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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산김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김재호
나의 섭생은 오직 독립 운동일 뿐"
"권동지, 미안하오. 내가 그래도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도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여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
이 말은 김시현이 그의 부인이자 동지인 권애라(權愛羅)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하구(何求) 김시현은
안동이 배출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구한말에서 해방이 되기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벌인 인물이다.
안동에서 풍산을 거쳐 예천 방면으로 34번 국도를 따라 약 2km 가노라면, 오른쪽으로 현애에 이르는
조그마한 길목이 나타난다. 한 굽이 돌아서서 직산 제일교회를 끼고 오른쪽에 (우)피실 동네(현재 예천군
호명면 직산 1리)가 보이는데, 이 곳 안동 김씨 종중 선산에 하구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대황산을 바라보며 약 1.5km 정도 가면 풍산읍 현애리에 다다르게 된다. 본래 현애(玄厓)는 높은
산밑이 되므로 감애(甘厓 가매)라고 불리었다. 현애리의 안동 김씨는 17세손 북애공(北涯公) 김후(金 )가
조선 광해군 때 대황산 앞자락에 생활 터전을 잡으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김시현은 1883년
북애공 김후(金 )의 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호)에서 생부 태동(台東)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백부 택동(澤東)에게 출계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기의 항일 의식 성장
1894년 이후 안동 유림이 중심이 된 최초의 의병 전쟁인 갑오 을미 의병은 그가 항일투쟁 의식을 지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이들을 돕기 위하여 군량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어린 소년 하구는
이런 분위기에서 항일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구는 1898년 신년 초 단신으로 예천을 거쳐 죽령 고개를 넘어 상경하였다. 그가 상경하게 된 이유는
한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지식으로는 급변하는 열강의 침략 야욕을 억제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숙부의 집에 거처하면서 중교의숙에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재경 영남 애국지사들이
조직한 교남교육회를 통해 폭넓은 견식을 쌓았다. 특히, 현재 풍산읍 오미1리 출신인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의열단원,1924년 동경 이중교 폭탄 사건), 김응섭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항일투쟁방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숙부와 함께 운영하던 미곡 도매상을 통해 경북 일원의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와 연결을 가지며 활동하였다.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6년만에 돌아온 그는 계속 애국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항일투쟁의 시작
김시현의 항일 투쟁 활동은 3 1운동이 일어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평소 일제 관헌에게 감시를 받고 있던
그는 그 해 3월 하순 경 상주 헌병대에 체포되어 2개월간 고초를 겪다가 상해로 탈출하였다. 그곳에
약 3개월간 머문 뒤 무장항일투쟁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망명 애국지사들이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 단체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김좌진이 주도하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원봉을 단장으로 추대한 의열단 조직에 참여하면서 그의 직접 행동적인 의열투쟁은 시작되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그해 9월 대구에서 체포될 때까지 그는 상해와 국내를 오가면서 군자금 모금,
동지 규합, 무기 구입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당시 구체적인 활동상을 보면, 첫째 의열단 최초의
암살·파괴 계획(일명 밀양폭탄사건)을 추진하였고, 둘째 임시정부를 비롯한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용단, 주비단 활동)
및 김좌진이 주도하는 대한독립군정서와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당시 밀양폭탄사건을 실행하기
위한 거사 계획에 그는 막후에서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땅을 빼앗기고 시장권을 빼앗기고 가난과 비분에 쌓여있는 국내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하여
신년에 무엇을 보내어 선사할꼬?"
"말하자면 설 떡을 보내자는 것인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우리동포들의 가슴에 활기를 넣어주는
폭탄을 보냅시다 그려."
의열단원 이성우와 나눈 대화 한 토막에서 우리는 이 때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
다.
또한 청산리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 국내에서 주로 재정 조달에 힘썼음을 "청산리 싸움의 수훈자가 김좌진
또는 이범석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욱 수훈자가 있다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무명의 용사들이다. 또한 그들을 위하여 막후에서 군자금 조달을 맡은 사람들도 수훈자가 되는데 그 중의
나도 포함된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하구가 국내에서 그들을 위하여 재정 조달에 힘을 기울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와 체포의 위협 속에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1년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시현·황옥 사건
1921년 9월 출감한 김시현은 상해로 재차 망명하였다. 그 때 상해 임시정부 내부는 '모스크바 대표단 파견'과
'레닌 자금' 사용 문제로 이동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그룹과 안병찬을 위시한 여운형, 조동호, 김두봉
등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갈등을 빚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 무렵 상해에 도착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이어서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5월
하순 경 상해로 귀환하여 장건상, 김원봉, 김지섭 등과 더불어 대중적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에서는 두 번째 국내 암살 파괴 운동(일명 김시현 황옥 사건)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실행의 책임을 맡게 되어 김지섭과 더불어 국내에 잠입하여 일경의 집중적인 감시와 체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지 규합, 자금 모집 및 거사 준비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15일 밀고자에 의해
폭탄 은닉 사실이 탄로나 동지들이 차례로 검거되면서 의열단 최대의 대중 투쟁적인 이 거사는 실패하였고,
그는 10년형의 선고를 받아 서울, 안동, 대구형무소를 전전하면서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재판 과정에서 보인 독립을 향한 굳은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앞다투어 대서특필 하였으며, 단식 투쟁을 비롯한
그의 옥중생활을 연이어 보도한 것을 보면 그의 항일투쟁 위상이 대단히 높았음을 의미한다.
김시현의 항일투쟁에 얽힌 일화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이른바 '김시현 황옥 사건'이다. 즉, 의열단에서 추진한
국내 제2차 암살 파괴 운동에 사용될 폭탄과 무기 및 선전용 유인물을 국내에 들여오는 계획이었다. 이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상해에서 제조한 폭탄을 만주 안동현에서 어떻게 엄중한 감시를 뚫고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통과하느냐가 문제였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김시현은 평소 친분이 있던 경기도 경찰부 소속 현직 경부인
황옥을 포섭하여 의열단에 가입시킨 뒤, 1923년 3월 초순 경 조선일보 안동현지국 개국 축하연 때 황옥에게
부탁하여 현직 경찰서장 및 일제 관헌을 초빙하고, 기생까지 동원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2차는 신의주에
가서 하자고 그들을 꾀어 기생이 타고 온 인력거에 무기를 숨기어 무사히 국내에 들여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조선일보, 동아일보 및 일본 국내 신문들은 대서 특필하였고, 호외까지 발행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 계획은 모두 그의 지휘하에 펼쳐졌던 것이다.
조국독립을 위한 강인한 항일의식
1929년 봄, 출감한 하구는 옥살이로 허약해진 몸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며 "나의 섭생은 오직
조국 독립일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또다시 만주 길림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독립군 양성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활동하다가 일제 관헌에게 붙잡히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천진에 와 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그와는 호형호제하면서 지낸 사이였으며, 해방 후에는 좌우 합작 추진 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하였다)의 권유로 남경에서 김원봉을 주축으로 하는 의열단과 재결합하였다. 1932년 10월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북경에서 비밀 지하활동을 통해 자금 모금 및 학생 초모관으로
활약하였다. 1935년 그는 북경에서 배반자를 처단하는데 앞장서서 지휘하다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또다시
5년형의 언도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사건 심문 과정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며, 친일적으로 전향하라는 일제 판사의 회유
심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우리 조선 동포는 극히 소수인 친일 주구배를 제외하고는 일본 국가에 반감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뿌리치면서 심문에 응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어가며 저항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안동인들은 그의 혀짧은 소리를 들었을 때 조국 독립을 위한 그의 강인한
항일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호가 '하구(何求)'로 불리게 된 연유로 다음의 일화가 전해진다. 원래는 학가산 오른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학우(鶴右)로 붙리었는데, 항일투쟁 과정에서 감옥에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기가 질린 당시 총독인 사이토오(濟藤實)가
"무엇 때문에 이 짓을 계속 하느냐, 차라리 호를 하구(何求)로 고치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9년 출감한 그는 또다시 중국 망명길에 올라 북경을 근거로 국내를 오가면서 두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 만주지방의 독립운동 단체 및 임시정부를 위하여 군자금 모금 동지 규합 등에 진력하였다.
가족들의 항일투쟁
하구(何求) 김시현의 가계에서 볼 때 그 어느 집안과 달리 무력 항일투쟁에 앞장선 집안이다. 갑오 을미 의병전쟁시
안동의진의 척암(拓岩) 김도화(金道和) 휘하에서 안동부 입성 전투와 태봉 전투를 치를 때 그의 두 분 부친과 고모부인
이인화(태봉 전투 선봉장)는 항일의병전쟁에서 활약하였고, 김지섭(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은 그의 매제이다)은
의열투쟁의 동반자로서 함께 활동하였다. 그의 친동생 정현(독립유공자 포상)과 고종제인 류병하(안동 하회:
독립유공자 포상)는 의열단원으로서, 1923년 대규모 국내 암살 파괴 운동을 하기 위한 폭탄 운반 사건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그의 부인 권애라(3 1 운동 당시 개성에서 만세 시위 주동자로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애국부인회에서 활동 중 대표 자격으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곳에서 하구와 만나 혼인하였다:1990년 독립유공자 포상)와 아들 봉년(峯年)은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그의 집안은 구한말 항일의병 전쟁부터 국권 피탈 이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중국 관내 및 만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40년대 들어서면서 김시현은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북경으로 갔다. 그들은 북경과 길림을 오가면서 활동하였고,
부인과 아들은 조선 의용대 소속 화북지대 군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북경에서 체포되어 두 차례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아 경성헌병대에서, 그리고 부인과 아들은 하얼빈과 신경에서 각각 체포되어 신경
감옥에서 복역 중 같은 시기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독재와 친일파에 저항하는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
해방을 맞아 경성 헌병대에서 풀려난 김시현은 해외 귀국 동포들의 귀환을 돕는 일에 힘썼다. 고려동지회를 비롯
하여 영생고아원, 동양공과대학 등을 통해서 그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고, 고향을 찾아가는 동포들을 위하여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안재홍을 비롯하여 여운형, 송진우 등이 찾아와서 함께 정치활동을
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그는 아무 곳에도 응하지 않고 단지 해외 동포 구제 사업에만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는 중에 그는 고향 안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위원회에 각각 중앙위원과 확대추가위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한민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존폐 위기에 처해 있을 무렵, 인촌 김성수의 부탁을 받고
우사 김규식을 당수로 옹립하려는 거중 조정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위원들과 힘을 합쳐
이시영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애족 민족통일 지향적 정부를 수립하려는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고
그는 회고하였다.
1952년 피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과 질서보다 조작된 민의와 폭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연장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는가 하면, 재야원로 60여명이 호헌구국
람이 테러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치계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하구는 김구 암살 당시 신문을 보며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하면서 대단히 분개하였다고 아들 봉년(현 광복회 고문)은 회고하고 있다.
"맹자도 살인한 자는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듯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러나 그대로 두면
수많은 백성과 애국자가 죽게 되니 그대로 결행하세."
이것은 1952년 6월 25일 피난시절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 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가 열릴 때 '
이승만 대통령 저격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김시현과 실행자인 유시태(의열단원)의 대화의 한 토막이다.
그는 유시태와 공모하여 이승만 대통령 암살 사건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1954년 1월 30일
살인예비·살인미수죄로 사형이 확정되어 대구, 마산, 부산 교도소를 전전하면서 기나긴 옥중생활을 또다시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60년 4 19 혁명에 의한 형집행정지 결정(특별사면)으로 4월 29일 부산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그의 기나긴 옥중 생활은 끝을 맺게 되었다.
출감 후 그해 7 29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안동에서 출마해 두 번째 당선되었다. 그 뒤에도 그는 평생을 걸어온
항일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해방 후 동지로서 활동했던 의성 출신 박진목(80)씨에 따르면 "1천만원만 마련해주게.
온 친일파가 세상을 주름잡는데 나의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폭탄을 터트리면 친일파가 깨끗이 종말을 고할 것
아닌가?"라며 친일파 제거의 끈질긴 집념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김원봉 등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시현은 단지 '항일투사'였을 뿐 현실 정치에 적응하지 못했고,
어느 면에서는 부적응의 '표본적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그를 가까이 모셨던 박진목씨는 "김옹은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데 항상 앞장서서 진두 지휘하였던 의열단의 거봉으로 어느 면에서는 김원봉 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그는 일생을 오직 조국독립과 일제에 항거하는 의열투쟁의
독립투사로서 우리 안동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사에서 크게 부각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는 3 1운동 이후 1960년 석방될 때까지 무려 7차에 걸쳐 23년 6개월여 동안 옥고를 겪었다. 이러한 굽힘이
없는 항일투사인 김시현은 지난 1966년 서울 불광동 허름한 전세 집에서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보람도 없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못본 채,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 권애라와 아들
봉년을 남겨두고 그의 파란만장한 항일투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불굴의 항일투사 김시현은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 않고 있다. 해방 후 형사범에게는 포상을
하지 않는다는 기준 때문이다. 독재자를 처단하여 민족을 구원하려 했던 사실이 독립유공자로서의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비록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석 하나 없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그의 무덤 앞에 서서 "나의 섭생은 오직 조국 독립운동일 뿐"이라는 그의 변함없고 강인한
의지를 돌이켜 본다.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해 온 항일투사 김시현 선생을 추모하면서, 그 분의 곧은 정신과 조국애를 우리
안동인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가슴 깊이 새기고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양 형 석(경일고 교사)
첫댓글 우리 문중에 김시현선생 같은 분이 바로 지금까지 풍산김씨들의 그 꼬장꼬장한 정신을 이어온것입니다. 자료를 많이 찾아야겠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