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빈서원(泗濱書院)을 찾아서
德庵 李 德 熙
신묘년 11월 19일 아침 일찍 안동 내앞 마을 사빈서원 복향 고유 및 중간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승용차편으로 출발 늦가을의 비가 그친 뒤라 찬 기운이 스며드는 임하호를 지나 서원에 도착하니 벌써 자손들이 새벽부터 행사준비와 손님맞이에 바쁜 모습이 보였다.
사빈서원은 청계(靑溪) 김진(金璡)선생과 그의 다섯 아들의 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 숙종 36(1710)년에 사림과 자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묘호(廟號)는 경덕사(景德祠)이다.
고종 5(1868)년 조정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터만 남게 된 것을 동왕 19(1882)년에 영남사림의 공론에 의하여 강당과 주사만 중건하였다.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가 2011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강당은 전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규모가 큰 편이다. 자연석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과 사각기둥을 혼용하여 세웠는데, 정면 1칸의 협실을 좌우 대치형으로 배치하고 중앙에 정면 4칸의 대청을 둔 간결한 구조이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대청을 둔 간결한 구조이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형 와가로 영남 지방의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는 재사건물의 일반적 형태이다. 그외 새로 조성한 사당과 전사청 및 동.서재와 문루가 비교적 너른 공간에 적절히 포치되어 있음으로써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제향 인물로 주향은 증이조판서 청계 김진 선생으로 자는 영중(瑩仲)이요 본관은 의성이니 연산군 6년, 1500년 2월 3일 천전 본가에서 출생하여 선조 13(1580)년 4월23일 청기 홍림초사에서 향년 81세로 졸(卒)하였다.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의성김씨 득관 시조인 의성군 휘 석(錫)의 9세손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의성군 휘 용비를 중시조로 삼는다. 3대를 지나 고려 문예부좌사윤 휘 태권은 공민왕 12년 흥왕사에서 발생한 김용의 난에 순국하였으니 선생의 7대조이다.
매죽헌 성삼문, 단계 하위지와 대. 소과에 동반급제하고 지승문원사를 지냈으며 단종을 모시는 숙모전에 배향된 휴계(休溪) 휘 한계(漢啓)는 선생의 증조부이며, 조부는 증좌통례 망계 휘 만근이다. 아버지는 병절교위 증좌승지 휘 예범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 사정 휘 세경의 따님이다. 을유(15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했으며 뒤에 넷째아들 학봉 성일이 귀하게 됨으로써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기상이 준엄하고 높았는데 16세에 권간의 문하에서 배워 크게 진취하였고, 기묘명유인 민세정 공과 교유함으로써 문견을 넓혔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는 제생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특히 하서 김인후와도 도의로써 친교를 맺는 등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유학 중 문득 느낀바 있어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자제와 향중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심력을 다하여 이끌어 도와주기를 수십 년 동안 그치지 아니하니 학풍이 크게 진작하였다. 1550년 후반 무렵부터는 영양 청기 초동에 들어가 농장을 경영하면서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을 창건하여 향풍을 교화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다섯 자제로 하여금 가문의 기본 교양을 닥게 한 다음 도산으로 보내어 퇴계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오한 자질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 가르침의 근간은 충과 효였으나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믿음을 얻은 다음에라야 면전에서 간언하더라도 가납될 수 있다.” 라고 한 바 있고 또 “사람은 정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를 굽혀 도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으면 나는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산다면 오히려 죽은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영양 청기의 산수를 사랑하여 마침내 집을 짓고 살다가 그 곳에서 임종했다. 청기에서 초종과 성복을 마치고 그 해 7월 임하 경출산 진향원에 장사했다. 학봉은 묘지를 짓고 우복 정경세가 지은 묘갈이 있다. 정조 2(1778)년 유림의 발의로 선생과 다섯 자제분의 문고를 모아 5권 3책의 연방세고를 간행하였으며 서문은 대산 이상정이 썼다.
우복 정경세는 묘갈명에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랴마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까봐 걱정이네
혹 또한 가르친다 하더라도
오래면 반드시 게을러지게 되네
가르칠 수 있고 오래 지속할 수 있음은
오직 공이 사랑할 수 있어라네
작은 어짊이라 행하지 아니함도
큰 어짊에 해가된다네
서두르지도 않고 늦추지도 않으며
먹은 마음 바꿈이 없으니
맑은 하늘도 잊지 아니하고
가꾼 것만큼 거두게 하였네
중용의 재덕 이미 갖추었으니
그 향기로움 세상에 드려났도다. ... ...
아! 선생은 가고 없어도 선생의 유훈은 길이 남아 후세에 전해 내려오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교훈이 되리라. 자제 교육을 넘어 지역을 넘어 온누리에 뻗어나리라. 선생의 뜻을 따를 때 모두의 귀감이 되리라.
辛卯年 晩秋之節 德庵精舍 閑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