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왕봉
흰 구름이 산골짜기 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뜻한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 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 했다.' 천왕봉 성모사에서 1박을 하던 김일손은 밤중에 날이 개이자 밖으로 나와 그 감흥을 읊은 것이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 해발 1,915m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 보라.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 저멀리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기 (瑞氣)가 어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잠깐, 동쪽 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면서 휘황찬란한 오색 구름 속에서 진홍빛 거대한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부챗살 같이 뻗치며 불쑥 솟는다. 이 장엄한 일출의 모습에는 어떤 경탄사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따름이다' 천왕봉 해돋이 는 지리산 10경 가운데서도 제1경이다. 이 일출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삼대(三代)에 걸쳐 적선을 헤야 된다는 속설도 있다. 아무래도 까마득히 땅을 누르고 하늘에 닿을 듯이 우뚝 솟은 천왕봉은 거대한 바윗덩어리들로 이루어졌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짙은 구름과 안개에 싸이고 비바람, 또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때문에 이른 새벽 천왕봉에 올랐다고 하여 누구나 일출의 황홀경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차례나 거푸 일출을 보러 갔지만 끝내 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km 떨어진 장터목 산장이 법계사에서 앞날 저녁에 일단 여장을 풀었다가 새벽 3시, 또는 4시에 랜턴을 밝혀 들고 정상으로 출발해야 한다. 아무리 더운 여름철에도 해 돋기 전의 천왕봉은 얼음처럼 차다. 운무가 잔뜩 싸고 있거나 강풍이라도 몰아치면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고도 견뎌내기 어렵다.
천왕봉은 거대한 암괴(岩塊)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듯이 외로이 서 있다. 이 암괴를 옛날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뜻으로 천주(天柱)라고 불렀는지, 천왕봉 서쪽 암벽에는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 천왕봉에는 지난 82년 진주의 산악인들이 두 번째로 세운 오석 표지석이 있었는데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현재의 표지석은 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규호씨와 민정당 실력자 였던 권익현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웠다. 높이 1.5의 자연석을 옮겨 와 세운 이 표지 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1,915m'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을 새겨 놓았다.
표지석을 세우는 날 기자는 우연의 일치로 천왕봉에 열렸는데 경남도내 공무원들이 대거 동원되어 천왕봉 일대의 쓰레기 수거작업을 했고, 도지사등 일부인사는 헬기로 천왕봉에 도착했다. 그날은 마침 휴일이어서 일반 등산객들도 많이 몰려 들었는데 천왕봉 일시에 많은 인파로 뒤덮은 것으로는 아마도 최고기록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천왕봉에선 일출을 천하 제일로 치지만 아침 운해(雲海)가 하계를 뒤덮고 있을 때의 경관 또한 선경중의 선경이다. 마을도 길도 구름바다에 잠겨 있고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만 섬처럼 떠 있는 것이다. 노고운해(老姑雲海)가 좋다지만 천왕봉에 비견될 수는 결코 없다. 智異의 천왕봉은 언제 찾아도 웅장한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어머니 가슴처럼 넉넉하고 아늑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짙은 운무에 돌풍이 몰아칠 때면 속인들의 분탕질에 분노하듯 준엄함을 보여준다. 천왕봉은 또한 구름바다 속을 헤치고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하면 화려한 석양 낙조를 연출해 삶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지리의 주봉은 계절마다 준비해 둔 멋진 옷을 갈아입는 듯 을해년 정월의 풍광은 쪽빛 하늘에 수놓은 듯 피어난 영화가 마치 산호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영국의 경건함을 보여주고 있다. 해발 1915m, 지리영봉의 제1봉인 천왕봉,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찾는 이를 알도록 한다.거대한 바위를 예로부터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를 풀이해 천주라 불렀음인지 서쪽 암벽에 "천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남명선생이 일찍이 "萬古天王峰 天嗚猶不嗚"이라며 "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로 지리영봉의 장엄함을 찬탄했듯 그 위용은 아직도 변함없다. 천왕봉은 반야봉과 노고단등 1백10여개의 우뚝 솟은 준봉을 거느리고 그 아래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연하선경에 울창한 원시림과 골골 마다 용솟음치듯 흐르는 물보라 등 태고의 숨결을 발아래 숨겨둔채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루는 천왕봉은 함양 방면으로 칠선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 내며 산청 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세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한데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인의 젖줄이 된다.
운무에 휩싸인채 말없이 억겁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천왕봉은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터전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천왕정상에는 현재 82년여를 경남도가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있는데 전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이 표기돼 있다. 그전에는 진주 산악인들이 남명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를 새겨 표지석으로 세워 두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이곳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겨져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성스러운 모습을 하며 인간을 자연으로 부르는 천왕봉은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들로 이뤄져 있으면서도 큰 바위 틈새에서 샘물을 빚어내고 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주고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가다 보면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이 샘물은 천왕샘으로 불리고 있는데 명산을 찾는 등반객들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다. 대대적인 자연보전 활동에 힘입어 천왕봉 주변의 쓰레기가 다소 줄어들긴 했으나 천왕샘 주변엔 가끔씩 수북히 쌓인 쓰레기가 눈에 띄고 있는 데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세운 천왕샘 안내간판 뒷면에는 어지럽게 적힌 낙서들로 뒤덮여 있어 안타깝게 하고 있다.
5백년전 우리네 선인들이 대자연을 음미하여 풍류를 노래하고 호연지기를 키웠던 지리산 산행기를 한번 탐독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천왕봉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기라고 하듯 뭇인간들을 보내지를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은 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 이에게는 천지개벽을 연상케하는 일출광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이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깍아지른듯한 날카로운 비탈길과 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길 등 두 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 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개천문은 법계사를 거쳐 정상으로 향하다 보면 나타나는데 원래 좌우로 두개의 바위기둥이 서 있어 위용을 자랑했는데 한족은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 하늘을 여는 문이라해 개천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개천문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늦은 가을이나 초겨울에 중산리∼법계사∼천왕봉 코스를 따라 오르다 보면 가끔씩 개천문을 기점으로해 정상쪽에는 눈이 내리는데 비해 아래로는 비가 내리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으며 간혹 설화가 이 문을 경계로 해 활짝 핀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어 천왕봉의 관문임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도 있다. 개천문은 그러나 통천문에 비해 위엄은 부족하다. 통천문은 노고단쪽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마지막 관문으로 "하늘을 오르는 문"다운 위엄을 갖고 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풍경화 같은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 보면 눈앞을 가로막은 문이 바로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그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등반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통천문의 위용은 시인 고은의 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신선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할 정도이니 우리 인간들은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왕봉은 이처럼 두 관문을 두고 있을 정도로 위엄을 갖추고 있으나 이들 두 관문의 역할이 있기에 천왕봉은 더욱 신비함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본다. 천왕봉 주변에는 이들 관문과 더불어 성모사, 법계사, 향적사, 천불암 등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이육은 "유 지리산록"에서 천왕봉에서 동으로 내려가면 천불암,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어 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으며 이름은 암법주굴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내려와 살천에 이르러 합쳐서 하나가 되어...... 로 적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기록과는 달리 현재는 법계사의 3층석탑만이 모든 것을 아는 듯 묵묵히 남아 있다. 선인들의 지리산행기를 따라 옛것을 되새겨 발굴해 봄직도 하다
피아골
피아골은 지리산의 관문인 노고단의 등너머서 섬진강으로 행하는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깊이 빠져나간 큰 계곡이다. 한국전쟁 직후 피아골이란 영화작품이 나왔던 탓으로 흔히들 한국전쟁때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피를 많이 흘려 피아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불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름이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옛날에 속세를 버리고 한적한 이곳 선경(仙境)을 찾은 선객(仙客)들이 이곳에 오곡중의 하나인 피(피)를 많이 가꾸었던 연고로 자연히 피밭골(피田谷)이라 부르게 된 것이 그후 점차 그 발음이 피아골로 전화된 것이라 한다.
뱀사골 대피소 뱀사골
뱀사골이란 이름의 유래는 뱀사골 초입에 있는 석실 건너편에 배암사(背岩寺)란 사찰이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배암사골'이란 이름이 변하여 생겼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배암사 역시 정유재란 때 불타 버리고 없는데,이사찰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아 뱀이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뱀사골은 용이나 뱀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명소가 많은곳으로 유명하다. 오룡대는 용이 머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곳이며 탁용소는 큰뱀이 탈피하여 용으로 변신하는 장소, 또 뱀소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던곳을 뜻한다.이밖에도 병모양의 병소,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병풍소,산신제를 올리던 곳이라는 제승대,소금장수가 소금가마니를 물속에 빠뜨렸다는 간장소,뱀사골의 상류 일대를 지칭하는 들돌골등이 유명하다.
장터목 대피소
제석봉의 고사목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장터목고개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 제석봉,제석봉 정상은 넓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들이 원시림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데 자유당 말기에 파렴치한 인간 송충이들의 무자비한 도벌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그토록 웅장했던 수림은 사라지고 황량한 초원으로 변하여 옛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제석봉을 넘어서 고색창연한 고사목의 앙상한 선골(仙骨)들이 암벽 기슭에 위태로이 나열하고 있는 고산지대의 특이한 선경을 감상하며 가파른 몇 개의 봉우리를 숨가쁘게 넘고 넘으면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通天門)에 이른다. 동굴 입구에 고색창연한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大刻字)가 암굴 동문의 신비와 위엄을 더해주고 있는데 옛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
칠선봉
칠선봉(七仙峰:1,576m) 칠선봉은 작은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아름다운 선경을 이루니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서 노는 형상 같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비경의 암봉들을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면 더욱 아름답고 고요한 운치를 돋구어 준다.
세석고원의 최고봉인 촛대봉에서 서남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지는 광활한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원으로서 그 주위가 12km나 된다고 하며, 상,중,하로 식물분포가 구분되어있다. 상층은 황량한 초원지대로서 지보초,좁쌀풀,산새풀 등 여러 종류의 초생(草生) 종류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층은 철쭉이 군락하는 관목지대이며, 하층은 구상나무와 물참나무 즉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루고 있어 등고선별 식물생태의 자연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선비샘
덕평봉을 등지고 남쪽 상덕평 능선에 샘터가 있으니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데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 외로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옛날 덕평골 아랫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에 쪼달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박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데다 인상마저 못 생겨서 그 인품이 몹시 초라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노인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사람들에게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유언을 하되,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효성스런 아들들은 훗일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꼭 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고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되어 노인은 생전에 그리고 한이 되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속에서 받으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후일 이 동네 사람들이 이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해주기 위한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벽소령 대피소 벽소령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km에 달하는 지리산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결하는 애환 어린 산령으로 유명하거니와 지금은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부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도로이다.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에 높고 푸른 산능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부른 산능들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우르는 달빛이 너무 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벽소령의 달은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이다.
토끼봉 정상부근 토끼봉
토끼봉은 정상이 믿믿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매우 우아할 뿐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 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花開)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樹海)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알맞은 고봉(高峰)이다. 정상 초원에 지보초(식용산채류)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연하천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연하천(烟霞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연하천은 언제나 수림속의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풀향기, 꽃향기가 그윽한 지대이며 여기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약 2km 지점의 삼각고지에 이른다. 삼각고지는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서 좌우로 탁트인 백무동과 화개골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어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며, 이곳에서 좌측으로 북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영원재와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내려갈 수 있다. 삼각고지에서 다시 종주 코스를 따라 능선길로 내려가다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목 왼족 능선위에 형제 바위라 불리는 10여m 높이의 우뚝솟은 큰 선 바위(立石)를 보게 되는데 언뜻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石像)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석상임이 분명하다. 이 형제 바위에 얽힌 전설은 , 옛날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하고 있을 때 산의 요정 지리산녀(地異山女)의 간곡한 유혹을 받았으나 형제가 다 같이 이를 물리치고 도통성불하고,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형제가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서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었다고 한다
반야봉
반야봉(般若峰)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의 제2봉이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봉우리이다. 지리산 어느 곳을 가던 오롯이 솟아 있는 두 봉우리를 볼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대개 여인의 엉덩이와 흡사하다는데 공감한다. 주봉(1,732m)과 중봉이 절묘하게 빚어낸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답게 노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많이 한다. 그 누가 보아도 두 봉우리의 정다운 모습을 보면 금방 지리산 사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반야봉은 또한 신비로운 낙조(落照)의 장관을 연출해 내는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저편 너머로 숨어들 무렵이면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지리산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지를 끝없이 되뇌여도 반야봉의 낙조는 모자람이 없다. 화려한 불꽃잔치와 더불어 반야봉은 운해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된다. 늘 발아래 운해를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반야봉의 장관은 비경 그것이다.태산준령들 사이 사이에 걸려있는 지리산의 운해는 아마도 주봉인 천왕봉과 반야봉에 얽힌 마고할미와 반야의 애틋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려는 듯 심오함을 갖고 있다.
반야봉에는 지리산 산신 중 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그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선지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데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반야봉의 애틋한 전설과 장엄한 낙조의 경관을 찾아 나서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대개 종주등반길에 잠시 들르는 방식을 택한다. 주릉상의 노루목 또는 삼도봉에서 오를 수 있는데 모두 2km 거리에 해당된다. 종주산행을 하면서 반야봉은 어쩌면 선택사양 품목과도 같다. 종주등반 과정에서 반야봉을 생략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곳에 오를 경우 1시간이라는 시간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산의 진면목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야봉은 반드시 올라야 한다.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는 지리산의 참된 모습을 보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야봉을 오르는 길은 종주등반 중에 잠시 둘러보듯 찾는 것보다는 반야봉 자체를 대상으로 달궁에서 올라야 반야봉의 묘미를 알 수 있다. 달궁은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2000년전 백제와 가야, 신라에 쫓긴 마한(馬韓)의 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궁전을 지었던 곳이 달궁이다. 이른바 "달의 궁전"이란 달궁에서 반야봉을 오른다는 것은 매우 값진 체험이 될 수 있다. 달궁∼반야봉은 8km 거리이다. 달궁마을에서 달궁계곡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계곡을 가로 지르는 쇠다리를 만난다. 달궁에서 이곳까지는 계곡과 나란히 성삼재로 향하는 포장도로가 있어 도로를 따라갈 수도 있지만 이는 생각않는 것이 좋다. 달궁계곡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별유천지 달궁계곡의 진수를 느끼며 걷다보면 쇠다리 부근, 쟁기소를 만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500여m 가량 가면 지계곡이 흐르는데 이곳에서부터 반야봉까지 식수를 구할 곳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물을 확보해야 한다. 줄지어 선 암봉들을 오르내리면 주변의 빼어난 절경을 음미해 볼 수 있다. 노송과 암릉의 절묘한 조화를 탄복하며 매혹적인 능선길을 한참 오르다보면 큰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급경사의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삼거리에 닿는다. 반야봉에서 이곳까지 1km 심원계곡으로 가는 길과 달궁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삼거리 지점에서부터는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로 이어지는데 곧 중봉이 나타난다. 헬기장도 있고 무덤이 군데군데 있는데 천왕봉 아래의 중봉과 이미지가 흡사하다.
여기서 주봉인 반야봉 정상까지 가려면 비탈을 한차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한다. 바로 이곳 중봉이 멀리서 볼때 여인의 둔부모양 중 조금 낮은 곳이며 높은 곳이 반야봉 정상이다. 탁 트인 사방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반야봉에 오르면 신선이 된 느낌을 받는다. 5월이면 두 봉우리는 화려한 철쭉의 향연이 베풀어진다. 그리고 이름모를 산야초가 운무와 뒤섞여 있을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곳이 반야봉이다. 달궁에서 반야봉을 오르다보면 자연휴식년제로 인한 입산통제간판을 만난다. 쟁기소 부근과 중봉 아래 삼거리, 그리고 반야봉 정상에서 중봉쪽에 각각 세워져 있다.
임걸령의 약수 임걸령(林傑嶺:1,320M)
임걸령은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8KM거리 능선상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령(高嶺)인데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주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니 녹림(綠林) 속에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이며 샘터에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녹림호걸(綠林豪傑)들의 은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의적(義賊)두목인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샘터에서 피아골쪽 암벽밑에 막(幕)터가 있으니 이곳을 '황(黃) 호랑이 막(幕)터,라 부르며 옛날에 약초꾼 황(黃) 장사가 눈이 내리던 겨울밤에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자다가 지혜와 용기로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4KM의 거리이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임걸령에서 반야봉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을 한동안 숨가쁘게 오르다 보면 평지가 나오고 계속 능선길을 가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면 약 2KM지점에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곳을 노루목 삼거리라 부른다. 노루목은 반야봉에서 내려지르는 산줄기가 산중턱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천연의 암두(岩頭)전망대에서 눈 밑에 펼쳐지는 피아골 원시림 계곡을 내려다 보노라면 원시림 속의 정적에서 풍겨 나오는 유적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노고단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은 우리민족의 영원한 믿음의 성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이란 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신앙의 영지로 남아있는 이들 두 봉우리. 노고단은 높이면에서는 해발 1,507m로 천왕봉의 그것과 비교해 다소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역사 이래로 우리 민중에게 부여해온 의미는 천왕봉에 비해 결코 뒤짐이 없다.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다. 이 곳은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노고단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와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부악(부악·지금의 팔공산)이었다' 고 적혀 있어 지리산에서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제사를 올리던 곳은 노고단이며, 남악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의미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을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과는 그 의미가 다른것으로 풀이하고 노고단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을 진행한 것은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별도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게재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의 큰 흐름) 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것으로 보아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제례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한말 융희2년 (1908)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년 12월 전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 라시대 이래로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온 노고단은 또한 화랑의 심신수련장으로 널리 활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세석고원까지 오가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의 드높은 기상이 아직도 노고단 언저리에 남아 있는듯 하다. 우리 민족의 안식처이며, 기개를 단련하던 노고단은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의 성지이며, 낙원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노고단 외국인 별장은 그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반란군들의 근거지로 이용됐다가 국군 토벌대에 의해 점령됐으나 이후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워져 지금은 옛 건물의 흔적과 잔해만 남아 아팠던 근대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건물이 불태워지면서 당시 노고단 일원의 울창한 수목들도 때아닌 화마에 휩싸여 지금도 노고단 일대는 큰 수목은 좀체 보이지 않고 싸리등 관목류만 남아있다.
노고단은 잘 알려진 비경의 운해 이외에도 숱한 명승지를 같이하고 있으며, 탁트인 시계로 멀리 무등산을 확연히 볼 수 있는가 하면 다도해의 장관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다. 예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다고 전해져 오는데 주위에 크고 작은 바위군들이 찾는 이를 감탄케 한다. 지금은 노고단 턱밑까지 도로가 뚫려 연간 찾는이가 수십만을 헤아리고 있으나 모두들 이들 명승지를 미쳐 보기도 전에 다도해에서 실려온 운무가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면서 운해만리 구름바다 를 이루다 다시 점점이 흩어지는 비경에 홀리고 만다. 겨울철에는 백설이 천하를 감싸안은 풍광을 연출해내 또다른 노고단의 모습을 선사한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서기에 앞서 고개를 들어 노고단을 향하면 상록수 위로 은가루를 뿌린듯 덮여 있는 노고정상의 설경은 노고단의 진면목을 새삼 실감케 해준다.
햐얀 겨울속의 노고단 진풍경은 이듬해 봄 늦게까지 계속된다. 고원지대의 겨울은 좀체로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새 봄 진달래가 움틀 무렵 끝났다 싶으며 아쉬운듯 다시 눈과 함께 왔다가 햇살에 밀려 허물어 진다. 5월이 되면 철쭉이 고원을 분홍으로 물들이면서 앞다투어 며느리 밥풀꽃과 원추리꽃들이 고원의 화원을 이룬다. 원추리 꽃은 특히 고원 전체를 황금빛으로 만들어 놓는 재주를 부려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원추리 꽃의 국내 최대 군락지로 알려진 노고단의 꽃향연 7∼8월이 절정이다. 고원의 광활한 화원에서 펼쳐진 최대의 꽃 향연이 끝날무렵이면 노고단에는 어김없이 많은 비가 내린다. 평지 보다 두배 정도의 강우량을 보이는 특이한 기후를 가진 노고단은 추적 추적 내리는 빗속에서도 찾는 이를 매료시킨다. 고원 특유의 향취가 풍기는 늦여름, 안개 비가 되어 내리다가도 금새 세찬 빗줄기로 변하는 고원의 정취를 즐기며 노고단을 걸어봐야 노고단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 꽃 잔치가 비와 함께 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노고단에는 만산홍엽이 찾아들어 가을인가 싶으면 이내 백설을 동반한 겨울이 시작된다. 고원의 사계절은 천하절경을 끊임없이 빚어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원의 정취는 그러나 지금은 턱 아래까지 이어진 도로로 쉽게 우리에게 모습을 내보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걷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는다. 화엄사에서 숨을 헐떡이며 10km를 걸어야 노고단은 제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 이제는 성삼재까지 관광버스가 올라올 정도니 노고단도 예전의 노고단이 아닌듯 하다. 여기서 이미 지난 88년 5월에 개통된 이 도로의 개설문제를 논할 것은 못되지만 지리산의 개발에 대한 보다 절제되고 합리적인 숙의의 필요성을 새삼 인식해 볼 문제다. 성삼재 관광도로를 통해 들어온 차량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매년 수십만을 헤아린다. 도로뿐 만 아니라 노고단을 향하는 10리길 등산로도 체증을 빚을 정도이다. 화엄사에서 코재를 거쳐 10km를 올라오던 성삼재에서 차를 내려 10리를 산보해오던 노고단은 이제 쉽게 만날 수 있다. 노고단에는 새로 단장된 노고산장이 먼저 길손을 반기고 있는데 정상을 향하다보면 외국인 별장의 잔해와 방속국송신탑을 언짢아도 봐야 한다. 정상에 서면 여성 둔부처럼 보이는 반야봉이 눈앞에 보이며 1백리 멀리 떨어져 있는 천왕봉이 아스라히 모습을 비친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의 또다른 매력으로 일컬어지는 왕시루봉 능선과 문수리계곡,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가 확연하다. 손에 잡힐듯 뻗어 있는 만복대 능선도 노고단 정상에서 보면 절경이다. 한민족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 전해져 오고 있는가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보기 흉한 잔해들과 함께 동족상잔의 아픔을 빚은 흔적들이 그대로 상존해 있는 노고단. 태고적부터 영겁의 세월을 보내오면서 고스란히 대자연을 물려받은 우리가 오늘날 조금씩 조금씩 대자연을 갉아 먹어 가고 있음을 노고단에서 새삼 느낄 수 있다.
차일봉 또 차일봉은 우번대, 관음대, 종석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으니 그 유래와 전설을 살펴보면 수려한 차일봉의 남쪽 아래 즉 수석이 아름다운 천은사계곡 상류 깊은 산중의 비경엔 오랜 옛날부터 상선암(上禪庵)이란 이름난 선원(禪院)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옛날 신라의 도승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동안의 좌선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열심히 불도를 닦은지 9년째 되는 어느 봄날,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 미인이 암자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며 자기를 따라 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유혹에 홀린 우번은 황홀감에 도취되어 수도승이란 자신의 위치를 잊은 채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산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갔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을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손짓하며 앞서 가던 그여인은 갑자기 간곳없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눈앞에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우번이 깜짝놀라 정신 차려 생각해보니 필시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해 미녀로 변신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끓어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을 간곳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이로부터 더욱 분발하여 수도하기로 결심하고 토굴 속에서 다시 수도정진하여 수년후 크게 도를 닦아 도통 성불하여 이름난 도승이 되셨다 한다. 그래서 우번조사가 도통한 그 토굴 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우번조사께서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石鐘) 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고 관세음보살께서 현신(現身)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후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한 고승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근세의 고명한 진응도사를 비롯하여 용화스님, 호음선사 등 많은 도승이 배출되어 불도(佛道)의 영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성불의 꿈을 안은 도사의 후예들이 이곳을 찾아 종석대, 관음천 샘터에 세워진 조용한 암자 불당에서 춘풍추우(春風秋雨)에 귀를 기울이며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노고단 대피소
성삼재--삼한 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 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 때,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여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당시 진한왕은 달궁을 방비하기 위하여 서쪽 10리 밖의 영(영)마루에 정장군을,동쪽 20리 밖의 영마루에 황장군을 ,그리고 남쪽 20리 밖의 산령에는 3명의 각성(각성)바지 장군을,또 북쪽 30리밖의 높은 산령에는 8명의 젊은 장병을 배치하여 일당 백으로 외적의 침공을 막아냈다 하여 정령재,황령재,성삼재,팔랑재의 이름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이같은 전설의 고장 달궁 마을에도 이제 그 옛날의 궁터는 찾아 볼 길 없다. (옮겨온 글) |
첫댓글 즐거운 여행 축하해~~
즐거운 산행 축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