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테르의 자식들
데스포이나
독자 여러분은 필자가 페르세포네의 납치사건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데메테르가 딸을 찾기 위해서 올림포스를 떠나 지상으로 내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산악지대인 아르카디아를 지날 때 데메테르에게 정욕을 느낀 포세이돈이 나타나 그녀를 범하려고 하였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 데메테르가 얼른 암말로 변신하였으나 말의 신 포세이돈도 숫말로 변신하여 욕심을 채웠다'고 기술한 부분이 생각 날 것이다
그 결과로 데메테르가 낳은 것이 신마(神馬) 아레이온과 '데스포이나' 여신이었다. 데스포이나는 아르카디아 지방에서 '엘레우시스 비의'에 뒤지지 않는 신비로운 종교의식으로 숭배되었는데, 한편으로 데스포이나는 페르세포네가 모습을 바꾸어 그 지방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페르세포네에 있어서 불행의 열매인 석류는 데스포이나에게 바치지 않는 유일한 과일이 되었으며 특히 아르카디아의 피가레이아에서는 데메테르와 데스포이나는 암말의 목을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플루토스
사실 플루토스의 아버지인 이아시온에 대해서의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일단 호메로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데메테르와 이아시온의 사랑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기로 하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식장에서였다. 데메테르는 당연히 올림포스의 신으로 참석하였고 이아시온은 하르모니아의 형제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데메테르가 크레타 섬에서 이아시온을 보게 되었는데, 전에 결혼식장도 본 인연도 있고 해서 급속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결국 데메테르는 이아시온의 용모에 반하게 되었고 이아시온도 여신의 뜻을 간파하였다.
당시에는 땅을 세 번 경작하면 지력(地力)을 보강하기 위해서 한번은 휴경지로 놀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쉽게 말하면 휴식년제 같은 것이었다. 데메테르가 밭을 지나다가 마침 그곳에 나와있었던 이아시온을 만났고 둘 사이의 텔레파시가 통하여 휴경지의 밭이랑 사이로 들어가서 사랑을 나누자, 화가 치민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쳐서 이아시온을 죽여 버렸다.
그 후 데메테르는 이아시온과의 관계에서 부(富)의 신 '플루토스'와 '필로멜로스'를 낳았는데, 특히 플루토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아들이므로 모자가 환상의 드림팀을 이루어 땅에서 나는 풍성한 소출을 관장하였다.
데메테르가 휴경지의 밭에서 이아시온과 관계를 가져 부의 신 플루토스를 낳았다는 것은 밭에서 나누는 남녀의 사랑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민족의 풍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이아시온과의 사이에서 낳은 필로멜로스는 그냥 평범한 농부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면서 짐마차를 발명하였다. 그는 죽어 어머니 데메테르에 의해서 <소치는 목동 별자리>가 되었다.
에리식톤에 대한 보복
데메테르는 테살리아 지방에 자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숲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에리식톤'이라는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자가 있었는데, 이 자는 함부로 베지 못하는 신성한 숲을 남벌함으로써 데메테르의 보복을 불러 일으켰다.
에리식톤은 숲을 바라볼 때마다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숲을 숲으로 보질 않았다. 울창한 숲에는 각종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고 태고의 신비를 가득 담은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얼마나 큰지 수령(樹齡)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리식톤은 주변 자연경관을 해치면서 많은 나무들을 베어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데메테르 여신도 언젠가는 한번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벼르고 있었던 차에 이제는 데메테르가 아끼는 그 참나무를 보고 군침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그 참나무는 숲 속 나무 가운데 데메테르가 애지중지하는 나무였다. 숲의 요정들인 하마드리아데스들이 그 주위에 모여서 춤을 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소망을 빌었던 신성한 나무였는데 에리식톤은 그것을 자신의 거처를 위한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에리식톤은 '모든 나무는 도끼 앞에 평등하다'는 만수평등설(萬樹平等說)을 주장하면서 그 참나무도 당장 베어버릴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에리식톤의 부하들이 신성한 나무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자 직접 자신이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도끼를 낚아채어 사정없이 내려찍으니 도끼질한 자국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에리식톤의 만행에 격노한 데메테르 여신이 나무의 요정으로 나타나서 '그만 두거라. 다친다'고 경고하였으나 도끼질은 그에 비례해서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도끼질을 중단할 것을 간곡히 애원하였으나 탐욕에 눈이 어두운 에리식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참나무를 베어서 호화로운 식당을 만드려고 했다고 한다(그림: 도끼질하는 에리식톤).
드디어 데메테르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 야만스러운 식충아! 네가 밥 처먹을 곳을 지으려고 내 나무를 베다니! 어디 한번 실컷 먹어 보거라. 먹다먹다 배나 터져서 뒈져라."
신의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요, 실컷 먹어 주리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합디다."
데메테르가 형벌로 주었던 '게걸 신드롬'을 처음에는 단순히 무한한 식욕을 돋구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에리식톤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자기 옆에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 계속 먹어댔다. 그러나 그것은 형벌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에리식톤의 전체수입 가운데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 즉 엥겔계수(Engel's coefficient)가 100%에 육박하자 이제 서서히 여신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그 재앙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게걸증은 제2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먹을 것이 점점 떨어지고 없었다. 일단 굶주림의 마수에 걸려든 에리식톤은 쉴새없이 먹으면서도 배고프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미 살림을 다 말아먹을 정도로 위장운동을 했는데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었다. 그는 배 터지는 굶주림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쫄딱 망하여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어떻게 그 아버지에 저런 딸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 딸마저 팔아 버렸다. 노예로 전락한 에리식톤의 딸은 그래도 아버지라고 포세이돈에게 기도를 올렸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불쌍한 그녀의 기도를 들어 주어 그녀를 변신시켜 그때마다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하였지만, 에리식톤은 돌아온 딸을 그때그때 되파는 식으로 굶주림을 해결하였다.
결국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한 딸은 한없는 아비의 먹을 것 타령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몸! 마침내 자신의 신체를 뜯어먹기 시작하였다. 에리식톤은 결국 죽고 나서야 데메테르의 복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데메테르는 함부로 자연을 파괴하는 현시대에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인간들아! 제발 욕심을 그만 부리거라. 너희들의 탐욕이 너희들을 죽이는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