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만달라의 그림과 그 구조물을 보고 만달라라고 잘못 알고 있으며, 원래는 자기 스스로가 만다라속에서 그 축복의 방편에 의지하여 본질을 깨우치는 것을 만달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달라에 의지하면 자기의 영광을 찾을 수도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으며, 또 깨닳음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만달라를 "본질의 찾음"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만달라가 생명을 양육시키는 원천인 가슴(유방), 자궁 등의 우주적 상징으로써 원안에 생식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만달라에 보이는 오여래(五如來)는 오대(五大), 오온(五蘊), 오번뇌(五煩惱), 오지(五智) 등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지니고 있는 오대(五大)는 오여래(五如來)의 본질로 바뀔 수 있는 재료인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는 이생의 거친 몸은 다음생으로 갖고 가지 못하지만 미세한 색온(色蘊)은 바르도를 통하여 다음 생으로 가게 된다. 색온(色蘊)을 만약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면 본래 우리의 색온(色蘊)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다. 이 색온(色蘊)이 없애야 되는 번뇌인 무명을 없애고 청정해진 상태로 되면 이를 비로자나라고 하며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식(識)에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들이 있는데 심왕(心王)을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심소(心所) 또한 51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51가지의 심소 안에 변행(邊行)의 심소중 하나가 수온(受蘊)인데 이 수온(受蘊)이 없애야 하는 번뇌인 교만을 없애고 청정해진 상태를 보생이라 하며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상온(想蘊)이 없애야 하는 번뇌인 탐욕을 없애고 청정해진 상태를 무량수 또는 아미타라고 하며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행온(行蘊)이 없애야 하는 번뇌인 질투를 없애고 청정해진 상태를 불공성취라고 하며,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미세한 오온은 올바른 수행을 통하여 결국 오여래로 변화할 수 있지만 지금 이것은 번뇌와 함께 있으므로 번뇌를 모두 없애게 된다면 거친 오온도 미세한 오온도 아니게 되므로 식들의 번뇌를 다 없앤 청정한 상태 오여래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은 오여래로 변화시키는 원인이므로 모든 중생들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만달라는 다섯 가지의 색깔을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꿈꾸며
사람들의 욕망은 많고 많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어떤 것이든, 그 속에 있는 큰 알맹이는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거의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존재해 왔습니다.
바로 티베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삶의 많은 시간을 자아 (ego)를 없애고 맑히는데 바칩니다.
몸으로는 남을 해롭게 하지 않으려고 끝없이 절을 올리고, 입으로는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으려고 쉬지않고 염불을 합니다.
또, 자신의 좁은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경전의 진리를 배우고, 영성이 담긴 힘을 얻으려고 스승을 찾아다니고 성지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티베트의 심장 라사 (LHASA);
하얀 산으로 둘러 싸인 그 고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윤회의 한 과정일 뿐이다.
오늘도 그들은 "옴마니반메홈"을 되뇌이며 내세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티베트의 수도는 라사 ; 이곳에는 티베트 불교의 근원인 포탈라궁과 죠캉사원이 있다.
티베트의 신비는 포탈라 궁전으로부터 시작한다.
불가사의한 건축물중의 하나인 포탈라궁전은 7세기 토번 왕국의 영주 송첸캄포왕이 처음 터를 닦은 이래 17세기 제5대 달라이라마때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 되었다.
정부청사로 쓰였던 아래쪽의 백궁과 역대 달라이라마의 영탑과 사원으로 쓰였던 위쪽의 홍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부에는 약 1천여개의 방이 있다. 그안에 수십개의 법당에는 부처님과 보살상 그리고 역대 달라이라마와 고승등 수많은 상들과 진기한 보물, 불교 조각품 그리고 벽화등이 가득차 있다.
가장 신성시 되는 곳 죠캉사원 ; 이 사원은 7세기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왕이 네팔왕비인 브리쿠티 공주가 갖고온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후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송첸감포왕에게 왕비로 오면서 가져온 불상을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티베트의 제2의 도시 시가체에는 타쉴훈포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달라이 라마와 쌍벽을 이루는 판첸라마의 사원으로 유명하다.
< 포탈라궁에서 내려다 본 수도 라사의 전경 >
< 라사의 전경 >
카일라스 KAILASH (수미산 須彌山, 캉린포체) 6714m
카일라스 일명 수미산은 불교의 우주론에 나오는 상상의 산으로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는 거대한 산이다. 사실 경전속에 나타나는 수미산은 신화와 전설속의 산 일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대한 피라밋같은 사면체의 수미산. 수미산 신앙의 진앙지로 알려진 이산을 향해 불교 및 힌두교, 자이나교, 뵌교 등 4대 종교도들은 모두 이 산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합장하고 머리숙여 기도하고 온몸을 던져 오체투지 하였다. 수미산이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 산이 가진 범상치 않는 모양새와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에 있다. 이는 생각과 언어의 차원이 아니다. 그냥 이 산을 보는 것 만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수미산은 우주의 연꽃으로도 불리운다.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받은 수미산 정상의 신비로운 광경
< 마니사로바 호수에서 바라 본 카일라스 >
수미산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수미산에서 흘려 내려온 물은 두개의 커다란 호수를 이루는데 마나사로바 호수(해의 호수, 양, 선을 상징, 4560M)와 락사스탈 호수(달의 호수, 음, 악을 상징, 4515M) 이다.
불교 경전에 수없이 나타나는 아뇩다지도 이 곳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 호수에서 인더스강,갠지스강 등 4대강이 발원한다.
꿈의산, 카일라스
지구 에너지의 중심축 성산(聖山) 카일라스, 눈부시도록 빛나는 성산 카일라스를 눈안 가득히 채워서 내세로 가져간다.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있듯 티베트와 인도인들에게 최고의 성산은 히말라야의 비경 카일라스이다. 성산 카일라스를 한 바퀴 돌면 55Km 이다. 걸어서 3일 걸리는 코스를 순례자들은 전신투지의 예배법으로 자벌레 기어가듯 순례하여 20~30일 만에 성산 한 바퀴를 순례한다. 여기가 순례자들이 오체투지를 시작하는 출발점.
::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종파
불교를 빼고 티베트 문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는 티베트인들의 생활뿐 아니라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있다. 원래 티베트에는 본(Bonpo)교라는 샤머니즘이 있었지만 불교가 전래되면서 본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처음 불교가 도입된 것은 6세기 송첸 감포 왕 때였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진 것은 티송데첸 왕 (742-797) 때였다. 티송데첸 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나란다 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를 티베트에 초청하였고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왕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대사원을 건립하고 팔리어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티베트인들을 인도로 보내 불교철학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티베트에는 대승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11-12세기 경에는 다수의 불교종파가 형성되었는데 카규(Kagyu)파, 닝마(Nyingma)파, 사카(Sakya)파, 겔룩(Gelug)파 등이다. 이 중에서 겔룩파는 최후에 형성된 종파로서 티베트 불교학의 중심으로서 역할 뿐 아니라 후에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하여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최대종파이다.
:: 티베트 불교의 특성
불교는 티베트인들에게는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생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국민으로서 그리고 민족으로서 티베트인들을 묶어주는 것 중에서 불교가 가장 강력하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에는 티베트인들의 25%가 종교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티베트 불교에서는 라마, 즉 스승이 죽으면 다시 어린아이로 환생(還生)하여 전생에서 다하지 못한 자신의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세속적 통치권을 함께 지니는 전통이 있다. 이러한 티베트 불교의 외형적인 모습과 함께 티베트 불교의 내용적인 특징은 경전수행과 탄트라 수행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 도입 과정에서 인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두 사상, 즉 중관 사상과 유식사상을 모두 수용하였으며 특히 당시 인도불교가 힌두교의 요가와 탄트라 수행법이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탄트라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2가지 길을 인정했는데 하나는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경전 수행의 기초는 계(戒-계율) 정(定-선정), 혜(慧-지혜), 즉 삼학이다. 또 다른 길은 탄트라 수행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되었다 탄트라는 정신개발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혐오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탄트라 수행법은 이러한 근원적인 충동을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충동을 건전하고 유익한 힘으로 정화한다. 티베트 탄트라(일명 바즈라야나로 알려진)에는 다양한 명상법이 있는데 기초적인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정신적인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모든 생명의 고통을 소멸시키고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명상으로 마음의 평정, 모든 생명을 어머니 같이 여기기, 모든 생명의 은혜를 생각하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자신과 타인을 동등하게 여기기, 이기심의 허물과 이타심의 이익을 생각하기,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하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복을 토해내기,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책임지겠다는 기도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명상을 통해서 느낀 것을 실제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마음을 훈련한다. 또한 업의 번뇌를 소멸시키며 자만심을 꺾기 위한 절(拜)을 행하고 부처님의 청정함을 상징하는 금강살타를 떠올리면서 만트라를 암송한다. 자기 자신속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황금판을 떠올리고 귀중한 곡식이나 돌 등을 바치는 만달라 공양을 한다. 만달라 공양은 더러움과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위이다. 다음으로는 스승의 본성과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결합하는 수행인 구루 요가가 있다.
간략히 살펴본 티베트 탄트라는에는 모든 생명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사상과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는 공(空) 사상, 그래서 자신의 불성을 찾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한 기도가 전제되어 있어 대승불교의 모습이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티베트인들의 수행
< 만달라 제작에 열심인 티벳 승려들, 이들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만달라 제작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티베트인들의 수행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불교 정신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우리가 빚지고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의 고통을 소멸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해탈하기 전까지 개인의 해탈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서 출발한다.그러므로 티베트인들은 스승의 도움과 지도로 명상을 통해 떠오르는 순수한 인식을 개발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붓다의자비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비를 일깨우고 증대시키려고 한다. 티베트인의 하루는 자신의 집에 차려진 불단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그들은 탄트라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성스러운 장소를 도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수행은 자신만의 깨달음과 복을 구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모든 중생의 깨달음과 복을 구하며 모든 중생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티베트인들의 자비 정신과 이타주의는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데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도 지렁이와 같은 미물조차 밟지 않으며, 나뭇잎을 주워 그 지렁이가 밟히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옮겨 놓는 모습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 티베트의 승려들
사회변동과 부의 재분배 개념으로 독립 티베트는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에 비교된다. 정신적, 그리고 세속적 정치권력의 수장으로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통치는 세습하지 않고 환생제도를 통해서 결정된다. 13대와 14대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달라이 라마는 평민, 즉 티베트의 변방지역에 있는 농촌에서 태어났다.달라이 라마 아래 있는 모든 행정직은 승려와 일반 재가관리가 동수로 이루어진다. 비록 재가 관료들이 세습적으로 직위를 유지하지만 승려들은 세습되지 않는다.승려 관리는 특권계층이 아닌 사람들이 다수를 점한다.
티베트의 사원제도는 사회변동의 기회를 제한하지 않는다. 티베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강원에 들어갈 수 있고 대다수의 승려, 특히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승려들은 대부분 천민 출신으로 캄과 암도지방등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는 티베트의 사원들이 사람들의 학식에 따라서 어떤 높은 자리에도 오를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티베트 격언 중에는 "만약 어머니의 아들이 학식을 갖고 있다면, 가덴(티베트 불교 겔룩파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자리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 자연에 순응하는 티베트사람들의 삶
원래 티베트에는 티베트 족이 중심으로 약간의 한족, 회족, 몽고족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의 이주정책으로 인해 지금은 한족의 수가 티베트인을 능가하고 있다. 인구는 주로 짱난 곡지에 살고 있으며 티베트의 가옥은 온돌과 흙을 겹겹이 쌓아올린 벽으로 만들어진 2∼3층의 집이다. 산업은 주로 농업과 목축이 대부분이며 주로 반농반목(半農半牧)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차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조생종 라이보리가 주요 농작물이고 봄밀, 완두콩, 원두라고 불리는 둥근 무, 유채, 누에콩, 메밀, 복숭아, 배, 사과 등을 기른다. 목축으로는 소와 비슷하게 생긴 야크와 양을 사육하는데 야크는 운송용으로 이용될 뿐 아니라 가죽, 털, 내장, 젖 등이 모두 쓰이고 그 분뇨는 연료로 쓰이므로 티베트인들의 생활과는 뗄래야 뗄수 없는 동물이다. 티베트인들의 주식은 라이보리를 볶아 가루로 빻은 참파라는 것을 먹는데 버터차로 반죽하여 먹는다. 버터차는 나무통에 끓인 찻물을 붓고 소금과 버터를 넣은 후 저어서 만든다. 옷은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는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잘라 맹금류에게 나누어주는 조장(鳥葬)은 티베트의 독특한 장례풍습이다. 화장을 하기에는 충분한 나무가 없고 기온이 낮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매장을 하더라도 시체가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풍습이 생겨났지만 보시를 통한 보살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티베트인들의 불교관이 잘 드러난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 티베트의 역사
7세기 초 송첸 감포 왕이 티베트 족을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당나라 태종 때 문성 공주가 송첸 감포 왕에게 시집오면서 종이 만드는 기술 등 중국문화가 전해졌고 또한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고 티베트 문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842년 다르마 왕이 즉위한 후 봉건제후의 활거 등으로 내분이 일어나 400년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13세기 몽고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정치와 종교를 함께 통치하는 정교합일적인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 원나라 이후 명과 청나라 시대에는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해 일부 티베트 상류층과 결합 중국으로부터 티베트를 분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는 30년부터 중국관리를 티베트에 파견하였고 34년에는 수도 라사에 몽장(蒙藏) 위원회 주(駐) 티베트 사무소를 설치, 중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 티베트는 독립정부를 구성했으나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군에 의해 1950년 침공을 받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의 점령이후 14대 달라이 라마는 UN의 티베트 문제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의 동부 티베트 지역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신변문제를 계기로 1959년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베트인들이 인도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 구역으로서 중국과 동일한 체제로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이 몰수되거나 아주 소수의 사원만을 남겨 둔 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환속당했다.
::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신비의 땅, 티베트의 자연
티베트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4천 미터 이상의 고원인,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자리하고 있어서 공기가 희박하고 드넓은 초원과 산맥으로 유명한 티베트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곳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연의 나라'라는 뜻의 '포(Poe)라고 부르거나 산의 눈이 여름에도 녹지 않고 쌓여 있어 '눈 덮인 나라'라는 뜻의 캉첸이라고 부른다.티베트의 총면적은 220만 km2으로 중국 전국토의 23%에 해당될 정도로 광활하다. 티베트는 북위 27∼37。 사이의 위도에 위치해 있지만 지형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차고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그래서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0도 이하이고 여름 기온도 섭씨 20。를 넘지 않으며 강풍이 불고 연평균 강수량도 200mm 이하이다. 반면 짱난 곡지는 브라마푸트라 강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으로 연평균 기온이 10。C 안팎이고 강수량도 1,000mm가 넘는 지역이 많다. 한랭건조하기 때문에 목초지와 황무지가 대부분으로 10∼20cm의 부식토에 목초가 건조한 땅위를 덮고 있다. 이 층을 캐내면 재생이 불가능하여 사막화될 위험성이 있어서 오랜 세월동안 토지를 개발하는 것을 꺼려왔다. 반면, 동부지역에는 삼나무, 낙엽송 등의 산림이 형성되어 있다.
:: 자연자원의 보고, 전략적 요충지 / 파괴되어가는 생태 환경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태국 등과 접해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이며 티베트 고원의 광물자원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하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이 티베트를 쉽게 놓아주지 않고 있다. 중국이 침략하기 전 티베트는 근대 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환경보존 제도를 갖고 있었다. 야생생물과 넓은 대지에 걸쳐있는 티베트 자연은 불교가 티베트 사람들에게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연관성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보존할 필요가 없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짐승을 죽이지 말고 모든 살아있는 것과 주위 환경에 자비심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베트 정부는 동물사냥을 금지했었다. 그래서 티베트는 생태 환경적으로 안정적이었고 환경보존이 티베트인들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중국의 침공은 이러한 티베트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짓밟아 버렸다.
티베트는 희귀한 식물종과 야생동물, 천연자원의 보고이며 아시아 대륙을 흐르는 강들의 발원지로서 파괴되어서는 안될 주요한 위치에 있다. 티베트에는 대부분 티베트에만 자라는 희귀한 1만 여종 이상의 고산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중 2천 여종은 티베트, 중국과 인도의 전통 의학에서 사용되는 식물이었다. 샤프란, 칼리스데몬, 미나리 아재비, 매나무 등은 티베트에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식물들이다. 또한 황새, 야생 백조, 물총새, 바다새, 맹금류, 딱새, 상딱새, 되새, 검은 목 두루미, 지빠귀 등의 새가 있었다. 티베트의 산과 숲은 눈 표범, 시라소니, 검은 곰, 갈색곰, 야생 야크, 푸른 양, 사향노루, 금 원숭이, 야생 당나귀, 티베트 가젤, 티베트 영양, 팬더, 붉은 팬더 등과 같이 희귀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보금자리였다. 2백 5십만 헥타르에 이르는 티베트의 삼림은 가파르고 35도가 넘는 계곡의 경사지에 형성되어 있다. 가문비 나무, 전나무, 소나무, 낙엽송, 노송나무, 자작나무, 너도밤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열대 침엽수림과 아열대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200년 이상된 나무들이 있다.
티베트에는 개발되지 않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금, 리튬, 우라늄, 크롬, 철, 붕산나트륨, 구리 등 126가지의 광물의 상당량이 있다. 우라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저장되어 있다. 또한 암도 지방의 유전은 매년 1백만 톤 이상의 원유를 생산한다.
티베트는 브라마푸트라, 인더스, 메콩, 양츠, 황하 등 아시아의 주요 강들의 발원지이다. 이들 강들은 중국, 인도, 파키스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흘러 들어가는 아시아 대륙의 생명선이다. 또한 티베트에는 1만 5천여개의 자연호수가 있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강들은 세계 인구의 47%, 아시아 인구의 85%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티베트의 환경문제는 가치 없는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중요한 지구적 문제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생태파괴로부터 티베트 고원을 지킬 필요성이 시급하다. 왜냐하면 이는 티베트인들의 생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절반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 의한 광범위한 환경파괴로 삼림파괴이 파괴되고, 야생 야크와 당나귀가 도살되며 흰색입술사슴과 티베트 표범, 푸른 티베트 양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과 석유, 석탄, 금, 철, 구리와 같은 광물이 무분별하게 채굴되고 있으며 핵무기 실험실과 핵폐기물 매립장소가 되었다. 현재 티베트에는 중국이 티베트 약 90기의 핵탄두를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산림파괴로 인해 티베트의 사막화가 빨라져 인도와 주변 지역에 홍수피해와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아무런 환경적 보완장치 없이 수많은 자연자원을 계속해서 빼가면서 티베트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 티베트의 망명정부
빼앗긴 뜰에도 봄은 오는가?
중국은 티베트(남북한 합친 한반도 면적의 11배)의 침공으로 본래 자신의 영토의 23%에 달하는 거대한 땅을 빼앗고, 네팔,부탄,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는 행운을 차지한다.
< 다람살라에 있는 티벳 망명정부의 전경 >
인도 북부 히말라야 기슭 다람살라에는 '작은 라사'로 일컬어지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다람살라에는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으며 3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네팔과 부탄의 티베트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쓴 티베트인들의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티베트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경우가 많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티베트 교육체계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이다.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농업 정착촌에 살고 있다. 농업, 농산업, 수공업, 서비스 분야의 산업을 중심으로 풍요롭지는 경제가 안정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현지의 티베트 전통문화가 중국인들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59년에 티베트 공연예술기관을 설립했고 한편으로 중앙고등티베트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에 있는 티베트인들을 위한 대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의 핵심인 티베트불교의 방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200여개 이상의 사원을 건립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관할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로서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가 있다. 또한 입법부로서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 뉴델리,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카트만두, 캔버라, 도쿄, 타이페이 등에 티베트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 중국인 이주정책 / 티베트인보다 중국인의 수가 더 많은 티베트
티베트인과 문화, 환경을 가장 위협하는 것 중에 하나는 중국인들과 군인들의 티베트 유입으로 티베트가 중국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당국의 중국인 이주정책으로 1980년에 티베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이 6백만명인 반면 중국인들은 7백 5십만명에 이르렀었다. 수도 라사의 경우만 해도 1946년까지만 해도 대 사원에 있던 2만여명의 승려 수보다 적은 인구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20여 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라사 인구의 70%가 중국인이다.
티베트인들에 대한 산아제한, 낙태 강요와 불임시술이 이러한 티베트의 중국화를 가세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1984년부터 1가정에 2명의 자녀만 낳은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중국인 이주 정책과 산아제한 정책의 추진 결과 티베트인들은 경제, 교육, 정치, 사회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있으며 티베트 문화와 전통은 급속한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경제정책도 티베트인보다는 중국인들 우선이고 대다수의 기업들은 중국인 소유인데 캄과 암도 지방에서 계곡에 위치한 좋은 땅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분배되었지만 티베트인들은 점점 황무지로 쫒겨나고 있다. 주요한 행정직은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더우기 중국인들은 티베트 사람들에 비해 삼림과 광물개발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라사에 있는 1만 2천개의 가게들과 식당중에서 단 300개만이 티베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133개의 사업체를 소유한 반면 티베트인들은 15개의 사업을 소유하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영국언론에 의하면 암도 지방의 도시 중심에서는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티베트에서 행해지는 개발에 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 개발은 중국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어 티베트로의 유입을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은 티베트어 사용 금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학교는 티베트어대신 중국어를 가르치고 정부 문서도 중국어로 출판한다.
:: 인권의 사각지대
티베트 망명정부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1979년까지 120 여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중국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중국군은 52년과 58년 사이에 996건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1만명의 티베트인들을 죽였다. 비슷하게도 진압으로 인해 암도 지방의 인구는 1956년의 13만명이던 것이 63년 6만명으로 감소했다. 판첸 라마는 이에 대해서
"만약 킹하이 지방에서 일어난 모든 잔혹행위를 영화로 담는다면 이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고록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언덕에서 웅덩이로 굴러갔다.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반역자를 몰아냈기 때문에 축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 위에서 춤을 춰야 했다. 하지만 곧 바로 그들 또한 학살당했다." 고 했다.
감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70%가 죽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 고원 북부의 황무지에서 1만명 이상의 구속자들이 5개의 감옥에 갇혀 갱도를 파야 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매일 10명에서 30명의 티베트인들이 굶주림과 폭행, 과로로 숨졌다. 1년에 8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와 비슷하게 라사의 전력발전소 공사에서는 매일 3-4명의 시체가 근처 강으로 버려지거나 불태워졌다고 한다. 1960에서 62년 사이에 1만 2천여명의 수감자들이 납 채굴 광산에 숨졌다. 한때 금지되었던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이 허용되고 있지만 공식 인정된 관광안내원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없다. 또한 라사 이외의 외곽지역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티베트인들은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가 없다. 정부당국의 허가 없이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중국당국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적법한 절차도 없이 투옥되거나 처형된다.
:: 티베트 불교 말살정책 / 불교문화 유산의 파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 전역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는 사원과 암자가 6천 여개가 있었고 여기에는 약 60만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드레풍, 라사의 세라, 사캬 등의 거대한 사원은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였었다. 이들 사원들은 수 천여 개의 불상과 금, 은, 다른 보석이 박힌 공예품이 있었고 수십만 개의 탑이 있었다. 불교 경전 외에도 이들 사원들은 문학, 의학, 천문학, 예술, 정치학 등의 작품 등을 보관하는 중심으로서 티베트 국민들의 "보물의 집"이었다.
불교민속과 가르침은 사람들의 생활과 축제, 명절, 노동윤리, 집안 일 뿐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까지도 조절해 주었다. 티베트는 중국이 침공하기 전까지는 긍지를 가진 불교독립국가였다. 티베트에는 또한 모스크 사원을 갖는 이슬람교도의 공동체가 있었다. 더불어 아주 소수의 힌두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 예전에 그들의 종교는 묵인되었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또한 중국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처음에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완전한 합병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종교수행에 대해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전통적 사회체계와 종교를 허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우리 유물론자들의 적이고 종교를 믿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지 말고 비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당국은 종교를 티베트 통치의 근본적인 장애로서 인식하였고 1956년 이후부터 소위 "민주개혁"이라는 것을 캄과 암도 지방에서 그리고 1959년 티베트 중앙까지 실시했다. 그 결과 사원과 문화기관들이 체계적으로 노략질 당해서 해체되었다.
처음에는 광물학자들이 사원건물들을 옮기고 귀중한 돌들을 뽑아갔다. 다음에는 야금학자들이 금속을 트럭에 실어갔다. 벽은 폭파되었고 목재와 나무기둥들도 빼갔다. 점토로 만들어진 불상들은 귀금속을 찾는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결국 남아있는 모든 나무와 돌들이 없어졌다. 수백 톤의 귀중한 불상, 탱화, 금속공예와 보물들을 국제골동품시장에 팔기 위해 또는 녹이기 위해 중국으로 실어갔다. 불교경전은 불태워져 밭의 거름에 섞였다.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하도록 했고 기적을 행하라고 강요했다. 황폐해진 사원은 돼지우리로 둔갑했다. 중국 감옥에서 굶주리고 있는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중국인들은 대신 "부처에게 음식을 달라"고 말했다.
중국의 공식 주장과 달리 수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가 1955년과 1961년 사이에 파괴되었다. 1976년에는 6,259개의 사원 중에서 단 8군데만이 남았다. 60만명의 비구, 비구니, 린포체(환생한 승려)와 탄트라 수행자 중에서 11만명이 고문을 당하고 죽었으며 25만명 이상이 중국당국의 강요에 의해 환속했다. 일례로 중국의 침공 이전에 세라 사원에는 8천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지금은 300명만 허용하고 있고 1만명에 가까운 승려가 있었던 드레풍 사원도 400명으로 감소되어 있다. 또한 사원의 기능은 종교사업국, 티베트불교연합, 민주관리위원회, 정보기관등으로 편제되었다. 티베트의 종교파괴 정도에 대해 1988년 판첸 라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사원들은 100% 완전히 파괴되었다. 티베트 전역에서 99%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중에서 포탈라 궁의 상황은 가장 양호하다. 그러나 포탈라 궁 또한 훼손되고 있다."
1979년 이후부터 피상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던 티베트에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사원의 복원과 절하기, 사원과 탑 주위 돌기, 만트라 암송, 향 피우기 등 일정정도의 의식을 허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허가된 곳에서 제한적으로 통제를 받으면서 할 수 있었다.중국당국은 티베트 승려들과 달라이 라마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사찰 내에 공안관리를 배치했다.
달라이 라마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자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 통치권자이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즉 "넓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의 소유자인 스승"이다. 1대 달라이 라마는 타시룬뽀 사원을 건립한 겐둡 둡빠로 시작해서 2대까지는 강 쪼라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3대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그후 5대 달라이 라마 시대, 몽고로부터 티베트의 주권을 물려받으면서 현재와 같이 정치적, 종교적 통치권자로서 역할 해왔다.
5대 로산 갸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자비의 부처가 티베트 역사 내내 달라이 라마로 환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티베트인들은 이에 따라 달라이 라마를 선택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아 후대 달라이 라마로 결정한다. 달라이 라마가 죽기 전 그가 환생할 장소를 예시하기도 하지만 예시가 없을 경우 신탁에 의해 새로 탄생할 달라이 라마의 집, 땅, 그 지방의 모습을 자세히 예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찾은 아이에게 전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기 전에 사용하던 염주와 유품들을 섞어 놓고 물건을 고르게 해서 달라이 라마인지 아닌지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최종 결정은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행하는 의식을 통하여 선택한다. 이렇게 선택된 아이는 달라이 라마로서의 자질을 갖출 교육을 받고 18세가 되면 정식으로 달라이 라마에 즉위한다.
전대 달라이 라마 입적 후와 다음 달라이 라마가 즉위하기까지의 기간동안은 티베트 승려 중에서 가장 덕이 높은 사람이 섭정이 되어 달라이 라마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다.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1935년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티베트 동북부 암도 지방의 탁처라는 곳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라모 톤둡이었다. 1937년 티베트의 섭정은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찾기 위해 고승들을 지방으로 파견했다. 고승들은 티베트 불교전통에 따라 여러 차례 시험과정을 거쳐 어린 소년 라모를 13대 달라이 라마의 화신임을 인정했다. 이때 달라이 라마의 나이는 만 3살이 되기도 전이었다. 시험과정을 거쳐서 달라이 라마의 화신임을 증명받기는 했지만 그 전부터 소년 라모는 항상 달라이 라마가 살았던 포탈라 궁전이 있던 티베트의 수도 '라사'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은 달라이 라마의 화신을 찾으러 관리로 변장하고 왔던 고승들을 '라마' 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의 생애
전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은 후 2년이 지난 4세 때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집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 궁에 들어갔다. 6세 때부터 링 린포체로부터 불교 철학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계를 분해하거나, 영사기를 조작하여 영화를 보기도 하고 차를 몰다가 차 유리창을 깨먹기도 하는 등 여느 어린이들과 비슷한 호기심과 장난기가 있었다. 25세가 되던 1959년 불교철학박사 학위에 해당되는 게쉬를 마쳤다. 달라이 라마가 공부한 불교철학은 논리학, 중관철학, 인식론, 불교교학, 계율론 등 이었고 고승들과의 논쟁을 통과해야 하는 여러 시험들을 거쳐 게쉬를 마칠 수 있었다.
중국의 침공과 망명정부 수립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베트 문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엘살바도로만이 UN 총회에 티베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는데 지지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 UN 총회에서 다뤄지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협상하였지만 중국의 강압에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의 "17개 조항의 협정"에 서명하고 말았다.1954년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베트 문제를 협상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믿는 중국 지도자들의 시각하에서 "티베트는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이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이후부터 지방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가 계속되었고 1959년에 티베트에 유례없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캄과 암도지방의 주요 라마승과 지역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공연과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고통스러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를 경극에 초대하면서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안전을 더욱 염려하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중국군이 경호원도 없이 오라고 한 점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라사의 시민들은 중국의 핑계에 달라이 라마가 끌려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1959년 3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가 중국 경극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블링카 궁을 둘러쌌다. 그후 며칠동안 중국이 티베트를 단념하고 완전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 대규모 집회의 폭발적인 결과를 염려하면서 노블링카 궁 앞에 있는 수많은 티베트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과 중국군의 노여움을 삭이고 폭력을 막기 위한 일환으로 중국군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이때 상황을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양측의 화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라사의 시민들에게 절제하도록 요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군의 모든 편지들에 답장을 했다. 당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비무장한 나의 국민들과 중국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사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전면적인 대치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중국군의 진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자, 달라이 라마는 그의 국민을 보호하는데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59년 3월 10일 하루동안 시위에 참석한 1만 5천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다. 당시 티베트인들의 민중봉기를 진압한 과정에서 중국은 6,000여개의 불교사원을 파괴했고 12만명의 티베트인들을 학살했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당시 상황에서 티베트인의 생명을 지키고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민주적 망명정부 조직,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인도로 망명한 후 네루 수상의 지원을 받아 인도 동북부 지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지난 40여년 동안 학교와, 수공예 공장, 예술 학교까지 설립하여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1963년에는 티베트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티베트 망명정부를 재조직하여 사원제도를 개혁하였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 의회의 의원은 직접선거에 선출되고 내각은 이 의회 의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달라이 라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티베트 행정부를 민주화할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티베트가 독립을 쟁취하면 정치적인 권한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의회 의원의 3/2가 대법원과 협의하여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 달라이 라마의 실권은 평의회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인도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한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문제에 대해 UN에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UN 총회는 1959년, 61년, 65년에 걸쳐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존중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시종일관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다.
티베트 독립을 위한 무장 게릴라 캄바의 대 중국 폭력투쟁 노선을 반대했고, 70년대 중국과 미국간의 데땅뜨 시기에는 캄바 지도자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결국 캄바 게릴라들은 해산했다.한편 1987년 세계인권 회의에서 티베트의 미래와 관련해서 '5개의 평화안'을 중국에 제안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티베트 국민 모두를 평화지역으로 이주시킬 것 2. 티베트 국민의 존재를 위협하는 중국의 이주정책을 포기할 것 3. 티베트 국민들의 근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존중할 것 4. 티베트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고 보호하며, 핵무기를 생산하고 핵폐기물을 처리하는데 티베트를 이용하지 말 것 5. 티베트의 장래는 물론, 티베트 국민과 중국 국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성실한 협상을 시작할 것
또한 달라이 라마는 최근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서 티베트의 독립이 아니라 완전한 자치지역으로서의 티베트를 보장해주길 요청했다. 이는 그만큼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중국당국의 폭력과 억압에 눌려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길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자서전『유배된 자의 자유』에서 밝혔듯이 적대관계에 있는 중국마저도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의 적이 가장 훌륭한 우리의 친구이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내면의 힘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존경을 기르도록 한다. 이런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고 존경하고 감사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이란 인내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가장 큰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마저 사랑하는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입장은 세계의 평화와 비폭력주의에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상 위원회는 "달라이 라마가 끝까지 폭력사용을 반대하는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투쟁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는 티베트 국민들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관용과 상호존중에 기초한 평화로운 해결안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89년 12월에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해 투쟁한 모든 사람들과 티베트 국민들을 대신해서 이 상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상을 수상하면서 "이 상은 진실과 용기와 결단이 무기가 되어 티베트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우리의 투쟁은 비폭력적이고 증오심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의 평화를 위한 비폭력 투쟁으로 이외에도 막사이사이상과 스웨덴 윌렌베르히 인권상을 수상하였고 국제 파리대학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대학에서 법학, 정치학, 인문학, 철학 등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평범한 승려로서의 삶
달라이 라마는 종종 자신을 가리켜 "나는 단순한 승려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달라이 라마는 승려의 삶을 준수하고 있다. 다람살라에 있는 작은 집에 살면서 새벽 4시면 명상을 하기 위해 일어나고, 아침 식사 후부터 오전 9시까지 명상을 하며 9시부터 점심때까지 불교경전을 읽고 공부한다. 오후에는 주어진 회의와 설법과 의식을 수행하며,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달라이 라마의 주요 수상 및 학위경력
- 삶의 성취상 :1999년 11월 24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Hadassah 여성 시온주의 조직 - JULIET HOLLISTER 상 : 1998년 5월5일 미국 뉴욕 - 명예박사 학위 : 1998년 5월 8일 미국 브란데이스 대학 - 명예박사 학위 : 1998년 5월 11일 미국 아틀란타 에모리대학 - 명예철학 박사 학위 : 1997년 3월 23일 대만 선 야첸 대학 - 꿈의 정신 : 1996년 1월 15일 미국 국제 블루스 재단 - 루즈벨트 4개 자유상 : 1994년 네덜란드 프랭클린 엘리노어 루즈벨트 연구소 - 세계안보평화상 : 1994년 4월 27일 미국 뉴욕 법률가 연합 - 인문학 박사학위 : 1994년 미국 콜롬비아 대학 - 인문학 박사학위 : 94년 4월 25일 미국 베레아 대학 - 명예 이사 : 1994년 3월 20일 이스라엘 히브류 대학 - 인류를 위한 으뜸상 : 93년 6월 13일 독일 사토리우스 재단 - 명예 법률학 박사 : 1993년 5월 14일 영국 성 앤드류 대학 - 명예 법률학 박사 : 1993년 5월 13일 영국 애버딘 대학 - 문학사 : 1992년 1월 5일 인도 안드라 대학, 비사카팟남 대학 - 명예 법률학 박사 : 1992년 5월 5일 호주 멜버른 대학 - SHIROMANI상 : 1991년 3월 25일 인도 Shiromani 연구소 - 평화와 화합상 : 1991년 8월 23일 인도 뉴델리 국가평화회의 - 생명의 바퀴 상 : 1991년 10월 10일 뉴욕 Understanding 사원 - 지구 상 : 1991년 6월 5일 미국 뉴욕 통일지구와 유엔 환경 프로그램 - 뛰어난 평화와 지도자 상 : 1991년 4월 6일 미국 핵시대평와재단 - 진보하는 인간해방 : 1991년 4월 17일 미국 뉴욕 Freedom House - 명예문학 박사 : 1990년 12월 8일 인도 카나타카 대학 - 교육학 박사 : 1990년 이태리 볼로냐 대학 - 신학박사 : 1990년 1월 4일 인도 중앙 고등티벳학 연구 - LE PRIX DE LA MEMORIE : 1989년 프랑스 파리 다니엘 미테랑 재단 - 노벨평화상 : 1989년 12월 10일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 - RAOUL WALLENBERG 인권상 : 1989 7월 21일 미국 워싱톤 의회 인권대회 - DR. LEOPOLD LUCAS PRIZE : 1988년 6월 16일 독일 튀빙겐 대학 - 알버트 슈바이처 박애상 : 1987년 2월 28일 미국 뉴욕 인간행동 재단 - DOCTOR HONORIS CAUSA : 1984년 1월 16일 프랑스 파리 대학 - 명예시민상 : 1981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시 - 자유의 횃불 : 1979년 10월 19일 미국 뉴욕 Gilbert di Lucia - 인문학 박사 : 1979년 미국 시애틀 대학 - 로스엔젤레스 열쇠 : 1979년 9월 톰 브래들리 시장 - 샌프란시스코 열쇠 : 1979년 9월 27일 파인슈타인 시장 - 불교철학 박사 : 1979년 9월 22일 미국 UCLA 동양학 연구소 - 명예시민 : 1979년 9월 17일 텍사스 휴스톤 시장 - 신학박사 : 1979년 9월 17일 미국 캐롤 대학 - SPECIAL MEDAL : 1979년 6월 17일 몽고 아시아 불교평화회의 - PLAKETT AWARD : 노르웨이 달라이라마의 난민활동을 위한 노르웨이 난민회의 - 링컨 상 : 1960년 1월 23일 미국 - RICHARD E. BYRD 추모상 : 1959년 9월 16일 미국 - RAMON MAGSAYSAY AWARD : 1959년 8월 31일 필리핀 - 문학 박사 : 1957년 인도 베나레스 힌두대학
내가 본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의 용기 있는 노력은 인권과 세계평화의 선도적인 지지자로서 그를 유명하게 했다. 티베트인들의 고통을 종결시키기 위한 그의 계속적인 노력은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했다."
- 톰 란토스 미국 의회 의원-
"달라이 라마께서는 우리들에게 불교에 관해서, 나아가 인간애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대교에 관해서 가르쳐 주었다. 모든 진정한 대화가 그렇듯이,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은 다른 믿음이 지니는 고결함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와 더불어 가치 있었던 것은 그분과의 만남이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기 전까지 무시해왔던 우리 자신과 유대교에 관한 면들을 상기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 유대교 랍비 어빙 그린버그-
"달라이 라마는 훌륭한 종교인이며 프랑스 국민들과 국제 사회에서 존경받고 있다." - Francois Rivasseau 프랑스 외무부 대변인-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선 종교지도자이다. 그는 티베트의 고통을 항상 짊어지고 다니면서 평화, 정의, 관용, 비폭력 등 세계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고귀한 가치관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실천해 왔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계적 존재가 되었다."
- 로렌스 프리먼 신부-
달라이 라마가 만난 세계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40 여년의 망명기간 동안 50여개국을 방문하였다. 방문할 때마다 방문국의 지도자들을 만나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대중들에겐 평화와 자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1991년에는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방문하여 의회에서 연설한 첫 외국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만난 유명 정치 지도자들로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클린턴 미 대통령,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등 셀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가 방문한 국가로는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스웨덴, 스위스 등 유럽국가는 물론,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폴, 태국 등 남미와 아시아 국가 등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를 방문했다. 종교간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를 만났는데 1973년에는 교황 바울 6세를 만났고 교황 요한 바울 2세와는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1954년 중국의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1956년 이후의 인도 모든 수상과 대통령, 부통령 1967년 11월 13일 Field Marshal T. Kittikachorn 태국 수상, Prime Minister, Thailand 11월 14일 Bhumibol Adulyadej 태국 국왕 1973년 10월 10일 Erskine Chidlers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 9월 29일 교황 바울 5세 1978년 Jayewardene 스리랑카 대통령 1980년 Suzuki Zenko 일본 총리 1982년 7월 27일 Tunku Abdul Rahman 말레이시아 외무장관 8월 Adam Malik, 인도네시아 부통령 1986년 5월 27일 Jacques Chirac 프랑스 총리 1989년 6월 27일 Oscar Arias, President 코스타리카 대통령 7월 3일 Carlos Salinas de Gortari 멕시코 대통령 12월 6일 Jurgen Wohlrabe 서독 대통령 12월 10일 Olav 노르웨이 국왕 1990년 2월 2일 Vaclav Havel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6월 1일 교황 요한 바울 2세 10월 7일 Richard von Weizsacher 독일 대통령 1991년 3월 22일 Mary Rohinson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 4월 16일 George Bush 미국 대통령 9월 2일 Kurt Waldheim 오스트리아 대통령, President, Austria 9월 29일 Vytauta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대통령, President, Lithaunia 10월 2일 Anatolijs Gorbunvos 라트비아 대통령 10월 4일 Bronius Kuzmicka 에스토니아 부통령 10월 5일 Zhelyn Zhelev 불가리아 대통령, President, Bulgaria 12월 2일 John Major 영국 총리 1992년 4월 8일 Paul Keating 호주 수상 4월 13일 Jim Bolger, Prime Minister 뉴질랜드 수상 6월 11일 Carlos Menem, 아르헨티나 대통령 6월 17일 Patiricio Aylwin 칠레 대통령 7월 26일 Thomas Klestil 호주 대통령, Franz Vranitzky 대법관 1993년 11월 16일 Franc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 Alain Juppe 외무장관 10월 30일 Alain Carignon 프랑스 통신부 장관 7월 14일 Thomas Klestil 오스트리아 대통령 Alois Mock 외무장관, Nikolaus Michalek 법무장관 7월 15일 Franz Vranitzky 오스트리아 대법관, Ernhard Buiek 부법관 1994년 10월 8일 Gro Harlem Brundtland 노르웨이 수상 7월 3일 Violeta Barrios de Chamorro 니카라과 대통령, Ernest Leal 외무장관 6월 17일 Silvio Berlusconi 이태리 총리 6월 16일 Oscar Luigi Scalfaro 이태리 대통령 6월 14일 Gabriele Gatti, 산마리노 공화국 국무정무 장관 6월 6일 Pleter Kooilmans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 6월 9일 Marin Gonzalez EC 부회장 6월 7일 Jean Luc Dehene 벨기에 수상, Willy Claes 벨기에 외무부 장관 4월 28일 Mr William J. Clinton 미국 대통령, Albert Gore 미국 부통령 Anthony Lake 미국 국가안보 고문관 3월 21일 Yossi Sarid 이스라엘 환경부 장관 6월 20일 Barbara McDougal 캐나다 외무 장관 5월 12일 Douglas Hurd 영국 외무 장관 4월 27일 William J. Clinton 미국 대통령, Albert Gore 부통령 1995년 9월 15일 Patrick Manning 트리니다드와 토바고 수상 9월 13일 William J. Clinton 미국 대통령, Albert Gore 미국 부통령 5월 4일 Klaus Kinkel 독일 외무부 장관 6월 23일 Flavio Cotti 스위스 외무부 장관 1996년 10월 23일 Klaush Hansch 유럽 의회 의장 10월 23일 Emma Bonino 유럽연합 위원회, Commission, European Union 10월 29일 Jacues Toubon 프랑스 법무장관 9월 26일 John Howard 호주 총리 9월 11일 Jim Bolger 뉴질랜드 수상, Don McKinnon 뉴질랜드 부수상 8월 22일 Nelson Mandela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7월 18일 Elizabeth 영국 여왕 7월 17일 Malcom Rifkind 영국 외무부 장관 5월 28일 Tore Godal 노르웨이 외무부 장관 5월 20일 교황 바울 2세 5월 15일 Niels Helveg Petersen 덴마크 외무부 장관 4월 30일 Price Albert 모나코 왕자 1997년 4월 23일 William J. Clinton 미국 대통령 3월 27일 Lee Teung-hui 대만 대통령 1998년 12월 8일 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 12월 8일 Lionel Jospin 프랑스 총리 12월 8일 Kofi Annan 유엔 사무총장 11월 10일 Wiilliam J. Clinton 미국 대통령 1999년 11월 24일 Avraham Burg 이스라엘 하원 의장 10월 28일 교황 요한 바울 2세 10월 26일 Massimo D'Alema 이태리 총리 10월 18일 Wim Kok 네덜란드 수상 6월 16일 Josckha Fischer 독일 외무부 장관 5월 10일 Tony Blair 영국 총리 5월 4일 Jean Luc DEHAENE 벨기에 수상 4월 14일 Edwardo Frei 칠레 대통령 4월 7일 Fernando Henrique Cardoso 브라질 대통령 등
티벳 사자의 서 < 바르도에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 >
8세기 티베트불교의 대가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 산중에서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후세 제자들이 찾아내어 남겼다는 전설의 경전이다. 원래 제목은 티베트어로 '바르도 퇴돌'이라고 한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를 말한다.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다. '퇴돌'이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전은 사후세계를 경험한 다음 다시 환생한 라마승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사후의 영혼이 겪게 되는 여러 현상을 설명하고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죽음을 배우면 삶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이 책은 바로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안내서이다. 즉 죽음과 다음 환생 사이의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자를 위한 안내서인 것이다.
티베트불교 최고의 경전 《바르도 퇴돌》이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927년이었다. 티베트 학승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영역하고, 영국의 종교학자 에반스 웬츠가 편집해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출판한 이 책은 《이집트 사자의 서》과 비교되면서 서구의 기독교적 영혼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집단무의식 이론을 세운 심리학자 칼 융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순간에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파드마 삼바바의 신비 경전을 완역한 책. 죽음과 다음 환생 사이의 중간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자(死者)를 위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후세계에서 보게 되는 그 모든 빛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49일간의 중간상태를 바르도라 부른다. 『티벳 사자의 서』에 의하면 바르도에서 사자(死者)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선택한다고 한다.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The 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
192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에반스 웬츠 박사가 편집한《바르도 퇴돌》이《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서구세계에 일으킨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서양 심리학계의 거장 칼 융은 1938년에 출판된 스위스 초판본의 해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티벳 사자의 서》의 초판이 나온 이래 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언제나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너무 많이 말하게 하거나 말이 별로 없게 만드는《이집트 사자의 서》와는 달리《티벳 사자의 서》는 원시적인 야만인이나 신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 존재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지성적인 철학이다. 그 철학에는 불교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책이다."
웬츠 박사는《바르도 퇴돌》의 필사본을 인도 다르질링의 한 사원에서 구한 후 시킴으로 건너가 티벳 승려인 라마 카지 다와삼둡의 정식 제자로 입문하여 5년 간 가르침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 그는 신비한 동양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5년 이상의 시간을 야자나무가 늘어 선 스리랑카의 해변으로부터 인도 대륙을 거쳐 빙하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양의 현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때로는 도시 속에서 살았고
때로는 밀림 속에서도 살았으며, 요가 수행자들과 함께 산 속의 토굴에서 살았다. 때로는 승려들과 함께 사원에서 살았고, 때로는 구원을 찾는 군중들 틈에 섞인 먼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19년 시킴의 강톡에서 그들은《바르도 퇴돌》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은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했고, 에반스 웬츠는 그가 구술하는 주석과 해설을 받아 적고 책의 편집을 맡았다.
《티벳 사자의 서》는 웬츠 박사의 초판(이하 웬츠본)이래 지금까지 두 번 더 영역되었다. 두 번째 영역은 1975년 프란시스 프리맨틀과 촉얌 트룽파 린포체가 번역했고(이하 트룽파본), 세 번째 영역은 1994년 달라이 라마의 서양인 정식 제자이며 현재 콜롬비아 대학의 종교학과장인 로버트 서먼 스님이 번역했다(이하 서먼본). 한글 번역은 웬츠본은 류시화 선생이 했고, 서먼본은 정창영 선생이 했다. 필자가 번역한 이 책은 트룽파본이다.
몇 해 전 류시화 선생의 번역을 구입하여 읽었을 때 사람이 죽은 뒤의 의식 상태를 비로소 알게되어 기뻤다. 사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다음 생을 받는지에 대해 티벳 스승들은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명료한 의식을 가진 채 다시금 인간의 육체 속으로 환생한 후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죽은 자를 위해 읽어주는 경전인데, 웬츠본은 해설과 주석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막상 독송을 하려고 하면 지나치게 꼼꼼한 주석과 소제목의 분류 때문에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amazon.com)을 통해 웬츠본 외에 다른 번역이 있음을 알았다. 첫 눈에 들어 온 것이 트룽파본이었다. 미국의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가 170분 동안 그 책을 녹음한 테이프도 있었다. 책과 테이프를 구입한 후 틈 나는 대로 테이프를 들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리차드 기어의 담담하고 명료한 리딩을 원서와 대조하며 듣다가 뜻이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펼쳐들고 단어를 찾아보기 시작하다가 아예 한글 독송용으로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이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이다.
웬츠본은 250페이지에 깨알같은 각주가 150여 개 달려 있다. 그러나 트룽파본은 120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본문의 주석도 20여 개에 불과하다. 군더더기(?)를 모두 뺀 담백한 내용이어서 독송용으로는 그만이다. 서문에서 프리맨틀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웬츠본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웬츠본은 1927년대 영국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현대인을 위한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 책을 대조해본 결과 본질적인 내용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중에 번역된 모든 번역본은 웬츠본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만큼 웬츠본의 선구적인 역할은 위대한 것이다.
역자는 죽음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해주는 일이라고는 이미 죽은 뒤에 통보를 받고 영혼을 위로하는 시달림을 해 주거나 사찰에서 재를 모시는 정도였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형식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마음이 허전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이 하는 일이란 서둘러 묻어버리거나 화장하여 재를 흩어버리는 정도다. 그나마 종교의식을 통해서 장례를 치를 때는 조금 나은 편이다. 집에서 치르는 장례는 망자를 위한 축원 하나 없이 죽은 지 삼일이 되면 허겁지겁 관을 장의차에 실어 나르는 것이 고작이다.
경비를 문제삼아 아예 49재를 무시하거나 지낸다 하더라도 아주 간략하게 형식에 치우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어서 절에서 재를 다 못 지낸다 하더라도 자손들이 오롯한 마음으로 집에서 망자를 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남은 자들이 망자를 생각하는 정성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경전에는 사자에 대한 안내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이 해야할 일까지도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안다면 마음이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송용이 필요한 것이다.
트룽파본이 독송용으로 좋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다. 먼저 이 책은 서먼 스님의 지적처럼 웬츠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번역이기는 하나 해설에서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서 현대 심리학에 밝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실제로 번역에 가장 힘이 들었던 부분이 이 해설 부분이었고, 따라서 이 부분만큼은 번역이 잘 되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또 경전 본문에 대한 주석도 거의 없기 때문에 티벳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막연하고 환상적인 장면의 나열로 보일 수 있다. 이 책은 강의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 같다. 즉 이 책은 스승으로부터 한 대목 한 문장마다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원전 같은 번역본'이다. 웬츠본의 해설에서 웬츠 박사가 말한 다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라마 카지 다와 삼둡은《티벳 사자의 서》에는 반드시 이 해설문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이나 북방불교의 특정 종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 이 번역본을 잘못 해석하고 나쁘게 이용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해설문이 자칫하면 철학적 절충주의의 산물로 여겨져 비판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판 서문에서 고백한 대로, 이 긴 해설문을 쓴 것이나 경전에 수많은 주석을 붙인 의도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티벳 사자의 서》가 가진 독특한 철학과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경전의 내용에 정통한 자격 있는 입문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신비 세계에 입문한 스승들만이 이 경전을 해설할 자격을 갖추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27년대의 시대에 비해 2000년대인 현재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티벳불교(밀교)에 대한 어설픈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역자는 처음에는 트룽파본 그대로 옮기려고만 했다. 독송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씩 번역을 하다 보니 티벳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자 역시 쉽게 들어오지 않는 대목이 많이 있음을 알았다. 아무리 독송용이라고는 하나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경전 원문의 경우 웬츠본의 주석을 찾아 많은 부분의 주석을 옮겨 달았다.
원래 웬츠본의 주석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까지 표기하는 등 아주 세밀하여, 주석을 따라 다니다 보면 전문 학술 서적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다. 사실 그 점이 웬츠본의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 학문적 엄밀성보다는 실천 수행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웬츠본의 주석을 옮기면서 독송시 꼭 알아야 할 부분만 간추려 실었다.
또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이《티벳 사자의 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록으로〈티벳 불교〉를 실었다. 이 글은 티벳 스승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8년간 티벳 불교를 공부한 후 80년대 초 송광사에서 5년간 선수행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배?러의《연꽃 속의 보석이여》(심재룡 역, 불일출판사, 1989)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티벳 불교 전반에 대한 스티븐의 명쾌하고 탁월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부분부터 잘 숙독하여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난 후 경전의 해설과 주석을 꼼꼼히 챙겨 보아야 한다. 자격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다는 기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정독할 것을 권한다. 실제로 이《티벳트 사자의 서》를 독송할 때 경전의 원문에 나오는 주석을 보지 않아도 다 이해가 될 때 비로소 독송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해설〉부분은 원래 앞에 나와 있는 것인데 뒤로 순서를 바꾸었다. 처음부터 난해한 심리학적인 해설을 읽다보면 본문에 대한 흥미가 반감될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부록과 본문을 먼저 보고 난 후, 좀 더 깊이 들어가기를 바랄 때 해설을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해설을 무시하는 것이 좋다.
본문 번역은 직역을 원칙으로 했지만 영어와 한국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특히 한글에는 없는 수동태의 빈번한 사용 때문에) 웬츠본과 서먼본을 참고하여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몇 몇 부분은 의역을 했다. 후일 더 나은 번역이 나와 이번의 미흡한 번역을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은 삶과 따로 분리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여 동전을 던져 버린다면 삶까지 던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삶에서도 자유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을 잊기 위해 눈앞의 현상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탐진치 삼독의 마약으로 자신을 잊고자 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쓴 맛 뿐이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 왔지만 언제나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티벳의 스승은 말한다. 우리는 이 지구별이라는 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어서, 열심히 공부할 때만 다음 생에서 영적인 진화가 한 단계 오른 탄생을 갖게 된다고. 모든 것을 6근(根)을 통해 밖에서 찾는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마음 공부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 경전을 하루에 세 번 독송할 것을 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독송해야 한다. 그것이 이 경전의 근본 뜻이다. 하지만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람이 현대 생활에서 하루에 세 번 독송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경전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조용히 정좌하고 크고 또렷한 소리로 독송하기를 권한다. 그런 실천수행이 따르지 않고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만 대하는 사람이라면, 삶과 죽음의 친절한 안내서인《티벳 사자의 서》라 하더라도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 위의 글 중 상당부분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대원사 티베트 성보 박물관에서 구입한 현장스님의 저서에서 인용 하였기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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