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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공 지 영
거실 탁자 위에 낯선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은 막 집 안 청소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뒤표지를 살펴보니 콩쿠르상에 빛나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 바스러지는 과거, 지워버린 생의 흔적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고독한 영혼의 발걸음이라는 글씨에 커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그 여자는 그것이 어제 집에 들렀던 동생이 두고 간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생은 팔의 선이 환하게 드러나는 철 이른 흰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채, 갈색 고양이처럼 두 발을 모으고 앉아, 언니 그런데 나 사실은, 사실은 말이야, 정말 이혼이 하고 싶은가 봐, 했었다. 그런 그 아이의 얼굴은, 그런데 언니, 나 봄옷을 새로 사야할까 봐 하고 말하는 것처럼 심드렁해서 그 여자는 동생이 그 집을 떠날 때, 뭐 두고 가는 거 없는지 살펴봐, 라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무언가 잃어버리기를 잘했다. 언젠가 한 번은 여행을 다녀오던 그 애가 시무룩하게 집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왜 그러니, 그녀가 묻자 그 애는 배낭을 두고 왔어, 언니 그렇게 경악하는 얼굴 하지 말아,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 버스회사에 연락했더니 찾으러 오래, 내일 찾으러 갈 거야, 하고 말했다. 거기가 어딘데? 남원. 그리고 그 아이는 그다음 날 정말 다시 남원으로 떠났다. 며칠 후 잃어버렸던 배낭을 들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 애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왜 또? 배낭 속에서 언 놈이 카메라만 홈쳐갔어. 거기 우리 일주일 동악의 지리산 산행이 모두 담겨 있는데. 카메라는 가져가도 좋아. 하지만 필름은 빼놓고 가야 하는 게 도둑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아니야? 친구들 얼굴 어떻게 보지? 어떻게 하니? 그녀가 물으면 동생은 곧 얼굴을 펴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 지나가버린 일인데 후회한면 뭘 해? 내 속만 상하지. 그 여자는 걸레를 꺼내 책표지의 얼룩을 문질렀다. 라미네이팅*이 된 표지의 갈색 얼룩이 지워지면서 ‘고독한 영혼’ 이라는 커다란 활자가 반듯해졌다. 그 여자는 책을 탁자에 놓아두고 청소기를 코노에 꽂았다.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여학교 때의 보건체조 음악처럼 활기차계 들렸다. 거실의 낡은 가죽소파 위에는 이제 초등학교 오 학년이 된 큰아이가 어젯밤 벗어둔 돌돌 말린 양말 한 짝과 작은아이의 로봇 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큰아이는 제 아빠를 닮아서 이렇게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서랍엔 늘 짝이 맞지 않는 양말들로 가득했다. 그 여자는 허리를 한껏 구부린 채 청소기 주입구를 소파 밑으로 넣어보았다. 넓적한 청소기 봉 끝으로 돌돌 말린 양말 한 짝이 따라 나왔다. 양말을 빨래통에 넣고 작은아이의 로봇조각들은 장난감 바구니 속에 넣어둔 후, 그 여자는 베란다로 나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꽃이 져버린 서양란과 베고니아 화분. 서양란은 벌써 세 번째나 꽃을 피웠다 진 것이었고 베고니아 화분은 오 년째 그녀의 집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가을이면 꽃잎이 지고 이파리가 말라가던 꽃들은 영양제를 몇 대 꽂아주고 물을 뿌려주면 신통하게 다시 피어나곤 했다. 그 여자는 몸을 구부려 벡고니아 화분에서 말라비틀어진 이파리 들을 떼어내다 말고 물뿌리개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물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에 닿는 물이 차지 않은 걸 보니 봄이었다.
거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산은 벌써 연둣빛이었다. 푸른 기운이 돈다, 라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숲은 돋아나는 이파리들로 가득 차버렸다. 그래, 봄이었다. 봄이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는 플라스틱 물뿌리개를 든 채로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여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교실 창밖에 피어있던 산목련의 흐드러진 흰빛은 눈이 부셨다. 작고 하얀 손수건 수백 장을 나무에 매달아놓은 듯 나부끼던 꽃이파리. 스물몇 살 시절 봄이 와서 잎들이 피고 꽃이 질 때마다 그 여자는 엘리엇의 시구를 떠올렸다. 사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사람의 손가락은, 그 여자가 아무리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준다 해도 다시는 돋아나지 않는데 그렇게 제 청춘이 가고 있어서, 지금 돌아보니 바로 그때가 청춘이었는데도, 그 여자는 봄이 오면 슬펐던 것 같았다.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늙음이 맨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얼마나 저주인가, 그 저자는 말했다. 신은 실수를 했다. 기어 다니는 벌레였다가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두는 번데기였다가 드디어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인간의 절정도 생의 맨 마지막에 와야 한다고. 인간은 푸르른 청춘을 너무 일찍 겪어버린다고.
그 여자는 눈에 힘을 주고, 이제 창밖에서 꽃처럼 곱게 피어나는 연둣빛 이파리들을 바라보면서 그때 자신이 느꼈던 그 가슴 아릿한 감격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이 멍멍해질 뿐, 작은 파문 하나 일지 않았다. 작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드니까 꽃이 그렇게 좋구나. 내가 이 봄을 몇 번이나 더 맞을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꽃빛이 더 고와. 생각나니? 너 대학 들어가고 내가 처음 니네 학교 앞으로 갔던 거. 그때 니가 벚꽃 핀 나무 아래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는데 여대생이 된 내 딸내미가 왜 그렇게 자랑스럽던지. 나이가 드.니까 말이다, 꽃향기도 다 기억으로 맡는다.
젊은 어머니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후, 생겨난 것이 그녀였다.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가 다섯 살 된 그녀를 데리고 지금 동생의 아버지와 재혼할 때까지 그 여자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의 아버지이자 그 여자의 새아버지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어린 그 여자를 귀여워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미국에서 수입한 구제품 원피스를 사다가 입혀주었다. 동생이 아장아장 걸을 무렵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아마 어머니의 서른세 번째 생일인가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민어를 생선가게 아저씨한테 부탁해놓았다고, 냄비에다 물 올려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민어 매운탕을 하기 위해 냄비에 올려놓은 물이 다 끓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왔다. 집 앞에 사고 났어. 자전거하고 삼륜차하고 부딪쳤는데, 쓰러져 있는 자전거가 아마 이 집 것이지 싶어서. 어머니는 아직 어린 동생을 둘러업고 그 여자의 손을 잡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거기 없었고 자전거만 쓰러져 있었다. 하나는 성이 김이고 하나는 성이 최인 자매는 그래서 각각 결혼할 때까지 성이 박인 어머니와 셋이서 살았다.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 대문 앞에 쳐진 금줄에 매달린 숯조각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와 함께 시장 어귀로 뛰어갔을 때 널브러져 있던 아버지의 검고 투박한 자전거, 명륜동 집 아랫방 툇마루에 놓여 있던 커다란 철쭉 화분, 기억은 빛바랜 사진처럼 몇 컷으로만 정지되어 있을 뿐, 그렇다고 그 여자가 그 삶들을 다 기억하지 못해서 힘겨워한 적은 없었다. 아니, 삶은 기억 때문이 아니라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힘겨웠다. 복잡한 집안의 내력 때문에 시댁에서 결혼을 허락할지 어떨지, 태어날 아이가 발가락과 손가락이 모두 다섯 개일지 어떨지, 이 어려운 시기에 남편이 해고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 삼 년 동안 부어온 주공아파트 청약통장으로 스물일곱 평짜리 아파트를 무사히 장만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 여자는 동생이 두고 간 책을 집어 들었다. 맨날 TV만 켜놓고 있지 말고 당신 책 좀 읽지. 당신은 퍼져 있으면서 애들한테만 책 봐라, 책 봐라 하면 애들이 책을 보겠어? 경멸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남편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재작년인가 재재작년 인가까지는 이렇게 책을 집어 들 때마다 사실 그 여자는 떨었다. 명색이 국문학과 출신이었고, 시를 쓰고 싶다는 그녀를 남편은 사랑했으며 실제로 시댁의 반대에 못 이겨 그녀가 헤어짐을 결심 했을 때, 남편은 깊은 밤 찾아와 시 한 편을 건네고 간 일도 있었다. 촌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가 시를 썼다는 게, 그녀를 위해 경영학을 전공한 그가 시를 썼다는 게 감격스러워서 그 모든 역경을 딛고 결혼을 결심할 만큼의 로맨틱함을 그도 그녀도 가지고 있었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지적한 대로 그 여자는 이제 책을 읽지 않는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버린 지 오랬다. 어떤 때는 며칠씩 신문도 읽지 않았다. 봄이 오는지 가을이 가는지, 비가 오면 고추장 단지를 덮고, 가을이 되면 김장배추를 사들일 생각만으로 일 년을 채우며 살았다. 다만, 남편이 일찍 돌아오지 않는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거실의 불이 꺼졌을 때,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겨우 사물들의 윤곽만 희미한 그 시간에 그 여자는 무언가에 들린 것처럼 긴 머리 풀어 헤치고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세상에 이렇게 이쁜 애들 놔두고 내가, 싶어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두려웠지만, 두려움만큼이나 그녀를 압도하는 감정 이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짜릿한 전율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문득 생각하곤 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다 굳어져버린 것은 아니구나. 아직 살아 있구나 느끼는 것하고 맨발로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가끔씩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남편이 취해 돌아올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검은 스커트 자락 휘날리며 저 광장으로 달려 나가는 자신의 환영이 보이곤 했다. 그럴 때 아파트 광장을 빙 둘러 서 있는 나트륨등의 오렌지빛은 그 여자가 이 집을 나서기만 하면, 그리하여 저 광장에 흰 맨발을 딛는 순간이 오기만 한다면 곧 축포라도 터뜨려줄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 여자는 서둘러 베란다 문을 닫고 들어와 부엌 싱크대 속의 양주잔이며 물잔이며를 모두 꺼내 거품을 많이 낸 수세미로 괜히 설거지를 시작하곤 했고, 아직 물기를 머금고 엎어져 있는 유리잔들이 부엌 불빛에 말갛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책표지를 열자 첫 문장이 나타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베란다에 서서 연둣빛 싱그러운 이파리를 보며 애썼지만 아무 변화도 없던, 그런 가슴에 작은 파문 하나가 퍼져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읽어보았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테라스…… 그러자 ‘카페테라스’라는 이국적인 단어 속에서 환한 실루엣으로 앉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테라스 한켠에는 노란 조명들이 환할 것이고 왕벚나무꽃의 분홍빛이 솜사탕처럼 터져 나올 것이었다. 카페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은 활기차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
지만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그 한구석 일인용 원형탁자에 맨발인 채 앉아 차르르차르르 가슴팍까지 떨어져 내리는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 매만지며 날씬한 글라스에 담긴 찬 맥주를 마실 것이다. 그러면 그 여자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도 좋았다. 아니,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어야 좋을 것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얼마 전 대형 할인점에서 사온 최선형 전화기 속의 여자는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했다. 그 여자는 전화기 속의 여자가 하라는 대로 전화를 받았다. 받으면서 그것이 동생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동생은 이 시간이면 전화를 했다. 언니 난데 놀라지 말아, 우리 남편 여자 생겼대. 어젯밤에 술 먹고 들어왔길래 내가 물으니까 순순히 대답하더라구. 요 몇 달째 이상하게 잠도 못 자고 자꾸 베란다로 나가 담배만 피운다 싶더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바야흐로 사랑에 빠진 거지. 우습지 않아?…… 언니 난데 놀라지 말아,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냈어. 바로 같은 직장의 아가씨래.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래…… 언니 난데 놀라지 말아, 사실은 나, 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 사실은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난 직후부터, 아이를 낳고 나서는 더욱, 사실은 이혼이 하고 싶었던 거야. 그 끔찍한 사실을 내가 이제야 알아 차린 거야…… 언니 난데 놀라지 말아, 나 남편한테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 사실은 용서할 수도 있는데, 마치 가슴에 칼이라도 꽂힌 것처림 길길이 뛰었어. 머릿속으로는 저 남자가 잘못해서 이혼하는 거니까 이 집이랑 아이랑 다 내 거구나, 이 풍경 속에서 귀찮은 저 남자만 빠지고 이제 난 자유구나, 손에 피 하나 안 묻히고 이혼하다니, 좋아서 길길이 뛸 것 같았으면서…… 언니 난데 놀라지 말아, 그 여자랑 만나기로 했어. 내가 전화를 했다니까.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남자였다. 누구세요? 물었지만 그건 그저 이쪽에서 그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그랬을 뿐이었고 그 여자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쪽에서 여보세요, 거기 김진영 씨 댁이지요, 말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책방집 아들이라고 불리던 옛 명륜동의 소꿈친구 경식이였다. 예, 제가 김진영인데요. 나 경식이야. 웬일이야? 그 여자는 물으면서 사실은 웬일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연히 동생과 전철에서 마주쳐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며 처음 전화를 했던 그와 그 여자는 한 달 전쯤 집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그녀가 살고 있는 분당의 거래처에 들른 길이라고 했다. 그와 그녀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오후를 보냈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아니 남편까지 합쳐서 남자와 함께 이토록 오랜 시간을 카페에 앉아 있어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그것부터 생각해보았다. 아니, 제 또래의, 아직 삼십 대 중반의, 저렇게 빳빳한 와이셔츠 깃을 올리고 넥타이 맨 남자와 얼굴을 맞댄 지가 얼마 만인가. 슈퍼 아저씨나 세탁소 아저씨 말고, 아마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젊은 전도사 빼고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그때 그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옆집 아롱 엄마에게 유치원에서 돌아올 작은아이를 부탁한다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해놓고 다시 돌아와 느긋한 포즈로 앉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왜 집 밖에 나가면 젊은 여자를 보고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더 담소를 나누다가 경식이 저녁을 먹자고 하면 한 번 더 아롱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염치 불고하고 이번에는 학교에서 돌아올 큰애까지 맡아달라고 해볼 심산이 아주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애들 있는데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물었을 때는 으음, 우리 아이 오늘 유치원에서 늦게 돌아올 거야, 마침 오늘이 견학이라나 뭐라나,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하며 둘러대었던 그녀였다. 그쪽이야 말로 이제 그만 회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냐. 혹시 너무 들떠 있는 게 그쪽에 들키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문득 당황스러워져서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사실은 나 해고당했어. 명예퇴직 그런 거 알어? 난 괜찮은데 마누라가 하도 심란해해서 아침이면 씩씩하게 넥타이 매고 어디로든 나온다. 실은 여기 토지공사에 있는 친구놈이랑 새로 구상하는 것도 하나 있긴 하고.
날씨가 좋은데 점심이나 같이할까 하고, 그가 머믓거리며 말하자 그 여자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누이 남편이 맹장수술을 한 병원에 오늘은 꼭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퇴원이라니 가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바쁜가 보지, 그가 물었다. 아니야, 오늘은 내가 점심 살게. 그 여자는 지금 실직 중이라던 그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가 웃었다. 누가 사면 어때, 날씨도 좋은데 여기 공원으로 오지 않을래? 꽃들이 많이 피었더라. 벌써 분당에 와 있는 거야? 난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래 천천히 와. 난 시간 많잖아. 그의 웃음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들렸다. 그 여자는 전화를 끊고 화장대까지 5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짧은 머리를 드라이하고 옷장을 뒤져 작년 겨울 백화점 사계절 의류 대처분 때 삼만 원을 주고 산 아이보리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원피스는 구겨져 있었다. 서둘러 다림질판을 펴고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면서 그 여자는 문득 생각했다. 가만,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이래도 되는 건가, 하고.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 여자는 옆집 아롱 엄마에게 열쇠를 맡겨놓으며 둘째가 돌아오는 시간에 문을 좀 열어달라고 부탁하고는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 마침 그곳에 서 있는 택시를 잡아탔다.
공원 한켠의 분식집에서 메밀국수를 먹고 그 여자는 옛 소꿉친구와 함께 캔커피를 손에 든 채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공원에는 풍성해진 햇볕과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들의 웃음소리들까지 꽃으로 피어나나, 착각할 만큼 공원은 화사했다. 저 여자들은 우리 둘을 어떤 사이라고 생각할까, 그 여자는 젊은 엄마들을 옆눈으로 훔쳐보았다. 그 여자는, 모르는 그 엄마들에게는 바람이라도 난 신선한 삼십 대처럼 부이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또 주위를 살피면서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두려웠다. 지난번
그와 함께 오후를 보내고 나서 그 여자는 남편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 며칠 동안 잠깐씩 멍해지곤 했다. 한 번도 꿈꾸어 보지 않았던 어떤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아 본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설거지를 하는 그 여자의 손을 자주 멈추게 해버렸던 것이다. 뭐랄까, 그날 오후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여자는 등에 짊어진 것을 놓아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이 배낭이든 아이든 혹은 가정이든 아니면 이제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게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든. 그 여자에게 그것은 맨발로 아파트 광장을 달려 나가는 것 같은 파격이었다. 삼십 대 중반을 넘기고 사십을 바라보면서 남편 아닌 남자와 바람이 나는 것처럼 쉽고 짜릿한 도피처가 또 있을까.
똑같이 날씨가 좋은데 왜 봄에만 아기들하고 병아리하고 그런 게 더 잘 보이는지 모르겠어. 가을엔 그런 거 잘 안 보이잖아. 그녀가 말하자 그는 감색 양복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걷다가 그러네, 하며 웃었다. 그와 그 여자는 호숫가를 돌아 벤치에 앉았다. 하늘에는 분홍빛 왕벚나무들, 땅에는 진홍빛 철쭉. 쏟아져 내리는 노란 봄볕과 그 진홍빛의 꽃들 때문에 아찔한 현기증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참 좋다. 그가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 봄에 피는 꽃들은 이토록 분홍빛이지? 크 여자는 첫 미팅을 나온 내숭기 많은 여학생처럼 물었다. 춘정에 겨워서 그런가 보지. 경식은 담배를 내뿜으며 말하고는 그 여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분명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여자의 뺨이 붉어졌다. 그 여자는 상기된 표정이 들킬까 봐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눈웃음을 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딱지치기도 하고 삼각형이란 구슬놀이도 하던 그를 떠올려보았지만 한 번도 그의 이런 눈웃음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이 남자가 바라는 게 뭐지, 하는 생각이 그 여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토지공사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라고는 하지만 그가 사는 강북에서 분당까지 와서 그가 바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오기만 하면 나를 불러내어 점심을 먹고 오후시간을 보내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내게는 꿈이 하나 있었어. 회사 때려치우고 말야, 시골 어느 저수지 가에 카페를 하나 짓는 거야. 손님이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을 곳에. 나는 주말이면 그 카페 무대에 서서 트럼펫을 부는 거지. 주중에는 자전거 뒤에다 낚시도구를 싣고 집 근처 저수지에 앉아 낚시나 하고. 개는 삽사리나 그런 걸로 한 다섯 마리 쯤 키우고.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까 마누라가 여보 당신 정 그렇게 힘들면 우리 시골로 가요, 하더라. 나는 웃으면서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했지. 마누라가 다시 묻더군. 당신 예전부터 시골 가서 낚시나 하면서 한적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해요, 우린 아직 젊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러는 거야. 이상하데. 나는 화를 내고 말았고 결국 마누라랑 싸움까지 해버렸어·……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가 힘없이 웃었다. 결국 안 되니까나는 그걸 꿈꾸었던 모양이야……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꿈은 더 절실했던 거야. 막상 그렇게도 살 수 있게 되니까, 난 겁이 난 거야·…‥ 이런 말 남한테 해보는 거 니가 처음이다. 그는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 여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니가 처음이야, 라는 말을 들은 건 그 여자가 제 또래의 넥타이 맨 남자와 마주 앉아 있던 것보다 더 오래된 일이었다. 그 여자도 그도 말없이 호수만 바라보았다.
여긴 집값이 어때? 그가 어색하게 물었다. 모르겠어. 강남보단 싸구 강북보단 비싸구 그런가 봐. 그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왜 거기다 넣어? 응 이따 쓰레기통 있으면 버리려구.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아직도 모범생이구나. 그 여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내가? 아직도 모범생이라면 내가 예전에도 모범생이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가 되물었다. 그러지 않았나? 그 여자는 별말도 아닌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그가 당혹스러워 자신 없이 대꾸했다. 하기는 그가 모범쟁이었는지 아닌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술래잡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부모가 책방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그저 책방집 아들이었다. 그 여자와 그는 한 번도 연인인 적이 없었고, 그녀가 기억하는 한 멀리서 가슴 아파하며 서로를 그려본 적도 없었다. 스무 살 때였던가, 한 번 버스 안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긴 했다. 그는 술에 좀 취한 듯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같은 골목길을 오르며 그 여자가 물었다. 차 한잔 할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 여자는 그날 집에 들어가기 몹시 싫었을 것이다. 그는, 오늘은 안 되겠다, 술 먹고 많이 토했거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서울에서는 드물게 그도 그 여자도 이십몇 년을 명륜동 한동네에 살면서도 마주 앉아 차 한 잔 마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와 그 여자는 서른을 넘어 마흔으로 달려가는 이 나이에 만나 꽃핀 공원을 산책하고 호숫가에 앉아 잃어버린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분당 지나다니면서 신도시라는 건 결국 시멘트의 폭력이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공원에 와서 앉아 있으니까 참 좋다. 그가 말을 돌렸다. 혹시라도 너 예전의 나를 다 기억할 수 있니, 라고 그가 물을까봐 겁이 난 그 여자는 재빨리 대꾸했다. 그래? 우리 집 뒤 불곡산 능선 등산해두 괜찮아. 언제 우리 한번 불곡산에 올라가 볼까? 둘이? 그 여자는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왜 어때서? 그가 웃었다. 신문에 맨날 나잖아. 양복 입고 구두 신고 북한산 오르는 남자들. 난 북한산 대신 불곡산으로 하지 뭐. 텔레비전에 찍히기라도 하면 우리 마누라 또 바가지 긁을 테지만…… 그 여자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다시 침을 삼키고 핸드백 잡은 손을 쥐었다 펐다 했다. 서둘러 다림질을 하고 시누이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작은애가 아프다고, 아파서 오늘은 갈 수가 없을 거라고 거짓말을 해놓고 이리로 뛰어나
오면서 내내 생각한 말을 꺼냈다. 저어기, 저어기 말이야, 우리 이렇게 만나는 거 별로…… 인 것 같아. 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고, 남편은, 남편은 말이야, 보수적인 사람이야. 그냥 보통 한국 남자 있잖아…… 내 말 이해하겠니?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분명 꾸며낸 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진홍빛 춘정에 겨운 웃음도 아니었고 뭘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는 그런 웃음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가 웃는 몇 초의 긴 시간 동안 그 여자는 알아버렸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을, 그것도 더듬거리며 그토록이나 심각하게 했는가를. 야 임마, 소꿉친구랑 밥 두 번 먹었는데 무슨 남편하고 아이들 이야기야? 니가 그렇게 불편하다면 전화 다시 안 할게. 난 그냥, 저번에 봤을 때 니가 답답해하면서 사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리 나오는 김에 가끔 얼굴이나 보려고 했지. 한국 남자이고 보수적이기로 치면 나도 못지않아. 그는 다시 웃었다. 그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만일 마주 앉아 있었더라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생각하느라 우스꽝스러워졌을 것이다. 작은아이가 두 시면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마운 날은 일찍이 없었다. 그 여자는 그의 말에 대꾸도 못한 채 애매하게 웃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계를 보며 자신이 몹시 좋은 엄마이며 그래서 원래 아이의 귀가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공원 입구에서 헤어지면서 그가 악수를 청했다. 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던가, 이 봄날에, 꽃피는 봄날에. 이야기를 해놓고 보니 우스워진 내 말은 그런데 정말 내 진심이긴 한 것일까. 그 여자는 내미는 그의 손을 힘없이 잡았다. 잘살아. 그는 마주 잡은 손을 몇 번 흔들고 돌아섰다. 그의 손의 투박한 감촉이 아직 거두어들이지 않은 그 여자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 여자는 돌아서려다 말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엷은 감색 양복을 입은 그의 어깨 위로 화사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를 불러 세우고 미안해, 내가 너무 촌스러웠지,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돌아서서 버스정류장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희성유치원, 수영교실이라고 쓰인 노란색 버스는 정확히 한 시 오십칠 분에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그 여자는 부엌 뒷베란다에 서서 버스에서 내리는 둘째를 찾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고 뚱뚱한 둘째는 맨 꼴찌로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메지 않고 손에 든 채로 아이는 뒤뚱뒤뚱 걸었다. 며칠 전 아이는 처음으로 혼자서 유치원 버스를 타러 갔다. 지난 초봄 아이가 유치원 2학년이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아이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둘째야, 이제 너는 귀여운반이 아니구 멋진반의 어 린이야. 귀여운반 동생들 말구 멋진반 형님은 혼자 버스를 타러 가야 하는 거야. 아이는 그때까지 혼자서 집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그래서 세 살 땐가 네 살 때까지 그 여자의 등에서 떨어져보지 않은 아이였다. 엄마가 다섯 번만 데려다주면 혼자 갈게. 그래서 그 이후부터 아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를 태워주면서 그 여자는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이제 세 번 남았어, 이제 두 번 남은 거야. 하지만 마지막 날이 되자 오히려 그 여자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겨우 아파트 두어 동을 지나가야 하는 몇십 미터의 거리였지만
아이 혼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드디어 혼자서 등원을 하기로 한 날 아침 아이는 오히려 그 여자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정말 혼자 갈 수 있어? 해볼게 엄마. 그 여자는 부엌 뒷베란다 창을 열고 서서 아파트 광장으로 걸어나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천천히 아파트 정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는 베란다에 서서 아이를 불렀다. 왜? 천천히 걷던 아이가 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 내려와 주면 안 될까, 와서 내 손을 잡고 날 저기까지 좀 데려다주면 안 될까 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어서 가라구, 엄마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구. 그 여자는 손나팔을 하여 말하고는 자신의 조바심이 아이의 두려움과 결탁해 이 모든 것을 그르칠까 봐 팔까지 휘저었다.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결음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사람을 얼마나 서두르게 하는지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처음 혼자 가야 했던 그 길이 둘째의 인생에서는 군대에 가는 일보다 힘 에 겨운 길이었으리라.
엄마 변신했구나. 오랜만에 얼굴에 한 화장에 아직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벗지 않은 그 여자를 보고 아이는 대뜸 내뱉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아이의 입에서는 변신과 합체라는 로봇 만화영화 용어가 떠나지 않았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제가 옷을 갈아입는 것도, 과학도감의 배추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는 것도 역시 변신이었다. 마치 엄마와 제가 껴안는 것과, 개구리 두 마리가 교미하는 것이 모두 똑같이 합체이듯이. 그 여자는 두 팔을 벌려 아이와 합체를 한 다음 물었다. 우리 둘째 오늘 유치원에서 무얼 했지? 오늘 바깥놀이 시간에 평균대라는 걸 했어. 왜 있잖아, 기다란 막대기 위에서 걸어가는 거. 그래 어땠는데? 선생님이 잡아줄 땐 안 무서웠는데 혼자 하려니까 겁났어. 그래서 울었니? 엄마 나 놀이터 가서 놀게. 아이는 대답 대신 유치원 가방을 던져놓고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아이가 내팽개친 유치원 가방을 세워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려다가 그 여자는 버릇처럼 가스레인지에 올려져 있는 냄비를 열어보았다. 냄비에는 아침에 먹다 만 김칫국이 남아 있었다. 그 여자는 보온밥통을 열어 밥을 한 그릇 퍼서 식탁에 앉았다. 데우지도 않은 김칫국을 가져다 놓고 냉장고에서 먹다 만 김치그릇을 꺼내놓은 후, 그 여자는 밥을 먹었다. 메밀국수라는 게 원래 칼로리가 낮아. 누가 무어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경식이 이 광경을 본다면 무어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라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이 광경을 경식이 바라보았다면, 그러자 그 여자는 괜히 용기가 솟았다. 촌스럽기는 했지만, 자신이 한 말이 꼭 틀리지는 않았다는 ㅊㅂ감이 생긴 것이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벨만 울리게 해놓아도 될 것을 남편은 고집을 피우며 이런 소리로 설정해놓았다. 재미있잖아?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이렇게 설정해놓은 건 그인데 이 소리를 매번 들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에 그 여자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짜증이 치밀곤 했다. 어차피 그저 벨만 울린다 해도 그건 전화를 받으라는 말이 아닌가. 전화기 속의 여자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 여자는 몇 번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전화벨 소리를 다르게 설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기계에 대해서는 일종의 경외감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매번 설명서만 만지작거리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남편은 말했다. 기계가 무섭다구? 기계처럼 정직한 건 없어. 이상하면 반드시 어디가 잘못된 거야. 그리고 그건 대개 사람의 실수이고. 기계보다 사람이 피곤하지. 이쪽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저 쪽이 고장 날 확률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꼭 당신처럼 말이야.
전화를 건 것은 동생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계속 전화했는데. 으응, 요 앞에 좀. 뭐 먹어? 밥. 밥을 입속에 넣은 채 우물우물하는 그 여자의 얼버무림을 감지할 여유도 없이 동생은 말을 이었다. 언니 놀라지 말아, 나 그 계집애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야. 그 여자는 입속에 들어 있는 밥을 꿀꺽 삼켰다. 뭐? 그 애 말이야, 우리 남편하고 사랑에 빠졌다는…… 지금이 칠십 년대도 아니고 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니? 가만 놔두면 남자는 다 돌아와. 그 여자는 소리 높여 말했다. 언니 엄마처럼 이야기하네. 그래, 그게 언니 말이든 엄마 말이든 남자 돌아오겠지. 아주 가도 할 수 없는 거고. 그런데 왜 언니는 꼭 남자가 돌아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해? 언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게 합당하고 지당한 일이라구? 갑작스레 동생은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 여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내가 그랬지, 내가 이혼해줄 테니까, 아이도 내가 키울 테니까 결혼하라고. 우리 남편하고 결혼하라고 그랬어. 동생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정말이니? 그랬다니까. 거기까진 좋았지. 그 계집애도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구. 그래서 내가 또 말했어. 내가 살아보니까 진짜 사랑이라는 거 그렇게 자주 오는 게 아니다, 난 사실 우리 남판하고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사이도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다 ―생각해봐. 시댁에서 그렇게 우리 엄마 이야기를 들먹이며 반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우겨가면서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야. 반항한다는 건 결국 의지하는 거니까. 적어도 대상이 있는 거니까―어쨌든 당신이 우리 남편하고 결혼한다면 내가 방해를 하지 않음은 물론, 원한다면 축복을 해줄 수도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도 한 평생인데 좋게 사는 게 좋은 거다, 짐짓 품까지 잡아가면서 딴에는 인생 선배로서 충고 좀 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랬더니 그 계집애가 뭐라는 줄 알아? 자기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차 과장님 애인감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편감으로는 별로일 것 같아요, 그리고 전 결혼 같은 거 당분간은 생각 없어요, 결혼이라는 거 명백하게 여자에게만 불리하게 되어 있는 제도 아니던가요? 이러는 거 있지. 동생은 다시 깔깔 웃었다. 그 여자는 무선전화기를 든 채로 다시 식탁으로 와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기가 막혀. 오는 길에 어떻게 화가 나는지. 아니, 처자식 있는 남자랑 사랑이라는 걸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야? 요즘 애들 무섭다더니 다 그런가? 아무튼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지무지 화가 났다는 거였어. 화가 나잖아, 스물몇 살밖에 안 된 게 살아보지도 않고 결혼이라는 게 어떤지, 우리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니, 나 질투가 났어. 나는 결혼하고 애 낳고 이제서야 깨달은 것을 그 계집애는 똑똑하게 벌써 알아버리다니, 내가 어떻게 화가 안 나겠어? 언니 듣고 있는 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갑자기 동생이 이국어로 말을 하는 먼 타인처럼 느껴졌다. 너 책 두고 갔더라. 그 여자는 말을 돌렸다. 책? 무슨 책? 몰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린가 뭔가…… 으응, 그거 언니 읽어. 난 다 읽었어. 거기 첫 문장 봤어? 나 그 문장 때문에 그 책 샀구 그래서 다 읽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로 시작하는 문장 말이야. 본 거야? 육. 그래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언니 생각을 알고 싶어.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지나고 보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야. 그 여자는 밥맛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무선전화기를 목과 어깨 사이에 낀 채 밥그릇과 국그릇을 개수대로 옮기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걸 언니는 벌써 알고 있었다는 거야?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난 몰랐어, 언니. 사랑하구 결혼하구 애 낳구, 가계부 쓰구, 집 늘리구 그러는 거 나는 그런 게 목숨이라도 결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결혼할 때 시댁에서 반대한다고 우리 남편이랑 도망까지 쳤던 거야. 아이 낳을 때 열 시간이나 진통하면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누가 날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은 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어서 그랬던 거였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니…… 언니, 나는 산다는 게 싸워서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하는 건지 알았어. 이를 악물고 참아서 무언가, 고난 끝에 무언가, 설사 행복이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아도 그래도 소중한 것일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듣고 있어? 언니, 뭐라고 이야기 좀 해봐…… 서영아, 우리 좀 시간을 가지고 이 고비를…… 그 여자는 말했다. 고작 이것뿐인가 싶었지만 달리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으면 좋겠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 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남편하고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를 내 인생에서 다 박박 지우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그런데 언니, 생각해 보니까 지워야 할 건 그것뿐이 아니었던 거야. 엄마도 싫고 성 다른 언니도 싫고 내가 학년이 올라가서 새로 가정환경조사서 내고 새 담임선생님과 마주 앉아 내가 왜 언니와 성이 다른지 매년 같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생각했었어. 고아였음 좋겠다, 차라리 고아였음 좋겠다, 아니면 태어나지 말든가. 개수대에 국그릇과 밥그릇을 놓아둔 여자는 한 손으로는 수화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김치그릇을 든 채 발로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래 언니, 나 그랬어. 내내 그 생각 했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이 모든 걸 하나도 기억하지 않은 채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동생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 여자는 들고 있던 김치그릇을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았다. 동생은 울지 않았다. 만일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면, 그 여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고. 에미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 여고생이었던 동생이 가출한 어느 날이었던가, 거래처에 가져다줄 한복감을 상자에 싸다가 어머니는 말했다. 내 피가 뜨거웠구나, 널 데리고 그냥 혼자 살고 저건 만들지 말아야 했는데, 내 피가 뜨거웠구나.
현관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둘째의 울음소리였다. 멍해 있던 그 여자는 울며 들어오는 둘째를 안았다. 왜 그래? 놀이터에서 누가 때렸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어떤 형아가, 형아가…… 그 여자는 우선 욕실로 아이를 데려가 흙투성이인 아이의 손발을 씻겼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대충 빗기며 그 여자는 다시 물었다. 왜 그래? 형아가 어떻게 했어? 내 바지를 벗겼어. 순간 그 여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내아이만 둘이라서 별로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놀이터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에 대한 성추행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하 수상하지만 설마, 그 여자는 조심스레 아이를 붙들고 다시 물었다. 그러고는 어떻게 했어? 아이는 갓 세수를 끝낸 말간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 곰돌이 팬티를 보고 웃었어! 그 여자의 입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 여자는 둘째를 무릎에 앉혔다. 그래서 넌 그때 뭘 했니? 나 가만히 있었어. 왜 가만히 있었어. 도망치든지 아니면 그 형아 팔을 잡아서 물어뜯든지. 그 여자는 웃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차근차근 말했다. 늘 맞고 들어오는 둘째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한테 이르는 거 말구? 그럼 엄마한테 말하는 건 이미 니가 다 아프고 다 챙피하고 그런 다음이잖아. 니가 먼저 남을 때려서는 안 되지만 누가 널 해코지하면 물어라도 뜯어. 둘째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말야, 이렇게. 그 여자는 아이의 통통한 팔을 들어 입으로 물어뜯는 시늉을 해 보였다. 둘째는 말했다. 그런데 엄마, 내가 물어뜯으면 그러면 걔가 아플 거 아냐? 그 여자는 둘째를 바라보다 그냥 웃었다. 어쨌든 다음부턴 울고 들어오지 말아. 지금은 엄마가 있지만 이담에 엄마도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할래? ……아이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집에서 혼자 놀아, 놀이터엔 그만 가구. 알았어. 나 핑구 볼래. 아이는 제 방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나와 재생기에 넣었다. TV 화면으로 펭귄 가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저 핑구라는 펭귄을 좋아했다. 하긴 그 핑구와 아이는 닮은 데가 있었다. 다리가 짧고 키가 작고 그리고 뒤뚱거리며 걷는 것. 제비새끼처럼 재재거리며 아파트 광장을 뛰어다니는 저 또래 아이들과는 분명 달랐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저 아이가 알게 되면 어쩌나. 아침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면서 그 여자는 잠시 겁이 났다.
시간은 벌써 오후 네 시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어진 햇빛이 베란다 밖에서 주황빛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그 여자는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 신문지를 펴놓고 그걸 다듬었다. 또 콩나물국이야? 어느새 학교에서 돌아온 첫째가 냉장고 문을 열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물었다. 콩나물국이 어때서? 아빠 월급 삼십 펴센트 깎였어. 너희들 공부하려면 콩나물국이라도 감사하게 먹어야 해. 아니야, 나 콩나물국 좋아하잖아. 첫째는 엄마 비위를 건드려 좋을 게 없겠군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엄마, 나 내일 자연시간에 납땜해가는 거 숙제야. 문방구 가서 사 오게 돈 좀 줘. 그 여자는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는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얼마쯤 한대니? 몰라 한 팔천 원쯤 할걸. 그렇게나 비싸? 큰아이는 입만 삐죽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한 장뿐인 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거스름돈 쟁겨 오는 거 잊지 말구. 엄마 나 오는 길에 PC 잡지 한 권만 빌리면 안 될까? 안 돼. 다른 집 애들은 다 사는데. 주말에 아빠한테 말해보자. 아빤 언제나 안 된다고 하는걸. 그거야 너 지난번 사회시험 백 점 맞으면 사주기로 한 건데 니가 팔십 점 맞아 왔으니까 그렇지. 알았어. 큰아이는 시험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풀이 죽었다. 차 조심하구. 알았다니까! 큰아이는 롤러브레이드를 신고 문구점으로 달려 나갔다. 작은아이는 어느새 비디오를 끄고 일찍 시작하는 TV 만화를 틀고는 주제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애국가를 부를 때처럼 경건했다. 그 여자는 아이들 때문에 이미 외워버린 만화 주제가를 가만히 따라 불렀다. 갑자기 닥쳐오는 범죄의 수상한 검은 그림자. 달빛 가득한 이 도시를 누군가 노리고 있어.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내가 가진 모든 용기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은빛 날개에 희망을 태우고 어두운 밤하늘을 달려 나간다. 단 한 번 나의 인생이 불타 없어진다 해도. 겟 어웨이, 누구도 날 막을 수는 없어…… 문구점에서 돌아온 큰아이는 방에 들어가 조립을 시작했다. 엄마, 이거 너무 어려워. 엄마가 좀 도와줘. 니 숙젠데 니가 해야지, 엄마가 하면 엄마 숙제잖아…… 그 여자가 말을 자르자 큰아이는 무슨 말인가 할 듯 망설이다가 방으로 돌아가더니 잠시 후 다시 그 여자 앞에 섰다. 엄마, 사실은 망쳤어. 선생님이 이걸로 자연 점수 매긴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지? 뭐라구? 사 온 지 얼마나 됐다구 그새 그걸 망쳐? 그 여자는 콩나물 깍지가 묻은 손을 바지 옆 선에 비비며 큰아이의 방으로 갔다. 큰아이의 방은 온통 납 연기투성이였다. 그 여자는 코를 감싸 쥐고 아이 방의 창문을 열었다. 엄마가 뭐랬어? 뭐든지 늘 찬찬히 조심해서 하라고 그랬잖아…… 고개를 숙이는 큰아이의 관자놀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게다가 문 열고 해야지 납 연기가 사람한테 얼마나 해로운데. 아이의 땀을 보자 그 여자는 큰애가 안쓰러워져서 부드럽게 말했다. 어디 줘봐. 큰아이는 제가 조립하던 걸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응? 깜빡이. 이렇게 조립하고 이렇게 납땜을 해야 하는데·…‥ 하라는 대보 했는데 안 돼. 엄마랑 같이 해보자. 그 여자는 아이가 내미는 설명서를 들여다보았다. 간단하게 몇 줄의 설명문만 씌어 있었고, 도면은 지나치게 단순해서 조잡하기까지 했다. 전화벨을 다른 음으로 설정하는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여자가 그 도면을 보아두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는 말했다. 설명서가 뭐 이래? 알아서 하라는 식이잖아. 어릴 때 로봇조립하는 데 선수였던 니가 못하면 이 설명서가 잘못된 거야. 큰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도 않구. 난 이게 처음인데. 그나저나 아이들한테 이렇게 거지 같은 걸 팔천 원씩 이나 받구 팔아먹다니. 그 여자는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큰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는 몹시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뭘 이거 하나 가지구 사내녀석이 마음 상하구 그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여자는 도면을 방바닥에 다시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망쳐가지고 가면 그러면 빵점이니? 몰라, 그렇겠지. 하나 더 사서 엄마랑 만들어볼까? 여자가 말하자 큰아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 돈 없잖아. 아빠 월급 삼십 퍼센트 깎였구. 아이의 말에는 반항기는 없었다. 괜찮아, 엄마가 돈, 하다가 그 여자는 아까 지갑이 비어 있던 것을 기억했다. 엄마가 은행 가서 돈 찾아서 사가지고 올게. 어느 문방구에서 사면 되지? 주공문방구.
그 여자는 콩나물 다듬던 것을 밀어두고 집을 나섰다. 봄 저녁이었다. 아파트 광장에는 벚꽃이 팔랑거리며 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집 앞 상가에 있는 현금자동지급기에 가서 삼만 원을 뽑았다. 월급날까지는 아직 열흘이나 남아 있는데 잔액은 달랑거렸다. 다음 주에 큰애 영어학원비도 주어야 할 텐데. 전자 깜빡이 조립 세트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가 꽃 지는 벚나무 아래로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의 축구공이 광장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고, 상가 한구석 전파사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 언제였던가, 아마 큰애 두 돌 때쯤이었던가, 시누이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겨울 밤길에 그 여자는 이 음악을 들은 일이 있었다. 동숭동 대학로 근처에 있는 큰 레코드점 앞길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와 남편은 모처럼 시내에 나온 길이라, 이미 잠든 아이를 업고 카페에 가서 앉았다. 간간이 흩뿌리던 눈발이 제법 거세지고 있어서 그 여자와 남편은 집에 갈 걱정도 잊고 로맨틱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마침 비어 있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은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그 여자가 무심히 내다본 창밖 거리, 눈 내리는 신호등 앞으로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다리를 절룩이는 키 작은 여자였다. 신호등이 바뀌었지만 길이 미끄러워서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건너지 못했다. 그사이 신호등은 빨간! 불로 바뀌어버렸고, 다리를 절룩이는 키 작은 여자 혼자서 차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조급한 차들이 연신 클랙슨을 울려댔다. 그때 차도 한가운데 혼자 서 있던, 다리를 절룩이는 키 작은 여자에게 저 음악은 어떻게 들렸을까. 다리를 절룩이던 그 여자가 그 후에 차도를 건넜는지 어쨌는지는 이제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콩나물을 다듬고 아이들과 싸우고 빨래를 비비다가 그 여자는 그날 보았던 다리를 절룩이는 여자 생각을 했다. 혼자서 눈 내리는 차도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 바이올린 선율은 여전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의 주제가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눈 내리던 날의 기억을 지우면서 벚꽃이 지는 아파트 광장을 검은 비닐 슬리퍼를 끌며 급히 걸었다. 그 여자는 이제 안다. 오늘의 날씨와 바람의 강도 그리고 통장에 남은 잔고가 같은 음악을 얼마나 다르게 들리게 하는가를. 어느새 나트륨등이 노랗게 피어나고 그 아래로 할랑할랑 벚꽃이 지고 있는, 가끔 그 여자로 하여금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던 그 광장, 광장 또한 마음의 조명을 받아 어떻게 다른 빛깔로 변해가는가를.
돌아오니 큰아이 방문 앞에서 둘째가 울고 있다. 왜 그래? 형아가 때렸어. 큰애야, 이리 나와 봐. 너 왜 동생을 때리고 그러니 응? 큰아이는 입을 삐죽이며 그 여자 앞에 섰다. 왜 때렸어? 재가 자꾸만 내 방에 들어와서 납땜해놓은 걸 만지려고 하잖아, 가뜩이나 신경질 나 죽겠는데. 그런다고 때리면 어떻게 해, 말로 하지. 이번에는 큰애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자꾸 만지려고 하잖아. 엄마 나간 담에 어떻게든 내가 다시 만들어보려는데, 그런데 재가 자꾸 방해하니까…… 됐다. 둘 다 손 씻어, 밥 먹게. 엄마, 아까 나는 손 씻었는데? 둘째가 말했다. 그럼 너는 됐구, 큰애 너는 손 씻어. 납은 위험한 거니까 비누질 두 번 해서 씻어, 또 대충 씻지 말구, 알았지? 알았어. 그 여자는 멸칫국물 우려놓은 것에 콩나물을 넣고 국을 끓이면서 지난번 사다놓은 자반고등어를 구웠다. 아이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나란히 앉아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 아빠는 또 늦어? 그런가 봐. 왜 맨날 늦어? 바쁘시니까 그렇지. 아빠 얼굴 본 지도 오래됐어. 아빠는 왜 맨날 밤에만 바뼈? 작은아이도 끼어들었다. 낮에도 바쁘고 밤에도 바쁘셔, 아빠는. 그래서 일요일에도 나가는 거야? 작은아이가 다시 물었다. 응. 그런데 왜 월급은 깎여? 큰아이가 묻는다. 밥 먹자. 그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소파에는 합체되지 못한 로봇들이 뒹굴고 있었다. 부러진 날개와 홀로 된 다리와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굴들. 그 여자는 그것들을 거두어 작은아이의 방에 가져다 놓고 거실의 불을 껐다. 작은아이는 아무리 덮어주어도 또 이불을 차 내던지고 큰애는 큰애대로 제 방에서 창문까지 열어놓고 잠들어 있었다. 그 여자는 아이들의 방문을 닫아주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은 열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허리께에 통증이 느껴졌다. 생리날은 아직 멀었는데. 그 여자는 희미한 시야 속에서 달력을 바라보며 두 주먹으로 등허리를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목 한가운데가 따끔따끔하기도 했다. 아마도 몸살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지어둔 약이 있을 텐데. 그 여자는 부엌 싱크대 서랍을 뒤졌다. 저기요, 먹고두 졸리지 않는 약을 좀 지어주세요. 약을 지으러 갈 때마다 동네 약사는 웃었다. 그런 약은 없어요. 푹 자고 좀 쉬라고 몸이 신호를 보내는데 주무셔야죠. 그때,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화 왔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그 여자는 수화기를 들었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이미 많이 취한 듯했다. 여보야, 사랑하는 여보야, 남편의 목소리에 술기운이 많이 느껴 졌다. 당신 술 많이 마셨어? 아니, 쬐끔. 그 여자는 덜컹이는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덥더니 밤이 되자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창밖에 부는 봄바람 소리가 남편이 들고 있을 PCS폰을 거쳐 그 여자의 귓가를 윙윙거렸다. 당신 지금 어딘데? 회사 앞이야. 직원들하고 한잔 하구 있어. 애들은 자? 응. 나 술 쬐에끔만 더 마시다 들어갈게. 알았어,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여보야! 응. 나, 당신, 애들하고 힘든 거 알아. 당신은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인데…… 왜 그런 소리 하구 그래? 당신 택시 값은 있어? 택시 값? 내가 왜 택시를 타? 전철 타야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택시를 타. 남편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전철 파업 중이야. 그래? 그럼 버스 타야지. 여보야, 기다려, 자지 말고 나 갈 때까지 기다려, 알았지? 알았어. 남편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남편이 메마른 목소리로 전화를 했을 때 말고, 이렇게 사랑하는 여보야를 들먹일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그 여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십삼 년의 결혼생활 동안, 사랑도 식고 싸움도 줄고 잠자리도 시들해지면서 남은 건 그런 거였다. 그가 메마른 소리로 전화를 하면 별일 없는 거구나. 그가 집에 들어와 베란다 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면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그가 부엌을 치우는 그 여자의 등을 가만히 껴안으며 여보, 우리 오랜만에 술 한잔 할까, 물으면 그는 지금 외롭구나, 그런 것. 지난겨울 남편의 입사 동기가 퇴직을 당했을 때 그는 밤 한 시쯤 전화를 걸어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당신 지금 어디야? 그 여자가 묻자 그는 말했다. 집 앞이야. 집 앞 어디? 몰라, 그냥 집 앞이야. 수화기를 들고 내려다보니 아파트 광장 한켠에서 PCS폰을 든 채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여보, 우리 집 올려다봐. 내 모습 보여? 나 여기 부엌 창에. 그녀가 말하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빙그레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들어와.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가 쭈그리고 앉은 채 웃는 것을 보자 그 여자는 목이 메어서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래, 들어가야지. 그런데 여보야, 왜 이렇게 힘이 들지? 여기까지 와놓고 우리 집에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이 밤에도 분명 그의 동료 누군가가 회사를 떠났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을 것이다. 큰아버지 산소의 비석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거나, 외삼촌 회갑이라거나 그래서 그가 몰래 가불을 해서 돈을 부쳤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동생의 남편처럼 그에게도 여자가 생겼는지 모른다. 아니, 그것이 아니면 그도 모처럼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털어놓으려고 만난 옛 여자 친구에게 이런 만남은 나쁜 거야 소리를 듣고 황망해졌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꾹꾹 눌렀다. 수화기 저쪽에서 꽉 잠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울고 있었니? 아니. 동생은 낮은 목소리였다. 그럼 술 마셨니? 조금. 애기는? 자. 제부*는? 아직…… 괜찮니?…… 그냥 그래. ……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아까 니 전화 끊고 생각했는데, 그래 우리 그렇게 살았어. 너 힘들었던 거 알아. 하지만 엄마도 힘들었다는 생각은 왜 못하니? 이제 너 애 생각해야지. 또 성 다른 동생 만들어줄래?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나보고 결혼을 또 하라구? 니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인데 그럼 혼자 살아? 언니는 소대장 좋다구 군대 또 가우? 동생은 천연스레 대꾸하며 깔깔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싶었지만 그 여자도 하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동생이 필름을 잃어버리고 속상했을 때처럼, 다 지난 일인데 생각해봤자 내 속만 상하지, 할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동생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엄마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 여자는 자줏빛 전화기의 번호판 틈새를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렀다. 그냥 앉아 있는데 자꾸 엄마 생각이 나더라구. 왜 있잖아, 엄마 폐암 걸린 거 우리한테도 숨기고 있었던 거. 의사한테 선고받고 나오면서 엄만 무슨 생각 했을까 하고. 아니 그전에 동대문 엄마 한복가게 불났을 때 그때 엄마가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으면서 우리한테는 걱정 없다고 큰소리치던 거, 그런 거 생각하고 있었어.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 곡기* 끊으셨잖아, 자식들한테 지저분한 뒤처리 시키지 않는다고. 그때 언니랑 나랑 식사 좀 하시라고 울고불고 매달렸을 때, 그때 난 울면서도 생각했었지. 이렇게 독한 여자니까, 이렇게 독한 여자라서 끝까지 우리 두 자매를 힘들게 하는구나. 속상했었어. 난 그때 엄마가 어떨까는 하나도 생각 안 하고, 병실에서도 엄마한테 신경질 부리고…… 울지 마. 그건 다 지난 일이야. 그 여자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만 생각해라. 나도 가끔 생각하지. 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남편이랑 살기 싫을 때, 아이들 때문에 울적할 때, 친구한테 전화해서 돈 꾸러 갈 때 원망할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너도 서른이 넘었고 제부랑 이혼을 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그 사람의 외도 때문이든 아니든 이젠 너의 문제야…… 넌 이제 열일곱 살이 아니구, 그러니 엄마 때문에 속상해서 가출할 수도 없는 거야. 얻니 말, 이해하겠니? 멀리, 수화기 멀리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애가 울어. 깼나 봐. 우유 먹이고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 여자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아픈 허리의 통증이 조금씩 더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거리던 목의 통증도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걸어가 약봉지를 꺼냈다. 멀리 바람 부는 광장이 내려다보였다. 차들이 들어서고 차들이 나가는 아파트 광장. 벚꽃이 지고 나면 이파리 무성해지고 꽃 진 자리에는 작고 빨간 열매가 맺힐 것이다. 그 여자는 광장을 가로질러 맨발로 뛰쳐나가는 여자의 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내일도 특별한 날은 아닐 것이다. 그 여자는 아마 자명종도 없이 일곱 시쯤이면 잠이 깰 것이고 오늘 먹던 콩나물국을 데워 내일 아침을 준비할 것이다. 남편과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차례로 일어나 회사로 학교로 유치원으로 떠날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보던 TV에는 텔레토비 네 마리가 손을 흔들며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할 것이고, 그 여자는 또 청소기를 돌릴 것이고, 그리고 내일도 몇 통의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만큼 되는 내일을 위해서라도 약을 먹고 따뜻하게 잠들어야 했다. 핸드백 속에 판피린을 가득 넣고 다니던 어머니. 엄마 또 아픈 거야? 어린 그
녀가 물으면 어머니는 대답했었다. 아프긴, 너희들 놔두고 엄마는 아프지도 못해. 그 여자는 동생이 두고 간 책을 들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옛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약 기운 탓일까, 여린 스탠드 불빛에도 눈이 부셨다. 그래서 그 여자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고독한 영혼의 발걸음을 더늠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마 동생의 전화가 곧 걸려올 텐데. 그 여자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 애를 위로해주어야 할 텐데, 난 그 애에게 남은 유일한 피붙이힌데. 그 여자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 그도 아니면 택시를 타고 온 남편이 택시비를 가지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오라는 그런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한 남편은 곧잘 그러곤 했으니까. 칩 앞에 와서 전화를 했는데, 택시비도 없이 택시를 타고 와서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러니 잠들지 말아야지, 아주 잠들지는 말아야지, 그러면서 그녀는 곧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21 세기문학』 6호(1999년 여름);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창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