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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6장 35-63절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선언(35-43절)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서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불가피성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특히 35-43절은 구원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타락한 여인과 같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35) 그러므로 너 음녀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음녀’라고 하십니다. 어제 본문에서 살핀 것처럼, 예루살렘은 태어나자마자 탯줄도 자르지 않고, 몸에 핏기를 씻지도 않고, 들판에 버려진 여자 아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아기를 깨끗하게 씻기고, 기름으로 바르고, 수 놓은 옷과 가죽신을 신겼습니다. 그렇게 하여 ‘왕후의 지위’에까지 앉혀 주셨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여자아이도 그런 신데렐라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참했던 자신(예루살렘)을 그렇게 존귀하게 세워주셨다면,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뜻과 온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심하게 음행(우상숭배)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표현하면, 집안을 무속인의 집처럼 꾸며놓고, 아무 신이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신을 찾으며 온갖 정성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제물로 드리는, 끔찍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일까지도 자행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을 파는 여인이 여러 남자를 받는 것처럼, 예루살렘이 이웃 나라의 남자와 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방신을 많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몸을 파는 여인은 화대를 받지만, 예루살렘은 돈과 선물을 주면서 까지 음행(우상숭배)을 하였다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루살렘을 향해 ‘음녀’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예루살렘이 심판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는 ‘누추한 것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추한 것’의 문자적인 뜻이 ‘청동, 놋’인데, 돈을 낮추어 말할 때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추한 것’을 표준새번역성경은 ‘재산’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우상숭배에 재산을 낭비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정든 자와 행음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든 자’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애굽이나 앗시리아와 같은 강대국을 뜻하고, 벗은 몸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다 드러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는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몰렉신에 자녀를 인신공양하였던 것을 강하게 질책하는 것입니다.
(37)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우상숭배로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는데, 첫 단어, ‘내가’ 앞에 ‘보라’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잘 보라, 똑똑히 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예루살렘이라는 여인과 정들었던 사람(나라)과 사랑했던 모든 사람(나라)와 심지어 미워했던 사람(나라)까지 대적자로 등장시킬 것이고, 그로 인해 옷벗김을 당하게 되는 것 같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여인을 재판하듯이 예루살렘을 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과 살인죄에 대한 벌은 모두 사형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선물을 주며 음행하는 것과 같은 우상숭배를 저지르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 제2계명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절도 하지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질투가 없다면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열정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그냥 넘기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이 그런 우상숭배의 삶을 버리지 못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루살렘이 그토록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던 것은 자신의 출발을 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탯줄도 자르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았으며, 강보도 없이 들판에 버려진 아기와 같았던 예루살렘을 왕후의 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자격이 있어서 왕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과 신앙에서 무너지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초심(初心)과 자신의 출발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같습니다. 처음에 자신과 같은 사람도 구원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의 은혜와 자신과 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한다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정당성(44~52절)
44~52절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 소돔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즉 상징적인 죄악의 도시인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예루살렘의 죄가 더 크기에 심판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44)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44절도 ‘보라’라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니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라는 딸이 어머니의 성품이나 인격을 넘어 더 뛰어날 수 없다는 경멸적인 의미가 있는 속담이었습니다.
3절에서 예루살렘에 네 어머니는 ‘셋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갓 태어난 딸의 배꼽 줄도 자르지 않고, 목욕도 시키지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은 채 들판에 버릴 정도로 비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예루살렘)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형제(자매)를 이렇게 말합니다.
(46)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예루살렘의 형(언니)이 사마리아이고, (여)동생은 소돔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 가운데 하나였기에 척박한 산간지방에 위치한 예루살렘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인 여로보암 왕 때도 그러했고, 아합왕과 이세벨왕비 시절에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모두 19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왕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남유다보다 136년이나 먼저 망하고 말았습니다.
소돔은 염해(사해) 중간 아래쪽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영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하늘에서 내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초록은 동색이다’처럼 예루살렘이 이런 사마리아와 소돔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돔의 죄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49-50)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소돔의 성적인 범죄는 언급되지 않고, 그들의 교만과 탐욕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소돔이 교만했던 것은 음식물(재산)이 풍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유나 능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풍족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 나눌 줄 알아야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런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만과 탐욕이 소돔의 멸망의 원인이라면, 우리 마음에 잘 새겨놓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교만과 탐욕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1)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인 소돔조차 예루살렘보다 죄가 가볍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사마리아도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행하는 것을 보면 언니인 사마리아와 여동생인 소돔은 의인이라고 합니다. 즉 사마리아와 소돔이 전과 100범과 200범이라면, 예루살렘은 그것을 합한 것과 같은 전과 300범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고,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징계와 회복, 그리고 새 약속(53-63절)
53-63절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소돔의 징계와 회복, 그리고 새 언약의 약속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53-54) 내가 그들의 사로잡힘 곧 소돔과 그의 딸들의 사로잡힘과 사마리아와 그의 딸들의 사로잡힘과 그들 중에 너의 사로잡힌 자의 사로잡힘을 풀어 주어 네가 네 수욕을 담당하고 네가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부끄럽게 하리니 이는 네가 그들에게 위로가 됨이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소돔, 사마리아를 ‘사로잡힘’에서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53절에 ‘사로잡히다’가 5번이나 나오는데, 히브리어성경에는 7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깊고 강하게 우상숭배에 잡혀 있었던 삶에서 돌이키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회복이 되었지만, 소돔이라는 도시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돔’은 ‘이방인’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복될 것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예루살렘은 자신이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않았지만(43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어렸을 때에 그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릴 때까지도 기억하시고,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는 것도 잊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에 역사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언약, 불변의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62-63)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고,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용서 받게 되어서 아무 것도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용서하다’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무엇무엇을 덮다’입니다. 한자 ‘옮을 의(義)’ 자는 ‘양 양(羊)’자 아래에 ‘나 아(我)’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은 내가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나를 덮어주실 때 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어떤 도시도 받지 않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있었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제사제도 있었고, 절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큰 은총을 입고서도 예루살렘은 우상의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수퍼 히어로 영화 중에 ‘스파이더맨’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큰 은총에는 큰 순종이 따른다”이어야 삶과 신앙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오늘이, 비록 겨자씨 한 알처럼 작게 보여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아무리 작고 연약하게 보여도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감으로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게 되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그런 은총을 누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그토록 많은 은혜와 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고서도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못한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 백성들을 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존재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패역한 삶을 살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새롭게 해 주심으로 영원한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을 목적삼고 살아감으로 우리의 삶이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