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필기구를 좋아한다. 글쓰는 일을 하기 전부터 그랬으니 직업 때문만은 아니다. 글, 그 중에서도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타자기를 샀다. 그 전까지는 굵은 글씨가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을 주로 사용했다.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연애편지였고 연애편지를 쓸 때는, 아무에게나 줄창 써댈 때는 술술 써지는 튼튼한 볼펜이 가장 알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탁하지도 않고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친구가 나타나, 글씨만 보아도 시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느 정도 수련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법인데 네 글씨는 전혀 시적이지 않다고... 대서소 사법서사, 혹은 지금은 사라진 직업인 필경사(筆耕士) 내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의 조카인 서기의 글씨체를 연상케 한다고... 시로써 입신하려면 일단 양부터 많아야 하는데 너는 스물하고도 댓 살이나 더 처먹도록 시의 시옷 자도 몰랐으니 지금부터 남들 두 배는 써야할 것이라고... 기타 등등의 지적을 하는 것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렇게 충고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시를 쓰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 친구야말로 필경사의 대왕 같은, 차트에나 어울리는 글씨체를 구사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꾸짖자 자신은 그런 서체는 학점과 관련된 시험에나 사용한다, 시를 쓸 때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당장 대여섯 가지의 서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낭만적인 시에 쓰는 서체, 클래식한 시에 알맞은 서체, 즉흥적인 영감에 의한 시의 서체,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좋아하는 서체, 여학생용 서체(이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여학생에게 보여줄 서체와 여학생이 쓸 법한 서체), 화장실 낙서처럼 보이는 서체, 낙서인 서체... 진절머리가 난 나는 누가 쳐도 똑같은 글씨가 나오는 타자기를 사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최초로 쓴 시로 받은 원고료에 부모님을 협박하여 울거낸 돈을 보태어 서울하고도 을지로 2가 지하상가의 사무기 취급점으로 가서 보기에도 웅장한 타자기를 샀다. 그게 바로 레밍턴, 기관총 만드는 회사 레밍턴에서 만든 전동타자기다. 검은색과 붉은색 두 가지로 타자를 할 수 있었고 말 그대로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손가락에 큰 힘을 주지 않고도 기관총처럼 빠르게 글자가 찍혔다.
일단 전원을 연결하면 탱크의 캐터필러 같은 소리가 음산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한 줄이 쳐지면 간단한 키의 조작으로 포탑이 움직이듯 철커덕, 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후우웅…타타타타타타타타타…철커덕…투타타타타타타…철커덕, 콰쾅. 그렇게 해서 무수한 문자와 글과 이야기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하염없이, 거침없이, 쉼없이.
레밍턴 전동타자기로는 16절지 같은 일반용지에 타자하다 보면 종이 갈아 끼우기가 꽤 번거로웠다. 그래서 폭이 대략 3,40 센티미터, 길이가 50에서 1미터까지 대중없는 두루말이를 구해서(병원 엑스레이실에서 나온 종이였다) 타자를 했다. 그 화끈한 두루말이 두 장이면 단편소설 하나는 충분히 나왔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때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나깨나 밤낮없이 타자기를 두드리며 세월을 보내던 차, 어느 날 글자판이 떨어져 나갔다. 원래 영어 글자판이 붙어 있던 곳에 한글 글자를 본드로 붙였던 모양인데 하도 장작 패듯 두드려대니 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본드를 사다가 붙여가며 한 장 쓰고 떨어지면 또 붙이고 쓰고 하다가 얼떨결에 자판을 외우게 되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자판을 외우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이 타자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자기가 굴뚝으로 변신한 건 아니고 엔진이 과열되었던 것이다. 판 곳에 전화를 했더니 수리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무게가 거의 삼십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놈을 들고 가는 게 문제였다. 사가지고 올 때는 한 번만 들고 오면 되려니 하여 어찌어찌 등짐을 지다시피 들고 왔었다. 하지만 고치러 갔다가 고치면 2회, 못 고치면 1회, 하여 확률상 1.5회의 등짐을 져야 하니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타자기를 힘이 좋아 보이는 후배에게 주었다. 후배는 공짜로 받은 타자기를 수리하는 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과, 내가 원래 구입했던 가격의 반쯤 되는 수리비를 들여 타자기를 고쳤다고 했다. 힘이 좋아 보였을 뿐, 정작 힘이 좋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를 볼 때마다 이를 드러내며 원망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친구 애인의 친구가 쓰던 수동타자기를 빼앗아서 써보기도 했고 어느 출판사(그러고 보니 한때 내가 취직한 곳이다) 한 귀퉁이에 비닐 커버가 씌워진 채 놓여 있던 전자타자기라는 물건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워드'라는 이름의 타자기 겸 컴퓨터 겸 프린터가 각광을 받을 때 나는 워드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PC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펜티엄 프로세서를 장착한 노트북 컴퓨터를 쓰고 있다. 이 모두 필기구이며 사용가치와 함께 애완할 만한 속성을 가진, 즉 중독이 될 만한 물건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필기구가 컴퓨터로 일통(一統)되는가 하더니 대세가 되었다. 386, 486, 586, 9600, 33600, 57600, 16, 32, 64, 메가, 기가 하는 숫자들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컴퓨터에 흥미를 잃어 버렸다. 컴퓨터의 발전속도가 내 지식과 인식 수준을 초월하고 추월해 버린 것이다. 마치 유행가 가사가 갑자기 귀에 안 들어오기 시작한 것처럼,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이름이 낯설어지듯.
그렇게 결정이 되고 결딴이 난 지금에야, 특별할 것도 없고 고전적인 것도 아니고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아니며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던 어정쩡한 필기구, 레밍턴 전동타자기가 그리워진다. 그래도 그런 게 세상 어딘가에 몇 개쯤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쓰고 있었으면 좋겠다.
고백컨대 나 역시 시시하면서 무겁고, 낡아서 우스워 보이는 것을 날 잡아서 폐기처분 하는 것을 능사로 알아왔다. 남처럼 속도와 새로움을 추구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런 추구 자체가 촌스럽고 낡고 시시한 게 되어 내가 혹시 폐기처분 되는 건 아닌가.
슬프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고철로 녹슬어가고 있을 레밍턴 전동타자기는 나의 친구였다. 어쩌면 일찍이 가루가 되어 원래 있었던 타자기의 대계(大界)로 돌아가 신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를 레밍턴 전동타자기에 내 인생을 맡긴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