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4장 1-25절
찬송가 170장 ‘내 주님 살아 계셔’
악인의 횡포(1-17절)
어제와 오늘 본문인 23-24장은 22장의 엘리바스의 3번째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엘리바스는 여전히 욥의 지금의 상황은 그가 죄를 범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까닭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우리 속담으로 요약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입니다. 즉, “욥 네가 네 삶의 아궁이에서 죄라는 장작으로 불을 땐 것을 사람들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숨기지 못하고, 결국은 그 연기라는 결과가 네 삶을 뒤덮어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엘리바스가 아니라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욥기 23:10-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속 나를 테스트 해 오셨지만,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도 99.9%의 금과 같이, 항상 내 삶에도 다른 불순물이 없이, 하나님께 온전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삶이 순금과 같이 불순물이 없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따라 걸었기에, 정도(正道)_바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았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생활이었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삶은 살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소망의 빛이 있습니다. 23: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하나님은 자신을 그저 억누르기만 하신 분이 아니시라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라는 소망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루 분량만큼 믿음이 성숙해져가고,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비록 지금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욥이 자신의 일도 그렇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의견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횡포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악한 사람은 남의 땅에 금을 긋고는 자기 것이라 하고, 남의 양 때를 자기 우리에 넣는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3절입니다.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이 말씀은 “아흔아홉 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섬을 채우려고 하고, 백석꾼은 천석꾼이 되고 싶어 하고, 천석꾼은 만석꾼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본문의 말로 바꾸면, “아흔 아홉마리 가축을 가진 부자가 한 마리가진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 마리를 채우려고 한다”입니다. 성경에서 ‘고아’, ‘과부’, ‘객’은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재산을 착취해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악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압제하여서 그들은 숨어서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사시시대 기드온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미디안 연합군의 착취가 극심했습니다. 그 착취가 7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 이상 집에서 살지 못하고, 산 속에 있는 동굴이나 바위 틈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 시대에는 이방인 군대의 착취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악한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난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먹을 것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빈 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려고 해도 덮어줄 이불 조각 하나 없다고 합니다. 산에서 비를 만나면, 비를 피할 방편이라고는 바위 밑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9-11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아버지가 없는 어린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그럼에도 빚 대신에 그 아이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은 외출복의 의미만이 아니라 이불 겸용이었습니다. 그것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옷도 입지 못하고 벗고서 다니고, 일을 해도 굶주림을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악한 사람들의 행동을 속담으로 말씀드리면, ‘모기 다리에서 피 뺀다.’와 ‘참새 앞정강이를 긁어먹는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 같다고 욥은 탄식합니다.
악인들의 행동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야밤에 행동하는데, 그 내용을 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사람을 죽일 정도로 악한 사람들은 동틀 무렵, 가장 곤하게 잠들어 있을 때에,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때에 궁핍한 사람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악한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자신들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도 알지 못할 것이고, 가면을 쓰고, 변장하면 완전범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보면 도적들이 대문에 표시를 해두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대에 도적들은 그와 같이 낮에 도둑질할 대문에 표시를 해 두었다가 밤에 담을 넘곤 했습니다. 그래서 도적들은 신변보호를 위해서 낮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빛을 어둠과 같이 여기고, 어둠을 빛처럼 여기는 전적인 어둠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활개를 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욥은 하소연합니다.
악인의 심판(18-25절)
그러나 18-25절에는 악한 사람들에게 어떤 심판이 임하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19절입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악한 사람들은 물(홍수)에 떠내려간다고 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악한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밭이 심판을 받아서 앞으로 포도원에 갈 일도 없다고 합니다. 또한 해가 뜨고 날이 따뜻해지면, 눈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이내 녹아 없어지고 마른 땅이 되고 말듯이, 악한 사람들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23-25절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고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악한 사람들의 삶이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것처럼 보여도 꺾이고 마는 것은 마치 곡식이 어느 순간에 잘리는 것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특히 한 밤중에 사람들을 짓밟고, 죽이고,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인생이 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려는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데 담대해집니다.
사울왕이 사무엘이 죽은 후에 남자 무당(박수)와 신접한 사람(여자 무당)을 다 쫓아내는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니까 두려움으로 마음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렸습니다. 결국은 밤에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영혼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왕은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고서 죽었지만, 역대상 10장에는 사울왕이 죽은 것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의 어두움이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서,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 때가 밤이었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의 영혼 역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팖으로 인해서 결국 그는 스스로 자기 길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사울왕처럼 자기 영혼의 어두움이 자신을 죽인 것입니다.
때때로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것 같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더 호의호식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주님 앞에서 어두움은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어두움 가운데 행했던 일들이 다 밝혀지는 것을 매일 신문, 방송을 통해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이겠습니까?
어두움이 결코 이길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죽음의 어두움을 뚫고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본능과 욕망의 넓은 길이 아니라 말씀과 진리의 좁을 길을 걸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찢어지지 않는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삭아 없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 속에 살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세상에는 언제나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이기는 것 같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빛에 거하는 사람들보다 더 호의호식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믿습니다.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많이 투명해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투명해지게 해 주옵소서. 과학이 발달하고, 가치관이 변화가 됨에 따라, 과거에 행했던 일이 다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바라옵나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소망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풀리지 않고 엉켜 있는 인생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정리가 되고 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삶으로 은혜와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는 한 날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