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가 똑 부러졌다. 깡마른 몸은 당차 보였다. 군인 출신다웠다. 2010년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 4군단 상사 출신 이소연(41)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의 스케줄표는 빽빽하다. 종편, 라디오 등 방송출연도 많고 탈북 여성 단체인 뉴코리아여성연합 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학교·단체를 찾아가서 개최하는 ‘통일 토크콘서트’는 올해 50회를 기획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을 위한 직업교육도 하고 있고 오는 4월부터는 심리치료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는 ‘북한에는 여자가 없다’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열차승무원, 군 간호사, 협동농장 출신 탈북 여성들의 입을 통해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행, 성추행 실태를 고발했다. 북한 여성 인권의 현실은 참담했다. 주간조선은 북한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 대표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 3월 14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에서 뉴코리아여성연합 회원들과 함께 동영상 촬영법 교육을 받고 있는 이 대표를 만났다. 교육이 끝나기를 기다려 겨우 시간을 얻었다. 1시간 여유밖에 없다는 이 대표를 붙들고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단답식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北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주민들이 권리를 주장할 때 변화해
여성은 성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
―기자회견에서 고발한 북한 여성 인권 실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군부는 물론이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할 것 없이 강간, 성추행은 흔한 사건이다. 중앙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북한에서 여성은 하나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기쁨조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뽑아놓고 고등학교 때 부모도 모르게 데려간다. 단 손톱자국 같은 흉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여성은 성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북한 군부 내 성폭행 사건도 심각하다고 들었다.
“실제 우리 중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120명 중 남자는 20명밖에 없었지만 간부는 100% 남자였다. 나는 1소대였는데 2소대의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소대의 여군들을 전부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임신한 피해 여군들이 군 병원으로 갈 수는 없고 군에서 가까운 해주시 병원으로 전부 간 거다. 병원이 하나밖에 없으니 의사, 간호사들은 전부 알 것 아닌가. 그들의 고발로 2년 만에 발각이 됐다. 군단 간부들이 조사를 해보니 소대원들이 전부 당한 거다. 워낙 수가 많다보니 가해자 처벌을 안 할 수 없었다.”
―가해자 처벌을 안 하기도 한다는 건가.
“다른 부대서도 성폭행 사건은 매년 불거진다. 특히 입당 열쇠를 쥐고 있는 정치지도원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은데 거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 여군들이 불명예 제대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군 간부 한 명을 양성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돈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중대 사건도 중대장, 부중대장 모두 감옥에도 안 가고 제대시키고 끝났다. 피해 여군 중 가장 성폭행을 많이 당한 4명은 불명예 제대 처분이 내려졌다.”
―소대 전체 여군이 대상이었는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남들은 땔감 구하러 가고 농사지을 때 편한 보직을 받기도 한다. 대가를 보고 성상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감히 문제제기를 할 생각도 못한다.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여군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성교육, 인권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 보니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이다.”
―여군 자원입대가 40%에 달한다고 하던데.
“군인은 북한에서 훌륭한 직업에 속한다. 의무복무 기간을 거치면 당원이 될 수 있다. 나는 의무 기간이 10년이었는데 요즘엔 7년이다. 60~70%는 당원이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서다.”
인권을 무시하고 통일하기 힘들어
유엔 대북제재엔 "김정은 머리가 아플 것"
―최근 통과된 북한인권법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고초가 많았다. ‘삐라. 전단지 보내면 포가 날아온다. 단체를 어떻게 다 지원해주느냐. 대한민국 인권도 힘든데 북한 인권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고 한다. 북한 인권은 세금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대한민국이다. 단지 갈라져 있을 뿐이다. 최종 목표는 통일인데 인권을 무시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나. 북한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 북한 주민들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 북한 체제의 변화가 올 수 있다. 인권을 꾸준히 이슈화해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북한인권법이 북한에 어느 정도의 압박이 된다고 생각하나.
“북한은 아예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 자유가 있는지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김정은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 인권이 세계에 공개되는 것이다. 인권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쓴다. 체제 유지를 하면서 국제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데 최대 방해세력 아니겠나.”
―북한인권법 관련 재단 설립 등 역할을 제의받은 것이 있나.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없는 것 같다. 북한에서 살다 왔고 북한 정세를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산증인인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나. 제의가 온다면 기꺼이 할 것이다.”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에 대해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김정은이 머리가 많이 아플 것이다. 대북제재 한 귀퉁이라도 느슨하게 하기 위해 뒤에서 중·러를 이용하지 않겠나. 무역 일꾼들을 통해 지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북한 주민 생계를 위한 지원 목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지 않나.”
'인도적 지원' 하지 말아야
쌀 보내도 당으로 빼돌려 빵공장 지어도 당으로 빼돌려 주민들은 혜택 못 봐
―그렇다면 인도적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하나.
“솔직히 그렇다. 쌀 보내고 빵 공장 지어줘도 당 간부 등 중간에서 다 빼돌리지 주민들은 덕을 보지 못한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나올지라도, 설사 내 부모가 어떻게 될지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고 실질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온다면 그때의 주민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으로 보면 이 대표가 눈엣가시일 텐데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
“작년 4월 북한에서 24명의 처단자 명단을 발표했다고 들었다. 그중 여자가 2명인데 내 이름이 있다더라. 어디를 가든 보고하고 몸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보다 더 위험한 분들이 많다.”
이 대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이 대표의 부모는 아직 북한에 있다. 이 대표는 2008년 두 번째 만에 탈북에 성공해 한국으로 왔다. 그동안 두 명의 오빠는 감옥에서 죽고 부모와는 전화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했다.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된 와중에도 전화 연결이 되느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자유롭지는 않지만 연락은 된다”고 답했다. “어머니가 북한 당국에서 경고를 받았는지 나한테 좀 조용히 살면 좋겠다고 하더라”면서 웃었다. 북한 인권운동에 뛰어든 계기를 물었더니 이 대표가 얼굴까지 붉어지며 힘주어 대답했다. “그동안 당한 것이 너무 억울해서 그럽니다.” <下편에 계속>
중국行 탈북은 6개월, 남한行 탈북은 3~7년씩 처벌 달라, 감옥은 '탈북학교'
[주간조선:北 4군단 출신 이소연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下)]
탈북 여성들 속을 보면 재만 남았다
1992년, 18세에 입대한 이 대표는 의무복무 10년을 마치고 당원 자격을 얻어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왔다. 관할 시당 등록과에서 직업 배치를 받아야 했다. 시당 책임비서한테 밉보였던지 배치를 받은 곳은 회령 탄광이었다. 당원이라 거부도 못하고 가서 곡괭이 들고 탄을 캐는데 도저히 힘에 부쳤다. 대학교수인 아버지 ‘백’을 동원해 다시 배치를 받은 곳이 수출 피복공장이었다. 러시아에서 천을 들여와 옷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월급은 당연히 안 나왔다. 그때가 2002년, 장마당이 등장해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공장에 적만 걸어두고 이 대표도 시장으로 나갔다. 철, 잡화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썩을 염려도 없고 돈이 됐다. 중국서 전기코드, 자전거, 중고 TV를 들여와 팔았다. 이 대표는 “돈 벌어 하루 한 끼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수십년 세뇌 당해온 것이 南 드라마로 바뀌기 힘들어
―탈북을 언제 결심했나.
“장사를 하다 보니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섰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북한에서는 손해가 났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탈북했다는 사람들이 많다.
“절반 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다는 아니다. 수십 년 세뇌를 당해왔는데 드라마 몇 편이 그걸 송두리째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랬다면 북한 주민 모두 탈북했을 것이다. 굶어죽는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도 배가 고팠다. 드라마에서 본 것도 있고 다들 탈북한다는데 나도 가보자고 생각했다.”
―가족들 걱정은 안 됐나.
“처음 탈북을 시도한 때가 2006년이다. 강력한 처벌을 하고 경종을 울려도 탈북 행렬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탈북해도 나머지 가족이 충성심이 있으면 안고 간다는 방침이 나왔다.”
―첫 탈북 과정은 실패했다.
“브로커를 잘 만나야 한다. 남한에 가서 정착금을 받아 브로커에게 주는 후불제다 보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잘 받을 수 있느냐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남자에게 팔아넘기기도 하고 쉽게 돈 벌 연구만 한다. 내가 말을 잘 안 듣고 따져대는 데다 결정적으로 공안기관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중국에 팔아도 말썽이 생기겠다 싶었는지 밤에 남자 4명이 와서 때린 후 비닐테이프로 손발과 입을 막고 승용차 짐칸에 싣더니 두만강에 던졌다. 죽는구나 생각했다. 오전 10시쯤이었는데 북한 측 국경경비대에서 지켜보고 있다 나를 건져냈다.”
―북송된 후 처벌은 안 받았나.
“중국으로 간 경우는 생계형, 한국으로 가다 붙잡히면 정치적 탈북자로 분류가 돼서 처벌이 달랐다. 생계형은 6개월 단련대만 거치면 풀어준다. 정치적 탈북자와 3차례 이상 시도한 경우는 교화소로 보내져 3~7년형을 산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이 아니다. 나는 두만강에 내던져진 덕에 단련대와 감옥을 거쳐 1년 만에 나왔다.”
―두 번째는 한국으로 곧장 왔나.
“중국 단둥을 통해서 바로 왔다. 그땐 브로커를 잘 선택했다. 감옥에서 학습을 다 했다. 감옥이 탈북학교다.”
매우 열악한 탈북 환경 인신매매, 폭행…
―최근 탈북 행렬이 뜸해졌다.
“김정은 체제 들어 내적 질서를 강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또 1990년대 중국으로 넘어왔던 생계형 탈북자들이 그동안 남한으로 다 들어왔다. 요즘에는 북한에서 곧장 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남한에 온 탈북자 3만명 중 여성이 70%라고 들었다. 왜 여성 비율이 높은가.
“가족 생계를 책임진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에 정착하는 데도 여자들이 유리하다.”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가 요즘에도 심각한가.
“그렇다. 중국에 머물렀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나. 누군가 작정하고 이끌어주지 않는 한 브로커들한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신매매 브로커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나.
“북한 내에서 브로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중국에 브로커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 여성들의 문제는 뭔가.
“많이 벌어도 150만원이다. 브로커에게 떼주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생활비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서 못 먹고 살다 그만큼 벌면 행복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그런 시선이야말로 우리를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으로 내모는 것이다. 상대적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 속을 들여다보면 다 재만 남았다.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 생각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이 대표의 정착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하나원을 나와 첫 일자리는 서울 영등포 근처 칼국수집이었다. 그곳에서 3시간 만에 쫓겨났다.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몰려드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나면서 공포감이 들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하고 나와 하얗게 질린 그를 보고 주인이 시급을 쥐여주고 등을 밀었다. 무엇보다 말투가 문제였다. 그러다 겨우 구한 것이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퇴근해서 고시원 청소를 하고 다시 오후부터 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문제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세요, 어쨌어요?, 요요 하는데 물어보는 건지 달라는 건지 도통 구별도 안 되고 뭘 달라는 건지 알 수 없더란다. 우리나라 말을 내가 왜 못 알아듣나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 시간을 2년 보냈다. 지금은 북한 말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방송활동 적극적인 이유는 북한실상 알리기 위해서
“나 하나로 북한 실상이 알려질 수 있다면”
북한 인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건 장교 출신이었던 두 오빠가 이 대표 때문에 강제 제대를 당하고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자살을 생각했을 만큼 괴로웠다. 처음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생각했다. TV에서 탈북자 단체들이 활동하는 뉴스를 봤다. 북한 실상을 알리고 여성들의 인권 실태를 알리자는 뜻을 같이한 탈북 여성들과 함께 2011년 뉴코리아여성연합을 조직했다. 현재 회원은 300여명에 이른다. 마침 채널A에서 하는 탈북자 토크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이 대표는 “나 하나로 북한 실상이 알려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여군 출신 탈북미녀로 알려지면서 강의 요청도 많아졌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 방송에 출연한 탈북 여성들의 증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격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북한이 맞느냐? 둘 다 북한이다. ‘너는 왜 맨날 후진 이야기만 하느냐’고 묻는데 재미와 감동을 위해 거짓과 포장으로 꾸며낸 프로그램은 오래갈 수 없다.”
―탈북자들이 오히려 자본주의 습성을 빨리 받아들인다는 생각도 든다.
“건강은 안 좋지 돈은 없지. 돈을 좇아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 나도 잘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돈 돈’ 하며 살았다. 탈북한 지 만 7년이 되는 올해 들어서야 내가 불쌍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과도한 욕심 때문에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엔 사람들에게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돈이 아닌 가정이나 일을 통해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남북녀라고 하지 않나. 와서 보니 어떤가.
“북한 남자들이 날 죽이려고 할 텐데. 하하. 장점만 말하면 북한 남자들은 가식이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다 말한다. 때론 시원하기도 하다. 남한 남자들은 상대 배려가 뛰어나다. 예의도 바르고.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 말한다. 장단점이 다 있다.”
이 대표는 남한 남자와 결혼을 해 26개월 된 아이를 기르고 있다. 결혼 후 가정이 생기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이 대표는 무엇보다 사회에서 탈북자들을 보는 마인드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못사는 데서 왔으니 지금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아라’가 아니라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심리적으로 단 한 번도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따뜻하게 봐 달라.” 이 대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