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의 출생>
동탁은 자를 중영이라고 하며, 농서군 임조縣 사람이다.
젊을 즈음에는 사나이다움을 자처하여 강족(서량주, 익주 북서쪽의 이민족) 지방을 방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들 모두와 사귐을 가졌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강족의] 우두머리 가운데 [농서군으로] 와서 그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자, 동탁은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경우(농사짓는 소)를 잡아 연회를 베풀어 환영해주었다. 우두머리들은 그 의기에 감동했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여러 종류의 가축 천여 마리를 모아 동탁에게 보냈다.
167년==========<동탁, 지방에서 전공을 세움>
[후]한 환제 말년, 6군에서 양가의 자제를 가려내어 우림랑으로 임명했다. 동탁은 천부적으로 무예가 뛰어났고, 보기 드문 팔 힘의 소유자였으며, 두개의 화살 통을 몸에 차고 말을 질주시키면서 좌우에서 활을 쐈다. 군사마가 되어 [흉노]중랑장 장환의 병주정벌에 종사하여 전공을 세웠으므로 낭중으로 임명되었고 합사비단(縑) 9천 필을 하사받았는데 동탁은 모두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광무령, 촉군북부도위, 서역무기교위로 승진했다가 면직되었다.
184년==========<황건토벌 실패>
소환되어 병주자사, 하동태수에 임명되었고, (184년 2월) 중랑장으로 승진했으나 (6월, 참소를 받고 물러난 노식을 대신하여) 황건적을 토벌하다가 패배하였으므로 죄에 해당[하여 면직]되었다.
185년 5월==========<변장과 한수의 난>
한수 등이 (서)량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재차 중랑장에 임명되었고 서진하여 한수를 방비할 때 망원협(望垣협) 북쪽에서 수만의 강족에게 포위당해 식량이 떨어졌다.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시늉을 하며 [귀로에 올라] 그 귀로의 건널목 지점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수십 리에 걸쳐 물을 저장하였고 제언 아래를 통과해 몰래 군대를 통과시킨 다음 제언을 무너뜨렸다. 강족이 그 정보를 알고 뒤쫓아 왔을 때는 이미 강이 깊어져 건널 수가 없었다. 이 때 6군이 농서로 향했으나 5군이 패배했고, 동탁만이 군세를 손상하는 일 없이 귀환하여 부풍에 주둔했다.
189년 4월==========<영제 붕어>
전장군을 배명하고 태향후로 세워졌고, (189년, 재차) 부름을 받았으며 병주목에 임명되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89년 4월)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했다. 대장군 하진은 사례교위 원소와 협력하여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계획했는데 황태후에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진은 동탁을 불러들여 군대를 이끌고 상경함과 동시에 몰래 상소문을 바칠 것을 명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중상시 장양 등은 (천자의) 애고(돌아보심)를 가로채고 은총에 빌붙어 천하를 혼탁케 하며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옛날 조앙은 진양에서 거병하여 주군 측근에 있는 악인들을 추방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종고(종과 북)를 울리며 낙양으로 진격하여 즉각 장양 등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하진은] 이 상소를 명목으로 [여동생인] 황태후를 협박할 생각이었지만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암살당했다. (189년 8월) 중상시 단규 등이 소제를 탈취하여 소평진으로 달아났는데, 동탁은 그대로 군세를 이끌고 [단규 등을 멸하고] 황제를 북망에서 맞이하여 어소로 귀환했다.
189년 9월==========<동탁 군권장악>
그 (십상시의 난) 때 하진의 동생 거기장군 하묘가 하진의 수하에게 살해되었다. 하진과 하묘의 부하들은 지휘관을 잃자 모두 동탁에게 몸을 맡겼다. 동탁은 또 여포에게 집금오 정원을 살해하게 하고 그 군세를 병합했다. 그 덕분에 동탁 단 한 사람이 군의 지휘권을 쥐게 되었다.
이 때 장기간 비가 내리지 않은 일을 빌미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동탁이 대신했다. 곧바로 태위로 승진하여 절월, 호분을 황제로부터 대여받았다.
그러고 나서 소제를 폐하여 홍농왕으로 삼았고, 곧이어 왕과 하태후를 살해했다. 영제의 막내아들 진류왕을 황제로 세웠다. 이 분이 헌제이다.
동탁은 상국(재상)으로 승진하여 미후에 봉해졌고 황제를 배알할 때도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에 오르는 일이 허락되었다. 헌제는 또 동탁의 어머니를 지앙군으로 봉하고, 가령, 승을 두도록 했다. 동탁은 이미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왔으며, 때마침 황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황제를 내쫓고 무기고, 갑옷, 각종 기물, 나라의 보옥을 차지하여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동탁은 또한 성격이 잔인무도하고 비정하여 가혹한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아주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없었다.
==========<낙양에서의 폭정>
이전에 군대를 파견하여 양성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2월의 봄 축제일이라 백성들이 모두 서낭당에 모여 있었다. 거기 있던 남자들의 목을 모조리 베고 백성의 수레와 소를 타고 여자와 재보를 실어 벤 목을 수레의 채에 매단 채 수레를 늘어세우며 낙양에 되돌아와 적을 공격하여 대량의 노획물을 얻었다고 선전하며 만세를 불렀다. 개양문을 통해 거리로 들어와 [벤] 목을 불태우고 부녀자를 하녀나 첩으로 병사에게 나눠주었다. 게다가 궁녀나 공주에게도 폭행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동탁의 극악함은 이런 정도였다.
190년 2월==========<장안 천도>
초평 원년(190) 2월, 그리하여 천자를 옮겨 장안으로 천도했다. 낙양 궁궐에 불을 지르고, 능묘를 모조리 파헤치고 보물을 탈취했다.
191년 4월==========<동탁 장안에서 폭정>
(191년 4월) 동탁은 장안에 도착하자 태사가 되어 상부라고 칭했다. [천자와 황태자만이 탈 수 있는] 푸른 덮개와 금꽃장식이 달린 수레를 탔고, 양쪽 가리개에는 조(爪)로 그린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간마거(竿摩車)라고 불렀다. 동탁의 동생 동민은 좌장군, 호후에 봉해졌고 형의 동생 동황은 시중, 중군교위가 되어 군대를 통솔하는 등 내외 모두가 조정고관이 되었다. 공경은 동탁을 만나면 수레 아래에서 인사를 했는데 동탁은 답례인사를 하지 않았다. 태위, 사도, 사공의 3공, 상서 이하 관료는 자기 쪽에서 동탁의 관소를 찾아가서 보고했다. [동탁이 살고 있는] 미에 요새를 쌓으며 높이는 장안성벽과 같게 했고 30년 치 곡물을 저장했다. [그리고] 성공하면 천하를 크게 지배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이곳을 지키며 일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은 미오로 가서 성채를 순찰할 일이 있었는데 공경 이하 모두가 횡문(장안 북문 가운데 가장 서쪽 문) 밖에서 송별연을 개최했다. 동탁은 미리 만막(장막)을 펴서 준비해놓도록 하고 주연이 시작되자 반란했던 북지군의 항병 수백 명을 안으로 끌어 오게 하더니, 술자리에서 먼저 그들의 혀를 자른 다음 손발을 자르거나 눈을 뽑거나 큰 가마솥에 삶거나 했다. 또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술잔과 탁자 사이를 쓰러진 채 굴러다니니, 모인 사람들이 전율하며 수저를 떨어뜨리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먹고 마시기를 계속했다.
태사(太史)가 하늘의 운기를 보고 점을 쳤는데 대신 가운데 사형을 당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고했다. 전 태위 장온은 당시 위위였는데, 평소부터 동탁과 잘 맞지 않아 동탁은 내심 그를 증오했다. 하늘에 이변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책망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움으로서] 막을 생각으로 사람을 시켜, 장온이 원술과 내통하고 있다고 아뢰게 하고는 마침내 태장으로 그를 때려 죽였다. 법령은 가혹했고, 애증에 따라 형벌을 남용하는데다가 사람들이 서로를 무고했기 때문에 누명으로 죽는 이가 천 단위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드러내놓고 비판하지 못하고] 길에서 눈빛[으로 정치비판]을 나눴다.
[동탁은] 동상, 종과 받침대를 전부 부쉈다. 게다가 오주전을 녹여 새로이 작은 동전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다섯 푼, 모양이 없고, 구멍이 뚫려져 있지 않았고, 가장 자리에 선을 넣지도 않았으며 줄질을 해서 갈지도 않았다. 그 결과 화폐가치는 폭락했고, 물가가 상승하여 곡물 한 석이 수십만 전에 이르렀다. 이 이후부터 동전이 유통되지 않게 되었다.
192년 4월==========<여포, 동탁을 살해>
(초평) 3년(192) 4월, 사도 왕윤, 상서복야 사손서, 동탁의 장수 여포가 공모하여 동탁살해를 꾀했다. 마침 천자의 병이 나은 때라 미앙전에 많은 신하가 모였다. 여포는 같은 군 출신 이숙 등에게 명하여 측근 병사 10여명을 이끌고 위사(근위병)의 옷을 입혀 액문(대문 좌우에 있는 작은 문)을 단단히 지키게 했다. 여포는 조서를 품고 있었다.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 등이 동탁의 입문을 막았다. 동탁이 놀라 "여포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자 여포는 "칙서다"고 말하고 나서 동탁을 살해하고 그의 3족을 멸했다. 주부 전경이 동탁의 주검 쪽으로 달려가자 여포는 그 또한 살해했다. [동탁의 종자로써] 죽임당한 자가 3명, 나머지는 감히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장안의 선비와 서민 모두가 서로 경축했고, 동탁과 영합하던 자는 모두 하옥되어 처형당했다.
처음에 동탁의 사위 중랑장 우보는 군대를 이끌고 별도로 섬 땅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192년 정월) 교위 이각, 곽사, 장제를 분파하여 진류, 영천 등을 공략시켰다. 동탁이 죽자 여포는 이숙을 섬 땅에 보내 칙명에 의거하여 우보를 처형하고자 했다. 우보 등은 이숙을 습격하였고, 이숙은 홍농에서 패주했기 때문에 여포는 이숙을 처형했다. 그 뒤, 우보의 진영병사 가운데 한밤에 반란을 일으켜 도망가는 자가 있어 진영안이 대소란을 일으켰다. 우보는 전부 반란했다고 생각하고선 금과 보물을 가지고 옛날부터 후대해왔던 복호적아 등 대여섯명만을 데리고 성벽을 넘어 북쪽으로 가서 황하를 건너고자 했다. 복호적아 등은 그 금과 보물에 눈이 어두워 우보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