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땅이나 버려진 땅이 눈에 띄는 농촌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황량하다.
닭, 소, 말의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던 풍경은 사라지고, 기계 소리로 바뀌었다.
그것도 월급쟁이 겸업 농민이 사용하는 주말에 집중되고 있다.
농약을 많이 사용한 벼농사는 먹을거리의 안전을 원하는 소비자에게 불안하다.
자급율의 저하에 따라 21세기에는 쌀이 부족하고 식량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무농약 벼농사는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여름의 김매기는 큰일이다. 생산자 회원의 노력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무농약으로 농사지은 안전한 쌀을 손쉽게 싼값에 구하기를 원하는 소비자의 안이함과 오만함을 반성한다.
21세기의 식탁 안전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거대한 군사기지는 환경 파괴와 오염을 일으키고 있으나,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대의와 기밀성이란 배경 때문에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없다.
오끼나와에 지금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푸르름에 감탄하고 있을 때,
안내하는 친구는 '기지라서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일 뿐' 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금주주의의 풍요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에 어긋나게 오끼나와를 군사대국에 팔아 넘기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다.
"기지반대 싸움은, 오끼나와의 마음과 문화와 삶을 지탱하는 운동이다" 라고 그 친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연과 풍토에 적합한 자립적인 삶이 굴욕에서 이탈할 수 있는 전제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오일쇼크로 석유문명의 취약함에도 안일과 이익추구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이 사고의 위험이나 미래세계의 죽음의 재를 남긴다는 난제를 무시하고 마구 추진되었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범죄적인 것이다.
자원 절약이나 환경문제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세상의 풍조에 화가 난다.
시대의 흐름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과 돈으로 움직이는 금주주의 정치가 판을 친다.
인권적 시각은 환경문제의 기본이다.
각자의 행복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턱없이 어리석고 죄 많은 에너지낭비의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원한다.
교사에게는 시간의 여유와 자유가 없는 한편,
아이들도 점수로 평가되는 체제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유치원에는 유희는 있지만 자연스러운 놀이가 남아 있는가?
돈을 주고 사는 텔레비전 게임에도 자유는 없으며 고독하다.
요즘 아이들은 불행하다. 놀이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야산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지 오래이다.
학교, 학원, 클럽 등에 갇혀 있기 때문일까? 거기에는 자연도 없고 자유도 없다.
개구쟁이 골목대장을 통해 하급생에게 전해지는 아이들의 놀이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샘과 협력을 통해서 배우는 사회성도 자라지 않는다.
물질의 풍요한 시대는 변화도 빠르니, 세대를 넘어 전수되는 문화의 전승도 없어졌다.
세대 간의 단절은 크고 문화의 공유성은 적다.
쓰고 버리는 시대에 문화도 쓰러 버려지게 된 것이다. 유행과 망각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고독과 초조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노인들의 외로움도 고령화 사회의 무거운 과제이다.
세대를 넘어 전승되는 놀이와 야산이나 자연 속에서의 놀이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자연이나 사회와의 만남은 환경문제의 기본이며, 놀이 속에서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전날 먹은 것은 밤이란 휴식시간을 지나며서 최적상태로 안정되어 다음 날 활동을 대비시켜 준다.
야생의 동물들도 공복상태에서 먹이를 쫓는다.
우리 인간도 공복 상태일 때 활력 즉, 사는 힘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틀림없다.
"상식에 맞지 않는다" 고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겠으나,
아침식사를 거르는 날은 오전 기간을 상쾌한 기분으로 활기차게 지낼 수 있어 즐겁다.
게다가 안 먹는 만큼 소비가 줄었기 때문에 환경부하도 적어서 좋다.
세상의 상식에 지배되기보다는 경험을 근거로 한 실제적인 것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IT혁명' 이 유행어가 되고, 정보화 기술사회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정보를 빠르고 많이, 그리고 편리하게 주고받는 기술은 멋지고 경제성장에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보 홍수는 위험하다. 인간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구불만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정확한 사리 판단을 못하게 만든다.
인간이 줄 수 있는 크기, 빠르기, 편리함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고 '쓰지 않고 버림' 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내핍생활이 몸에 배어 자라서 물건을 버릴 수 없는 세대는 구제할 길이 없다.
조용하고 간소한 삶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종이의 산을 처리해야 한다.
기술 진보에 대한 환상이 가끔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은 원자력개발만이 아니다.
또 온 나라의 돈이 움직이는 곳에 이권이 있는 것은 공공토목만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풍족한 물량을 누리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회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새로운 사회제도와 삶의 방식이 추구되어야 한다.
21세기는 농과 식이 기본이 될 것이다. 생존의 기초인 먹을거리는 농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농업은 식물의 광합성에 의해서 식량을 생산하는 산업이다.
비옥한 대지를 소중히 여겨 그 대지에 안정된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유기농업이며,
유기농업만이 가장 훌륭한 최고의 태양에너지 산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 공업적으로 태양을 이용하지 않아도,
공생의 풍요함 속에서 태양의 은혜에 감사한다. 푸르름의 세계를 소중히 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런 소망을 현실로 착각하여 과학기술의 힘에 기대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생각이다. 과학은 수제품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 문제 해결의 꿈이었던 원자력도 계속되는 사고와 죽음의 재 뒤처리의 불가능성으로 그 마각을 드러내었다.
석유합성 화학도 훌륭한 합성물질을 만들어 내어 편리하고 풍요한 삶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발암성이나 알레르기 유발성 등 건강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고,
결국 세계는 생존과 생명계를 위협하는 환경호르몬 문제로 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지나친 믿음, 즉 과학기술 신앙은 착각이다.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환경주체인 인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대량생산, 대량낭비의 사회가 GNP를 밀어 올리고, 자원과 환경 양면에서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
욕구불만에 자기 자신을 일어버린 것이다.
21세기 전반은 군사력으로 파탄났고, 21세기 후반은 돈과 과학의 힘으로 모순을 키워왔다.
먹을거리가 있고 나서야 생명이 있다.
생명은 홀로 삶을 계속할 수 없고 공생에 의해서 사는 것이다.
서로 협력하여 유기농업을 넓혀 온 것도 그것이 공생의 이치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농업현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니, 21세기에는 굶주림의 비극을 면할 수 없으리라.
힘에 의한 화대, 발전에서 축소, 지속을 과제로 하는 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추구하고 있는 지(知)는 양심과 관계되는 양지(良知)이며 진지(眞知)이다.
그것은 없는 것을 무리하게 하지 않는 현명함이며, 태양과 물의 순환을 바탕으로 전승되어온 생활문화 속에 있다.
주어진 풍토의 조건을 살려, 지혜와 연구에 의지해 생존의 가능성을 개척하는 것이다.
재생할 수 없고 순환되지 않는 지하자원을 자원이라 믿고 과학기술에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인, 지인들과 서로 돕는 협력의 띠로 연결하여 확실한 삶의 방식을 자기답게 풀어 가는 것은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다.
21세기를 희망과 함께 맞이해야 한다.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