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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태동했던 도시들 중 그 어떤 곳도 향을 사용하지 않았던 곳은 없다. 향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사용 목적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용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인류와 더불어 동고동락해 온 향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라에 따라 그 쓰임새나 취향도 다르게 변했다. 향의 쓰임새가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지형과 기후조건, 그에 따른 의식주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향 문화는 그 민족의 체취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육식을 주로하는 서양에서 향문화가 발전했듯이 말이다.
이렇듯 교역의 발달로 각 나라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 향 문화의 교류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새롭고 다양한 향을 탄생 시켰다. 나라마다 향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모습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지 이제부터 향의 고향을 찾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집트: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이집트는 나일강을 끼고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운 나라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가장 오래전에 향료를 사용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나일강 하류에서 발생한 햄족은 B.C 4000년경에 이집트 통일 왕국을 건설 했으며 피라미드와 신전. 상형문자, 천년역법 등 괄목할만한 문화를 이룩했다.
B.C 6세기 말까지 흥망을 반복했던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문화의 틀을 구축하였으며, B.C 7세기경에 이르러 향료가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향료의 제조와 교역은 고대 이집트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향료는 화장품과 더불어 대부분은 제식용으로 쓰였으며, 훈증요법 등을 통한 치료제와 미약 (최음약)으로도 사용되었다. 기록상에 나타난 향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B.C 2400년경 이집트 제 5왕조 시대의 왕이었던 사후 라(Sahu-ra)로 8만 포대의 향료를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제11대 왕조때 만들어진 석관에 새겨진 "가축을 도살하고 산양을 잡아 제물을 마련하고 불에 향료를 던져····· " 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집트는 향료문화의 천국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종교의식과 장례의식용으로 많은 향료가 사용되었다. 마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몰약, 삼나무, 시더우드의 정유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나무를 압착하여 추출한 순수 정유로 이집트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몇 개의 작은 항아리들이 이 기록을 뒷받침해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증류법은 아리비아인들이 창안했다는 시기보다 무려 2,000년 앞서 이집트에서 행해졌다는 것이 된다.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면서 시체 부식을 막기위해 향료를 사용했는데 투탕카멘(Tutankhamen) 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18세에 사망한 이집트의 제18왕조 투탕카멘의 능묘가 1922년 3,000년의 암흑을 벗고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다. 투탕카멘의 유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은 주로 종교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웠으며 시체 보존을 위한 방부제로 향료를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몰약이라고 알려져있는 미르(myrrh) 오일은 특히 미라를 만드는 작업에서 많이 사용된 향료로 '미르' 라는 단어에서 '미라(mirra)'가 유래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향고가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강한 방부성을 가진 유향과 보류성이 높은 방향성 수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향료와 화장품 제조술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시대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가 절정의 시대였다. 가히 전설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클레오파트라는 향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순수 이집트 혈통이라기보다는 오이려 히랍인에 가까웠다. 클레오파트라는 결코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마르크스 안토니우스뿐만 아니라 줄리어 시저를 정복하기에 충분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향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덕분에 마르크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손을 부드럽게하고 손에서 향이 나도록 하기 위해 400데나리온(당시 성인 1인 하루 임금이 1데나리온 이었음) 이라는 막대한 돈을 주고 구입한 향고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키피'라는 조합향료가 제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향유는 붓꽃, 몰약, 육계, 등에 송진과 벌꿀을 조합하여 정신을 맑게하고 기분을 좋게하며, 수면을 촉진하는 작용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제조법이 복잡하여 향유 0.5리터를 만드는데 무려 1년 이상 걸렸으며 주로 돌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용기에 담아 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클레오파트라는 유람선 돛대를 장미로 장식하여 바다에서도 그 향을 맡을 수 있게 했다 . 향을 즐기고 사용할줄 알았던 고대 이집트 여성들은 강한 태양열로 인해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매일같이 향유를 바르고 화장을 했다.
이집트 남자들이 향유를 바르고 사용했던 방법은 단단한 향고를 머리위에 올려놓아 체온으로 향고가 서서히 녹게하는 것이었다.
나일강 연안과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공장이 건설되어 다양한 종류의 향료를 만들어 냈다.
이 향료들은 그리스, 멀리는 인도까지 퍼져 귀족들의 기호품으로 애용 되었다.
바빌로니아(Babylonia): 바빌로니아는 세계 최고의 문명발상지로 셈족(Sem) 의 아카드인이 B.C 1200∼2000 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세운 왕국이다.
특히 제1왕조의 제6대 함무라비왕(B.C. 1792∼1750)은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확립시켜 나갔다.
강력한 왕권을 기초로 43년 간 통치 하면서 정국을 안정 시켜 대제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세기의 대업인 메소포타미아의 통일을 이룩했으며 이를 토대로 마르둑 신의 숭배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의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B.C 1800년경의 바빌로니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이 판은 '수입된 삼목, 몰약, 그리고 사이프러스 오일' 에 관한 주문서로 히말라야삼나무 정유 추출액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국제적인 향료 무역이 이미 4,0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종교적인 용도 외에도 유난히 치장을 좋아했던 바빌로니아인들은 여러 종류의 향목을 태워 그 향을 활용했다.
헤로도토스는 바빌로니아 시대의 엄청난 향수 소비에 관해 "남녀를 불문하고 귀족들은 온몸에 향수를 뿌렸으며 거대한 연회에서 황금으로된 그릇에서 향운(香雲)이 하늘로 피어 오르도록 했다" 고 언급했다.
또한 이들 향료나 값비싼 화장품, 연고 제품은 수메리아 시대를 거치면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어 다른 나라에서까지 명성을 떨쳤다.
발굴된 유물들중 여러 가지 모양의 조각이나 정교하게 디자인된 파우더 상자, 연고병 등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용기 중에는 25가지 성분을 섞어 제조한 '로얄 오인트먼트(Royal Ointment)' 라는 마취성 향료를 담아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땅 속에 잠들어 있었던 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 대중에게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사용되었던 향료 및 화장품은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바빌로니아 제국은 점차 국력이 쇠약해져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최초로 통일한 바빌로니아의 문화적 가치와 업적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시리아(Assyria): 아시리아는 B.C. 2000년경 수아르, 아르벨라, 칼라크, 니니베의 주요 도시로 구성된 국가로 셈 계 아시리아인이 세운 제국이다.
아시리아 문화는 바빌로니나의 영양을 많이 받았다. 아스르나시팔 2세, 살마나살 3세, 아수르바니팔 왕에 이어지는 통치 기간 중 건축, 문학, 조각 등 다방면에 걸쳐 황금기를 맞았다. 아시리아의 문헌들을 보면 화장품 및 의약품에 관한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여 종이나 되는 약초를 추출하여 만든 약들은 매우 유명하여 의술이나 종교행사, 화장용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당시 아시리아인들은 의술을 행할 때 질병을 퍼트리는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정성들여 치장을 하고 향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볼 때 이들은 의약품과 향에 대해 매우 박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형문자로 새겨진 '아시리아 서적(B.C 2000년부터의 기록을 모은 판) ' 에는 향기로운 유약과 향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향을 가미한 음료는 호흡곤란 증상을 치료하는 데 좋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오늘날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 의 근원이 되고 있다.
아시리아 왕들은 늘 곁에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는데,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강조 하기위해 장신구를 이용해 치장을 했으며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더불어 향수류가 많이 애용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는데, 시리아나 남부 아라비아와의 교역에서 얻어진 향유가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합성법이 전래된 이후에는 합성 향유를 이용한 향유가 널리 사용되었다. 왕과 상류 계급에서는 치장하기를 무척 즐겼는데 이러한 관습들로 인해 턱수염, 머리카락등에 광택을 주는 화장품도 발명되었다.
아라비아(Arabia): 동서양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비잔틴문화를 이룩해 낸 동로마가 쇠퇴해 갈 즈음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셈계의 사라센족이 흥하고 있었다.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로 광대한 사라센제국을 건설하고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전개했다.
자연 과학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연금술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증유법과 이에 대한 화학 관련 서적이 다수 저술되었다. 향과 향수가 일상 생활에 걸쳐 두루 애용되었던 이슬람교국에서 향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표현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10세기 말에 증류법을 창안해낸 사람은 아라비아의 의사 아비센나(Avicenna) 였다.
그는 58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면서 거의 100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최초로 장미(로사 센티폴리아) 증류에 성공한 아비센나는 뒤이어 여러 식물 정유와 향수를 증류했다.
아비센나의 증류법 창안은 화학 분야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꽃의 정유 이외에도 사향과 용연향 등의 동물성 향료를 첨가한 새로운 향유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향유 증류법은 곧 실용화되었고 아라비아 향료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흔히 동양의 신비로움을 연상시키는 오리엔탈 향은 바로 아라비아의 향유에서 기원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인들도 향을 사용했다.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에는 사향의 사용에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사향은 아랍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으로 이슬람에서는 사원을 지을 때 흰 반죽에 향을 섞어 건물을 지을 정도로 향을 애용했다.
마호메트 역시 향수를 애용하여 극동 지역에서 들여온 안식향, 백단, 송진 등 희귀한 나무로 만든 향유와 꽃을 원료로 한 향수를 즐겨 사용했다.
그의 12명의 아내 가운데 마호메트가 가장 총애한 아내가 종종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에 향수를 발라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아랍인들은 용연향이 섞인 장미유나, 오렌지꽃, 혹은 제라늄, 재스민 향유가 가득 담긴 "마리샤"라는 향수를 손님에게 듬뿍 뿌려주는 것을 예의로 여겼으며 집안에서는 항상 향이 퍼져 나오도록 했다.
『천일야화(千日夜話, 아라비안 나이트) 』에서는 숨이 막힐듯한 동물성 향료가 미약으로 이용되어 환상적이고 관능적인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스(Greece): 그리스인들은 향수의 기원을 신에게서 찾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향품에 관한 지식을 비너스의 용정인 에온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그리스에서는 향과 관련된 신화도 많다. 비천한 희랍 장인의 딸인 밀토는 장미향으로 인해 사이프러스의 총애를 받는 아내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몹시 가난했던 밀토는 값비싼 제물을 드릴수가 없어 매일 아침 신선한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제사를 드렸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뺨에 종기가 자라나기 시작해 큰 슬픔에 빠졌다.
어느 날밤 아프로디테가 꿈에 나타나 그녀에게 제단에서 장미꽃 몇 송이를 빼어 뺨에 바르라고 말했다. 여신이 일러 준대로 하자 그 종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그녀는 마침내 사이프러스의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되어 페르시아의 보좌에 앉게 되었다. 그리스의 치유의 신인 에스쿨라피우스의 신전과 아프로디테 신전에 있는 대리석판에는 여러 가지 향료 약품 처방이 새겨져 있다.
신화의 따르면 아폴로의 아들이며 요정인 에스쿨라피우스는 나중에 욕실과 치료센터를 갖춘 건강시설이 들어선 큰 도시가 되었다.
그 당시 향료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한사람은 테오프라스토스 (Theophrastos, BC 370∼285) 였다. 그는 향료의 혼합법, 정유의 특성, 건조한 꽃이나 생약의 이용법, 저장법 등 많은 연구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플리니우스(Plinius, BC. 79∼23)는 향료의 제조에 큰 공적을 남겼다. 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BC. 460∼377)는 질병의 예방이나 건강을 위해 향료를 탄물로 목욕을 하거나 향유를 이용한 마사지를 권유하기도 했다. 신체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향 처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향은 종교의식과 위생 용도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문화의 한 형태를 이루었다.
또한 개인의 치장용등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사치스런 향 풍습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상류계층에서는 향료를 매우 귀중하게 여겨 종교의식과 고인을 추모할 때도 향유를 사용했으며 향료병을 시신과 함께 봉헌했다.
몸에서 향이 풍기도록 하기위해 향유를 발랐는데 주로 붓꽃의 뿌리나 장미에서 채취한 향유를 이용했으며, 신체 부위별로 각기 다른 향료를 사용했다.
그리스에서는 신들의 제단에 바치는 향료와 향유를 제조하는 '조향사'가 있었으며 이를 신성한 직업으로 여겼다. 신에게 훈양하고 죽은 사람에게 향료를 뿌리는 습관이 일상화되어감에 따라 향 제조기술뿐만 아니라 조향사의 사회적 지위도 점차 높아져 제사장의 위치와 동등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이 향료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자 한때 아테네의 솔로몬은 향수 판매 금지 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는 방향뿐만 아니라 훈향을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널리 이용되었다. 페스트가 기세를 떨치자 향이 짙은 식물을 태워 페스트의 전염을 방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향을 이용해 페스트의 전염을 방지하려 애쓴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425)나 히포크라테스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듯 그리스에서는 향이 사회전반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처음으로 장미, 마요라나 등의 꽃으로 향이 나는 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향수를 만드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스의 향 문화는 연회장을 장미로 장식하고, 음식물에 바르거나 태워 향이 스며들도록 할 만큼 번성했는데, 그 풍습은 로마인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마(Rome): 로마시대는 문화의 황금기라 불리울 정도로 전 분야에 걸처 찬란한 꽃을 피웠다. 그리스의 사치스런 향료문화가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천연향료를 즐겨 사용했던 로마인들은 동방에서 향료가 전래되면서 사치스러울 만큼 많은 향료를 소비했다. 로마의 벨라브룸에서는 비쿠스 드래리쿠스(Vicus thraricus)라는 지역에 웅켄테리(unguentarii, 향료 제조업자)를 두어 향품을 제조했다.
로마인들은 창포, 육계, 몰약 그리고 수지넘(susinum)과 창포, 카더멈, 멜리사, 감송향과 몰약으로 만든 향유 나디넘(nardinum)을 즐겨 사용했다. 또한 27가지 향료가 배합된 향수 '황제의 향'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이었다. 폭군의 대명사인 네로 황제는 특히 장미향을 좋아했는데 장미꽃 물로 가득 채운 욕조에서 목욕을 즐겼다.
그는 왕비의 장례식에 향료 공급지인 아라비아의 연 생산량보다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하여 '향수 광' 이라 불리기도 했다.
로마인은 진귀한 향유를 사용했는데 특히 장미, 수선, 창포, 침나무(계수나무), 몰약 등이 주로 쓰였다. 또 실내에는 방향제, 의류나, 침대 등에는 고체나 분말 형태의 향료를 사용했다.
로마 귀족들은 정원에 테리움이라는 냉욕실을 갖춘 목욕탕을 두었다. 내부는 고가의 대리석에 정교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고, 아치형의 우아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온수는 아름답게 세공된 은이나 청동의 관을 통해 흘러나왔으며, 욕조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귀족들은 '프리지테리움' 이라는 냉탕에서 '데비테리움' 이라는 미지근한 탕을 거쳐 '카르테리움' 이라는 뜨거운 탕에서 몸을 씻은 후 마지막으로 '웅크테리움' 이라고 하는 방에서 장미, 수선화, 백합 등의 향유가 담긴 유지를 발랐다.
심지어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들까지도 만약 전쟁터에서 죽을 경우 자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위해 향료를 뿌리고 적과 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은 공예품에 담긴 용연향이나 사향 등은 그 무게만큼의 금과 맞바꿀 정도로 비샀다.
따라서 향료는 특정인만의 소유물이었고, 부의 척도로 여겨져 한때는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초기 로마 귀족 사회의 사치품으로 쓰이던 향료는 얼마 안 있어 시민들에게도 널리 애용되었다. 로마인들은 머리와 옷, 목욕용품은 물론 집안 곳곳에 향을 내기 위해 많은 양의 향유를 사용할 정도로 향을 즐겼다.
이시기에 특히 즐겨 사용한 향품은 향고 '레이디스마타(ladysmata)', 향유 '다이어페이스마타(diapasmata) 등 크게 세 종류를 들 수 있다. 향료가 시민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화장품 제도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 했는데 오비드(Ovide)는 화장품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이 분열하는 동안 동로마에서는 동양과 서양 문화가 조화, 절충된 비잔팀 문화가 번성했다.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서 물자 교류의 요충지로서 향료 무역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이때부터 향료에 관한 화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향료의 화학적 발전과 더불어 연금술사들이 민들어낸 알코올은 진정한 의미의 향수가 탄생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화학과 식물학에 식견이 높았던 수도원의 수사들의 의해서도 향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로마 멸망후 잠시 사그라들었던 향료의 사용은 십자군 원정에서 패한 십자군 병사들이 동양의 신비롭고 관능적인 향을 구입해 귀향하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이들이 가져온 동양의 관능적이며 신비로운 향료는 서양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향은 다시 대중들의 생활 속으로 번져갔다.
15세기 로마의 귀족 가문인 프랜지파니(Frangipani) 가는 프랜지파니 향수를 탄생 시켰다. 처음에 이 향은 건조 분말 형태였으나 메르쿠티오 프랜지파니에 의해 액체 상태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있게 되었다.
1492 콜럼버스가 서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신항로에 대한 탐험이 서방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 항로의 발견은 유럽국가에게 동양의 향료를 직접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항구 도시인 베네치아는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에서 상인이 들어오는 상업 중심지로서 유럽국가에 향료를 조달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유럽인들은 이곳을 통해 동양의 정교한 비단과 자수품, 향료 등을 선호했고, 그 결과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부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스(France): 프랑스는 향료식물의 재배에 알맞은 자연조건과 뛰어난 조향사, 오트 쿠튀르들에 의해 '세계 향료의 메카'로 불리워 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에 걸맞지 않게 초기에는 페스트 등 각종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용도로 향료가 사용되었으며, 자체적으로 향료를 개발하기보다는 동양의 향료를 수입해서 사용하거나 모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190년에는 프랑스의 국왕 필립 아우구스트(필립2세)가 '향료, 장갑 제조업자 영업 조례'라는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향수 제조업을 공식적으로 허가하고 전문 제조가에게 면허증을 발급했다.
12세기 초가 되어 파리에 자생적(自生的) 향수 판매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3세기 말 라벤더 향수를 시작으로 해서 자체적으로 향수 제조, 판매를 시작했다.
15세기 루이 15세 때에는 '향기의 궁정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향수가 대단히 많이 사용되었다. 루이 15세는 자신의 전담 조향사를 두어 감정이 격앙될 때나 불안할 때, 권태로울 때 각기 다른 향을 사용했다.
한편 그의 애첩인 뒤발리 부인이 향수를 애용함으로써 유행을 부추기기도 했다고 한다. 16세기 앙리2세(1519∼1559) 시대에 이르러 향수의 제조 및 판매는 중요한 상거래 중 하나가 되었다.
앙리2세의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의 왕가로 시집올 떄 본국에서 자신의 전담 향수 판매상을 데려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피렌체 출신의 르네(Rene)였다.
당시 르네는 파리의 퐁토샹쥬(Pont au Change)에 팬시숍을 열었다. 이 팬시숍은 16세기 말 파리 사교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파리의 생토노레 19번지에는 향수를 판매하는 상점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상점으로는 ' 아 라 코르베이유 드 플뢰르(A la Corbeille de Fleur, 꽃바구니)' 라는 향수 전문점과 장 프랑수아 우비강(Jean Francois Hobigant) 이 오픈한 향수숍을 들 수 있다. 우비강은 향수와 분, 포마드 외에도 향 장갑 및 식물 성분의 입술 연지 등을 판매했다.
물론 그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마리 앙트와 네트 였다. 향료 제조가 가장 활발했던 곳은 가죽, 유리 제조로 유명한 그라스(Grasse) 지방이었다. 그라스는 6, 7세기경 지중해 연안의 켈트족의 약탈을 피해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라스 지방이 향과 연관되어 공업과 상업이 번영하게 된 계기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 왕비가 데려온 '톰바레리' 에 의해 향료가 처음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원래 가죽산업이 번성했던 그라스는 이때부터 향수의 메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은 가죽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용했던 향수가 단일 상품으로서 전망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과감히 향료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시대에는 가죽제품으로 된 옷이나 제품이 유행이었다. 따라서 향료 역시 장갑이나 의류 등에서 나는 역겨운 가죽 냄새를 지우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아직 뿌리는 향수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이 시기에 의류 자체에서 향이 나게 한 것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성들은 향기나는 조끼를 여성들은 향기 나는 스커트와 장갑, 부채 등의 장신구를 애용했다. 향기 나는 가죽제품은 다양한 향수제조를 가능하게 해 향문화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로 수출되어 국가 재정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지닌 그라스 지방은 향료 식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조건 또한 그라스에서 향이 번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건이다. 17세기에 이르러 향수 산업이 점차 이탈리아와 니스로 옮겨지게 되자 그라스는 독자적으로 정유산업을 발전시켜 갔으며 향료식물을 그 지방의 기후에 적합하게 접목, 개량하면서 새롭게 재도약을 시도했다.
18세기 구체제를 몰락시킨,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프랑스 혁명'의 성과로 시민의 권위가 크게 신장됨에 따라 향수는 시민 계급으로 확산되었다.
18세기 이후 프랑스에서는 초기 라벤더와 같이 단일 향만을 사용했던 것에서 발전하여 여러 가지 성분을 조합한 수 십 가지의 다양한 향이 만들어졌다.
가장 인기를 끈 대표적인 향은 오크모스, 사향, 용연향, 백단향, 오리스, 장미 등을 혼합하여 탄생한 시프레향 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오 드 콜로뉴를 일주일에 반 병, 스페인산 재스민 향유를 한달에 60병이나 비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조세핀은 사향과 영묘향 등의 관능적이고 도취적인 향들을 선호했다고 한다.
19세기 들어 겔랑, 모리나드 등의 향수 회사가 등장하면서 향수산업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남성용 향수도 보편화되면서 프랑스는 패션과 더불어 세계적인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며 세계향수의 메카로서 향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인도(India): B.C. 3000년 인더스강 하류에 고도의 문화를 꽃피운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인도의 신 중에는 향기만을 먹고사는 신이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향을 먹고 몸에서 향을 내는 향신(香紳) 건달바(Gandharva) 가 바로 그 신이다.
인도의 '간다라(Gandha)문화' 와 '건달바(Gandharva)' 의 '간다(Gandha)' 는 산스크리트어로 '향기'를 뜻한다. 불전에는 "향기란 신성한 것이며 심신을 부양하는 것"이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향, 이것은 여래의 사자가 된다(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떠오르는 향연을 따라 부처에게 통한다)"라는 구절도 있다. 불저네 의하면 향적여래가 살고있는 곳을 '흥춘국' 이라고 부르며 이곳의 건물은 모두 향목으로 만들어져 있고 정원에는 향초, 향화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향기로운 바람이 항상 감돌고 있다고 한다.
그 향을 맡는 것 만으로도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하니 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법화경에는 전신의 피부에서 향을 바라는 것이 미인의 조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약 2천여 년 전 인도에서 저술된『성애(性愛) 의 경전』에는 "안방에 부인들이 거쳐하고 바깥방엔 주로 남자들이 기거하는데 그 방엔 언제나 향료가 가득해.........소파 근처에 화구, 향수병, 책, 그림 등을 준비하여.............."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인도는 레몬과 오렌지 등 서양에 여러 가지 향료를 전해주었으며 환영의 표시로 손님에게 장미 향유를 뿌려주는 관습이 있을 정도로 향유를 애용한 나라 중 하나이다. 초기 향료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불교나 힌두교의 종교의식과 제사의식에 주로 쓰였다.
인도에서 향은 길조를 상징하여 신에 대한 경배의식에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으며, 동양적인 향이 주는 관능미와 향수 제조가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인 특권은 향문화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장미향유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무굴제국의 왕 자항기르의 아내인 누르지하 왕비라고 한다.
왕비는 늘 목욕타에 장미꽃을 뛰우곤 했는데, 어느날 향이 좋은 얇은 기름막이 뜬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장미 향유를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Akbar, 1556∼1605)는 향수를 무척 좋아하여 왕이 직접 향수를 제조하기도 했다. 인도 바라문교의 성전인 『야주르베다(Yajor-Veda)』에는 다양한 향 제조법과 사용법이 수록되어 있다. 백단향은 향료나 미용품으로 사용되었고, 연고 형태인 감송향은 왕과 대사제의 머리 위에 붓기위해 사용되었다.
예로부터 인도 사람들은 백단향을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 결혼식 등 여러 행사에 백단향을 비롯한 갖가지 향을 사용했는데 신부들은 결혼하기 한달 전부터 향유를 넣은 탕에서 향목욕을 하여 몸 전체에 향이 풍기도록 했다고 한다. 백단향, 알로에, 장미, 재스민을 섞어서 만든 연고 어쥬자(urgujja)와 우시라(usira)는 화장용으로, 베티베르의 뿌리로 조제된 연고는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도산 향수는 품질이 우수하고 다양하여 중세 때부터 향료무역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상달, 카넬, 팔마로사, 세드르 히말라렝, 브와데 글그 등의 향품들은 멀리 유럽에까지 수출되었으며 페르시아와의 교역품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중국(China): 중국은 일찍부터 황하강 유역의 황토지대에 문명의 싹을 틔웠다. B.C. 1000경에는 도기 문화를 탄생 시켰으며 향료 역시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향료는 여타의 나라들이 그랬듯이 지도층의 전유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다. B.C. 1000년경에는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도 질병치료에 이용되었으며 불교권의 확대의 따라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에서는 장목(樟木, 녹나무)을 증류하여 얻는 장뇌유(樟腦油), 장뇌유보다 향이 짙고 우아한 용뇌유(龍腦油), 최고품으로 분류되는 사향, 침단향 등의 다양한 향이 궁궐 내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제조되었다. 이렇게 제조된 향료는 국제적인 교역품이 되었다.
B.C. 2000년경 한무제 시대에는 낙양, 장안, 돈황을 거쳐 천산남북로를 경유해서 지중해에 이르는 실크로드(Silk Road) 가 만들어져 해로 (해상무역에) 이어 동서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길을 통해 믾은 문물과 함께 향료도 서양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동양적인 신비함과 관능적인 향을 풍기는 향료는 서구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왕이 기거하는 궁궐의 기둥에는 침향과 백단을, 벽에는 유향이나 사향을 발라 건물 전체에 향이 풍기게 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향약생약(香藥生藥: 정자, 감송향, 청목향, 규심, 당귀, 사향) 등을 잘게 부수어서 꿀을 섞어 환약으로 만들어 항상 복용시켜 몸에서 향을 품어내는 방향 미인을 키웠다고 한다.
또한 최상급 향료로 불리던 용뇌(龍腦) 가 황제에게 헌상되었다. 향이 사용된 일례를 살펴보면 송나라의 재상을 지낸 조정(趙鼎) 은 그가 거쳐하는 마루 네 구석에 좋은 향불을 피워 놓고는 마루 이름을 '향운(香雲)' 이라 지었다.
하며, 당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 역시 다량의 용뇌향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나라의 휘종 황제의 황후 옥요는 향을 통해 병을 치료했으며, 당나라 현종(재위 713∼755)대에는 베트남의 하노이 지방에서 용뇌를 헌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중국사의 3대 미녀인 서시, 양귀비, 향비는 뛰어난 재능과 절색의 미모에도 자신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할 요량으로 향료를 애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귀부인들은 비단옷으로 만든 향낭을 패용하기를 즐겼는데 일반 백성들 역시 옷에 향을 뿌려 향긋한 냄새가 풍기게 했으며, 머리에는 사향, 용연향 등의 포마드를 발랐다. 방에는 선향을 피워 향으로 가득 채웠으며 향연에는 향을 입힌 종이를 썼다.
그리고 유난히 다도를 즐기는 중국인들은 차를 마실 때에도 차에 꽃잎을 띄워 그 향을 더욱 그윽하게 했다. 일찍부터 화려한 도기문화를 꽃피웠던 중국에서는 향료를 담기 위한 다양한 용기들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토기에서부터 중국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자기류, 코구멍에 바짝 대고 향을 즐길 수 있는 비연호(鼻煙葫) 라 불리는 소형 향수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Japan): 일본인은 향에 대해 비교적 민감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목욕 문화가 성행함에 따라 향의 사용도 함께 발달했다. 욕실 창가에 향수병을 놓아 두어 뜨거운 물의 열로 향이 욕실 안에 가득하게 했으며, 욕탕에 향유를 넣거나 혹은 욕조를 향이나는 나무로 장식하고 목욕 용품 등에 향을 뿌리는 방법으로 향을 사용하기도 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건축 환경도 향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나무, 다다미, 종이 등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이 자연의 향과 조화되어 아주 독특한 향을 창출해 낸다. 헤이안(平安) 시대에는 향수가 비단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는데 왕궁에서는 사향, 백단, 알로에, 정향, 장뇌 등 고가의 향료를 중국에서 다량 구입하여 사용했다. 남성도 여성 못지않게 향 나는 옷을입고 풍아(風雅)를 즐겼을 정도로 향은 풍류를 즐기는 데 필수 요소였다.
향을 이용한 놀이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11세기 헤이안 세태를 묘사한 장편소설 『겐지 이야기(源氏 物語)』에는 향을 맡고 알아 맞추는 놀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오늘날에는 겐조,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시세이도, 가네보 등 세계 굴지의 오트 쿠튀르들과 화장품 회사들이 다양한 향수를 선보이며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와 같아 일본 특유의 독자적인 향 문화가 발달하고 오늘날 일본의 향수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것은, 육지와 고립된 섬나라라는 일본의 독특한 지리적 상황 외에도 오래 전부터 향이 생활 전반에 자연스럽게 응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Korea):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을 중시햇다.
이런 연유로 고대 사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향과 화장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정계급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유물이었던 향은 종교의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불교문화의 전래와 함께 오랜 제사의식을 통해 향의 종교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제정일치 사화였던 고대 사회에서는 제천(祭天) 행사시 향나무 가지를 태우거나 향나무 잎의 즙을 몸에 발랐다고 한다.
고조선 시대의 향 사용을 입증 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희박한 편이나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단군신화가 실려있는 『삼국유사』에는 B.C. 2333년 한 민족의 첫 생활 근거지를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기록하고 있다. 첫 임금이 단군임과 태백산이 지금의 묘향산이라 유추할 때 신수(神樹) 는 단순한 거목이 아니라 단수(壇樹)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유사를 저슬한 일연(一然)은 단군 신화를 기록하면서 태백산을 일명 묘향산( 妙香山) 이라 했다. 묘향산은 글자 그대로 '묘한 향이 나는 산'이란 뜻이다. 단군의 단(壇)은 속칭 발달나무로 자작나무과에 낙엽교목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자단(紫檀), 백단(白檀) 등의 향나무를 뜻하는 단향이라 볼 수 있다.
단군이 사용했다는 단궁(檀弓)을 박달나무로 만든 활이라 생각한다면 고대 한국인의 주거주지는 단목(檀木) 근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첫 생활 근거지가 박달나무 근처로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겼으며, 이 시기부터 향료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달나무가 향료로 사용된 사실은 성현의(용재총화(墉齎叢話)에 " 한 벼슬아치가 향실(香室)에 앉아 장기를 두는데 마(馬) 등 장기짝이 모자라 단향(檀香) 조각과 사기조각으로 대신하자, 이를 본 이차공이 몹시 나무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삼구시대의 향은 불교의 전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향료가 전래된 시기는 신라 19대 눌지왕(417∼458) 때로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가 들여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고구려 승려와 백제 승려가 중국에 파견되었다가(370∼380년경) 돌아오면서 향료도 함께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학계 일각에서는 불교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향료가 자체적으로 제조 되어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향료가 어떻게 유입되고 사용되었든, 불교가 향료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불교의식 가운데 공양의식(부처님께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비는 것) 때 향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또한 국가와 개인의 안위를 기원 할 때나 혹은 성대한 잔치나 결혼식을 치를 때도 향이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 향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김유신이 향불을 피워 하늘에 맹세하고 기도했다든지, 신라의 진지왕이 도하녀와 침실에서 향을 사용했다든지, 고구려의 평강 공주가 온달의 집을 찾아갔을 때 평강공주의 향취에 노모가 놀랐다든지, 신라에서는 성골 이외에 귀족 및 지배층에게 침향(沈香)을 금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석굴암 안쪽 둥근 벽 둘레에 지혜제일사리불과 신통제일목련불이 향로를 들고 있으며, 혜공왕이 서기 771년에 완성한 신덕대왕신종(에밀레종) 에는 꽃구름을 타고 구슬 옷자락을 휘날리며 높은 굽받침이 달린 연꽃송이 모양의 향료를 받들고 내려오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무왕이 왕흥사에서 향을 피웠다거나, 궁예가 외출 할 때 반드시 동남(童男), 동녀(童女) 로 하여금 깃발, 향화 등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케 했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안악 제3호분 고분벽화 중 '주인공 부인상(婦人像)'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부인의 오른쪽에 향료를 받침대 위에 받쳐서 들고 있는 시녀가 묘사되어 있다.
쌍영총 고분벽화에는 아홉 사람이 걸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맨앞에 선 소녀가 향로를 머리에 이고 두손으로 맞들고 있다.
그 향로는 밑이 크고 둥글넙적한 크고 낮은 그릇처럼 생긴 받침에 위로는 둥글고 길쭉한 막대꼴의 대가 세워져 종발(鐘鉢) 같은 것이 올려진 모양인데 세 줄기의 향연(香煙) 이 피어오르고 있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화장을 하고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했으며 난향과 사향을 담은 향낭(香囊,향료주머니)을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향료 사용이 대중화된 것은 신라시대의 귀부인들이 향낭을 즐겨 착용하면서부터이다. 초기에는 인도 중국 등지에서 들여온 향료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향이 좋은 꽃잎이나, 줄기, 나무껍질 등을 직접 말려 분말을 만들어 유지(油脂)와 섞어 향합(香盒, 향을 담는 작은 도자기 용기)에 담아 두고 손끝에 묻혀 사용했다. 이는 최초의 천연향료 사용법으로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소형 향유병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유리병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토기병들이다.
그러나 문헌에 백통(구리, 아연, 니켈의 합금) 향로를 일본으로 수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는 도기 이외에도 금속제 향로도 제조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되는 논문 중에 「신라 서역교류사」에는 아랍이 신라로부터 사들여간 물품 중에 비단, 검 이외에도 사향과 침향, 도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신라가 일본 아랍에 향료를 수출할 정도로 고품질의 향료를 제조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특히, 일본 정창원(正倉院) 에 소장되어 있는 『매신라물해( 買新羅物解)』에는 여러 가지 향료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잡향(雜香), 훈향(薰香) 등의 조합향료까지 포함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향료의 다양함도 다양함이지만 조합향을 만들어 수출했다는 사실은 신라의 향료 제조기술이 건조를 통한 분말과 압착 등 초보적인 단계를 넘어선 고도의 기술이었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백제의 경우는 일본에 화장품과 향을 수출한 것은 물론 그 기술까지 전수해 주었다는 문헌도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때부터 향을 이용한 향전(香篆) 이라는 시계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불교 사워에서 의식을 행하기 위해 향을 사를 때는 분향(紛香)이나 선향(線香)이 사용되었는데 수도승들은 향이 타는 시간이 그 분량에 따라 거의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향전을 만들었다. 향전은 6세기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지금도 절에서는 30분향, 1시간향 등으로 불리는 향인 '만수(萬壽)' 가 쓰이고 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널리 선봉되어감에 따라 청결, 청정이 강조되어 향문화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문화는 신라를 그대로 답습하여 발전시켰다 해도 과언은 아니며 향료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관리 서긍(徐兢) 에 따르면 고려 왕실에서는 사향, 용뇌향, 전단향, 독누향, 침수향 등을 살랐다고 한다. 또한 은으로 만든 자모수로(子母獸爐)의 입에서는 항상 향이 뿜어져 나오게 했다. 이 자모수로는 큰 짐승(母) 이 작은 짐승(子)을 움켜쥔 형상으로, 뒤돌아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에서 향을 내뿜었다고 한다. 향을 끓는 물에 넣어 옷에 향을 쏘이는 '박산로(博山爐)'는 습기와 향을 혼합하여 향이 흩어지지 않게 했으며, 난초를 우린 물에 목욕(난탕)을 했다는 내용이 『고려도경』에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귀부인들은 향유(香油)를 바르는 것보다는 보석이나 비단으로 향낭을 만들어 패용한는 것을 즐겼으며 평민들 역시 헝겊으로 향낭을 만들어 사용했다.
또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운 자수배개를 사용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귀부인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향을 즐겨 사용했으며 향의 제조기술도 매우 발달했다. 외국과의 향료교역이 활발했는데 주요 교역국으로 중국의 진(晉). 송(宋). 원(元), 그리고 아라비아였다.
일례로 고려 초기인 혜종 2년(945), 그리고 문종 33년(1079)에 향유 50근과 220근을 각각 진나라와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반면에 문종 33년 송나라가 침향, 목향(木香), 정향(丁香), 서융안식향(西戎安息香), 곽향(藿香), 용뇌향, 사향 등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향료의 사용이 일상화되었던 탓에 향료를 담았던 용기들도 많이 남아 있다. 향낭은 사용했던 사례가 많음에도 비단이나 헝겊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출토된 것은 거의 없으며 백동 혹은 청동제의 정교한 향로와 청자 향로가 다수 남아 있다.
역시 청자로 만들어진 분말향과 고형향을 담았던 향합과 액상의 향을 담았던 작은 향유병도 적지 않게 발굴되고 있다. 유교가 국가 전반적인 사상으로 자라를 잡았던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장 및 향료는 퇴조를 보이는 듯 했으나 이미 생활에 폭넓게 자리잡은 향 문화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 향의 사용 사례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향료는 일부 상품화하여 시전에서 판매되었지만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과 마찬가지로 자가 생산되었다. 궐내 궁녀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리, 선비들은 의무적으로 향낭을 패용했으며 궁중에서는 향장(香匠)이라는 전문 기술자에 의해 향료가 생산되었고, 민간에서는 여염집 아낙들에 의해 제조되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다음과 같은 향료 제조법이 소개되고 있다. "무릇 향을 화합함에 그 질거나 되기를 알맞게 하기가 무척 힘들다". " 향을 고루 섞어 그릇에 담아 종이로 굳게 봉하여 집안 땅을 세치 혹은 너댓치 파고 묻는다.
한달이 지난뒤 꺼내면 그 향내가 기이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내의원(內醫院)용 사향이 매년 공납되었던 사실이 남아 있는데 삼남과 해서 지방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직접 사향노루를 사육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향으로 제조한 청심환(淸心丸)과 안신환(安神丸)은 중국에서 신약(神藥)으로까지 불렸다. 중국에 간 조선 사신이 청심환 1개를 주고 3일간 청루(홍등가)에서 주지육림을 즐길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독서할 때나 시를 지을 때에 단정히 옷을 입고 향로에 향을 지폈으며 훈목(薰沐)하는관습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심신 수양의 방법으로 거처하는 방안에 향을 피우기도 해서 분향묵좌(焚香默坐)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 부모의 처소에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갈 때 반드시 향낭을 차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다.
부부의 침실에는 사향을 사르고 난향 촛불을 밝혔으며 혼례에도 향은 필수품이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포천(抱川)에 한거(閑居)하고 있는 백양숙(白良叔)에게 보낸 시에도 "시를 읽는 사람은 방과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분양한 후에 읽어보아야 그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임금의 교지를 받을 때 반드시 향로에 향을 살랐다. 사약을 받을 때에도 궁중에서는 커다란 향로를 항시 침향을 살랐으며, 임금이 설날 아침에 벽온단이란 향을 직접 태워 일년 내내 국가가 평안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역시 잠자리에 향을 복용하거나 사용한 동정녀를 부여안아 회춘(回春), 혹은 조정(助情) 효과를 기대했다.
조선시대 3대 명절중 하나인 단오날에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하는 것은 물론이고 향낭을 만들어 차거나 창포주를 마시기도 했다. 단오는 1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때로 이 때 창포의 향도 가장 진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여러가지 향 중에서도 난향을 가장 좋아했다. 최익현(崔益鉉)은 난향에 대해 "그 향기가 널리 퍼져서 위로는 신명이 음향하고 아래로는 악취를 제거할 만 하며, 이를 제대로 갖추어 가차를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최한기 (崔漢耆,1803∼1877)는 "어진 사람이 사는 방엔 난초향과 지초(芝草)향이 풍긴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8년 안동에서 발굴된 조선시대의 미라에서도 향낭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향의 사용은 광범위하였다. 이와 같이 향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향로, 향합, 향꽂이, 향갑(향집,향남) 따위의 향구(香具)들도 다양하게 발달했다.
처음엔 주로 토기나 목재를 사용하다가 점차 금, 은, 동, 및 도자기로 이어지며 하나의 예술품으로 자리잡아갔다.
이렇듯 천연향료의 사용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게속되었으며,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 희소성과 높은 가격으로 인하여 향 사용은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일부 귀족 계급의 전유물로 그쳤으며, 이후 폐쇄적인 문호 개방과 향수에 대한 편견으로 서구와 여타 아시아 국가들처럼 향 문화가 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근래에 들어 우리 향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선향을 사르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고,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향화(香花), 향목(香木), 향초(香草)로 만든 향수 제품도 속속 개발되어 발매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나간다면 외국과의 향료교역이 활발했던 향문화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