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을 시작한다. 마라톤같이 긴 여정을 가고 있다.
성경의 전 본문을 읽으면서 묵상까지 기록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목장 식구들과 함께 하는데
힘겨우면서도 각자가 각자의 모습으로 통독을 이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
특히나 묵상하는 모습이 다양한 게 나에게는 큰 감동을 준다.
그런 다양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다양성이 가장 큰 감동이고
다음이 분명 쉽지 않을텐데 아직까지 한 명도 낙오 없이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내 아내가 가장 뒤에 처져서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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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을 들어가기 전,
메시지 성경의 서문이 구구절절 인상적이다.
마지막 한 부분만 발췌.
‘열왕기서를 읽는 유익은 실로 엄청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 있고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고 생각했던 억측이
무너지면서, 그분의 주권을 한층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게 된다.
온갖 유토피아적 계획이나 망상들의 현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에 따라, 아무리 문제 많고 죄 많은 지도자들(왕들)이 우리 사회와
교회를 농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무효화될
수는 없으며, 그 어떤 현실과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은밀히) 행사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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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요압의 행적에 눈을 돌리게 된다.
너무나 충성된 장군이었고
그의 공로와 업적도 컸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의 과실은 왕인 다윗의 의도를 보이지 않게
그러나 정면으로 거스른 몇 가지 사건에 있다.
아브넬과 아마사를 살해한 것이 명백히 그런 사건이었지만
압살롬을 죽일 때도 다소 그런 낌새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결정적으로
다윗의 뜻과 관계 없이 자기 판단으로
세상의 힘에 편승하여 아도나이를 후계자로 세우는데 함께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과 과, 선과 악, 순종과 불순종이 교차한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의 판단 기준은
잘못함에 대한 회개, 돌이킴이 있었는가인 것 같다.
그것이 없다면 나에 대한 마지막 결정은 결국 X를 피할 수 없다.
많은 공로가 있었지만 요압은 자기 욕심과 자기 중심을 버리지 않았고
그 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내가 조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부분이 떠오른다.
2.
다윗이 대체로 선량하고 화합을 강조한 왕이었는데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인계사항, 지령을 내리는 모습은 냉혹하다.
요압을 반드시 죽이고, 시므이를 철저히 경계하라고 한다.
이 일을 두고 지금의 신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윗이 정적 제거라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한 것으로 여기는 이도 있고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불가피성 70%, 정치적 인식 30% 정도이다.
그들은 분명이 중벌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명백한 과실이 있다.
처벌되지 않은 벌일 뿐이다.
다윗 생전에는 자신이 핸들링하는 것이므로 관리 가능했지만
다른 이가 왕 위에 오르면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지연된 형을 집행하는 의미로,
그러니까 없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느낌으로 그렇게 조처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실제로 요압과 시므이는 솔로몬 휘하에서도
그 본성을 버리지 못하는 행동을 결국 비춤으로써
죽임을 당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시므이 같은 경우, 지정된 지역을 벗어나지 마라고 했는데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에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왕을 존중하지 않고
행동할 가능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조치가 당위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조치하지 않고, 죽기 직전에 그런 지시를 했다는 것에는
다윗에게 정치적인 효과가 비춰져서 느낌이 깔끔하지는 않다.
왠지 어떤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왕국 안에서 하는 일들은 언제나 찜찜함, 어둔 그림자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본질적으로 오직 하나의 왕이신 하나님,
그분을 무시하고 인간의 왕을 추구한
사람들이 선택이 그 일의 발단이다.
3.
3장에는 유명한 ‘진짜 엄마’ 판결이 등장한다.
이 일화를 볼 때마다 늘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아이는 한 명, 엄마는 두 명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진짜이고, 다른 한 명은 가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은 계속된다.
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마디씩 거들게 된다.
구경꾼이 많아질수록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어떤 이는 A가 진짜라 하고,
어떤 이는 B가 진짜라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진정성 없는 선택을 하고,
어떤 이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말을 보탠다.
또 어떤 이는
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상황 자체를 혐오하여
“나는 상관없다”며 거리를 둔다.
그런데 만약
이 힘들고 지리한 싸움이 끝내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고,
두 엄마는 여전히 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누구에게 좋은 결과일까.
진짜 엄마에게는 계속되는 고통이고,
아이를 빼앗지 않은 가짜 엄마에게는
버티면 되는 과정이자 결과가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갖은 오해와 누명,
진영 논리나 자기 이익을 취한다는 의심까지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진짜 엄마를 밝히기 위해 애쓴다면
그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 것이다.
비록 그 과정 속에서
이미 갈기갈기 찢기고 상처 입어
겉으로는 전혀 거룩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의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은
그를 진정 거룩한 사람이라고 여기실 것이다.
반대로,
특히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혼란함과 더러운 현장을 기피하며
자신의 순백함을 유지하는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더럽혀지지 않은 것일 뿐,
그의 마음까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