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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향연 원문보기 글쓴이: 현우
★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Solomon And Sheba,1959)
◈영화명 :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Solomon And Sheba,1959)
◈감 독 : 킹 비더
◈출 연 : 율 브리너, 지나 롤로브리지다, 데이빗 파라, 로렌스 네이스미스, 해리 앤드류스
◈장르/요약정보 : 드라마 | 미국 | 139 분
◈주요 줄거리◈
아도니아(Adonijah: 죠지 샌더스 분)는 시바의 여왕(Sheba: 지나 롤로브리지다 분)을 찾아가 함께 솔로몬(Solomon: 율 브린너 분)에게 대항할 것을 권유한다. 그에 따라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실험하고 그를 유혹하여 부족들에게서 신임을 잃게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한다. 하지만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하여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곧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은 국정에 소홀하게 되고, 그 결과 백성들의 원성과 타부족으 공격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던 중 형 아도니아에 의해 암살될 위기에 처하자 마침내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첫번째의 싸움에서 솔로몬은 아도니아에게 참패를 당했고, 아도니아는 궁궐을 점령한 후 시바의 여왕을 백성들에게 넘겨주며 돌을 던질 것을 명령한다.
한편 솔로몬은 이집트군을 맞아 대승리를 하고 궁으로 귀환하던 중 시바의 여왕이 돌에 맞아 광장에 쓰러져 있음을 발견한다.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에게 다가 서려는 순간 아도니아는 그를 공격했고 둘의 결투 끝에 솔로몬은 아도니아를 살해하게 된다. 또한 시바의 여왕은 이스라엘의 신전 앞에 깊이 사죄하고 용서를 빌며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힘쓸 것을 맹세한다.
▼ (영화)솔로몬과 시바의 여왕-1
▼ (영화)솔로몬과 시바의 여왕-2
▼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요약버젼)
☞ 오랜만에 다시봐도 감동이 몰려오네요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 사무엘상 17장46~47절 -
아주 오래 전, <주말의 명화>에서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에게 이웃나라 '시바'의 여왕이 외교를 맺기 위해 찾아오는데, 그녀가 솔로몬을 유혹하려다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였다. 1959년 작품으로 율 브린너가 솔로몬역을,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시바여왕역을 맡았다.
고색창연한 개봉당시 한글 포스터
(영화감독이자 칼럼니스트인 스탠리박님이 운영하는 고전영화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http://blog.naver.com/filmclassic
영화의 한 장면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관능적인 연기가 어린 나를 괴롭혔었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이야기다. BC 10세기 경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던 통치자였던 솔로몬에게 주변 국가들이 머리를 숙이고 찾아와 친교를 청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바왕국이었다고 한다. 구약의 <열왕기 상> 10장과 <역대 하> 9장은 이에 관해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천천히, 주의깊게 한번 읽어보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예루살렘에 이르니
매우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향료와 금은보화들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매
솔로몬이 그가 묻는 말에 다 대답하니
솔로몬이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건축한 궁과
그의 상의 음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신하들이 도열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황홀하여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본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
하고 황금 120 달란트와 매우 많은 향료와 보석을 드리니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바친 것처럼 그렇게 많은 향료가 온 적이 없었더라
....
솔로몬 왕이 스바 여왕이 가져온 대로 답례하고
그 외에 또 그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모두 주니
이에 그가 그의 신하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
<역대 하 9:1~12>, <열왕기 상 10:1~13>
유사사례 대부분이 그러하듯, 성경의 기록과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다르다. 성경에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고, 오로지 그녀가 솔로몬의 지혜와 부(富)에 감동해 그들의 신(여호와)을 찬양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만 적혀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시바여왕이 솔로몬으로부터 감화받아 '개종'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급기야 그들의 '얼레리꼴레리'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서양인들에게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유일신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솔로몬의 시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로, 각종 영화와 음악, 미술작품의 단골소재가 되어왔다.
영국화가 포인터가 그린 <시바여왕의 솔로몬 방문> (1890)
Edward John Poynter, <The Visit of the Queen of Sheba to King Solomon>
캔버스에 유화, 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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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귀에도 익숙한,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1748) 중 '시바여왕의 도착'
'The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
자,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것이다. 과연 이 이야기는 전설일까? 아니면 역사적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시바는 도대체 어느 나라였고, 시바여왕은 누구였을까? 미리 귀띔하자면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 가운데 짤막하게 등장하는 이 일화가 후세에 널리 계승되면서 놀라운 모습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비학(秘學), 중세의 신비주의는 물론 에티오피아의 건국신화도 연관되어 있다. 심지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레이더스-잃어버린 성궤)와 밥 말리의 레게음악(라스타파리 운동)까지도 관련이 있다면 놀랍지 아니한가? 그럼 어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I. 정설 (正說)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에 나온 '시바(히브리어로는 스바 Shbwa)'는 '사바 Saba'왕국을 뜻한다고 본다. 사바왕국은 솔로몬의 시대에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던 나라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 끝,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지금의 예멘이다.
이곳에 지금으로부터 3000년전 쯤에 '사바'라는 나라가 세워져 약 천년간 번영하였다고 한다.
A라는 표시는 사바왕국의 수도였던 '마리브(Marib, Ma'rib)'라는 곳이다.
이곳에 당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옛 도시의 모습
그 옛날에 이런 고층빌딩을 짓고 살았던 걸 보면 매우 발전된 문명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달의 신전'
일명 '아르시 빌키스(Arsh Bilqis)'라 부르는데 '빌키스의 옥좌(玉座)'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4km 정도 가면 또다른 유적이 나온다.
바로 '태양의 신전'이다.
초대규모의 사원으로 우뚝 솟은 여덟 개의 기둥이 특징이다.
대부분이 모래 속에 묻혀 있어 현재까지 계속 발굴이 진행중이다.
나는 사막이란 데를 가본 적이 없어 저런 돌기둥이 어떻게
수천년 동안 모래 위에 서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달의 사원을 '아르시 빌키스'라고 부르는 것 처럼
이곳 태양의 사원은 일명 '마흐람 빌키스(Mahram Bilqis)'라고 한다.
'빌키스의 신전'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빌키스'가 뭐냐고?
그것이 바로 '시바의 여왕'의 이름이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예로부터 시바의 여왕을 빌키스라 불렀으며
그 이름은 코란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사바왕국'하면 빼놓을 수 없는 특산품이 하나 있다.
바로 '향료'다.
그녀는 솔로몬 왕에게 많은 양의 향료를 선물로 주고 갔는데,
그 가운데 지금 우리가 재배하는 유향나무의 뿌리도 얻을 수 있었다.
(유대고대사 8권 6부 - 6장)
II. 전설 (傳說)
흥미로운 건 이제부터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를 다시 보자. 그 8권의 6부 5장과 6장은 시바의 여왕 이야기로 꽉 차있는데 그녀에 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그녀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여왕이다.
(유대고대사 8권 6부 - 5장)
엥?... 이게 무슨 소리?
그녀는 사바왕국의 여왕이었다며?
그리고
사바왕국은 아라비아의 예멘 땅이었다며?
근데 무슨 아프리카의 여왕이래?
학자들은 아까의 '정설'을 근거로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요세푸스가 헷갈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시바의 여왕이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마치 이 나라의 '건국설화' 처럼 전해지고 있다.
시바의 여왕은 본디 에티오피아의 여왕이다.
그녀는 솔로몬과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름은 '메넬리크(Menelik)'로
'현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시바의 여왕이 낳은 솔로몬의 아들 메넬리크는
에티오피아의 '악숨(Aksum)'에 수도를 정하고 왕조를 여니,
이것이 바로 '악숨제국'이며
고대세계를 호령하던 왕국의 이름이 되었다.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악숨제국은 (마치 조선이 고구려부터 내려왔듯이) 에티오피아 왕국의 선조국가이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인들은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후손들이 되는 셈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의 에티오피아 국기.
이 나라 국기는 정권 변화에 따라 여러번 바뀌었는데
지금까지도 자신들이 솔로몬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여 이런 도안을 만들어 냈다.
(가운데 그려진 오각형의 별은 일명 '솔로몬의 별'이다.)
일단 '악숨제국'부터 살펴보자. 악숨제국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한때 로마제국, 한나라, 사산조 페르시아와 함께 세계 4대 제국으로 꼽힐 만큼 강성했던 나라이다. 중심지는 '악숨(Axum, Aksum, 에티오피아 북부의 고대도시)'이었고 1세기∼10세기까지 번영하였다.
지도상에서 악숨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에티오피아 북쪽 끝에 있다.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밑에 있는 '랄리벨라' 라는 지명도 기억해 두자. 잠시 뒤에 나온다.
중앙에 '아디스아바바'는 에티오피아의 수도이다.)
악숨에서 가장 유명한 건 오벨리스크다.
곳곳에 수백 개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들이 서있거나 쓰러져 있다.
'시바여왕의 왕궁터'로 알려진 곳.
악숨에 남아있는 옛 유적들에는 시바여왕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시바여왕의 목욕탕'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
경사진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연못으로 폭 30m, 길이 67m의 대형 저수지이다.
고대 에티오피아에 발달된 문명을 가진 왕국이 존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 왕국이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후손에 의해 건국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도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 근거가 되는 유명한 고문서가 있었으니, 바로 <케브라 네가스트>라는 책이다. '케브라 네가스트(Kebra Negast, '왕들의 영광'이란 뜻)는 게즈어(Geez, 고대 에티오피아어)로 씌어진 기록인데, 총 117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솔로몬과 메넬리크로 부터 비롯된 에티오피아 왕조의 내력을 상세히 담고 있다.
<케브라 네가스트>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것은 불어판)
<케브라 네가스트>는 13~14세기에 씌어진 책이다. 우리로 따지면 13세기 말 일연의 <삼국유사>에 단군신화가 실린 것 처럼, 에티오피아인들도 700년 전 기록 가운데 자신들의 건국설화를 갖고 있다. 거기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랑을 하고, 어떻게 메넬리크를 낳았는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영어 번역본을 읽어보실 분은 -> 여기클릭!)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도 담겨 있다.
바로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이다.
메넬리크는 22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아버지인 솔로몬을 찾아 이스라엘로 간다.
그리고 솔로몬의 환대를 받아 3년간 예루살렘에 머문다.
솔로몬은 메넬리크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만
메넬리크는 사양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가 돌아갈 때 솔로몬은 아들의 나라를 위해
유대교 장로들의 장남들을 뽑아 메넬리크와 함께 가도록 명령한다.
이때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유대의 장남들이
성전에 보관중이던 언약궤를 몰래 빼내어 에티오피아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최대 보물인 언약궤는
예루살렘에서 악숨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원 세상에...
이런 '개구라'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는 구약성경 속 유물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담아 놓은 궤짝을 가리킨다. 이 상자는 각종 전투에서 신비로운 능력을 발휘하였고,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에 고이 모셔졌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애지중지하던 이 보물이 어느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침공(BC 587년 경) 이후, 그 전까지는 성경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오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당시 약탈, 혹은 소실되었는지, 아니면 이미 그 전에 사라진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언약궤 모형.
4명이 메고 다니며, 전투에서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에서 에티오피아로 왔다는 이야기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에티오피아인들이 현재까지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에티오피아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자신들의 선조들이 가져온 언약궤는 악숨에 있는 '시온의 성 메리 교회(St. Mary of Zion Church)'에 지금도 모셔져 있다고 한다. 물론(?)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아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고 신성한 혈통을 물려받은 관리자만이 죽을 때까지 그것을 관리하게 돼있다고 하니...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얘기가 돼버렸다...
시온의 성 메리 교회 옆에 있는 이 조그만 예배당 안에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 절대 출입금지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언약궤를 '타보트(Tabot)'라고 부르며, 모든 교회에서는 이 타보트의 모형을 만들어 상징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중요한 축제 때마다 이를 꺼내 행사를 벌인다고 하니 진짜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욱 미칠 지경이다.
언약궤의 행방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한 미스터리의 소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영화 <레이더스 -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 (1981)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제1탄이다.
과연 에티오피아인들이 강하게 믿고 있는
이 놀라운 전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들은 왜, 언제부터 이런 전설을 믿게 된 걸까?
우리는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까?
이 수수께기를 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약간의 기초지식들이 필요하다. 어쩌면 궁금증이 꼬리를 물어 더욱 복잡해 질 수도 있지만 시작한 김에 끝장을 보기로 하고 약간의 공부를 더 해보자.
<팔라샤>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대인들을 '팔라샤(Falasha)'라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유대인이 있는데 굳이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이런 별칭이 붙어있는 걸 보면 약간 의아하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흑인 유대인들(Black Jews)도 팔라샤라고 부른다는데 이들은 대부분 에티오피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걸 보면 분명 에티오피아와 이스라엘은 뭔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추측된다.
에티오피아의 옛 수도였던 곤다르(Gondar)에 있는 팔라샤마을.
현재 에티오피아에는 약 2만 명의 팔라샤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변의 멸시 속에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며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이들의 '유대인성'을 직접 심사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에티오피아에 있는 팔라샤 가운데 일부가 진정한 유대인들로 여겨지긴 하지만, 대부분은 유대민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확실한 '유대인'이라 주장하며 히브리 신앙과 모세의 율법을 악착같이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팔라샤들 스스로, 자신들이 메넬리크가 이스라엘에서 에티오피아로 건너올 때 함께 건너온 유대인들의 후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케브라 네가스타>의 전설에 따르면 솔로몬왕은 메넬리크가 에티오피아로 돌아갈 때 아들의 나라를 돕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 부족에서 성직자와 학자, 장인 등 1천명씩 모두 1만2000명의 유대인을 골라 에티오피아로 같이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들의 후손들이 바로 오늘날의 팔라샤라는 것이다.
시온의 성 메리 교회 내부 벽화
메넬리크가 1만 2000명의 팔라샤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언약궤를 가져오는 장면이다.
<셀라시에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서양인들에게는 1930년부터 1974년 군사쿠데타로 물러날 때까지 45년간 장기집권해 온 전제군주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때 아프리카 국가로는 유일하게 6천명의 군대를 보내준 은인으로 유명하다. 1968년에 한국을 방문해 서울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1942년 모습)
옛날에 우표수집했던 사람들은 다 아는 이 물건!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기념 우표
이 시점에서 셀라시에의 이름이 나온 이유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유명한 '솔로몬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는 12,000명의 팔라샤를 이끌고 언약궤를 가져온 메넬리크의 225대 직계손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 사실은 에티오피아의 '헌법'에서도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황제의 위엄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가계로 영원히 존속되는 바,
이는 예루살렘의 솔로몬왕과 에티오피아의 여왕인 시바여왕의 아들
메넬리크 1세 왕조로부터 간단없이 내려온
살레 셀라시에(Sahle Selassie)의 후예이다.
에티오피아 개정헌법(1955) 제1조 2항
(영어원문 -> 여기클릭!)
세상에...
일국의 헌법 첫머리에 저런 이야기를 써놓다니...
정말 대단한 믿음 아닌가?
셀라시에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밥 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밥 말리의 레게음악이 그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잠깐, 그 둘의 관계를 밝혀보자.
밥 말리(Bob Marley, 1945~1981)
(그에 관해서는 옛날 포스팅 참고 -> 여기클릭!)
하일레 셀라시에(정확히 말하면 셀라시에 1세)는 1892년, 당시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이 양반도 일부러 이름을 메넬리크라고 한 거 봐라 ㅋㅋ)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애초 이름은 타파리 마콘넨(Tafari Makonnen)... 후에 '라스(Ras, 왕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황위 계승자인 황세자 지위에 오르면서 '타파리 왕자(Ras Tafari, 라스 타파리)로 불리게 되었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930년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이름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의 하일레 셀라시에로 바꾸었고, 자신의 황제대관식 자체를 성서의 예언을 수행하는 의식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이후 그를 신격화하여 재림한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밥 말리가 깊이 빠져있던 라스타파리교(Rastafarianism)이다.
라스파타리교인들은 돼지고기와 우유, 커피를 먹지 않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머리를 길게 땋아서 드레드록(dreadlock, 일명 레게머리)을 유지한다. 밖에서 보기엔 괴이한 신흥종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흑인들의 아픔, 아프리카의 단결과 독립 등을 갈구하는 마음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한 자유와 평등, 평화에 대한 외침을 노래한 것이 1960년대 후반 자메이카에서 탄생한 레게음악이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은 하일레 셀라시에가 '왕은 아프리카에서 나올 것이다'라는 고대 성경의 예언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 아프리카를 위한 정의가 실현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밥 말리는 22살 때 기독교를 버리고 라스타파리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위한 새로운 노래 - 레게- 를 불렀다. 먼 이역만리 조선 땅에까지 건너와 유행하는 '뽕딱-뽕딱' 하는 경쾌한 춤곡의 정체는, 실은 에티오피아 왕조의 부활에 대한 끈질긴 염원이었던 것이다.
<전설의 기독교 왕국>
여기까지 읽다 보면, 논의의 핵심이 결국 '종교'로 귀결되는 느낌이 든다. 유대교, 이슬람교, 라스파타리교...
그래서 얘긴데 에티오피아가 매우 유명한 '기독교 국가'라는 점을 꼭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다. (고대의 악숨왕국이 4세기에 기독교를 국교화 하였고, 5세기에 이미 수도원 제도가 마련되었다.) 에티오피아의 교회는 로마보다 앞서고, 교황청의 간섭을 피하여 2000년간 지켜온 전통을 자랑한다. 그 결과 이 나라는 아프리카나 중동의 다른 나라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도 인구의 절반인 4천만 명이 기독교 신자라니 가히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라 할 만하지 않은가?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Bole Medhane Alem 교회에 모여 예배중인 기독교인들
이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다.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은 중세 유럽에서 이슬람 세계 내의 기독교 국가를 다스리던 군주로 알려진 인물이다. ('프레스터'가 사제라는 뜻이기 때문에 때로는 '사제왕 요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는 가공의 인물이었지만 그가 다스린다는 '프레스터 존 왕국'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유럽에서 대유행하는 전설이 되었다.
초기 기세좋게 성공을 거두며 성지까지 탈환했던 십자군은 이후 지리멸렬해지다가 결국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기고 무슬림에게 몰리는 형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 한 가닥 희망의 메시지가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어딘가에 있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서 기독교 형제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스터 존은 동방박사 3사람 중 한 명의 후손이고 그의 왕국은 에덴 동산에 맞닿아 있으며, 거기에는 값비싼 보물들이 가득 쌓여있고 심지어 마시면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들은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삽시간에 중세 유럽인들을 사로잡는 판타지가 되었다.
이런 소문이 왜 나돌게 되었을까? 그것은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에티오피아는 앞서 말했듯 유명한 초기 기독교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교가 등장해 중동과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유럽 사회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당시 나라 자체가 악숨제국 이후 긴 암흑기를 겪는 중이었음) 그러다가 13세기에 들어서 에티오피아에서는 기독교 왕조가 다시 부활한다. 그 소문이 십자군 전쟁 당시 퍼져나가면서 '프레스터 존'이라는 가공의 이름이 만들어진 듯 하다.
바로 그러한, 기독교 왕국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에티오피아의 유적...
'랄리벨라의 암석교회들'이다.
'랄리벨라(Lalibela, 또는 랄리발라 Lalibala)'는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는 도시로, 기독교 왕조의 부활과 함께 약 300년 간 수도 역할을 해왔다. 전성기를 이루었던 랄리벨라왕(1181∼1221)의 이름을 딴 이 곳에 놀라운 유적이 있으니, 넓은 바위지대를 파내려가 만든 암굴(岩窟) 교회군(郡)이 그것이다.
이곳은 해발 3000m 고지이다.
여기 암반을 10m 이상 파내고 들어가 꼬불꼬불 미로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11개의 교회를 건설하였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흡사 개미굴과 같은 모습이다.
12~13세기에 이런 엄청난 건축물을 만들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성조지(St. George)교회이다.
이 교회는 독특한 모양의 아름다움으로 순례객을 압도한다.
땅 위에서 바라보면 완전한 십자가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라고 부른다.
커다란 바위산을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깎아내려가 이런 건물을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는가?
화산재가 굳어진 부드러운 응회암이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는 하지만
독실한 신앙심 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6세기 초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뒤 <프레스터 존 왕국의 비밀>*이라는 책을 썼던
포르투갈의 수도사 프란시스코 알바레스 (Francisco Álvares)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회들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나를 지치게 할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글을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니까..."
* 원제 : <A True Relation of the Lands of Prester John of the Indies>
=<Verdadeira Informação das Terras do Preste João das Indias> (1540)
종교와 신화가 범벅이 돼버린 나라...
에티오피아의 미스터리는
그래서 더욱 깊어 보인다.
III. 가설 (假說)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이 시바여왕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바여왕의 왕궁터'나 '시바여왕의 목욕탕'과 같은 유적을 1차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유적들은 대부분 시기가 맞지 않는다.
시바여왕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 10세기 경의 인물인데
에티오피아의 유적들(특히 악숨에 있는 시바의 유적들)은 아무리 길어봐야 1세기 이후에 등장한 것들로,
무려 1천년 이상이 차이가 난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시바여왕이 다스리던 '사바왕국'은
에티오피아가 아닌, 예멘 지역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나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비분강개했다.
제 나라의 유래는 본인들이 제일 잘 아는 법인데...
자기들 스스로 '우리는 솔로몬과 시바여왕이 응응응해서 낳은 사생아의 후예다'라는데
왜 서양인들이 그들의 잣대로 남의 건국설화를 부정하는가?
우리나라에도 '단군신화'가 있는데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혹은 그 이야기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게 13세기 말이라고 해서,
'너희는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게 아니야'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에티오피아 민중의 풍부한 전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놓으려 한다.
역사학자들도, 에티오피아인들도 모두 맞다.
예멘도, 에티오피아도 모두 시바여왕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즉,
두 나라는 같은 나라였다!
에티오피아(파란색)와 예멘(빨간색)은 '아프리카'와 '중동'이라는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들이지만, 실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매우 가까운 이웃이다. '아프리카'니 '중동'이니 하는 개념은 현대인들의 편의에 의해 만든 개념이지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지역의 최단거리는 24km로 영국과 프랑스를 갈라놓는 '영불해협' 보다 짧다.(참고로 우리나라의 울릉도나 제주도는 육지에서 130~140km 떨어져 있다.) 육안으로도 빤히 보이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을 이곳 사람들은 제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 했을 테고, 자연스럽게 같은 문화를 나눠같게 되었을 것이다.
두 지역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커피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돼 예멘을 거쳐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커피(Coffee)'라는 이름 자체가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나무가 야생하는 곳인 '카파(Kaffa)'에서 나온 말이고
'모카(Mocha)커피'라는 말은 커피수출항으로 유명한 예멘의 항구도시 '모카(Mocha)'에서 유래되었다.
에티오피아와 예멘이 이웃처럼 교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커피는 지금처럼 널리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나라가 같은 통치 하에 있던 때는 없었을까?
옛날 예멘 땅에 있던 '사바왕국'이 큰 세력이었다면
가까운 바다 하나 건너 에티오피아까지 다스렸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나의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지금부터 잘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것은 에티오피아의 '예하(Yeha)'라는 곳에 있는 유적이다.
B.C. 800여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고대신전 안에 내가 찾는 증거들이 있다.
첫째, '사바문자'로 새겨진 돌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멘에 있던 사바왕국은 고층빌딩과 댐까지 건설할 정도로 발달된 선진국이었다.
그들이 썼던 언어가 '사바어'인데, 매우 독특한 문자체계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사바문자'로 기록된 유물이, 예멘이 아닌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멘에서 발견된 오리지널 사바문자와 비교해 보자.
내용은 몰라도 동일한 문자임은 한눈에 알 수 있다.
같은 곳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도 살펴보자.
이것은 신전의 한 구석에서 발견된 벽화다.
메인 그림보다 그 아래에... 맨 밑에 조그맣게 보이는 장식문양에 주목해보자.
뿔달린 이상한 짐승 6마리가 한 줄로 서 있다.
얼핏 보면 귀여운... 얘네들의 정체는 뭘까?
여기서 잠깐,
참고 자료가 하나 필요하다.
예멘의 사바왕국 유적지에서 발견된 향로이다.
사막의 돌산 위를 뛰어다니는, 사바왕국에서 신성시하던 동물이라고 한다.
바로 이 '아이벡스'들이
사바왕국의 상징문양이 되었던 것이다!
시바여왕이 솔로몬을 만난 건 BC 10세기의 일이고
예멘의 사바왕국이 힘을 뻗치고 있던 시대도 바로 그때이다.
이 유물은 BC 9세기 정도의 것이니... 시기도 비슷하게 맞는다.
그렇다면 '사바왕국'의 영토가 예멘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게 맞는 거 아닐까?
본래 시바의 여왕이 향료를 가득 싣고 출발한 곳은 예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 뒤,
그의 아들 메넬리크가 1만 2천 명의 유대인들과 정착한 곳은
예멘이 아닌 에티오피아였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것만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아이벡스'와 '사바문자'가 새겨진 사바왕국의 명문(銘文)이다. 이제부터 이런 고대의 유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일 것이다... * 달의 신 알마카흐(Almaqah)에게 바쳐진 명문(銘文), 루브르 박물관 소장 (BC 700년 경)
지금껏 심하게 잘난 척 하면서 나의 논리를 폈는데,
실은 '순수창작'이 아니다.
(내 주제에 무슨... 예멘이나 에티오피아 근처도 가본적이 없는데...)
고백을 하자면
'인터넷'과 '마이클 우드'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마이클 우드(Michael Wood, 1948~ )는 영국의 역사가이자 BBC 역사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이다.
그는 2005년에 <In Search of Myths and Heroes>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만들었고
(우리나라에서도 KBS에서 <신화와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4부작물을 방영한 바 있음)
<신화추적자>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최애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6)
이 가운데 시바여왕의 발자취를 따라 예멘과 에티오피아를 돌아다니는 대목이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나는 신화의 역사성을 믿는다.
신화란 본래
같은 곳에 모여살던 사람들의 동질감을 담은 이야기로
철저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실증사학으로도,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