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손민호] 박경리가 끝내 흙으로 돌아갔다.
영정 앞에서 외람된 언사일 수 있겠지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기억 속에서 박경리는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건강은, 나이가 있으니까….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아요. 하지만 혈압약만 먹어. 병원에도 1년에 두 번 정도만 가고.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
박경리는 흙의 작가요 생명의 작가였다. 굳이 『토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전의 그는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손수 무치고 담가 토지문화관을 찾은 후배작가들에게 먹이곤 했다. 농약 한 번 쓰지 않은, 이른바 유기농 야채였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육신에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폐에 종양이 슬었어도 담배를 끊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는 치료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렇게 박경리는 갔다. 흙으로 돌아갔다.
#모진 팔자 드센 인생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초저녁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초저녁’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생전의 작가가 들려준 사주 얘기다.
“초저녁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초저녁 범띠 생이지.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막 먹잇감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할 때잖아. 여자 사주치곤 기가 아주 센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62)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다. 딸의 남편, 즉 선생의 사위는 김지하(67) 시인이다. 생전의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어”라고 되물었다. 1973년에 쓴 『토지』 서문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의 일화도 있다. 박경리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어른이 소설가 김동리(1913∼95) 선생이다. 한데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맨 처음 보여준 원고는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 54년 박경리의 습작시를 일독한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한다. 상심한 그에게 김동리는 대신 “소설을 써봐라” 권한다. 그래서 쓴 소설이 이듬해 ‘현대문학’에 발표된 ‘계산’이다. 박경리의 등단작 말이다. 박경리에게도 인생지사는 새옹지마였나 보다.
#『토지』 그리고 박경리『토지』 1부의 배경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 박경리는 거기 땅 한 번도 안 밟아보고서 『토지』를 썼다. 2부의 주무대가 되는 만주땅 용정도 마찬가지다. 책이 다 나온 뒤에야 그는 소설 속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면 『토지』는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오롯이 작가의 상상에 기댄 것일까.
“『토지』는 6ㆍ25사변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았던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 그것은 빛깔로 남아있어요. 외가는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콜레라)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가설을 위한 망상』, 320쪽)
그 빛깔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박경리는 지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평사리의 악양 들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평사리의 풍경이 소설에 묘사해 놓은 모습과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털어놨다. 몇 해 전 세트를 짓고 TV 드라마를 촬영한 뒤로 평사리는 『토지』의 무대를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연중 부산하다.
누가 뭐래도 박경리는 『토지』의 작가다. 그러나 『토지』는 단순히 한 작가의 대표작에 머물지 않는다. 『토지』는 한국의 현대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이다. 프랑스 문학이 19세기 국민소설의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한국 문학은 『토지』로 인하여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었다.
『토지』가 세운 몇 가지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필 기간 26년. 69년 시작해 94년 8월 15일 완결했다. 권수로 21권이고, 원고지 분량으로 3만1200장에 이른다. 등장인물은 700명을 웃돈다. 『토지』는 또 한국형 문화 콘텐츠의 전형이 되는 작품이다. 수차례 TV 드라마로 방영됐고, 영화ㆍ가극ㆍ창극도 제작됐다. 만화 『토지』와 청소년판 『토지』도 출간됐다. 『토지』의 두 주인공 ‘길상이’와 ‘서희’는 한국소설에서 가장 알려진 캐릭터 중 하나다.
#토지문화관과 청계천박경리는 1999년 강원도 원주 오봉산 자락에 토지문화관(www.togicul.or.kr)을 지었다. 원주 시내에 있던 작가의 집이 개발되자 보상비와 지자체 지원금 등을 모아 세운 문화창작 공간이자 작가 자신의 처소다. 박경리는 여기에 작가 창작실을 마련해 후배 작가들이 공짜로 들어와 서너 달씩 살게끔 했다. 은희경ㆍ김선우ㆍ천운영ㆍ윤성희ㆍ천명관ㆍ백가흠 등이 토지문화관 단골 손님이다.
강원도 인제의 만해마을과 함께 한국에서 두 군데뿐인 작가 창작실을 두고 있지만 토지문화관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다. 현재 15개인 작가 창작실을 더 넓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생전의 박경리는 기업의 후원 따위를 한사코 거절했다. 여기저기에 얼굴 비치며 아쉬운 소리 꺼내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까닭이다. 박경리는 손수 고추밭과 배추밭을 일궜고, 손수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밥상에 올렸다. 생태계 복원이란 큰 뜻 말고도 부식비라도 아껴 보려는 속사정이 담긴 밥상이었다.
토지문화관은 가끔 토론회와 세미나도 주최한다. 몇 해 전 열린 토지문화관 세미나에서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제기됐다. 그 제안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니까 토지문화관은, 청계천 복원의 꿈이 맨 처음 여문 고향인 셈이다.
그 토지문화관이 주인을 잃었다. 딸 김영주씨가 관장으로 있고, 문화예술 단체의 지원이 당장 끊기진 않겠지만 박경리 없는 토지문화관은 생각만 해도 휑하다. 박경리의 빈자리가 벌써 걱정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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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토지’로 ‘홀가분’하게 떠나다
기사입력 2008-05-05 18:01
ㆍ현대문학 거목 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5일 별세한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의 큰 나무이자 세상의 고통과 생명을 품에 안은 넓은 강이었다. 전쟁과 독재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낸 고인은 20세기 한국사를 ‘토지’라는 거대한 피륙으로 직조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5년간 스스로를 글 감옥에 가두고 한 작품에 매진했던 고인은, 노년에 들어 생명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토지문화관을 설립해 후배작가들의 뒷바라지에 애썼다.
고인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탓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져 진주고녀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듬해인 46년 김행도와 결혼, 딸 영주씨 등 1남1녀를 두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는 바람에 홀몸이 됐고, 전쟁 직후 아들을 잃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다. 그후 “시보다는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동리의 권유에 따라 단편 ‘불안시대’를 썼고 55년 ‘현대문학’에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돼 문단에 나왔다.
고인은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가 장편으로 옮겨갔다. ‘계산’ ‘불신시대’ ‘암흑시대’ 등 초기 단편은 작가의 신변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후 ‘성녀와 마녀’(60년), ‘김약국의 딸들’(62년), ‘시장과 전장’(64년) 등의 장편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성녀와 마녀’는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 여성의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또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집 다섯 딸과 어머니 한실댁의 삶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렸으며,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행복과 이념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그러나 박경리의 본격적인 작가인생은 ‘토지’와 함께 꽃피웠다. 43세이던 69년 시작해 68세인 94년까지 25년간 5부로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21권)는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최고, 최대의 역작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원고지 4만장에 써내려갔다. 몰락한 최참판댁 손녀 서희와 그의 남편이 되는 하인 길상이를 비롯해 700여명의 인물이 명멸하는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은 역사소설과 달리,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민족의 역사를 형상화해 ‘창안적 역사소설’(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로 명명됐으며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토지’는 주인공이 따로 없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뼈마디와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탈중심적 성격으로 서구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보여주는 동시에,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다.
고인은 운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뤘다. ‘토지’는 물론이고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의 주인공은 모두 운명이라는 초인간적 힘 앞에 선 문제적 인간이다. 이는 작가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불행은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데서 그치지 않고 사위 김지하 시인의 민주화운동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인지 작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생이 행복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유명한 딸보다는 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효도인데 나는 불효막심했다”는 회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직전 통영을 떠났던 그가 2004년까지 50여년간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창작활동으로 바빴다”고 하지만 고향에 불행한 추억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 역시 집필기간 동안 일절 방문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료에 의존한다든지, 생생한 현장이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만년의 그는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였으며 후배작가들을 뒷바라지하는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했다. 작가가 17년 동안 살던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도시계획으로 사라지는 것에 반대한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99년 6월 토지문화관 건물이 세워졌다. 이곳은 문화계 인사들의 집필실이자 문화사랑방이었다. 2006년에는 사재를 털어 창작전용관을 세웠다. 작가는 이곳에서 낮에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단박한 일상을 영위했다.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던 작가 윤대녕씨는 “후배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인사조차 받지 않으시면서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 내려보내셨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2003년 ‘토지’의 후속편인 지식인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시작했으나 ‘현대문학’에 연재하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했으며, 지난 3월에는 8년 만에 ‘까치설’ 등 시 3편을 역시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윤정기자>
| 박경리는: 수난의 민족 운명 보듬은 현대문학 거목 |
| 입력: 2008년 05월 05일 15:2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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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별세한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자 세상의 고통과 생명을 품에 안은 어머니였다. 그는 한국인의 자화상인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말년에는 생명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강원도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설립, 후배작가들의 뒷바라지에 애썼다.
그는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아버지에게 학교 등록금 문제로 대들었다가 관계가 틀어져 진주여고를 1년 늦게 졸업했다고 한다. 여고 졸업 후 46년 결혼한 그는 6.25 전란 중 남편이 납북되는 바람에 홀몸이 됐고 전쟁 직후 아들을 잃는 단장의 슬픔을 겪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다가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돈암동 집을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던 것이 본격적인 문학 행보의 첫걸음이 됐다. 당시 김동리 선생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 권유에 따라 단편 '불안시대'를 썼고, 55년 '현대문학'에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어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초기 대표작인 '김약국의 딸들'(1962년)을 쓰면서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시장과 전장'(64년), '파시'(65년) 등의 역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특히 69년부터 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5부로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전 20권)는 그의 최고 역작으로 꼽힌다. 작가는 구한말부터 해방기까지 민족 수난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3만장이 넘는 원고지에 촘촘히 써내려갔다.
'토지'는 몰락한 최참판댁의 유일한 후계자인 서희와 그의 남편이 되는 하인 길상이를 비롯, 7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놀라운 증식력을 자랑한다.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며, 세번이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중과도 친숙하다.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통해 '운명'이라는 추상적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어왔다. '토지'는 물론이고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파시' 등의 주인공들은 모두 운명이라는 거대한 초인간적 힘 앞에 서 있는 문제적 인간들이었다.
작가의 개인적 아픔도 끊이지 않았다. 외동딸 김영주씨와 결혼한 사위 김지하 시인은 유신체제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이 때문인지 작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생이 행복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유명한 딸보다는 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효도인데 나는 불효막심했다"는 회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직전, 고향 통영을 떠난 뒤 2004년까지 50여년간 그곳을 찾지 않았던 일화도 유명하다. "수줍음 많은 성격을 타고난 데다 창작활동에 몰두하느라" 바빴다는 것이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 역시 집필기간 동안 한번도 찾지 않았다. "자료나 현장 답사가 작가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자료에 의존한다든지, 생생한 현장이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는 것도 사실"이라는 설명이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변한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글감옥에 가둬놓고 치열하게 원고지와 씨름한 삶이었다.
만년의 그는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설파했으며, 후배 작가들을 뒷바라지하며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했다. 작가가 17년 동안 살던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도시계획으로 사라지는 것에 반대한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99년 6월 강원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 건물이 세워졌다. 이곳은 문학과 자연, 인생을 논하는 문화사랑방으로 자리매김됐으며 문화계 인사들이 누구나 와서 머물며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작가는 낮에는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담백한 일상을 영위했다. 2006년 5월에는 사재를 털어 귀래관이라는 이름의 창작전용 건물을 문화관 입구에 세우기도 했다.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던 소설가 윤대녕씨는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인사조차 받지 않으시면서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 식당으로 내려보내곤 하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또한 쓸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창작의지를 불태웠던 진정한 작가였다. 2003년 '토지'의 후속으로 '현대문학'에 지식인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시작했으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아쉽게 끝내지 못했고, 지난 3월에는 8년만에 '까치설' 등 시 3편을 역시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했다. '목에 힘주다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쳐 혹이 생긴다/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인생을 깨닫지 못한다/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뽐내어본들 우리는 도로무익(徒勞無益)/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원주 토지문화관 1층에 걸린 이 글이 생전 주인의 성품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한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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