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래아씨(阿氏)의 아~옛날이여!]
따스하고 정겨운 안방
김혜래
정겹고 따스했던 안방.
절절 끓던 아랫목 구들장에는 당연히 밍크담요나 카시미론 이불이 펼쳐져 있고, 그 이불 안에는 때로는 복지깨 덮은 밥주발이 놓여있었다.
늦게 들어오는 식구들의 저녁밥상에 따뜻하게 올려질 밥 한 그릇.
따스한 정이 느껴지던 모습.
즈냑 가마솥에 밥하면서 땐 장작불이 새복까지 그 온기를 간직했었다.
많이 뜨거워 장판이 다 새까맣게 탈 정도로 따뜻한 온기.
내중엔 까만 구공탄으로 바뀌어 연탄가스 중독이란 위험에 늘 시달리곤 했지만...
윗목에는 낮은 책꽂이가 놓인 앉을배이 책상이 정겹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책꽂이에는 소박한 교과서 몇 권이 달랑 꽂혀있었고,
혹은 세계명작소년소녀 전집중의 하나인 소공녀, 쟝발장, 톰소오여의 모험 등 몇 권이 소박한 책꽂이를 약간은 화려하게 해주기도 했었다.
책상밑판에는 씹다가 붙여놓고 잊어버린 검으스레한 끔이 굳어서 붙어있기도 했지.
대부분의 책상 위에는 반드시 이런 글귀가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 "시간은 금이다"
좌우명이라고나 할까?
이런 글귀들을 보고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슬그머니 웃음짓기도 했지.
책상옆에는 '부라더 미싱'이 떡하니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도 있었다.
그 당시 최고의 혼수품이 미싱이었다나.
벽에는 못에 걸린 옷가지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면 보기가 숭하다고 언니들이 자수 놓은 옷보로 덮어 가려놓았는데...
그 옷보 자체가 생활용품이면서 때로는 동네 새닥들이 그 집 딸들의 솜씨를 엿보는 수단으로도 활용이 되었다. 마실왔던 동네 새닥들이 그 솜씨를 보고 중신을 설까 말까를 결정하기도 했을 법 하다.
방 한켠에는 상보덮힌 두렁반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식구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고,
구석진 벽에는 함석 쓰레받이와 수수 빗자루가 걸려 있었다.
그 밑에는 호야를 끼운 남포, 혹은 등잔에 불붙이기 위한 다황(성냥)이 있었는데 주로 '향로' 혹은 'UN'이라는 상표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방문을 열면, 맞은 편에는 으레 국회의원 사진이 복짱에 크다마하게 박혀있고,
그 가새이에 촘촘하게 열두 달이 새겨진 연력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 국회의원이 우리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 때문에 밥먹고 사는줄 알았었지.
그 이면에 검고 구린 일들이 그리 많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문위에는 식구들의 지나간 추억들이 빡빡하게 걸린 액자가 늘 걸려 있곤 했다.
돌사진, 결혼사진, 졸업사진 등등...
밤이면 윗목에 놓이던 이동식 화장실 요강.
사기 요강, 놋 요강, 스뎅 요강 등.
가정의 경제 규모와 안주인의 취향에 따라 요강이 결정되어졌겠지.
문풍지 웅웅 거리던 창호지문에는 방안에 앉아 밖을 내다보게끔의 높이에 바깥세상과 소통이 되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바깥세상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거나 미적인 안목이 뛰어난 예술적인 사람이 주인이라면 납작하게 말린 꽃을 창호지에 붙혀 문을 장식하고는 했지.
프레스 플라워(압화) 공예의 원조라고나 할까.
시건장치가 변변치 않던 그시절의 자물쇠는 놋숟깔, 열쇠도 놋숟깔. 문고리에 푹 꽂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경제적이고 편리한지.
우리조상님들의 지혜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따스한 삶의 온기와 온갖 추억이 물들어 있던 안방에 대한 그리움...
아! 옛날이여~~
첫댓글 김혜래 시인님의 따스하고 정겨운 안방
옛날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 지낸 풍경이
눈 앞에 선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라
그리운 고향의 그 시절 생활이
예향이 겪었던 것 같이 많은 공감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작품 소개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어두워졌네요
행복한 아름다운 밤 되십시오^^
시대공감~
감사합니다!
그 옛날의 기억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