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29일(목) 오후 4시, 대전남지방 학생부 일본 단기선교팀 47명을 실은 팬스타훼리(Panstar Ferry)호는 서서히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일본 오사까로의 출발이다. 객실은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4명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들어가 보니 깔끔하게 잘 정리 되어 있었다. 객실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이들과 어울려 어깨를 부딪히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갑판에 올라갔다. 부산항 너머 산등성이 밑으로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붙어 있는 부산의 빌딩과 주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한해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스레 살갖에 스치운다.
다섯 번의 준비 모임을 통해서 보여준 녀석들의 태도는 이번 선교여행의 전망을 어둡게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이 여러 교회에서 모이다 보니 분위기도 어색하고 연령의 차이만큼이나 신앙의 수준도 천차만별 이었다. 준비 모임 프로그램에 억지춘양처럼 의욕 없이 참여하던 녀석들의 무표정한 표정을 떠올리며 이번 선교여행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아니 과연 이번 선교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는 있을까? 상념에 잠겨있을 무렵 동그란 얼굴, 코와 뺨 사이에 큰 점이 하나있어 인상적인 하영이가 다가왔다. “목사니임-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아- 찍어야지 우리 멋지게 한번 찍어 보자.....”
팬스타훼리 호에서의 첫 번째 식사가 시작되었다. 값은 700엔 메뉴는 비빔밥, 된장찌개, 불고기 백반(천엔), 일식 등이었다. 내가 심사숙고 끝에 주문한 불고기 백반은 비싸기만 하고 뭔가 빠진 듯한 맛이었다. 이튼날 아침에 먹은 순두부 백반도 순두부와 조갯살, 야채 등이 들어가 맵게 어우러졌지만 맛은 뭔가 이상한 잡탕찌게였다. 맞은편에 앉은 고병태의 된장찌개에 슬쩍 숟가락을 넣어 떠먹어 보았다. 연한 된장에 게가 들어가 시원한 맛이 우러났다. “에이, 오늘 저녁 메뉴 선택은 실패군.”
우리 아이들도 삼삼오오 식당에 몰려와 나름대로의 경험과 눈대중으로 음식을 주문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낯선 여행지로 떠날 때의 긴장감과 약간 두려운 듯한 눈빛들이 포만감으로 인한 안도감으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저녁 식사 후 다시 갑판에 올라가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한 바람과 함께 뱃전에서 부서지는 파도로 인해 물보라가 날아왔다. “이크 안되겠군.” 얼른 내려와서 로비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물 빛깔이 점점 짙어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제 CNN 방송에서 오끼나와 남쪽으로부터 태풍이 일본열도 쪽으로 북상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으니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본부인 222호에 스텝목사님 사모님들이 모여 태풍 문제를 비롯하여 선교여행의 여정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스텝 목사님 회의에서 해병대로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신 반석교회 주제홍 목사님의 무시무시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각 방마다 취침점호를 실시하라!” 늘푸른교회 홍이석목사님이 짙은 눈썹을 휘날리며 각 방을 돌며 점호 준비를 독려하고 뛰어 다니자. 팬스타호는 일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배안의 공기마저 싸늘히 식는 듯 하였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쌕에서 페라가모 썬글래스를 꺼내 들었다. 언제나 봐도 썬글래스의 귀족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명품이었다. 어깨를 펴고 배를 약간 내밀며 흡사 장군다운 풍모로 복도를 걸어 210호로 향하였다. 오른 손에 지휘봉이 들려있지 않은 것이 한 가지 흠이라면 흠이었다. 부관이랄 수 있는 산소망교회 최용관 목사님과 제자교회 권기수 목사님을 거느리고 복도 중간쯤 걸어갔을 때였다. 순간 아찔하며 현기증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래서 하마트면 품위를 잃고 넘어질 뻔 하였다. 아- 배의 복도를 그것도 한밤중에 걷기에는 명품 페라가모 썬글래스의 색깔이 너무 짙었던 것이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안간힘을 쓰며 몸을 추스르고 기어이 210호의 문을 열어제끼며 첫 점호를 시작하였다. 방에는 학생들이 마치 사자 앞의 순한 네 마리의 사슴들처럼 두려움에 떨며 점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백십호 총원 네명! 사고무! 현재원 네명! 우로 번호! 하나, 둘, 셋, 넷 이상 점호 준비 끝!”
구호가 끝나기가 무섭게 권기수 목사님이 일갈(一喝)하였다. “야 이놈들아 관물대 정리가 이게 뭐야! 침구는 각을 칼같이 잡아야지! 화장실에 있는 이 물건은 뭐야! 신발 똑바로 정리해!” “엎드려 뻗쳐” “갑판 문까지 선착순으로 뛰어갔다 되돌아온다. 실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211, 212호 계속해서 점호는 이어졌다. 아이들은 아닌 밤중에 이게 웬 난리인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열심히 점호에 임하였다. 두두두두- 아이들이 복도에 뛰어 다니는 소리에 급기야는 여객전무가 놀라서 달려왔다. 그리곤 학생들이 뛰어다니지 말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일본으로 향하는 팬스타호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이튼 날 새벽 6시에 기상하여 학생들이 졸린 눈을 부비며 조별로 모여 큐티(Quiet Time, 관주: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관찰, 해석, 적용하여 서로 나누는 것)를 시작하였다. 조장들의 인도 하에 큐티는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암, 밥을 먹기 전에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꼭 먹어야지.....
오전 10시에 팬스타호는 드디어 일본의 관문이자 국제 항구 도시인 오사까항에 도착하였다. 일본으로의 입국 절차는 까다롭고 지루했다. 이미그레이션(Immigration) 담당 직원들이 휴가를 갔는지 약 800명의 입국 심사를 단 세 명이 앉아 진행하고 있어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내가 들고 들어간 공동 짐 속에 햄이 들어 있었는데 햄은 비록 가공은 했어도 ‘구제역’ 파동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 번 사정을 해 보다가 포기하고 나왔다. 밖에 나오니 우리를 인도하실 오사까 주애(主愛)감리교회 이주부목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퍼머로 큰 웨이브를 준 사자머리에 멋진 베레모 비슷한 헝겊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멋졌다. 이주부 목사님은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그 어렵다는 일본에서의 선교 사역에 헌신한 30대 후반의 복음의 열정과 심미적 감수성을 겸비한 범상치 않은 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깨끗하고 근사했다. 첫 번째 문화 탐방 장소는 고베 지진박물관이다. 차창 밖으로 오사까 해변과 빌딩, 현수교 등이 어우러져 한국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세련된 선진국다운 풍모가 느껴졌다. 지진박물관은 외관을 유리로 마감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으며 영상과 사진 자료를 통해 지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또한 빌딩 시공 시 행하는 내진 설계의 다양한 방법을 모형으로 설명해 주었다.
1995년 1월17일 일본 고베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불과 10초 만에 6천여 명이 숨지고 2만7천여명이 부상했으며 7만4천여채의 건물이 파괴되는 등 고베시는 일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땅을 잠깐만 흔들면 엄청난 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지진박물관의 대부분의 직원은 고베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 자원봉사자들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안내를 맡은 한 일본인 할머니께 나의 신분을 밝히고 우리는 한국에서 온 선교단원들임을 설명하니 의외로 그 할머니의 얼굴이 밝아지며 자신도 얼마 전부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1억3천만 명의 일본인 가운데 캐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인이 100만명 정도이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들은 27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 대비 비율로는 0.2퍼센트에 불과하다는데 첫 번째 문화 탐방 장소에서 기독교인을 만나다니!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선교 여정을 축복해 주시는 듯 하였다.
하버랜드 모자이크관에서는 조별로 자유 매식을 하였다. 역시 일률적으로 700엔 씩이 지급되었다. 돈까스 전문점에서의 점심 식사는 한마디로 끝내줬다. 뎀뿌라(튀김) 요리가 발달한 일본음식의 진수를 맛보았다. 자유 매식 후 떠난 두 번째 탐방장소는 나라현의 사슴공원이다. 사슴공원에는 수많은 사슴들이 오래된 시간의 궤적을 쫓아 거니는 풍경을 접하게 되었다. 숫자가 1002 마리라든가? 일본의 사슴은 일본 왕가를 상징한다는 동물이다. 사슴들은 그들을 격리시키는 울타리가 없어 자유스럽게 사람들 틈에 끼여 돌아다닌다. 단원들은 사슴 틈에 섞여서 또 사슴과 나란히, 사슴에게 먹이를 주거나 안아보며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였다. 사람들이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먹이를 주고 받아먹는 모습에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들이 사슴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따사롭기만 하다. 처음 들어섰을 때 방목된 수많은 사슴을 보고 놀라던 사람들이 어느새 한 마리 사슴에게 동화 되는 순간이다. 건너편에서 잔디에 앉은 사슴 한 무리가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자기네 종족과 사람들이 노는 모양이 볼 만한가 보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단원들 중에 사슴을 무서워(?)하는 여학생들도 있었단다.
사슴공원 안에 위치한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는 높이 약 15M, 무게25톤의 금동좌불상을 볼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겉보기에도 목조건물로서 그 규모가 엄청났다. 금동좌불상을 중심으로 동대사 내부를 한바퀴 빙 돌아볼 수 있었는데 기둥에 구멍이 뚫려있고 일본인들이 그 반질반질한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며 뭐라 뭐라 그런다. 그 구멍이 뭘 뜻하느냐고 물어보니 자세히는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구멍의 크기와 금동좌불상의 콧구멍 크기가 같다는 뜻인 듯 하였다. “나 참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야단들이야.....”
기념품 가게에서는 역시 각종 부적들을 팔고 있었다. 기분 나빠 얼른 밖에 나왔다. 동대사 밖 왼편에는 보자기 같은걸 뒤집어씌운 목상이 하나 서있었다. 자기가 믿는 신을 버리면 거지꼴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목상이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본 만화영화 ‘센과 치히로의 모험’ 에는 거지신(神) 가우나시가 나오는데 밖엘 떠돌며 뭐든지 먹어치우는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신이다. 그 가우나시가 이 목상을 본뜬 것으로 생각 되었다.
“에이, 일본은 어딜 가나 우상 천지라니까.” 오사까에만 신사가 2천여 개가 있고 일본 전역에는 20만개가 있으며 이름이 붙여진 잡신만 자그마치 8백만개나 있다니 일본은 우상 공화국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묵을 오사까주애교회는 지하철 미도스지센 대국역(大國驛, 다이교꾸죠) 근처에 있는 아담한 일본식 4층건물로 이주부 목사님에 의해 개척된 지 5년이 된 교회였다. 2000여개의 신사(神社, 진자, 관주:신사란 일본 천황 가문을 신격화해 제사하는 신도(神道:Shintoism) 사원(寺院)으로 우상의 제단이다.)가 널려있는 오사까 중심부 상업지역에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오사까 주애교회가 성도들의 피와 눈물과 기도로 십자가 탑을 높이 세우고 우뚝 서있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철탑의 모양이 우리 주님의교회와 너무도 비슷하여 목사님께 여쭤보았다. 역시나 한국의 십자가 철탑을 박스에 넣어 배로 부치고 한국인 기술자가 직접 나와 세운 순 한국식 십자가 탑이란다.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격적이었다.
선교여행 셋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교또(京都)에 가는 날이다. 교또는 도쿄(東京)이전 1868년까지 약 1,1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폭격을 가할 때 맥아더 장군이 교또 만은 폭격하지 말자고 할 정도로 유적과 신사, 절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다. 역시 직접 와보니, 교또는 오사카와 같은 상업도시의 번잡함이 없는 고풍스러운, 그리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함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평안신궁(平安神宮, 헤이안진구)은 1895년에 교토가 수도로 정해진 지1,10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신사(神祠, 진자)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들 중에서 빼어난 자태와 거대함이 으뜸이란다. 역대 천황 가운데 칸부천황과 효명천황을 제신으로 하여 제를 올린단다. 특이한 것은 지붕을 빼고 모든 처마와 기둥을 붉은 색으로 칠해 놓아 마치 중국의 오래된 건물을 보는 듯 하였다. 사진을 두어 장 찍으니 빗물이 후두둑 떨어져 다들 버스로 뛰어 왔다. 그리곤 바로 점심식사 시간. 운전기사에게 사정사정하여 미리 준비하여 버스에 싣고 온 620엔짜리 도시락을 관광버스 안에서 먹을 수 있었다. 역시 탁월한 선택으로 애 어른 할 것 없이 다들 맛있게 10분 만에 후다닥 해치웠다.
이조성(二條城, 니조조)는 토요토미 히데우스 이후 정권을 잡은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교또의 숙소로 지은 저택인데, 손자 대에 성으로 정비했다고 하는 곳으로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곳이다. 주변에는 해자(관주:해자란 일본의 성이나 중세 유럽의 성 등 평지에 세워진 성들은 대개 해자라고 하는 인공 수로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다. 이것은 대개 적이 곧바로 성 밑까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니노마루 어전(국보)은 모모야마문화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세련되고 화려한 건축과 내장이 돋보인다.
제법 내리는 비 덕분에 한국에서부터 준비한 우비 패션을 선보일 기회가 왔다. 우비 자락을 휘날리며 3-4분 걸어 들어가 보니 역시나 커다란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부산하게 우비를 털어 난간에 걸치고 14번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발로 들어갔다. 수십 개의 다다미방을 왕래 하도록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널찍한 널빤지를 잇대어 놓은 복도에 발을 디딜 때마다 삐요 삐요 새 울음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제작 방법은 널빤지를 견고하게 고정 시키지 않고 쇠못을 헐렁하게 박아 놓아 사람들이 디딜 때마다 쇠못과 지지대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암살자의 침입을 미리 감지하고 막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제작했단다. 마당에도 직경 5밀리 정도 되는 검정 돌을 쫙 깔아 놓았는데 그것도 역시 밟을 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미리 감지하기 위해서란다. 권력을 잡았으나 정적들로 인해 늘 불안한 밤을 보내야 했던 사무라이 보스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정원에 심은 소나무는 얼마나 잘 가꾸어 놓았는지 그 자태가 빼어났다. 관리인들이 솔잎을 세어가면서 손질 해 주었단다.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이라니..... .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는 나라에서 온 승려가 780년경에 세운 절로서 절벽위에 세워진 아찔한 높이의 본당 건물로 유명하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그 위쪽으로는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청수사는 교또 시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 찾아오는 명승지라나 뭐라나.....
그 곳에는 특이한 장소가 한군데 있었으니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만남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점을 쳐보는 장소가 있었다. 요령은 약 15미터 떨어진 곳에 여인네가 앉아 있으면 다른 쪽에서 남정네가 눈을 가리고 걸어와 정확히 만나면 맺어질 인연이라는 것이다.
“야 이놈들아 결혼 상대는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고 맺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지! 점을 쳐서 정하면 쓰것냐? 쯧쯧쯧.”
우리 일행은 신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교또 시내에 촛대 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은 교또 타워를 바라보며 이 우상의 도시가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으로 변화되길 기도하였다. 그리고 양쪽에 각종 상가가 이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일본에도 녹차 건강법이 유행인 듯 냉 녹차, 녹차 빙수, 녹차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였다.
선교여행 넷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이다. 일본에서 주일을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10여년 전 그때는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공학도의 신분으로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형님이 유학하던 동경에 가서 주일을 보내던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왠지 일본 땅이 무척 낯설고 일본이 기술 강국이라선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소니 워크맨, 니콘 카메라, 도요다 자동차가 전 세계를 호령하던 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소니는 물론이고 세계 IT업계의 3대 강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와 IBM, 인텔의 실적을 추월하며 기술력에 있어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다. 순이익도 소니의 2배 이상이니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쾌거이다. 더구나 우리는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영적인 파워를 가지고 일본에 기독교 영성을 한 수 가르쳐 주러 왔지 않은가?
일본인이신 아이가와(相川)목사님의 설교와 한국인이신 사모님의 통역으로 일본인 예배가 시작 되었다. 통역이 필요 없을 만큼 아이가와 목사님의 한국어 구사력은 뛰어났다. 설교는 쉽고 친근감이 있었으며 부드러웠다. 우리 아이들의 ‘아나따니와 무까시까라(아주 먼 예날 하늘에서는)’와 ‘예수 산비(예수님 찬양)’ 찬양은 훌륭했고 아이가와 목사님의 딸 유리애 양의 플룻 연주(곡명:이코오 센겐 애이오)는 수준급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정성을 다 해 예배드리고 고사리 손으로 헌금도 정성껏 드리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우리 아이들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늑대들처럼 일제히 유리애 양에게 몰려들었다. 예배 시간에 어떻게 참고 있었나 싶었을 정도였다. 사진을 찍고, 수첩을 내밀고 난리 법썩을 떨었다. 사춘기는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더니..... 그 말이 사실임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보기가 다소 민망했다. “얘들아 좀 참아라.”
11시 30분에 한국어 예배가 시작되었다. 사회를 보는 이주부 목사님은 트레이드 마크인 사자머리에 과감한 미색 양복 차림이었다. 역시 심미적 감수성을 내보이는 범상치 않은 옷차림이다. 우리의 문화탐방 가이드를 하시느라 쉰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을 본문으로 한 반석교회 주제홍 목사님의 설교는 역시 탁월했다.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하여 다양한 인용과 예화로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은혜로운 설교였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특별 명령이 하달되었다.
“교회 인근에 있는 지하철역 대국역(大國驛, 다이가꾸죠)에서 미도스지센을 타고 난파역(難坡驛, 난바쪼) 8번 출구로 집합하라!”
“실탄은 천엔씩을 지급하니 저녁까지 해결하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
오사까 남부의 중심가 젊은이거리 도톤보리에 위치한 에비스바시(다리)에서 노방전도가 시작 되었다. 마침 휴일인 주일 오후라서인지 수많은 일본인들이 다리 위를 가득 메우며 왕래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거대한 사람의 물결에 일순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통성기도 후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찬양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와다시와 캉고꾸까라 기마시다!(나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민나상, 아나따오 아이시마쓰!(여러분, 당신을 사랑합니다.!)”
“민나상, 예수사마오 신지떼 꾸다시이!(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1, 2조는 찬양과 찬무를 하고 3, 4조는 일본어로 제작된 전도지에 한국 동전을 넣어 의아스런 눈으로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도지를 길에 내버리면 다시 주워서 건네주고 또 건네주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한여름 태양의 뜨거움 보다 더한 열정과 믿음으로 목이 터져라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외치고 또 외쳤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모두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강렬했던 태양이 구름에 슥 가려지더니 이윽고 비가 보슬 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전도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만 같아 구름 위를 떠다니듯 너무도 은혜 충만하여 복음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교회에 돌아오기로 약속한 저녁 7시 25분이 다 되도록 김창성 학생이 조장인 이찌고(1조) 한조만이 교회에 돌아왔다. 스텝 목사님들은 내심 불안해 졌다.
“길을 잃어버렸나?”
“무슨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잠시 후 그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7시 30분 정각이 되자 나머지 2, 3, 4조 모든 학생들이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교회에 돌아왔다. 아- 우리 대한의 건아들은 세계 그 어느 오지에 데려다 놔도 당당히 자기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아이들이 분명하다. 박수 짝짝짝.
그날 밤 집회는 말 그대로 성령의 불바다였다. 주제홍 목사님은 지난 첫째날 저녁에는 창세기 28장의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복을 나눠주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둘째날 저녁에는 요한복음 12장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그 한사람이 반드시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한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ㄱ’자(字)가 들어가는 일곱 가지 단어의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1.꿈 2.꾼 3.깡 4.꼴 5.꼭 6.끼 7.꾀 인데 이것을 잘 갖추어야 믿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이윽고 주제홍 목사님의 마지막 밤 말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미운오리새끼가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도 있으나 그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가지고 사십시오.”
“담대하게 나아가는 믿음 짱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 안에서 새로 태어난 백조입니다.”
목사님들의 안수기도가 이어졌다. 한 학생 한 학생 머리에 손을 얹고 뜨거운 사랑과 눈물로 기도했다. 아이들도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값진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성령 충만의 열기가 우상의 도성 오사까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아 가며 선교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선교여행 다섯째 날이 밝았다. 사모님들이 정성껏 차려 주신 식탁이 우리를 맞이해 준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도는 형형색색의 반찬이다. 참치김치찌게, 멸치볶음, 무장아찌, 콩자반, 오징어채, 짜장, 카레, 김 등등. 한국에서도 우리의 입이 이렇게 호강하였을까?
모든 사람이 잠든 사이에도 사모님들은 이튼 날의 반찬거리를 준비하였으며 모든 사람이 꿈속을 헤매일 때에도 사모님들은 오직 내일 반찬거리를 걱정하였던 것이었다. 사모님들은 오로지 선교 단원들의 입맛과 건강을 위하여 그들의 육신의 안일과 달콤한 잠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다만 두 손 모아 사모님들의 수고와 사랑에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기를......
다섯째 날 문화탐방이 시작되었다. 오사카성(大阪城)은 500년의 역사를 지닌 오사카의 심벌로서 임진왜란의 장본인인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일본을 통일한 뒤 3년에 걸쳐 완공한 오사카의 명소이다. 성의 네 측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16세기 말에 세워져 17세기에 전란으로 소실되어 20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천수각(天守閣, 덴슈각)이 재건되었다. 천수각은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8층이다. 8층은 전망대이고 6층은 기계실인지 막아 놨고 3-7층까지는 당시의 무기와 갑옷, 민속자료 등 풍신수길에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으로도 보여주고 있었다. 2층은 오사카성에 대한 정보코너인 듯. 천수각에는 풍신수길의 초상화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무사라는 이미지 보다는 아주 영악한 정치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오사카의 영웅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통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전범이요 원수덩어리 아니겠는가? 썩 유쾌하지 않은 탐방이었다.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마지막 탐방 장소인 해유관(海遊館, 카이유깐)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자그마치 2천엔!! 해유관은 어항을 측면에서만 보는 일반적 상식을 벗어나 중앙의 8층 건물 높이의 태평양 수조를 중심으로 모든 수조들을 위, 좌우, 아래 등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만들어 좀 더 다양한 어류의 생태를 관찰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첫 입구에서부터 해저터널로 정신을 사로잡은 후 마지막 해파리관의 환상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일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상층으로 올라간 후 거기서부터 가운에 대형 수직 수조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수조들을 보면서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수조를 위에서 중간에서 아래서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설계되었다. 안내판에 보니 총 580종 39,000마리의 바다생물을 전시하고 있다고 소개 되었다. 수족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함보다는 대형수조와 대담한 전시시설이 돋보이는, 그래서 일본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대륙적이고 서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대형 수조 속에 해녀 아니, 해남(海男?) 한 사람이 빨판 같은 것으로 모래를 뒤적이며 다니고 있었다. 추측컨대 아마도 물고기들의 배설물 즉, 똥을 치우는 것 같았다.
오사까 항구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 일행은 늘푸른교회 홍이석 목사님의 부드러우나 무시무시한 협박에 일본 동전 1원까지도 다 헌금으로 내어 놓은 후 사자머리 이주부 목사님과 아쉽게 작별하였다. 그리고 입국 때와는 달리 출국 수속을 간단히 마친 후 우리 일행을 부산까지 실어다 줄 팬스타호에 올랐다. 역시 그 배에 그 승무원들이다.
저녁식사 후 식당에 모여 조별 발표회 및 간증의 밤을 갖었다. 떠날 때의 어색함과 서먹함은 간 곳없고 다들 뭔가 큰일을 해낸 자부심과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은혜가 충만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성문교회에 도착하여 폐회예배를 드렸다. 그 와중에도 풍성한교회 송용호 전도사님은 공동 짐 박스를 이리 저리 챙기며 그 풍성한 몸을 부지런히 놀린다. 아- 지금까지 우리 송씨 가문에 이런 꼼꼼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일솜씨는 뛰어났다. 점검, 확인 또 점검이 그의 생활신조이리라. 전쟁이 벌어지면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부대의 활약 여부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듯 그의 꼼꼼함 덕분으로 우리 선교단 일행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부산항에 입항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마무리에 설교를 하는 문수형(성문교회 김문수 목사님, 선교단장)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번 선교 여정을 축복 해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다.”
“이제 여러분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십시오.”
김문수 목사님은 이번 대전남지방 일본선교여행의 총 책임을 맡으신 단장으로 준비 과정에서부터 기도와 말씀으로 스텝들을 무장시키고 준비 사항을 철저히 점검하였다. 또한 선교여행 중에도 아이들의 신상을 소상히 점검하고 파악하여 적절한 조치를 내리는 등 영적 지도력과 함께 신앙 인격의 원숙함을 보여 주셨다.
이윽고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다. 우리는 빙 둘러 서서 손에 손을 잡고 파송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리고 서로 깊게 포옹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되고 자매됨의 진한 사랑과 축복의 말을 주고받았다.
목사님들도 사모님들도 학생들도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며 보석보다 영롱하고 밤하늘의 별똥별 보다 찬란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우리 모두는 가슴에 한 송이씩 성령의 불을 간직한 채 세상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믿음과 순종을 통한 축복의 길을 떠나갔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하시니
너의 걸음걸음 주 인도 하시리 주의 강한 손 널 이끄시리
너의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칠은 광야 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 안에서 주님의 영광 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 힘 늘 주시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고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기록된바‘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