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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뒤에 숨은 시인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당신은 연출가가 되어야 한다. 화자를 시의 무대 위로 내보내 놓고 화자의 뒤에 숨어 배후조종자가 되어야 한다. 배우(화자)의 연기가 서툴거든 호되게 꾸짖어라. 그래도 배우가 영 탐탁지 않으면 당신이 배우의 가면을 쓰고 아주 잠깐 배우와 똑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가보라. 관객(독자)의 눈에는 당신이 무대에 등장한 줄도 모르고 가면 쓴 배우만 보일 뿐이니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현대시의 훌륭한 배후조종자인 김소월과 한용운은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여성 화자의 입을 빌려 이별의 정한을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고은의 가계에는 실제로 누이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초기 시의 화자는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한 겨를의 실크빛 연애戀愛에도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을
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
-「폐결핵」 부분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코 누님이야말로 가을이었습니다
-「사치」 부분
라고 노래하면서 실제로 없는 누이를 여럿 거느리는 포즈를 취하면서 소름 돋도록 놀라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⁵⁴ “첫딸의 이름은 아내의 허리에 달아 두려 한다”(「내 아내의 농업農業」)는 시를 발표할 때에도 그는 미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허구가 빚어낸 노래에 탄복할 뿐 아무도 시인의 시를 두고 가식의 산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학 4학년 때 겨울,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나는 혁명에 실패하고 서울로 잡혀가는 전봉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신춘문예가 입을 모아 요구하는 ‘참신성’을 공식처럼 외우고 다니면서도 나는 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80년대라는 시대와 시를 어떻게 결합할 수 없나, 하는 것이었다.(캠퍼스 안에는 정보경찰들이 합법적으로 방을 얻어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그 이름을 ‘이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시’로 내걸었다가 ‘어둠’이 무엇인가에 대해 따지는 사람들과 고된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그 흔한 ‘어둠’의 은유하나도 허락되지 않던 때의 시는 그에 맞서기 위해 ‘어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무렵에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재일사학자 강재언이 쓴 『한국근대사』였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책의 뒤표지에는 한 장의 조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한 마디,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나는 노트 한쪽에 또박또박 적어 두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이라는 메모를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고치고 그걸 제목으로 삼아 학교 앞 자취방에 엎드려 시를 썼다.⁵⁵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또 다른 책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건드리는 몇 가지 허구의 재료들을 모았다. 전봉준이 전북 순창의 피노리에서 체포된 시기는 음력으로 정월이었다. 그 어느 책에도 서울로 압송되는 동안 눈이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역사는 압송 시기를 음력 정월로 적어 놓았으니 이걸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시의 배경에다 눈을 퍼부어대기로 했다. 그 앞부분이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시가 끝날 때까지 눈이 내린다. 만약에 앞으로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는 장면을 영화로 찍는 감독이 있다면 반드시 눈이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잡을 것 같다. 시적 허구는 역사적 사실보다 생동감 있는 진실을 보여주므로.
한편 이시의 마지막 연은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귀를 기울이라”로 끝이 난다. 여기에서 거센 물결소리의 실감을 위해 농민군의 혁명 기치 중의 하나인 '척왜척화 척왜척화‘를 그대로 빌려온 것에 대해 지금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갑오년 당시에는 '척외척화' 말고 '척양척왜'라는 구호도 있었으나, 격음의 효과가 선명한 쪽을 선택했다.⁵⁶
몇 해 전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시를 발표한 후에 독자들한테 전화를 몇 차례 받았다. 그 바닷가가 도대체 어디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느 바닷가를 지나다가 우체국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이 시의 배경이 그곳이 아니냐고 물어오는 분도 있었다. 정보통신부에서도 연락이 와서 그 바닷가 우체국의 위치를 알려주면 시비를 하나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그분들을 모두 실망시키고 말았다. 나는 가끔 변산반도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데, 그 바닷가 언덕에 있는 몇몇 낡은 집들에게 매혹되어 오래오래 그 집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게 죄였다. 그 언덕 위의 낡은 집 문 앞에 빨간 우체통을 세워두고, 우체국장을 출근시키고, 우표를 팔고, 우체부의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고, ’바닷가 우체국‘ 이라는 간판을 거는 상상을 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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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은, 『고은시전집』, 민음사, 1983.
55 “이 시는 서정, 서경, 서사의 제 측면이 적정하게 배치되고 그 배치가 알맞은 조화로 상승하고 있는데, 눈여겨볼 것은 서사의 전경화 방식이다. 가령 제목에 나오는 이름이 범부의 이름이 아니라 전봉준이라는 사실, 달리 말해 역사의 중대한 국면과 고비를 응축하고 있는 전봉준이라는 이름이 제목에서부터 앞장을 서는 것은 역사를 시화하겠다는 의도의 직접적인 전시이다. 역사에 대한 시적 탐구와 묘사는 시의 역사만큼이나 긴 이력을 지닌 작업이다. 한데 그런 유형의 작업이 실패에 봉착하는 경우, 그 실패는 거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버리거나 역사의 우상화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우세할 때 온다.…… 역사의 현재화, 다시 말해서 역사의 시공간적 상징성을 문학인어가 압축하는 것은 마치 줌인(Zoom-ln) 기법 같온 것이다.”(장영우 • 이재무 • 유성호 엮음, 「대표시 대표평론 II」, 실천문학사, 2000, 257-258쪽. 이성욱의 해설.)
56 “아우성이 강기슭에 부딪치는 물결소리로 환유되고 그 소리의 기표에 얹혀지는 반외세의 사유가 서로 충돌 없이 결합되는 이 장면은 시가 요구하는 언어조형술과 주제의식의 분명합이 시 전편에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있음을 마지막에 일러주는 마침표라 하겠다.”(앞의 책, 259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5. 1. 2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