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5)
눈코 뜰 새 없는 시간 속으로(1)
970만원이었던 집이 입주할 당시에는 1,800만원이 되었고, 2년 후에는 4,000만원을 넘었다. 아파트값 상승률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외벌이 월급쟁이 능력으로 이런 집을 갖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때맞추어 상경하신 부모님 덕분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해 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공짜로 얻다시피 한 집을 살게 되면서 긴 세월 내가 치룬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부모님은 이부자리와 장독들만을 갖고 오신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문화,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 그분들의 인간관계와 함께 오셨고, 그로 인해 철철이 치러야 하는 집안 행사와 일들이 다 내 것이 되었다.
시동생이 결혼 해 나갔어도 아직은 8식구였고, 그 외 며칠, 몇 달, 또는 1년씩 묵고 가는 객식구들이 늘 있었다. 음력설, 양력설, 추석, 기제사 4번, 부모님 생신과 어버이날, 남편 생일까지 정기적으로 시댁 형제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날이 최소 1년에 11번이었다. 양 명절과 시조부모님 기일에는 시골에서 작은 아버님들이 오셔서 하룻밤 묵고 가셨다. 제 상에 올릴 음식을 만드는 틈틈이 술상을 봐야 했다.
삼시 세끼 해 먹는 일도 전에 비해 더 커졌다. 이사 온 후로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주방이었다. 출근을 하는 남편과 시뉘가 먼저 아침밥을 먹고 나면 부모님은 새로 차려드려야 했다. 당신 아들이 집에 있는 날도 부모님은 꼭 따로 잡수셨다. 두 번 씩 밥상을 차리게 하시는 것에 짜증도 났지만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남편을 어려워 하셨다. 한번 먹은 상을 치우고 돌아서면 또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10시간 이상을 부엌에서 보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오전반일 때도 있고 오후반일 때도 있어 그 때마다 밥 먹는 시간이 달랐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 2부제 수업을 했다. 그래도 한 반에 학생 수가 70명이나 되었다. 한 때는 신림초등학교 전교 생 숫자가 1만 명이 넘은 때도 있었다.
그 후로 신설 학교들이 들어서고 산아제한 운동이 국가 차원에서 일어나 한 반의 학생 수는 줄어들었다. ‘둘만 낳아 잘 살아보자.’는 정부차원의 켐페인이 있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잘 기른 자식 하나 열 자식 부럽지 않다.’라고 까지 발전했다.
줄줄이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이 미개인 취급 받던 시절, 산아제한을 강하게 반대하신 분이 우리 성당 신부님이셨다. ‘사람을 소비자로만 보아선 안 된다. 인간은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인 것이다.’ ‘산아제한 운동은 미래에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신부님의 예언처럼 꼭 산아제한 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6,7십 명씩 채우던 비좁은 교실이 요즘은 학생 수가 형편없이 줄어 썰렁하고 폐교도 늘어나고 있다. 이래서 현 시대에는 정부에서 다자녀 가정에 혜택을 많이 주고 아이를 많이 낳는 부모가 애국자가 되고 있다.
내가 삼시세끼에 올인 하고 있었다 해서 어머님이 가만히 앉아 얻어 잡수셨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긴 지금 내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니 67 세면 노인도 아니었다. 아직 힘이 있을 때였다. 게다가 이곳에 오시기 전까지 큰살림을 해 오신 분이셨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 일들이 그분에게는 소꿉놀이와 같았다.
부엌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어머님께서는 내가 일하는 곳을 항상 비집고 들어오셨다. 고부간에 싱크대를 서로 점령하려 경쟁하였다. 도와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부엌이 넓지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아예 어머님께 다 맡겨드릴 형편도 아니기에 “이것은 제가 할 테니 어머님은 다른 것 하세요.” 하며 부엌에서 나가시도록 사정하곤 했다. 그래서 어머님은 청소며 빨래며 일을 도와 주셨고, 고추장 된장 간장 김장 등 힘 든 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16년 후 집을 허물고 새로 건축 했을 때 내가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은 부엌을 넓게 하고 싱크대를 길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들어오실 공간을 마련해 드리고 부엌일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이 끝나고 한 숨 돌릴 만하면 어머님의 말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웅변가이신 어머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이층으로 올라가셔서 이젠 좀 쉬시나 보다 하고 있으려면 다시 내려오시어 “참 내가 빠뜨린 것이 있는데...”하며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어머님은 시장을 보러 갈 때도 따라 나오셨다. 이처럼 어머님과 나는 한 몸처럼 지냈다. 언니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와 어머님은 샴쌍둥이와 같다우. 눈만 뜨면 늘 붙어 지내.” 이 말을 들은 언니는 ‘샴쌍둥이’이라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나만의 시간은 없었다. 책을 읽을 시간도 혼자 생각에 잠길 수도 없었다. 아이들과 놀아줄 틈도 공부를 가르쳐 줄 새도 없었다. 아이들은 한글을 스스로 깨치거나 더러는 한글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했다. 먹는 것도 아이들 위주의 음식을 해 주지 않아 어른 들 식성에 맞춰 먹고 컸다.
우리 애들은 놀 때는 실컷 뛰어 놀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며,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학교에서는 특출하지도 뒤떨어지지도 않은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대가족 속에 살았던 경험은 후에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학교 공부에서는 얻지 못한 유익한 자산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