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산 가수와 죽은 가수의 碑
이원우
現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 대한가수협회 회원 ‧ 26기계화보병사단 홍보대사 겸 안보강사/ 前 초등학교장 ‧ 무료 노인학교 25년 매주 토요일 오후 운영 ‧ 유네스코 부산협회 부회장 ‧ 부산북구문인협회장 겸 문화예술인협회장 ‧ 아시아경기대회 부산가요제 준비위원장(본인의 와병으로 결실을 못 맺음) ‧천주교 부산교구 노인대학 강사 지원단장 ‧ 초량시각장애인복지관 웃음치료+노래지도 강사 ‧오순절평화의 마을 자문위원 - 콘서트 16회/ 저서 18권/ 수상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봉사 본상 ‧ KNN문화대상 ‧ 부산교육상 ‧ 한국수필 제정 청향문학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화쟁문화포럼 문화대상 ‧ 부산수필대상 ‧ 허균문학상 ‧밀양시 교원예능경진대회 국악 성악 최우수 ‧ 양산교원예능경진대회 가곡 성악 장려‧ 전국시조경창대회 장려)
노래를 잘하면 소리꾼? 그런 명제에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 노래를 많이 불러서 가수? 그건 딱 맞다. 실제 나는 현재 대한가수협회회원이니까. 거기 걸맞게 노래와 더불어 산다. 난 가수라는 직업(?)이 참 좋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대신 돈을 버는 가수가 아니라, 그 반대의 가수다. 하지만 십 수 년 전만 해도 딱 20분 동안 노래 두어 곡 불러 주고 출연료 30만원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가수가 아니었다.
무상한 세월은 나를 완전히 변모시켰다. 어디든 소리꾼으로 나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정말 소원이 있다면, 10개 야구장에서 애국가 독창하는 것! 애국가만은 어느 대중가요 가수나 성악가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기록이 증명하고 남을 것이다.
죽은 가수나 작곡가의 유택에 가끔 발걸음한다. 유택이라니 무덤을 가리키는 걸로 착각할지 모르겠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추모관이나 봉안당, 이런 게 다 그거다. 근래 나는 세 군데 죽은 가수를 찾았다. 황금심과 부군 고복수 내외, 그리고 동남아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유명을 달리한 두 분의 아들 고병준의 묘소에 갔다 왔다. 가족 묘역이니 한 번 걸음으로 참배가 가능했다. 그리고 신해철과 박상규(내 친구) 유택 앞에서 잠깐 묵상하고 돌아왔다. 유택은 아니지만, 재작년에는 박시춘 선생의 생가도 탐방했다. 노래비 앞에서 ‘애수의 소야곡’을 흉내 냈고. 참, 고복수 내외의 노래비는 ‘타향살이’여서 처연한 느낌에 빠질밖에.
대중음악과 관계된 연예인이 죽으면, 비(碑)를 상징적으로 세워 주더라. 박시춘 선생도 그렇고 신해철 가수도 그렇다. 신해철은 노래비가 아니라 추모비이긴 하지만. 그게 뭐 그거 아니겠는가?
며칠 전 나는 삼랑진 아니 밀양 출신 가수로서, 너무나 유명한 고 남백송 선생의 부인을 인천 제물포에 가서 만났다. 남백송 선생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대단하고말고. 그가 KBS 가요무대 최다 출연 가수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그는 미성(美聲)을 지녔었다.
난 그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좋은 교직을 박차고 나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몸부림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수로 데뷔하기 훨씬 전에 부산에서 처음 다중 앞에서 대형 콘서트를 열었을 때 그가 우정 출연을 하였다. ‘부산 노래’를 내가 16/ 19 소화했고 그가 나머지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10년 뒤 우린 다시 인사동에서 만났다. 그가 백년설 후원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공연했는데, 나도 거기서 다시 트로트를 목에 담았던 것이다. 그 인연으로 인하여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수가 된다. 글 쓰는 사람이 등단하면 소설가나 시인 수필가의 반열에 올라서듯이, 노래 공부를 하는 사람이 데뷔라는 과정을 거치면 연예인 혹은 가수라는 소릴 듣는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남백송 선생이 고맙지 않으랴. 그래 바쁜 일이 하 많아 이리저리 미루다가, 아예 결심을 하고 그분의 부인을 만난 것이다. 동석한 이필우 시인이 어찌 남백송 선생의 히트곡 ‘방앗간 처녀’를 아는지 참 신기했다. 우리는(그분의 아들딸도 함께였다.) 거울 같은 시냇물 새들이 노래하는/ 수수밭 내 고향 오늘도…을 열창했음은 물어보나마나.
화두는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선생의 노래비를 하나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실 그분 살아생전에, 밀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 이미 그분의 노래비 이야기가 오갔었다. 추진할 주체가 없는 것이 탈이었을 뿐. 지금 판단해 보니 너무 건방진 얘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기치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인사동에서 그분과 스무 대여섯 번 이상 무대에 같이 서면서, 틈만 나면 내가 먼저 귀띔을 했으니 경박했는지 모른다. 그분이 이승을 떠난 지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무치는 그리움을 억누를 길 없었다.
그러던 중, 내 고향 삼랑진 행곡 마을을 획기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전 신라대 총장과 의견이 오갔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그와 나는 통하는 바가 많다. 그가 말했다. 남백송 선생이 작고했으니, 그의 노래비를 삼랑진 발전의 상징인 행곡에 하나 세우면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나는 찬성했고말고. 역전 어느 구석진 곳보다, 거기가 더 큰 의미를 지니리라는 판단이었다. 지금은 J 총장이 외국에 다녀오는 동안 이야기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참이다. 곧 나는 하부할 일이 있어 이번에 행곡 부락에 다녀 올 결심이다. 가족들이 삼랑진역 앞이 좋겠다고 하더란 말을 J총장에게 전해야 하는 게 걱정이다. 다만 남백송 가요제라도 열려면, 어느 한쪽이 양보(?)하는 게 전제 조건이다.
오늘 나는 조영남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흔든다. 아이고 교장 선생님!
조영남 씨는 가수 조영남이 아니다. 가수 조영남의 노래비(화개장터)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전 화개 파출소장 조영남 경감(당시 경위)이다. 그와 전에는 많은 통화를 했었는데, 근래 뜸했던 것이다. 조영남의 노래비에 얽힌 일화를 몇 마디 섞다가 끊었다. 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옷깃부터 여민다. 지난번 대한가수협회 회장(김흥국/ 전회장 태진아) 이취임식 때 조해진 의원을 만나 얘기를 건네기도 했으니, 그게 서막이다. 비록 3선에 실패했지만,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리라. 엄용수 의원은 시장 시절에 인사를 나눈 바 있으니 구면이고, 언제든 국회로 가서 면담을 청할 수 있다. 박일호 현 밀양 시장은 행시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내가 알고 있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와 신뢰는 대단하단다. 그와 의회 의장 등과의 다리는 J 총장이 놓아 줄 테고. 내 제자 H 군이 큰 몫을 해 주리라 믿고말고.
누구보다 중심인물은 그러나 현 삼랑진 읍장이리라. 그가 취지에 공감하면 일이 쉽게 풀릴지 모른다. 어제 통화는 했다. 내가 총 12년 동안 근무했었던 송진초등학교 바로 이웃에 읍사무소가 있으니, 그 인연이 어찌 소중하지 아니하랴.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오순절 평화의 마을도 지척에 위치했고. 내가 밀양 시내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그는 ‘국민학생’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를 정중히 대하려는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참, 이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가수협회 회장 선거하는 날 태진아 회장이 이야기했었다. 남백송 선생이 명재경각(命在頃刻)에 이르러 있다고. 그와 현 김흥국 회장에게도 언질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둘 다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협회로 바로 찾아가도 되고. 가수라면 모름지기 죽음과 삶을 알아야 한다. 인기도 생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 15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