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중 작사, 윤극영 곡으로 1947년 공개된 '기차길 옆'(현재의 맞춤법으론 '기찻길 옆'으로 써야겠구만)이란 동요는 어린이들이 해방 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에 휘둘리지 말고 씩씩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가사에서 기차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바로 옆을 지나가도 아기는 아랑곳없이 잘 자고 있다고 했으니 이 아니 다행일까.
30여 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우리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으로 맞은 해방은 태생부터 좌우익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자유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민중의 삶이야 뒷전이요 자신이 신봉하는 체제 수호에만 목숨을 걸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던 시절을 오롯이 온몸으로 겪어온 민초들의 삶은 언제 돌아보아도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들이다.
김주영의 장편소설『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문이당, 2001)는 처음 같은 이름으로 1988년 출간되었다가, 내용의 상당 부분을 손보아 제목을 『거울 속 여행』(문이당, 2003)으로 바꾸어 출판되었다는데... 이후 표지와 판형을 다듬어 다시 원래 제목으로 돌아와 수정·출판(문이당, 2005)되었다고 한다. 근디 제법 길게 나열된 책의 제목이 선뜻 이해되덜 않는 게 무식한 나만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거울 속 여행』이란 제목이 소설의 내용으로 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이긴 하다만...
시대로는 해방직후이자 지리적으로는 경상북도 청송군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공간적으로 나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자 시간적으로도 나의 그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은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있는 걸쭉한 경북 사투리가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푸짐하게 쏟아지는 이야기의 흐름도 그렇거니와, 무릇 성장소설이 그렇듯 아이들을 둘러싼 작은 변화들이 하나 둘 모여 이윽고는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읽는 이들에게 재미를 더해 주는 듯하다.
과숫댁의 큰 아들인 주인공이자 화자(話者)는 가난한 시골 마을의 풍경과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배경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나'와 '아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이야기 속의 많은 부분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기에 과거를 회상하는 공감과 함께 읽을 수 있었는데...판자로 된 교실 바닥 아래로 떨어진 아이들의 연필, 지우개, 칼 등의 학용품을 주우러 몰래 캄캄한 교실 바닥에 기어 들어가 물건들을 더듬어 줍던 일(이야기 속에선 여학생이 떨어뜨린 학용품을 찾아오라고 선생님이 화자를 내려 보냈지만)이며, 배가 고파 밥 대신 술지게미를 먹고 등교했다가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고 선생님께 호되게 야단맞은 일 등이 어제 일처럼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는 장석도로 대표되는 서민들의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상, 두 아들을 키우며 긴 세월 한과 슬픔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정치적 이념 때문에 이방인으로 숨어 살아야 하는 이발관 주인 설영도와 최영순 선생님, 화자에게 사랑을 고백한 깜찍한 거짓말쟁이 남순애, 그리고 아우의 첫사랑인 옥화 등의 모습이 명멸해 가는 모습들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는데...그러면서도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아기는 기차 소리 요란해도 잘도 잠을 자듯, 주인공은 어머니의 믿음에 부응하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그 시대 소설들이 흔히 그리고 있는 게 한 가정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여인의 모습이지만, 특히 이 소설에서는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한과 슬픔을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어 읽는 나의 가슴을 내내 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