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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26-35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본래 불교 용어인 이 말은 불자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선함과 악함에 따라 그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라는 의미로 많은 이가 순화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땅한 죗값을 치른다’라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오늘 나눌 본문을 관통하는 단어가 바로 이 ‘인과응보’입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이스라엘 3대 왕이 되었습니다. 다만, 대개 권력 이양 과정이 그렇듯 이스라엘은 권력 공백기를 틈타는 이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에 어제 본문부터 시작해 솔로몬은 정적을 신속하게 제거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라고 해서 적대 세력을 이유 없이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라에는 여전히 복수의 불씨가 살아남아 금세 전란이 일기 때문입니다. 이때 솔로몬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그들의 죄에 따라 합당한 죗값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야욕을 드러낸 아도니야를 죽여 자기 왕권 제일 위험 요소를 없앴습니다. 그 뒤 그의 칼날은 신정국가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종교 지도자를 향했습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의 추방과 파면(26-27절)
(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이로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솔로몬은 아도니야 편에 서서 반란을 꾀했다는 이유로 제사장 아비아달을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했습니다. 다만 그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비아달이 그간 다윗을 도운 것만 아니라 다윗과 함께 여러 고초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전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할 때 놉에 가 그곳의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빵과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그가 얻은 건 사울에 의한 자신과 일족의 몰살이었습니다. 이때 간신히 참극을 피한 아히멜렉의 한 아들이 있으니 그가 아비아달입니다.
이후 아비아달은 다윗을 찾아가 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다윗에게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가져오며 그때부터 다윗의 제사장으로서 생사를 함께 했습니다. 또한 아비아달은 다윗이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쫓았습니다. 뿐만아니라 다윗의 명을 따라 다시 압살롬에게로 돌아가 다윗의 첩자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즉 아비아달은 다윗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비아달은 안타깝게도 다윗 말년에 아도니야 편에 가담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이에 솔로몬은 아비아달이 자기 아버지를 위해 헌신한 것을 기억해 죽이진 않지만, 중앙 권력에서 떨어뜨리는 추방령을 내립니다. 이어지는 솔로몬의 명령은 이렇습니다.
(27)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추방함과 동시에 파면합니다. 더는 제사장으로서 일할 수 없게 말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 기자는 오래전 하나님이 엘리의 집에 대해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엘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사사시대 말,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있던 엘리를 기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패역한 행태를 두고 저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한 날에 죽고 그의 집안은 제사장직을 잃는 것도 모자라 구걸하는 신세가 될 거라고 말입니다. 아비아달은 이 엘리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날 이후 파면당한 아비아달과 그의 후손은 다시 제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다윗과 함께 누렸던 영광을 잃고 사라지는 아비아달의 모습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분명 다윗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했던 그입니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충성하지 않고 반역한 결과 그에게 돌아온 건 성경 무대에서의 초라한 퇴장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아비아달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우리를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우리 인생 모든 날을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동행을 망각하고 예수님에게서 등 돌릴 때 우리도 아비아달처럼 반역의 길 앞에 설 것입니다. 보암직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그 길 말입니다. 이때 우리는 아비아달처럼 우리 중심을 지켜낼 실력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본문 속 아비아달을 반면교사 삼아 주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교우님 되시길 바랍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동행은 뒤돌아 헤아려 볼 때 더 선명하고 또렷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릴 어떻게 품에 안고 오셨는지 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군사령관 요압의 처형(28-34절)
얼마 후 아비아달의 좌천 소식 예루살렘 성내에 돌자 황급히 움직인 이가 있었습니다.
(28)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그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으니 이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요압은 솔로몬의 칼날이 이제 자신을 향할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압살롬의 난까지는 다윗을 따랐지만 이후 솔로몬 아닌 아도니야 편에 섰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도 솔로몬에게 있어 숙청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비아달 소식을 듣자 곧바로 성막으로 피했습니다. 이때 그는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래전 이스라엘에는 범죄자가 제단 뿔을 잡을 때 적절한 재판으로 유죄판결이 날 때까지 보호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은 죽었지만, 아도니야도 제단 뿔을 잡아 솔로몬의 자비를 얻어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행동을 보고받은 솔로몬이 반응합니다.
(29-30) 어떤 사람이 솔로몬 왕에게 아뢰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이르되 너는 가서 그를 치라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아뢰어 이르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어쩌면 솔로몬은 자신의 제거 대상이 먼저 움직인 게 반가웠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요압은 아버지 다윗이 유언을 남기면서까지 지목한 정적이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즉각 브나야에게 요압 처형을 명했습니다. 이에 브나야가 성막으로 가 어명을 전했지만 요압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성막 안에서 죽겠다며 버텼습니다. 순간 브나야는 잠시 주저합니다. 앞서 소개한 전통도 그렇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에서 처형을 집행하는 일은 성막을 더럽히는 중대한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에 브나야가 왕에게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자 솔로몬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31-32)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솔로몬은 단호했습니다. 그의 말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해라, 그를 죽여라, 그를 묻어라!” 솔로몬은 그간 요압이 얼마나 무고한 피를 많이 흘렸는지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화평을 청하러 온 아브넬을 죽인 일과 다윗이 군사령관 삼은 아마사를 살해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율법은 무고하게 흘린 피는 땅을 더럽히며 그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로 반드시 속하라고 명령합니다(민수기 35:33-34). 이 모든 걸 아는 솔로몬은 자신의 집안은 요압의 죄와 무관함을 천명하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솔로몬은 이제 무자비한 살인마 요압과의 오랜 인연을 끊고, 오직 그의 나라를 하나님이 주실 평강, 샬롬으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이 자기 뜻을 밝히자 브나야는 즉각 순종합니다.
(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성경 무대에서 요압이 퇴장하는 순간입니다. 다만 그의 뒷모습은 앞선 아비아달보다 더 초라하며 비참합니다. 요압은 분명 폭력적이고 자기 욕망을 왕의 의지보다 앞세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장에서 용맹한 장군이었고 번뜩이는 전략가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무수한 전장을 누비며 이스라엘 평안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압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자기 야망을 중요시하는 유능한 장군이 지키는 나라가 아님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충성하며,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나라임을 말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최후 앞에서 과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견고해져가는 솔로몬의 왕위(35절)
(35)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요압마저 제거하며 군사력까지 손에 쥔 솔로몬은 이제 자기 사람들로 국가 요직을 채웁니다. 앞선 요압 처형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브나야는 이미 다윗의 경호 대장으로 봉직했었고, 그의 삼십 용사 명단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 대관식 때 기름 붓는 의식을 주도한 사독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이때부터 사독과 그의 가문은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때까지 주도적인 제사장계열이 됩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인과응보를 명분으로 내세워 누구도 토 달 수 없게 자신의 정적을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내일 살필 남은 열왕기상 2장 남은 부분까지 혼란한 나라 상황을 수습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솔로몬의 행보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열왕기상 2:46b)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이제 모든 권력이 솔로몬에게 집중되었고 이스라엘 앞에는 부국강병의 길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전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 다윗과 그의 후손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말씀도 이뤄진 것만 같습니다(사무엘하 7:12).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토록 말씀에 신실하시고 죄를 도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습 돌아볼 것을 요청하는 듯합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을 덮기엔 께름칙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과연 우리는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해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던 솔로몬이 내세운 논리, 인과응보에서 벗어날 수 있냐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아비아달과 요압과 같은 죄지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 말씀을 사모하며 새벽 묵상도 챙기고 주일예배 및 각종 모임과 봉사도 빠지지 않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은 적이 있는지 돌아보면, 저부터 부끄럽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았는지, 과연 사람들을 선대하며 용서했는지 돌아보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솔로몬의 칼날을 피할 탈출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오늘 본문 속 칼날을 휘두른 솔로몬도 비껴가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은 솔로몬을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잠깐 다윗을 뛰어넘는 왕으로 묘사되는 듯하지만, 이후 수많은 이방 처첩을 두며 우상 숭배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든든히 세우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라를 두 동강 내는 주역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어두운 면은 사실 오늘 본문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정적 숙청 시작 기점이 된 건 그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이었습니다(열왕기상 2:5-9). 그런데 그 유언에 아비아달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비아달에 대한 조치는 솔로몬 개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또 솔로몬이 한 일로 오래전 하나님의 신탁이 이뤄졌다는 성경 기자의 말은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비아달을 파면한 솔로몬이 구태여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나님 말씀을 도구 삼았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수 세기 후 아비아달이 산 아나돗에서 다윗 왕조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 말입니다(예레미야 1:1). 또한 솔로몬은 다윗이 유언에서 꼭 집어 말한 바르실래의 아들들에 대한 선대는 실천하지 않습니다. 과연 솔로몬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요압 처리 과정에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바른 왕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은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는 제단에서 잡아내려 죽이라고 명합니다(출애굽기 21:14). 하지만 솔로몬은 제단 뿔을 잡은 요압을 그대로 죽였습니다. 자기 형편대로 율법의 문자적 표현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것입니다. 또한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깨끗하게 하겠다는 그의 주장도 다소 불편합니다. 사실 솔로몬 자신부터 까닭 없이 무고하게 흘린 피를 통해 태어난 자 아닙니까. 그런 그가 자기 집은 요압과 다르다고 열변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즉, 솔로몬도 요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도 자기 모든 수단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무자비 한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를 때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솔로몬보다 낫다고 내세울 게 없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마땅히 죽을 자라고 고발하는 게 꼭 나 자신인 것만 같아 마음이 어려운 걸 넘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인과응보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이미 임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추악한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 누구보다 비참하게 수치스럽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세상의 인과응보 논리를 뒤집기 위해서입니다. 인과응보로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 모든 이의 죗값을 치르는 은혜로 이 견고한 논리를 뒤엎어 그의 사랑하는 자들, 스스로 사람의 아들-바라바라는 정체성에 사로잡혀 죽음을 향해 걷는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신해, 솔로몬을 대신해, 오늘 우리 모두를 대신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기억할 때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곱씹으십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우리가 바른 행실을 할 때, 또는 우리 곁의 악한들에게 우리가 정의를 행사할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그 평강을 우리에게 가득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또 넘어질 것이고, 세상에는 악인이 활개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남겨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이지만 영원한 생명 얻은 자로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책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할 책임, 그렇게 그리스도를 좇아 오늘 우리 삶에 신실할 책임 말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우리 앞에 놓인 이 영화로운 걸음을 떼시는 교우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죄를 지은 사람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비아달도 요압도 모두 하나님의 길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을 따랐습니다. 이런 그들이 맞이한 건 초라하고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이 모든 걸 집행한 하나님 대리인 솔로몬조차 그들과 매한가지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고발하는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는 부끄러움을 넘어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죄책에 결코 낙심하지 않음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까닭 없이 무고하게 죽으셨지만, 도리어 모든 죄책을 자신이 감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말입니다. 분명 오늘 우린 또다시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릴 사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영원히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성도의 책임을 다하며 살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아비아달과 요압이 다윗 왕국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솔로몬의 정적 처리 과정은 매우 신속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채 한 대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3. 요압과 솔로몬은 모두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 적용하며 자기 욕망 실현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지 생각해보세요.
4. 사람은 그 누구도 ‘마땅히 죽을 자’라는 성경의 고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내가 보일 마땅한 반응과 책임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