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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부안 49코스 제1부
신재생에너지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장신교차로-
송림마을-마전마을-악어산-석불천-석하마을-석상마을-
구암마을-구암리 지석묘군-도하사거리-상서초등학교-
도화봉암마을-장동삼거리-분장마을-장서마을-주상천 둑방
20230510
1.지칭개 논둑길과 푸르른 호밀밭길에서 부르는 노래
서해랑길 48코스를 마치고, 쉴 틈도 없이 곧바로 49코스 탐방에 나선다. 6시 25분 월포마을 경로당 앞 월포길을 따라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아래를 통과하여 월포 들판으로 나갔다. 동쪽에 떠오른 태양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고, 백련리 들녘은 모내기 준비를 하는지 논에 물을 가득 담아 두었다. 남쪽 내변산의 의상봉은 또렷이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입하를 지난 월포 들녘의 모습은 모내기 농사를 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다. 아침 6시 30분경의 아침 농촌은 아직 일할 시간은 아닌지 한가하다. 월포길에서 개천의 다리를 건너 노계마을로 넘어갔다. 붉은 지붕에 감나무가 자라고 아담한 장독대가 있는 노계마을 첫 집 뒤 체육공원으로 갔다. 쉼터정자에서 아침 햇빛을 받으며 아침을 먹었다. 간밤 차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대낀 탓에 입맛은 없지만 30km 가까운 거리를 걸어야 하기에 목구멍에 쑤셔넣듯이 어거지로 샌드위치 두 조각을 커피와 함께 먹었다. 쉼터정자에 불어오는 바람이 노곤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햇빛과 바람, 푸르게 맑은 아침 풍경은 탐방길의 두근거림을 일깨운다. 가자, 봄날의 우리 국토를 마음껏 걸으면서 국토 사랑과 지리를 배우자.
세상의 모든 아침은 장엄하고 새로운 꿈으로 가슴을 들뜨게 한다. 이 들뜬 마음으로 경쾌하게 백련리 들녘을 걸었다. 한 주민이 개천의 둑방을 따라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다. 들밭에서 푸르게 자라는 작물이 보리인지 밀인지 분명하지 않아 그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이곳 지역민이 아니어서 모르겠다고 한다. 마을 주민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신재생에너지단지 연구원인 것 같디. 나중에 들밭의 푸른 작물을 알아보니 밀이었다. 백련리 들판에 푸르름은 밀밭이다. 출렁이는 밀들의 소곤거림, 쓰러진 밀들의 아픔, 밀밭에서 들려오는 기쁨과 설움의 소리가 길손의 마음을 흔든다. 이 밀은 이 지역 농민의 주요 소득원으로 농협에서 수매해 간다고 한다. 푸른른 밀밭 둑방길에 지칭개 분홍빛 꽃이 꼿꼿한 자세로 길손을 맞이한다. 저 연약한 지칭개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지칭개 분홍꽃에 기다림의 자세가 솟아오른다. 자신의 종족을 퍼뜨리기 위해 햇빛과 비와 바람과 함께 생명을 마칠 때까지 혼신의 힘으로 서있는 자세, 그건 숙명적 기다림이다. 밤하늘의 별과 달을 응시하면서 지칭개는 긴 밤을 논둑길 이 자리에서 몸을 떨었을 것이다. 지칭개의 숙연한 당당함에 길손은 왜 이렇게 부끄러워지는가.
하서면 백련리에서 장신리로 넘어갔다. 왼쪽에 나즈막한 수양산이 있고 그 동쪽에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가 달리고 수양산과 '변산바다로' 사이에 장신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장신삼산길은 장신리 장신마을과 백련리 삼산마을을 이어주는 도로명인 것 같다. 장신마을을 어림하며 장신삼산로를 따라가면 오른쪽에 대왕참나무숲이 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받은 것은 월계관과 월계수라고 하는데 실제 받은 묘목은 대왕참나무였다고 한다. 그때 심은 나무가 손기정기념공원에 자라고 있는데 그 나무는 월계수가 아니라 대왕참나무라고 한다. 대왕참나무는 이번 48코스 백련마을에서 만났었다. 대왕참나무 푸른 잎들의 싱그러움은 길손의 마음을 물들이고 힘을 솟구치게 하였다. 이 대왕참나무숲을 장신리 등용마을에서 다시 만났다. 백련마을 대왕참나무숲은 멀리서 보았는데 등용마을에서는 가까이서 자세히 살피니 대왕참나무가 더없이 소중하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나태주의 '풀꽃2' 전문) 대왕참나무는 나의 연인이 되었다. 짧은 만남의 연인과 작별한다.
장신삼산길 위쪽에는 대숲이 있는데 대숲 한켠에 오동나무 몇 그루가 솟아 있다. 오동나무 보랏빛 꽃은 연보랏빛이어서 더 은은해 보인다. 5월 달밤에 오동꽃 떨어지는 모습이 환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땅에 떨어져 구르는 오동꽃잎이 아침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애처로움을 안긴다. 수많은 꽃망울을 달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를 보고서 등용마을 돌아나와 변산로로 나갔다. 변산로의 가로수는 이팝나무였다. 이팝나무의 유래는 여럿 있지만 꽃이 입하(立夏) 절기에 피어나기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리다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일까? 5월 6일 입하 절기를 지나서 이 지역의 이팝나무는 하얀 쌀밥 같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흐드러진다. 서울 지역에서 이팝나무 꽃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하서면 장신리 변산로 가로수 이팝나무들은 실바늘처럼 가느다란 꽃잎들을 탐스럽게 피우고서 길손을 배불려준다.
길은 변산로에서 장신리 들판으로 나가 들녘길을 가로질러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장신리 송림마을 방향으로 넘어간다. 들길에는 홀씨들을 바람 따라 멀리멀리 흩어 보내고 꽃받침만 남은 민들레 군락지가 있다. 이 모습은 충만감과 허탈감을 함께 느끼게 한다. 앞에는 석불산이 솟아 있다. 이 산은, 중국에서 석불(石佛)을 실어와 이 산에 숨겼다고 해서 또 한 승려가 이 산에 올라가 참선을 하다가 돌부처가 되었다고 하여 석불산((石佛山)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석불산이 불교 전래와 관련되면서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임을 알려 준다. 석불산은 하서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석불산에서 발원한 석불천이 영은천으로 흘러들어 주상천에 합류하는 주상천 2지류가 되는데, 석불천은 이 지역 농작물 재배에 절대적인 농업 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또 변산반도 북쪽 해안에 위치하여 서해 바다와, 북쪽 부안군 계화면 지역과 김제 지역, 그리고 멀리 군산 지역을 조망하는 전략적 요충지일 것 같다.
하서면 장신리 송림마을에서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하서면 석상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앞쪽에 야트막한 구릉 같은 악어산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석상리 마전들을 가로질러 악어산 오른쪽으로 돌아 나간다. 석불천이 악어산을 돌아 흐르는데, 하서면 석상리와 청호리를 경계한다. 악어산 옆 석불천 둑방을 따라간다. 길에는 갈퀴나물이 진보랏빛 꽃을 피우고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석불천 물을 농업 용수로 쓰는 수로가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은 석불천과 헤어져 수로 옆 들녘길을 따라 변산로 방향으로 나간다. 길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석불천 하류 지역의 청호리와 석상리 일대가 가늠된다.
변산로에서 석상리 석하마을로 들어갔다. 밭에서 농부들이 무엇인가를 심고 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으니 고구마 모종을 심는다고 한다. 아, 지금이 고구마 모종 내는 시기로구나. 조선 순조 때 정학유가 쓴(1816년) '농가월령가'에서 4월령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4월이라 초여름이 되니 입하 소만의 절기로다. 비 온 끝에 햇볕이 나니 날씨도 화창하다. 떡갈나무 잎이 피어날 때에 뻐꾹새가 자주 울고, 보리 이삭이 패어나니 꾀꼬리가 노래한다. 농사나 누에 치는 일이 이제 막 한창이라. 남녀 노소가 농사일에 바빠서 집에 있을 틈이 없어, 고요한 가운데 사립문 녹음 속에 닫혀 있도다. 목화를 많이 심소. 길쌈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 수수나 동부, 녹두, 참깨 밭에 간작(間作)을 적게 하소. 떡갈나무를 꺾어 거름을 만들 때 풀을 베어 섞어 하소. 무논을 써레질하여 이른 모를 심어 보세." 음력 4월은 농사가 시작되어 농부들은 집에 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무척 바쁜 시기이다. 농부가 길손에게 묻는다. 일행은 30분 전에 여기를 지나갔는데, 왜 이렇게 늦소? 농사일에 부지런한 농부의 눈에 길손은 게으름뱅이처럼 보인 것 같다.
서둘러야 한다. 바삐 걷는 그들의 발걸음보다 얼마나 더 빨라야 30분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아마도 거리와 시간은 더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석상마을로 들어가 우아한 자태의 노거수 팽나무를 만났다. 보호수 안내판에 수령이 적혀 있지 않다. 조사하여 안내판에 적어 두면 좋았을텐데. 오늘 새벽 48코스 대항리 해안에서 만났던 팽나무보다 수령이 더 되어 보였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을 쏘이며 본 팽나무 푸른 잎들이 얼마나 멋지던가. 밝은 햇빛 속에서 만난 석하마을 팽나무 싱싱한 푸른 잎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춤을 추면서 그들이 노래한다. 늙음의 탄식이 아니라 노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가 들려온다. 수령에 상관 없이 팽나무는 아름다웠다.
양귀비 붉은 꽃이 담장 아래에 즐비하게 늘어서 길손을 유혹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올바로 살피지 않으면 남성의 도리가 아니다. 양귀비 꽃 앞에서 여인들을 찬양했다. 그 담장 안에 청동기시대의 옛 연인들이 거무죽죽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여인의 차별은 남성의 도리가 아니다. 부안 구암리 지석묘群 앞으로 가서 태곳적 여인들의 얼굴을 기렸다. 긴 세월 동안 이곳에 터잡고 살아온 숱한 여인들의 모습이 고인돌 표면에서 어른거린다. 현재의 삶은 언제나 과거의 삶의 고통에 빚지고 있고, 미래의 삶은 언제나 현재의 삶의 희망이 아로새겨진다. 지석묘群, 그들의 아득한 삶의 모습이 쇠뿔바위봉에서, 그리고 우금산에서 영은천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가야할 거리가 멀기만 하고, 살펴야 할 것은 많기만 하다. 빠름과 느림, 그 옳고 그름은 없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느림을 칭송한다. 느림과 기억,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왜 현대인은 빠름만 추구할까? 왜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려고만 할까? 게으름과 한가함은 다른 것이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여유와 한가함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영원성 속에 기억하는 것이다. 고인돌로를 따라 영은천의 구암교를 건너고 도화사거리를 지나서 하서면 석상리에서 상서면 통정리로 넘어왔다. 남쪽으로는 내변산 산줄기가 벋어 있다. 우슬재 넘어 우금산과 쇠뿔바위봉을 가늠한다. 북쪽으로는 하서면소재지 언독리 시가지가 보인다. 더 북쪽 계화면 간척지를 가늠한다. 고인돌로에는 이 지역의 옛 양잠업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가로수를 뽕나무로 조성하였다. 양잠업은 사양길로 들어서고 이제는 뽕잎고등어, 부안뽕주, 해풍오디를 이 지역 9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고인돌로 남쪽의 도화 봉암마을은 명덕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마을이 무릉도원의 이상향, 샹그릴라처럼 평화롭게 보인다. 입구의 팽나무는 무릉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이로군.
고인돌로에서 상서면 통정리와 장동리를 가르는 봉야로로 들어섰다. 서북쪽으로는 걸어온 길이 조망되고, 동북쪽으로는 걸어갈 길이 가늠된다. 상서면 통정리 들녘과, 하서면 청호리와 언독리 일대 그리고 석불산이 정답게 부른다. 봉야로에서 장동리 분장마을을 거쳐 드넓은 장동리 들녘으로 나갔다. 남쪽으로는 상서면 용서리 지석마을 일대와 상서면소재지 가오리 저기마을 일대가 가늠된다. 동쪽으로 장동리 장서마을이 가늠된다. 농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농로 왼쪽 봉야로에 자리한 마을의 이름도 모른 채 내뺀다. 길손은 망각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발걸음이 먼지를 일으키며 내닫는다. 딸랑딸랑 트랭글의 경고음이 울렸다. 길을 잘못 잡은 것이다. 갈림길을 찾지 못하여 당황스러웠다. 허둥거리다가 그대로 농로를 따라갔다. 실제로는 농로에서 장서마을 뒤 숲으로 들어가서 장서마을을 거쳐 마을 입구로 내려와야 하는데, 농로를 따라서 그대로 장서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장서마을에서 드넓은 장서마을 앞 들녘으로 나가 논길을 따라간다. 주상천 둑방으로 가는 길 호밀밭에 호밀이 푸르게 무성하다. 밀밭이지만 보리밭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 때 이상화 시인이 발표한 시 작품이 들녘을 따라 울린다. 봄날이다. 사랑하는 내 국토에 봄이 찾아왔지만 나라를 빼앗긴 터에 봄을 어찌 봄날로 즐길 수 있겠는가? 봄날의 들길을 걸으면서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탄식한다. 길손은 21세기 조국의 국토를 순례한다. 봄날이다. 논길을 걸으며 푸르게 자라는 아름다운 밀밭 풍경에 감탄한다. 내 조국의 아름다운 국토 사랑의 길을 힘차게 걷는다. 그런데 20세기 이상화 시인처럼 길손은 탄식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국토의 봄 풍경에 영탄만 한다. 21세기 국토 분단의 아픔을 길손 또한 이상화 시인처럼 읊어야 하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데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의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2.탐방 과정
탐방 거리 : 전체 20.4km 중 12.3km
소요 시간 : 전체 5시간 5분 중 2시간 50분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월포마을 앞 월포길 모퉁이에 서해랑길 부안 48·49코스 안내도와 시작점 표지가 있다.
서해랑길 부안 48·49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하고 서해랑길 49코스 탐방에 나선다.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월포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아래를 지나서 왼쪽으로 이어간다.
월포길48-52에서 왼쪽으로 꺾어 월포길40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는 백련리 금산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월포길40 농로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솟은 산봉이 수양산일 것이다.
오른쪽 뒤에 해변교회와 잿등마을, 맨 왼쪽은 금산마을이라고 가늠한다. 맨 뒤에 의상봉의 공군레이더기지가 조망된다.
월포길40 농로에서 '장신로'로 나가 다리 오른쪽 방향으로 이어간다.
변산바다로 아래를 통과하여 농로를 따라왔다. 맨 오른쪽 뒤는 백련마을, 그 왼쪽에 해변교회와 잿등마을, 맨 왼쪽은 금산마을이라 어림한다. "변산의 의상봉과 와우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수동 계곡 아래에서 못을 이루고 그 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났기 때문에 백련동이라고 불렀으며, 백련(白蓮)마을은 이로부터 유래한 지명이다. 백련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금산(金山)마을은 원래 노계마을에 속했는데, 마을이 점점 확장하고 또한 노계마을과는 변산로(邊山路)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1983년 행정리로 독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장신로의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노계길을 따라간다. 앞쪽은 백련리 노계마을이다. 노계길에서 잠시 벗어나 왼쪽 붉은 지붕 집 뒤에 있는 쉼터정자로 가서 아침을 먹고서 출발한다.
붉은 지붕의 집 앞 노계길에서 벗어나 체육공원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집이다.
이곳에서 약18분 동안 아침을 먹고 6시 50분에 출발한다.
왼쪽 노계길에서 와서 앞쪽 노계길을 따라간다.
중앙에 보이는 체육공원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그 왼쪽 노계마을 노계길을 따라 맨 왼쪽 기와집 앞을 거친다.
오른쪽 기와집과 중앙의 슬래브집을 거쳐서 왼쪽으로 꺾어서 농로를 따라 이곳으로 왔다. 왼쪽 뒤에 의상봉이 보인다.
개천의 둑방길을 따라 북진한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은 백련리 삼산마을, 그 오른쪽에 금광마을이 보인다.
"삼산마을은 백련리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산 세 개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삼산(三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삼매 또는 산매라고도 불리며, 마을의 도로명은 가락골길이다. 삼산마을 서쪽에 금광(金光)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에 있었던 금광사(金光寺)라는 절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사행천 둑방길을 계속 따라간다. 앞의 건물은 식품제조가공업체 '산내들 에스엠주식회사'이다.
이 지역에서는 밀을 많이 재배하여 밀밭이 드넓다. 생산한 밀은 농협에서 수매한다고 한다. 오른쪽은 '산내들에스엠(주)'이다.
지칭개 피어 있는 논둑길이 정겹다. 서해랑길은 둑방길을 왼쪽으로 빙 돌아서 오른쪽 장신리 등용마을로 올라간다. 중앙에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장신교차로 왼쪽에 하서면 장신리 장신마을, 맨 오른쪽에 장신리 등용마을이다.
길쭉한 잎 가장자리가 여러 번 깊이 패어 들어가 마치 ‘임금 왕(王)’ 자 같다고 하여 대왕참나무라고 불린다 한다.
하서면 백련리에서 장신리로 넘어왔다. 오른쪽에 묘목농원이 있으며, 서해랑길은 장신삼산길을 따라 중앙에 보이는 대숲 뒤쪽에 있는 등룡2구 경로당 앞으로 이어간다. 장신삼산길은 장신리 장신마을과 백련리 삼산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명 같다.
장신리 등룡2구 마을에 묘목농원이 넓게 자리한다. 중앙 뒤에 의상봉과 공군레이더기지가 보인다.
다리 건너편 오른쪽 장신삼산길을 따라와 앞에 보이는 등룡2구경로당 앞에서 다리를 건너왔다. 이 도로명은 등용길이다.
"국도 제30호선과 변산로 사이에 폭넓게 자리 잡은 등용마을은 용이 여의주를 얻어 하늘로 오르는 비룡상천(飛龍上天)의 풍수혈이 있어 ‘등용(登龍)’이라 불러야 하는데 일제가 쉬운 글자를 채택하여 ‘등용(登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등용마을은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83년 등용1리와 등용2리로 행정리가 분리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건너편 장신삼산길을 따라 대왕참나무 군락지와 묘목농원, 앞의 대숲을 거쳐 등룡2구 경로당 앞의 다리를 건넜다. 대숲 옆 오동나무에 보랏빛 오동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고 그 밑에는 떨어진 오동꽃이 흩어져 있다.
등용마을 등용길을 따라간다. 마을집 울타리에 불두화가 피어 있고 오른쪽 길가의 호랑가시나무는 꽃망울을 맺었다.
오른쪽 뒤 대숲과 오동나무 꽃이 보인다. 그 앞을 거쳐 다리를 건너 장신리 등용마을 등용길을 따라 나왔다.
등용길 초록아리울 영농조합 앞에서 석불로로 나가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왼쪽 교차로는 장신교차로, 그 위 도로는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이다. 장신교차로 건너편이 장신마을이다. 오른쪽 뒤에 보이는 산봉이 석불산이라 가늠한다.
"長信里는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에 있는 법정리. 장신(長信)마을은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긴 갯가 마을이라는 의미로 장신개 또는 장신포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 이곳에 잠시 수군의 군영이 있었다고 한다. 장신마을 남쪽에 자리한 장원마을은 긴 제방이 있어 ‘장언(長堰)’이라 하였는데 ‘장원(長元)’으로 고쳐 불렀다. 장신마을 동쪽의 복룡(伏龍)마을은 석불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끝에 자리한 마을로,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여의주를 얻지 못한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장신마을에 바짝 붙어 있는 농소(農所)마을은 복룡마을에 엎드려 있는 복룡의 수염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용수말(龍鬚-)이라고도 부른다. 수조(水釣)마을은 수양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어부가 낚싯대를 드리운 형국이어서 ‘수조(垂釣)’라고 썼다가 언제부터인가 ‘드리울 수(垂)’를 ‘물 수(水)’ 자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장신리는 동북쪽으로 석불산, 남쪽으로 수양산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작고 낮은 산들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자리한다. 예전에는 장신리의 서쪽으로 해안선이 길게 뻗어 있었지만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어 마을 앞 넓은 갯벌이 육지로 변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등용로에서 석불로로 나왔다. 석불로에서 왼쪽에 보이는 농로로 진입한다. 석불로 가로수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진다.
석불로에서 농로로 진입하여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에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가 지나고 왼쪽 뒤에 석불산이 솟아 있다.
등용마을 입구에 초록아리울영농조합 건물들이 보인다. 왼쪽 뒤에는 의상봉 공군레이더기지가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이곳이 하서면 장신리 신성(新成)마을일까?
"등용마을에서 국도 제30호선 건너편의 송림(松林)마을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는 뜻이며, 신성(新成)마을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위가 장신리 송림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석불산이 왼쪽 뒤에 솟아 있다.
"石佛山은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와 청호리의 경계에 288.0m 높이의 산이다. 북쪽은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이며, 동쪽에는 청호 저수지, 서쪽에는 새만금 방조제 내부, 남쪽에는 변산반도의 산지가 있다. 석불산 주변에는 매봉산, 암탉봉, 죽산, 악어산 등의 봉우리가 있다. 중국에서 석불(石佛)을 실어 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관련 전설로는 북쪽의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 불등리마을과 부처댕이마을이 있는데, 중국에서 돌부처[석불]를 실어 바다를 건너 불등리로 올라와 이 산에 숨겼다는 이야기와 옛날에 한 승려가 서해를 헤엄쳐 와 이 산에 올라간 후 참선을 하다가 돌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전설을 보면 중국에서의 불교 전파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국도 제30호선 '변산바다로'가 지난다.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이쪽으로 넘어와 송림마을 입구를 거쳐왔다.
장신리 송림마을에서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변산바다로' 건너편 하서면 석상리로 넘어간다.
목초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중앙 뒤에 하서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 있는 공립 중학교. 1971년 1월 16일 하서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3월 5일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378-1번지에서 4학급으로 개교하였다. 2004년 10월 1일 현재 위치인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406-1번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2020년 2월 7일 제47회 졸업식을 통해 13명이 졸업하여 총 6,68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20년 현재 총 3학급에 29명[남 13명, 여 16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1학급에 6명[남 3명, 여 3명], 2학년은 1학급에 11명[남 5명, 여 6명], 3학년은 1학급에 12명[남 5명, 여 7명]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사 9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4명으로 총 14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가 : 변산반도 정기받은 하서의 전당/ 힘 모아 창조하는 우리 배움터/ 타고난 소질을 저마다 계발하여/ 우리 이름 온 세상에 길이 빛내리/ 성실과 협동으로 개척을 하고/ 새 역사 창조하여 전통을 세우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석상리 마전마을 들판의 농로를 따라 왼쪽의 악어산 오른쪽 자락으로 이어간다.
앞의 산이 악어산이라고 한다. 농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악어산 오른쪽 자락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 '변산바다로' 지하통로를 지나서 마전들판 농로를 따라 왔다. 왼쪽에 마전마을과 왼쪽 뒤에 하서중학교가 있다.
하서면 석상리(石上里) 마전마을 뒤쪽에 하서중학교가 자리한다.
하서면 석상리 마전마을은 변산로 북쪽에, 운암마을은 변산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전마을과 운암마을은 원래 하나의 마을로 삼밭실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독립된 행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산봉 아래의 마을이 운암마을이다.
악어산 아래 석불천 옆 지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앞의 비석은 전주 최씨 사당 지선재(祗善齋) 입구를 알리는 표석이다.
전주 최씨 사당 지선재(祗善齋) 입구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앞의 석불천은 석상리와 청호리의 경계를 이룬다.
서해랑길은 석불천 마전교를 건너지 않고 석불천의 오른쪽 농로를 따라 내려간다.
"석불천(石佛川)은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의 석불산 정남향 산기슭 및 암닭봉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석불 저수지를 지나 악어산 남쪽 산기슭에서 북동쪽으로 유로 방향을 바꾸어 부안군 하서면 언독리 언독마을 인근 배수문을 통해 영은천에 합류되는 하천으로, 주상천의 제2지류이다. 석불천은 북동 방향으로 영은천과 합류하고 있으며 상류부는 산지부를 관류하고 있고 중류부는 양안으로 농경지와 산지가 약간 분포하고 있으며 영은천 합류점인 하류부는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석불산 암닭봉에서 뻗어나간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는 악어산 둘레를 알파벳 J가 좌우 반전된 형태로 휘감아 흐르고 있으며 악어산을 벗어난 중류부·하류부는 유로 정비되어 직선화된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흐른다. 상류는 산지로 구성되어 하상의 경사가 급한 편이나 하류부로 갈수록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석불천에 유입되는 지류는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운암골에서 시작하는 운암 소하천이 있으며, 악어산 남쪽 마전교 인근에서 합류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전마을 앞을 거쳐 지산길을 따라 지선재(祗善齋) 입구 표석 앞으로 내려왔다. 왼쪽길은 서당로이다.
보랏빛 갈퀴나물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석불천 옆 농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수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판을 가로질러 오른쪽 변산로로 나간다. 앞쪽의 시가지는 하서면 청호리 일대라고 가늠한다. 석불천 왼쪽은 하서면 청호리, 그 오른쪽은 하서면 석상리 지역이다.
"靑湖里는 석불산과 청호 저수지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농경지가 부족한 편이다. 청호리의 동남쪽 농경지는 과거에 바닷물의 영향을 받던 곳이었으나 방조제를 만들어 간척한 땅이다. 변산에서 흘러드는 영은천이 이 지역을 지나감으로써 아무리 가물어도 어디를 파든 샘물이 잘 나오기에 시암밭들[井海坪]이라고 부른다. 한편 석불산의 석불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석불천이 악어산을 돌아 청호리 남쪽으로 흐르면서 하서면 석상리와 경계를 나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수로 옆 오른쪽 농로를 따라 맞은편의 변산로 방향으로 나간다.
중앙의 마전마을 그 오른쪽 악어산 자락 마전교 앞 농로를 따라 내려왔다. 왼쪽의 마을은 운암마을이다.
오른쪽 뒤에 석불산, 앞에 악어산이다. 악어산 앞을 흐르는 석불천을 따라 오른쪽 수로 앞으로 내려왔다.
왼쪽 악어산 앞 석불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중앙의 수로 철조망 옆 농로를 따라왔다. 왼쪽 뒤의 산봉이 석불산, 그 오른쪽 낮은 산봉이 암탉봉일 것이라 가늠한다. 악어산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하서면 청호리(靑湖里) 서당마을일 것이다.
"청호마을 서남쪽 악어산 아래에 서당마을이 있다. 약 200년 전 이곳에서 차기만(車基萬)이 한의원을 열고 아울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서당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호마을에서 서북쪽으로 700여m 떨어진 석불산 아래에 계곡(鷄谷)마을이 있다. 암탉이 양 날개를 펼치고 앉아 있는 형상의 암탉봉 아래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변산로로 나와서 변산로 왼쪽 운암마을과 맞은편 마전마을을 올려보았다. 오른쪽 악어산 왼쪽 자락에 마전교가 있다.
석하마을 버스정류소 오른쪽 석하길로 진입하여 석하마을로 향한다. 아래 왼쪽 마을은 청일마을이다. "청일(晴日)마을의 청일은 우리말로 풀어 쓰면 ‘비가 갠 날’이라는 뜻이어서 ‘개나리’로 더 잘 알려진 마을이다.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모님이 죽어서 출상하는 날 내리던 비가 잠깐 멈추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하서면 석상리(石上里) 석하마을로 이어지는 석하길이다.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는 돌머리의 위쪽에 자리한 지역이라 웃뜸 또는 석상(石上)이라 하였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농부가 밭에 고구마 모종을 심고 있다. 서해랑길은 밭 건너편 석하길을 따라가다 고인돌길로 나간다.
"석상리(石上里)의 지리적인 중심지에는 석상마을과 석하마을이 있으며, 이 두 마을은 원래 하나의 마을로, 예전에는 돌마리 또는 돌머리라고 불렀다. 석상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 바위에서 유래한 돌마리는 돌마을을 뜻하는 이름으로 웃뜸은 윗돌마리, 즉 석상(石上)이라 부르고, 아랫뜸은 아랫돌마리, 즉 석하(石下)라고 부르는데 1967년 행정 구역을 정비할 때 각각 독립된 행정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석하마을 주택 시멘트 담벽에 멋진 글씨(家和萬事成)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석하마을에서 '고인돌로'로 나와 동쪽으로 걸으면 오른쪽에 석상마을 입구가 나온다. 석상길을 따라 석상마을로 향한다.
고인돌로에서 밀밭 건너편 솔숲 뒤 왼쪽의 반암마을을 조망하였다. 길 오른쪽 뒤는 구암마을이다.
"구암마을의 북동쪽에 반암마을이 있으며 마을에는 고인돌 3기가 있는데 그 형태가 소반 같다 하여 반암(盤岩)이라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일제가 쓰기 쉬운 반암(半岩)으로 바꾸어 버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석상길을 따라 석상마을로 들어간다. 이 지역에는 밀을 많이 재배하는 것 같으며 농협에서 모두 수매한다고 한다.
밀밭이 푸르게 펼쳐진 석상길을 따라간다. 석상마을 쉼터정자 앞의 노거수 팽나무가 우아하다. 서해랑길은 석상마을에서 왼쪽으로 돌아 구암마을로 이어간다.
"석상리(石上里)의 지리적인 중심지에는 석상마을과 석하마을이 있으며, 이 두 마을은 원래 하나의 마을로, 예전에는 돌마리 또는 돌머리라고 불렀다. 석상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 바위에서 유래한 돌마리는 돌마을을 뜻하는 이름으로 웃뜸은 윗돌마리, 즉 석상(石上)이라 부르고, 아랫뜸은 아랫돌마리, 즉 석하(石下)라고 부르는데 1967년 행정 구역을 정비할 때 각각 독립된 행정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팽나무의 자태가 그윽하고 우아하다. 수령이 어떻데 되는지 궁금하다.
석상마을을 돌아 구암마을로 가면서 뒤돌아 보았다. 석상마을의 팽나무, 중앙 뒤의 석하마을, 맨 뒤 석불산이 확인된다.
밀밭 건너편에 구암마을, 그 왼쪽에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다. "석상마을의 동편에는 구암(龜巖)마을이 있다. 석상마을에는 거북 등딱지 같은 고인돌 10기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고인돌의 규모도 크고 특징도 있어서 사적 제103호(부안 구암리 지석묘군)로 지정되었다. 마을 이름은 바로 이 고인돌에서 유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암마을 구암길 지석묘군 담 아래에 양귀비 붉은 꽃들이 고혹적이다.
구암리 지석묘군은 주변이 잘 정리되어 있고, 주차장과 화장실 등이 갖추어져 관람하기에 편리하고 휴식 공원 느낌이 들었다.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卓子式)[북방식],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식[남방식],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돌로 덮는 개석식 등이 있다.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扶安龜岩里支石墓群)의 ‘구암리(龜岩里)’라는 지명은 가장 규모가 큰 7호 지석묘의 모양이 거북을 닮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의 서쪽과 남쪽에 석재 채굴이 가능한 산지가 분포하며, 남쪽에는 영은천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주변 지역에 대체로 너른 평지가 펼쳐 있어, 지석묘를 축조할 당시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은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자연 암석을 떼어 내어 덮개돌로 사용하였고 그 아래 고임돌을 몇 개씩 괴어 놓았다. 고임돌이 4개인 것과 8개인 것 등 두 가지가 있고 키가 큰 돌을 고임돌로 세워 놓은 경우도 있다. 1963년 1월 21일 우리나라 고인돌 중 최초로 사적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부안군에서 정비하여 민가를 없애고 잔디밭을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석묘군 앞 구암마을회관 앞을 거쳐 영은천을 따라 '고인돌로'로 나가 영은천의 구암교를 건너간다.
구암마을에서 '고인돌로'로 나왔다. 구암교(九岩橋)와 구암(龜岩)마을의 한자 '구'가 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구암교를 건너 고인돌로 도화사거리를 건너 상서초등학교 방향으로 직진한다. 도화사거리에서 상서면으로 넘어간다.
저 위쪽이 우슬재와 우금산 그리고 오른쪽으로 쇠뿔바위봉이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영은천(靈隱川)이라는 명칭은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용와동 뒤에 있는 영은사(靈隱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 선비 김복사(金僕射)가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부안군 상서면과 하서면의 남서쪽에 위치한 내변산 입구인 우슬재와 상서면 통정리 수련마을 상류 산지, 하서면 옥녀봉 일대의 분지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 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 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주상천의 제1지류이다.
영은천은 우슬재 아래의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수련마을을 지나는 수련천과 하서면 석상리 용와마을을 지나는 용와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영은천의 지류로는 풍랑천, 도화천, 석불천이 있다. 상류에서 산지를 흐르던 영은천은 도화천 합류부 인근부터 산지를 벗어나 경지 정리된 넓은 평야 지역을 통과한다. 하류의 언독교를 마주보고 배수 갑문(排水閘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후 청호 저수지까지 남북 방향으로 직선으로 뻗은 유로는 청호 저수지 바로 아래에서 동쪽으로 급격히 90° 선회하여 국도 제30호선과 나란히 흐르다가 신흥교 인근에서 주상천에 합류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도화사거리에서 하서면소재지 방향으로 가는 내변산로이다. 내변산로 왼쪽에 하서면 석상리 반암마을과 고인돌공원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고인돌로를 따라 상서초등학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하서면 석상리에서 상서면 통정리로 넘어와 고인돌로 도화사거리에서 구암교를 뒤돌아보았다.
상서초등학교 담에 불두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다. 고인돌로를 따라 상서초등학교 정문으로 이어간다.
구암마을에서 고인돌로로 나와 구암교를 건너고 도화사거리를 지나서 왔다. 도화사거리에서 내변산로 왼쪽은 내변산 직소폭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하서면소재지 언독리 신지마을로 이어진다.
상서초등학교 앞에서 바라본 남쪽의 산은 우금산일 것이며, 내변산로 우슬재 가는 길에 용와마을이 있을 것이다. "내변산로를 따라 변산 골짜기로 들어와서 석상마을을 지나면 우슬재를 넘기 전 계곡 아래 자리한 마을이 용와(龍臥)마을이다. 마을에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디지털부안문하대전)
"우금산성(禹金山城)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우금산에 있는 고려 시대~조선 시대 산성이다. 우금산성(禹金山城)은 우금산(禹金山)[329m]의 울금 바위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의 산줄기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의 석성이다. 백제 멸망 후 부흥 운동의 본거지 중 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은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것이다. 우금산성은 1974년 9월 24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방의 초등학교는 학생수가 감소하여 학생들은 넓은 공간에 학습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상서초등학교(上西初等學校)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1922년 3월 22일 부서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부안군의 서쪽 지역인 상서면·하서면·변산면·행안면·주산면 등 5개 면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여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으며, ‘부안’의 첫머리 글자 ‘부(扶)’ 자와 ‘서부’의 ‘서(西)’ 자를 붙여 부서공립보통학교라 이름 지었다. 1925년 9월 19일 보습과를 설치하였고, 1941년 4월 1일 상서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88년 3월 1일 청림국민학교[1945년 10월 1일~1993년 2월 28일]를 분교로 편입하였다가 1993년 3월 1일 통폐합하였다. 1996년 3월 1일 상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그해 12월 27일 강당을 건립하였다.
2020년 2월 7일 제95회 졸업식을 통해 2명이 졸업하여 총 6,45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20년 7월 1일 현재 총 5학급에 18명[남 11명, 여 7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1학급에 3명[남 2명, 여 1명], 2학년은 1학급에 6명[남 4명, 여 2명], 3학년은 1학급에 3명[남 2명, 여 1명], 4학년은 1학급에 3명[남 2명, 여 1명], 6학년은 1학급에 3명[남 1명, 여 2명]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사 7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9명으로 총 17명이 근무하고 있다. 영어 체험실과 도서실, 과학실, 컴퓨터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교가 : 변산의 푸른 기상 넘쳐 서린 곳/ 겨레의 새싹들이 모여들어서/ 배움길 재고 익혀 숲을 이루고/ 웅장한 영봉처럼 솟아오르리/ 굳세게 자라거라 우리 건아들/ 빛나고 자랑 되자 우리 상서교.// 황해의 힘찬 물결 굽이치는 곳/ 상서벌 재동들이 모여들어서/ 희망의 아침 햇살 머리에 이고/ 유유한 강물처럼 바다 이루리/ 굳세게 자라거라 우리 건아들/ 빛나고 자랑 되자 우리 상서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인돌로에서 상서면 통정리 들판 너머의 하서면 면소재지 언독리 시가지를 조망한다. 밭에는 갈퀴나물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맨 왼쪽에 석불산, 그 오른쪽은 암탉봉일 것이라 가늠한다.
명덕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봉암마을이 자리한다. 입구의 팽나무가 그윽하다. 상서초등학교의 교목이 팽나무이다.
"도화(桃花)마을은 동화실이라고 불리는데, 이 지역에서는 마을 이름이 복숭아나무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에는 이 마을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찾아볼 수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인돌로 도화 버스정류소를 지나 장동 삼거리에서 왼쪽 봉야로를 따라 장동 방향으로 진행한다.
고인돌로에서 봉야로로 들어왔다. 봉야로는 통정리(桶井里)와 장동리의 경계를 이룬다. 오른쪽 마을은 장동리 분장마을이다.
봉야로에서 왼쪽 통정리 지역을 바라보았다. 왼쪽 목초지 너머의 마을은 성암마을이고, 오른쪽 뒤의 마을은 통정마을이다.
"통정리(桶井里)의 우리말 이름은 통시암골이다. 통정마을 옆 나지막한 산 아래에 통으로 만든 우물이 있었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수량도 풍부하여 통시암골이라고 불렀다. 통정마을 서남쪽의 성암마을은 예전에 바윗돌이 일곱 개 있어서 마치 북두칠성 같다 하여 ‘성암(星岩)’, 즉 ‘별바위’라고 불렀는데, 1974년의 경지 정리 사업 때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신성(新成)마을은 새로 생겨난 마을이란 뜻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상서면에 속하지만 하서면 소재지에 바로 붙어 있어 생활권은 하서면에 속한다. 통정리의 동쪽과 남쪽은 상서면의 장동리와 용서리, 가오리, 청림리, 서쪽과 북쪽은 하서면 석상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통정리·성암리·신성리·도화리·풍랑리·수련리의 6개 행정리에 158가구, 245명[남 115명/여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봉야로를 따라 장동리 분장(分章)마을로 이어간다. 왼쪽 뒤에 보이는 마을은 통정리 구마을 곧 통정마을일 것이다.
봉야로 왼쪽 지역은 상서면 통정리, 오른쪽 지역은 상서면 장동리 지역이다. 왼쪽의 건물은 양곡보관창고이다.
봉야로에서 통정리 성암마을 가는 입구가 왼쪽에 있다. 서해랑길은 통정로 앞쪽에서 수로를 건너 오른쪽 들녘으로 나간다.
성암길은 통정리(桶井里) 성암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맨 뒤쪽의 석불산 아래 지역은 하서면 청호리 지역이다.
"성암마을은 예전에 바윗돌이 일곱 개 있어서 마치 북두칠성 같다 하여 ‘성암(星岩)’, 즉 ‘별바위’라고 불렀는데, 1974년의 경지 정리 사업 때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상서면에 속하지만 하서면 소재지에 바로 붙어 있어 생활권은 하서면에 속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봉야로에서 수로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녘으로나가는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왼쪽 뒤 마을이 통정마을일 것이다.
수로 다리를 건너서 왼쪽 길을 따라 들녘으로 나간다.
농로에서 동남쪽 지역 상서면 용서리 지석마을 일대를 바라보았다. 그 왼쪽 뒤가 상서면 소재지 가오리 저기마을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수로 옆 농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장동리 장서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농로를 따라 왼쪽 뒤에 보이는 장동리 장서마을 입구까지 이어간다. 트랭글 트랙은 가는 도중 왼쪽 산길로 넘어가 장서마을로 내려오도록 지시하는데 우왕좌왕하다가 농로를 따라 그대로 진행했다.
장서마을 가는 농로에 마을이 있다. 무슨 마을일까? 도로명은 봉야로라고 적혀 있는데 마을 이름을 알 수 없다. 장동리 장서마을과 가까우니 이 마을도 장서마을이라 이르는 것일까?
서해랑길은 앞에서 왼쪽 숲길로 들어가 뒤쪽 장서마을로 내려가는 것 같다. 트랭글 소리에 허둥대다가 농로를 따라간다.
맨 뒤쪽에 우금산 산줄기, 왼쪽 뒤에 통정리 도시레미콘 공장이 보인다. 그 오른쪽 고인돌로 장동 삼거리에서 봉야로로 들어와 봉야로를 따라오다가 수로 다리를 건너 들녘으로 나가는 농로를 따라오다가 왼쪽으로 꺾어 이곳에 왔다.
왼쪽 뒤에 장동리 장서마을이 있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쉼터정자 앞 장서마을 입구로 이어간다.
서해랑길 정상코스를 따라오면 숲길을 통하여 장서마을로 진입하였다가 장서마을 입구로 내려오는 것 같다.
"장동리(長東里)는 원래 장다리[장교리(長橋里)]로 불렀다. 장다리는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옛날에 마을 사람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생소나무를 이용해 기다란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서 마을 사람들은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그와 같은 과정에서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교리라 불린 것이다. 예전의 장교리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지역이어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세 집이 마을을 이루어 '세가호뜸'이라고 불렀다. 1935년 일제가 두포천 하구에 갑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막은 후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서서히 확장되고, 장교리 옆으로도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을 장서리(長西里)라 부르면서 장교리는 자연스럽게 장동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장서마을 입구에서 왼쪽 농로로 나간다.
왼쪽 뒤 봉야로의 마을에서 농로를 따라왔다. 정상코스는 장서마을 뒤의 숲길을 통하는 것 같다.
장서마을 쉼터정자 왼쪽 농로를 따라왔다. 정상코스는 위쪽 장서마을을 통하여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 같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농로를 따라 진행한다.
오른쪽 길을 따라가다가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농로로 진입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농로로 진입하여서 농로를 따라가다가 바로 왼쪽으로 꺾어 중앙의 축사 앞으로 이어간다.
농로를 따라 축사 앞을 거쳐 주상천 둑방으로 올라간다.
1935년 일제가 주상천(舟上川) 하구에 갑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막은 후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주상천 옆의 장교리(長橋里) 마을이 확장되고, 장교리 옆으로도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장서리(長西里)라 부르게 되고, 장교리(長橋里) 마을은 장동리(長東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밀밭이 드넓다. 이 밀은 밀 중에서도 줄기와 모가지가 길게 올라오는 호밀이라고 한다.
둑방으로 올라가 주상천(舟上川) 다리를 건너 행안면(幸安面) 대초리(大草里)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