 왕으로 삼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이요, 왕이라 믿고 그 믿음 위에 삶을 얹어 살아가고 계십니까?
‘삼다’라는 동사를 하나님에게도 비추어봅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자기 피로 정결케 하여 신부로 여겨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가족인 우리를 향한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삼다’를 기억할 때 우리도 하나님을 진정 신이요 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주일 예배를 드린 후 첫 날입니다. 우리 모두 가정 안에서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할 때 가족끼리 피를 흘리는 아픔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만을 귀히 여기기 시작할 때 그분은 우리 가족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실 것이고, 우리 가정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변화를 나타내는 믿음의 가정으로 든든히 서 갈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은혜로 가족 삼아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만을 왕으로 삼고 귀히 여기는 복된 한 날 보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왕이신 하나님, 그동안 하나님이 아닌 헛된 우상들을 왕으로 삼고 섬기며 살았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질투를 받을 만큼 하나님께 소중히 여김받는 자임을 기억하며, 이제는 우상숭배의 소굴에서 나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온 맘과 온 삶을 다해 경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가정을 비롯해 우리가 속한 모든 곳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어 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기드온이 죽자마자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묵상해봅시다.
2. 하나님은 우상으로부터 내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 질투하십니다. 내 눈에 비치는 나와 하나님 눈에 비치는 나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3. 아비멜렉, 외가 친척, 세겜 사람들은 서로의 욕망이 하나되어 일사천리로 일을 추구했지만 이후 고배를 마십니다. 내 삶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욕망에 이끌려 살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4. 우리 가족이 예수님을 참 신이요 왕으로 삼고 귀히 여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고 결단해 봅시다.
(작성 : 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