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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進(김진) 淸溪(청계) 大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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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子 : 克一(藥峰) 안동 임하 천전동 세거(大宗宅) - 第二子 : 守一(龜蜂) 안동 임하 천전동 세거(小宗宅) - 第三子 : 明一(雲巖) 안동 임하 신덕(신당) 세거(운암宗宅) - 第四子 : 誠一(鶴峯) 안동 서후 금계동 세거(학봉宗宅) - 第五子 : 復一(南嶽) 예천 용궁 구계동 세거(남악宗宅) |
위 五派의 후손들은 내부적으로는 경쟁을 하며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더욱 급성장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일신과 같이 단결하여 대내외에 그 명성을 드러내어 조선조 후기에는 그 영향력이 영남유림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진왜란시 진주대첩을 이끈 학봉 김성일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사실상 영남유림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나. 川前(내앞)김문의 독립운동
1) 을미의병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동년 12월 1~2일 퇴계학맥의 적정자이자 학봉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은 족친인 巨儒 척암 김도화와 함께 영남 각 문중과 서원에 거병의 당위성을 통문 하였으며 12월 3일에 호계 서원 통문이 재차 발송되자, 12월 6일까지 10,000여명이 을미의병에 동참하였다. 12월 7일 의병진이 편성되어 인근지역 의병진과 연합하여 상주군태봉에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에서 1896년 12월 13~16일(4일간)에 걸쳐 치열한 격전 끝에 패전하자 왜군이 안동시가지에 진입하여 가옥 1천호를 모두 불태웠다.1) 이후 왜군은 금계리 서산의 저택으로 몰려가 서산을 포박하고 종제 김회락을 포살하였다.
이상과 같이 을미의병은 서산 김흥락 문중의 주도하에 그의 제자 708인을 통한 영남 각 유림의 적극적 참여로 일어난 의병활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안동지방의 항일 민족의식이 발달하고 독립운동가가 전국 최대로 배출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2)
이 때 거병자금으로 낸 연금은 “금계문중 500냥, 천전문중(大·小종택) 800냥, 호계서원(천전김문 관리) 800냥, 임천(학봉)서원 600냥, 사빈서원(청계공 김진6부자) 400냥, 임호서원(김용, 학봉의 조카) 300냥으로 영남전체 20,867냥의 약 17%를 담당함으로써 항일의병활동의 최선봉에서 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갑제125호증의 7, 한말의병일기)
2) 협동학교설립과 구국계몽운동
상주 태봉(일본군 병참기지)에서 을미의병이 패전하고 고종황제의 효유문이 있자 을미의병은 안동향교를 통해 해산되었다.3) 그러자 동산 유인식이 계몽주의를 제창하고 협동학교 설립을 주장하여 川前(내앞) 金門에서는 종손 김병식(교장)과 김긍식(일송, 김동삼 본명), 김만식, 김형식 등이 참여하고 이후 석주 이상용, 백하 김대락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1907년 천석군인 도사댁 김대락의 집을 기증하여 개교한 이래 1919년 3.1운동까지 수백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고 만주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였다. 이는 한국독립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4)
3) 서간도(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계몽운동에 가장 관심이 많던 석주 이상용, 백하 김대락, 동산 유인식, 일송 김동삼은 협동학교 임원회의를 열어 서간도로 망명을 결정한다. 서울의 이동녕, 이관직 등의 신간회 인사 사전답사에 이어 사동의 황만영, 천전의 김만식, 법흥의 이준형이 사전답사를 하였다.
백하 김대락의 백하일기를 보면 1910년 12월 24일 고향 안동 천전리를 떠나 이듬해 1월 15일에 중국 황도천에 도착하고, 4월 19일에는 삼원포에 정착하였다. 이 때 뜻을 같이한 세 문중의 원로가 선두에 섰는데 川前(내앞)김씨 김대락, 평해 사동리 황만영, 안동 법흥의 이상용이 그들이다. 석주 이상용은 백하의 매부이고, 황만영 4종제는 백하의 손서 사동 종택 종손 황병일의 숙부들이었다.5)
이 때 川前인사를 보면 50명이 넘는 인원이 망명에 가담했고 위의 세 문중은 집단이주의 대표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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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신흥학교 (1911-1913) |
⇒ ② |
공리회 신흥무관학교 (1913-1916) |
⇒ ③ |
부민단 백서농장 (1916-1919) |
⇒ ④ |
한족회 서로군정서 (1919-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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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
전만한족통일회 통의부 (1922-1923) |
⇒ ⑥ |
전만통일준비회 정의부 (1924-1928) |
⇒ ⑦ |
혁신의회(1년)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 (1928-1929) |
⇒ ⑧ |
한국독립당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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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와 같이 천전인의 재만 독립운동은 35년간이라는 긴 항쟁을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청산리전투와 경신참변만을 언급코자 한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같은 해 10월 26일까지 6일간 일본군 20,000여명을 청산리 계곡 80리에 유인하여 사살 1,200명, 부상 200명을 가져온 독립운동사상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이다. 또한 북로군정서 김좌진, 홍범도, 서로군정서 일송 김동삼, 지청천 장군 등 독립군 10개 단체가 연합한 전투이다.(김좌진 장군의 자료에 의하면 사상자 3,300명으로 기록됨) 따라서 안동인은 석주 이상용, 일송 김동삼이 이끄는 서로군정서에 가담했으므로 청산리 전투에 많이 참여하였다.(석주 이상용,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은 학봉 11대 종손 서산 김흥락의 문하생이다.) 이 때 천전인 김성로가 사망하였다.6)
경신참변은 3.1운동으로 독립운동이 크게 발전하자 일본군이 서북간도 지방 독립기지촌을 불태우고 망명자를 학살하고 학교를 불태우는 등의 1922년 4월부터 자행한 만행을 일컫는다. 일본군은 마적단을 매수하여 독가스를 살포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살냈다. 이것을 ‘간도참변’이라하고 이어 동년 10월부터 11월 김문의 독립기지도 같은 방법으로 초토화하였다. 이 때 일송 김동삼의 동생 김동만을 말꼬리에 묶어 왕고령고개까지 끌고가 참사하는 처절한 일이 있었다. 폐허가 된 기지촌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일송 김동삼, 월송 김형식은 일족을 북만주로 이주시킴으로서 서간도에서 북만주시대가 전개된다. 고향 안동(천전 금계리)에도 위기를 느끼고 일송 김동삼의 종제 김장식, 금계리의 김원식도 이 때 만주로 왔다. 또한 안동, 상주, 영주 청년 유림단체들이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자금활동을 폈다. 이 때 천전인 김정식, 김창노, 김성노가 국내군자금 모금을 위해 파견되었고7) 학봉 宗宅 宗孫 김용환이 그 많던 종가 전 재산 (전답 20만평)을 독립자금으로 모두 탕진하고, 옥고를 치른다.8)
조선시대 명문 후예가는 거의 친일파로 전락 또는 식민지에 안주했지만 천전인은 그것을 거부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여의치 않자 협동학교를 세우고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육성했다. 보수적인 의병과 계몽 운동가들이 모두 합심하여 혁신노선을 함께 걸었으며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문중이 외척과 사돈까지 모두 불러들여 50년이란 기나긴 항쟁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국내에서 천전인은 만주로 망명한 집안걱정과 독립자금의 공급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여 시위운동을 하는가 하면 대종손까지 파리장서 서명에 참여하고 의용단을 결성하여 지하운동과 신간회와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남은 힘마저 모두 쏟았다.
4) 만주생활77년(이해동 여사, 난중록)
이 글은 만주독립운동을 이끌어간 남만주의 호랑이 천전인 일송 김동삼 선생의 맏며느리 이해동여사가 1988년 1월 18일 영구귀국 직전 회고한 난중록 중 일부이다.
여사는 이 글 머리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해 사상주의가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아버님(김동삼)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거룩한 업적만은 예나 지금이나 존경해 왔으며, 이러한 것이 마음속 기둥이 되어 80년이 넘도록 천한 목숨을 살려 하소연하고 싶었다고 하였다.9)
만주 망명 첫해에는 극심한 식량난과 전염병으로 고난을 겪으며 마실 물조차 없어 나무뿌리에 괸 냉수를 먹다보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10)
1922년 청산리전투 직후 교포 학교(삼관중) 교장인 시삼촌 김동만(일송 김동삼 동생) 외 40여명이 왜놈의 토벌대에 붙잡혀 말꼬리에 달고 왕굴령 고개까지 끌고가 총살하고 또 죽은 시체도 일본도로 목을 쳤다.11) 또한 1926년 월송 김형식(천전인, 백하 김대락의 둘째아들)이 세우고 친히 교장을 하고 있는 취원창학교가 항일 애국사상이 제일 유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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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상님들의 훌륭한 업적이 큰 교육이며,우리의 자산으로 알고,열심히 살아야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