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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도쿄 고라쿠엔구장에서 열린 롯데 오리온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에서 백인천(오른쪽)이 홈런을 친 뒤 1루를 향해 걷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오 사다하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
백인천 혹은 하쿠진덴(백인천의 일본어 표기). 1982년 이후의 백인천을 모르는 야구팬은 없다. 그러나 이승엽 이전에 배트 하나로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하쿠진덴(백인천의 일본어 표기)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한국야구출신 선수 가운데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화려한 성적을 거뒀으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1982년 이전의 백인천을 그의 육성을 담아 소개하고자 한다.
젊은 날의 꿈과 야망 그리고 장훈과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4번 타자 시절, 퍼시픽리그 타율 1위 등극과 2천 안타의 좌절. 여기다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이 되야했던 백인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야구를 떠나 인생의 소중한 교훈담이 될 것이다.
올해로 실질적인 야구 데뷔 50주년을 맞는 백인천의 1982년 이전 현역시절의 이야기는 총 3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어째서 일본에서 요미우리 구단 인기가 좋은 지 아나? 그렇지. 선수들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선수도 스타로 만드는 요미우리만의 특별한 힘이 있다고. 자네 두산 김현수 아나? 이 친구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 번 봤는데 야구센스가 상당하더라고. 이승엽 어렸을 때랑 닮은 게 많았어. 요즘 무척 잘 하지.
여하튼 (김)현수가 잠실구장에서 홈런을 쳤다고 상상해 보자고. 분명히 우리나라 구단 프런트는 ‘몇 호 홈런’이란 간단한 홍보만 할 게 뻔해. 언론도 비슷해. 그런데 요미우리는 신문사, 방송사를 두고 있단 말이지. 별 거 아닌 홈런이나 선수도 순식간에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네. 더 늦기 전에 우리도 깨달아야 해. 관중을 부르는 가장 좋은 마케팅은 ‘스타 마케팅’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나? 글쎄 (이)승엽이 보다야 스타였겠나. 그래도 일본에선 꽤 알아줬지. 일전에 일본으로 중계하러 갔더니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알아보는 팬이 있더라고. 벌써 언제 일인데 예전 홈런을 기억하고 있어. 돌아보면 참 세월 빠르이. 그게 벌써 50년 전 이야기라니.
중국 쉬시에서 경동고 4번 타자까지
내가 태어난 곳이 중국 쉬시(무석)라고. 아버님 고향이 원래 이북이신데 극단 일을 하셨나봐. 그 통에 상하이 위에 있는 쉬시에서 1942년 9월 27일에 태어났어. 서너 살 즈음 귀국해 평안북도 철산에서 유치원을 다니다 해방되고 이남으로 넘어왔네. 지금 장충체육관 뒤로 옛날에는 일본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거기서 살게 됐는데 그 집에 야구 글러브가 있었어. 그걸로 동네 아이들이랑 야구를 처음 했지. 지금 돌아보면 야구보다는 찜푸에 가까웠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뭔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 어린 나이에 신문팔이랑 구두닦이를 했다고. 전쟁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신문 팔고 다녔는데 그때야 다들 어렵게 살 때 아닌가. 자네 아버지도 나랑 연배가 비슷하다니 같은 고생을 하셨을 거야. 어쨌든 그 난리 통에도 야구 글러브는 꼭 쥐고 있었지.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는데 배재중이 꽤 명문이었다고. 나도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봤어. (입맛을 다시며)그때만 해도 세상이 참 우스웠지. 신입생 420명 모집하는데 480명을 뽑은 거야. 60명은 보결이었지. 시험에 붙었다고 자신했는데 떨어진 거야. 얼마나 속이 상해. 아, 열이 받아서 초등학생이란 놈이 대단하지. 배재중 교장실에 신발 신고 쳐들어간 거야.
당연히 교장선생님이 깜짝 놀랐지. 당장 “너, 뭐야”하지 안하겠어. 난 나대로 “시험지 좀 봐야겠다. 난 분명히 이 학교에 합격했는데 왜 떨어진지 모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 “이름이 뭐냐”고 묻더라고. 그래 “백인천이오”하고 대답했더니 양복 소매 주머니에서 뭘 꺼내. 보니까 명함만한 크기의 종이에 깨알같이 이름들이 써져 있어. 그 가운데 내 이름이 제일 위에 써 있더라고.
교장선생님이 뜨끔했는지 “아, 그렇구나. 내일 아버님 모시고 오면 합격시켜주마”하는 거야. 부모님 오시라는 이유야 물어보지 않아도 알지 않겠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왜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와야 하느냐”하면서 따졌지.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내가 ‘이 놈의 학교 나중에 꼭 복수한다’고 울면서 교장실에서 뛰쳐나왔네.
결국 성동중에 입학했지. 그때가 1955년이야. 잘 다니고 있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야구부 창단을 발표하면서 “야구하고 싶은 놈들은 다 모여라”하는 거라. 나도 갔지. 그렇게 처음으로 유니폼을 입었어. 첫 포지션은 2루수, 투수였어. 그러다 경동중 코치선생이 날 스카우트했지. 포수는 언제부터 했느냐고? 경동중에서도 내 포지션은 2루수였어. 투수는 동급생 이재환이었고. 그런데 포수가 너무 시원찮은 거라. 2스트라이크에 던지면 죄다 만세 부르면서 공을 잡는 거야. 내가 하면 너보다 잘하겠다 싶은 마음으로 포수를 하기 시작했네(웃음).
고등학교도 경동고로 진학했어. 그때가 1958년이라고. 실질적은 내 야구인생의 출발은 이때부터네. 그런데 말이야. 당시 고민이 많았어. (손을 내저으며)아니네. 포수 때문은 아니었어. 야구를 계속 할까, 공부를 할까 상당히 고민했지. 아마 2학년으로 올라갈 겨울방학 때였을 거야. 그때 내가 매일 저녁마다 집에서 학교까지 방망이를 들고 뛰었어. 왜냐? 학교 현관에 대형 전신거울이 있었거든. 그거 보면서 스윙연습을 했던 게지. 그런데 숙직 선생님들이 날 보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거라.
“넌 임마 매일 방망이만 휘두르고 뭐 하는 거냐”하고 꾸짖는 분부터 “인천이 참 열심히 하는구나” 격려하는 분. 그리고 아예 본체만체하는 분까지 다양했어. 그런데 하루는 정말 존경하는 선생님이 숙직을 서다 날 봤다고.
“우리 인천이 오늘도 열심히 하는구나”하면서 따뜻하게 감싸주시는데 내가 “선생님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하고 조언을 부탁드렸지. “제가 야구와 공부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공부를 하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싶고 야구를 하면 대한민국의 1인자가 되고 싶습니다”하고 속내를 털어놨더니 선생님이 “넌 뭘 해도 잘 할 수 있다”하시면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뭐냐”고 묻지 않겠어.
그때 박현식(작고) 씨가 떠오르지 뭐야. 그 양반이 육군에 다닐 땐데 방망이 몇 자루 들고 매일같이 우리 동네 뒷산으로 오르는 거라. 당시만 해도 방망이 들고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었거든. 속으로 ‘야, 대단하다. 저 이가 바로 대한민국 홈런타자구나’했지. 박현식 씨 같은 야구선수가 되자는 목표가 있던 터라 그렇게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래 뭐든 해봐라. 넌 반드시 박현식을 넘어서는 선수가 될 거다”하셨어. 돌아보면 형님(백인원)의 한도 풀어드리고 싶었는지 몰라. 대학교 때까지 야구선수를 하시다가 그만두셨거든. 참 야구 잘했는데….
1958년 경동고 1학년 때 백인천은 전국무대에 이름을 처음 알렸다. 스스로 야구 데뷔 원년이라 밝히는 1958년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
선생님과의 대화 뒤로 한층 열심히 야구에 매달렸다네. 오직 생각은 ‘야구선수로 대한민국 1인자가 되자’는 것뿐이었어. 고 2가 되니까 효과가 나오더라고. 청룡기대회 결승전에서 우리(경동고)가 인천 동산고에 졌지만 가을 고교야구쟁패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어. 고 3때는 경동이 날렸지. 서울시 리그에서 전승을 거두더니 4도시 대항전에서 우승하고 전국규모 대회를 휩쓸었어. 전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청룡기대회에서도 기어이 우승컵을 안았지.
잘 기억하고 있구먼. 그랬지. 어느 팀(청룡기 서울예선 휘문고전)이랑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네만 거기서 내가 투런 홈런을 쳤다네. 자네 말대로 해방 이후 고교생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운동장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순간이었어.
자, 이제부터 잘 듣게. 나와 일본야구의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허이. 1956년부터인가 해마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모국방문경기를 펼쳤네. 당시 한국고교팀이랑 재일동포팀은 수준 차가 컸어. 내가 1학년 때 경동고랑 재일동포팀이랑도 붙었는데 뭐 상대가 되나. 1-4로 졌을 거야. 그래도 나는 2안타를 쳤어. 그때 재일동포팀 어떤 선수가 나보고 “아주 잘 친다”고 칭찬을 하더라고. 보니까 하리모토 이사오란 선수야. 그분이 내가 “장이형”이라고 부르는 장훈 씨였네. 그게 인연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겠나.
2학년 때도 붙었는데 재일동포팀에 홍승일이라고 간사이대 왼손투수가 섞여 있었다고. 반칙이었지. 어떻게 알았냐고? 나중에 일본 가니까 자기 입으로 다 말하더라고(웃음). 그런데 이 투수가 어찌나 잘 던지는지 경동고 타자들이 줄줄이 삼진을 당했어. 커브도 처음 보는 커브야. 나도 3연속 삼진을 당했네. 그때 ‘다음해 반드시 재일동포팀을 이기겠다’고 속으로 칼을 갈았네.
고 3때 그렇게 칼을 갈던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환영경기가 8월에 열렸네. 아마 우리(경동고)랑 하기 전까지 13승 1무였나 그랬을 거야. 서울운동장에서 경동고와 재일동포팀이 마지막 경기를 하는데 관중이 꽉꽉 들어찬 거야.(주:당시 공식집계 2만5천 명) 그럴 만도 했지. 재일동포팀 만큼이나 우리도 그해 고교야구대회에서 24승2패를 거둔 최강팀이었거든.
정말 손에 땀을 쥐는 경기였네. 결국 9회 우리팀 야수가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3-3으로 비겼어. 그런데 관중석이 난리가 난거야. 왜긴 왜야. 한 번 더 하라는 거지.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경기가 다음날 벌어졌네. 그 경기에서 오춘삼이 3번, 내가 4번을 쳤다고. 1회 오춘삼이 볼넷으로 걸어 나갔어. 예감이 좋았지. 아니나 달라. 딱 쳤는데 그게 투런 홈런이 되는 거야.
경기 중간에도 투수가 고의사구 하려는 걸 받아쳐서 타점을 기록했지. 우리가 4-2로 이겼는데 그때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어쨌거나 전해 세웠던 개인적인 목표는 이룬 셈이었네.
국가대표 스케이터에서 아시아의 홈런왕으로
이 경기를 유심히 본 건 관중만이 아니었어. 재일동포팀이랑 함께 방문한 일본학생야구협회 사이키 다쓰야 전무이사도 지켜본 모양이야. 이 분이 그해 10월 경동고를 일본으로 초청했어. 고교 단일팀이 해외 원정경기에 나선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일거야.
그때 일본 가서 8경기를 했는데 상대팀이 죄다 고시엔대회에 출전한 강팀들이었어. 구마모토에서 진세이고고한테 2-0으로 이기면서 출발이 좋았네. 가고시마실업고와의 경기에서도 2-2로 비겼어. 이때 내가 홈런을 쳤네. 그렇게 일본 6대 도시를 돌며 경기를 해 2승2무2패를 기록하고 도쿄로 넘어와 헤이안고와 경기를 했어. 아쉽게 0-0 무승부로 끝이 났지. 이제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열리는 니혼대 제2고와의 마지막 경기만 남게 됐는데.
그 경기에서 내가 4타수3안타 7타점을 올렸지 뭔가. 5회초에는 중월 홈런도 쳤어요. 2차 대전 종전 뒤 진구구장에서 홈런을 친 2번째 타자가 됐다고 하더군. 아마 고교생으로는 처음이었을 거야. 그렇지. 그때부터 일본프로야구에서 날 주목하기 시작하고 스카우트 제의가 밀려왔네. 단순히 홈런 때문만은 아니었어. 당시 난카이 호크스에 노무라 가쓰야(라쿠덴 이글스 감독)가 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고. 그런데 노무라는 발이 느렸거든. 난 포수인데도 발이 빨랐단 말이지. 일본스카우트들이 날 ‘노무라 플러스’라고 부른 이유가 거기에 있었네.
정식으로 입단제의를 받았지. 계약금으로 3천만 엔 이야기가 나왔어. 그때 일본에 갔으면 지금쯤 갑부가 됐을 걸세(웃음). 농담이 아니야. 당시 내가 살던 돈암동 일대 땅을 다 살 수 있는 엄청난 돈이었어. 시발택시(지프를 개조한 택시)라고 그거 한대만 있으면 4가족이 잘 먹고 잘 살 땐데 차값이 35만 원 정도했어. 생각해보라고 그런 차를 수백 대 살 수 있는 돈이라면 얼마나 거액이었겠느냐고.
하지만 일본에 못 갔지. 그때는 일본이 미수교 국가였어. 게다가 내가 일본 간다니까 난리가 났어. 집에 편지가 엄청나게 오는데 그 가운데 혈서도 있더라고. ‘만약 네가 일본에 가면 너는 매국노다’ 하는 내용이었어. 그땐 프로란 개념이 없으니까 프로선수가 된다는 건 돈에 팔려간다는 뜻이었거든. 결국 일본프로야구 진출이 좌절됐지만 사이키 씨가 자기 모교인 와세다대 입학을 주선해주겠다고 했어. 경동고 일본원정경기를 줄곧 지켜봤던 메이지대 시마오카 감독도 “네가 메이지대로 입학하면 5년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고.
왜 5년이냐고? 일본어를 배워야 하니까 1년은 청강생으로 공부하라는 뜻이었지. 시마오카 감독이 대학졸업하면 자기가 어느 프로팀에 가든 적극 주선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어. 얼마 있다 메이지대에서 입학통지서랑 유학초청장이 날아왔네. 그때 참 순진했지. 그것만 있으면 일본에 가도 되는 줄 알았지 뭔가.
마침 연세대, 고려대에서도 장학생으로 입학시켜주겠다는 제의가 왔어. 그런데 내가 겨울에는 스피드스케이팅을 했단 말이야. 자네 그거 모르지. 내가 이래 뵈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네. 고3때 올림픽 출전 500, 1500m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었다고. 중학교 때부터 겨울에는 스케이트, 여름에는 야구를 했거든.
말이 좀 돌았는데 겨울에 스케이트를 하다보니까 친구들이랑 접촉이 없었어. 그 친구들은 다 연대에 가기로 했던 모양이야. 어느 날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넌 왜 연대 안가고 고대 간다는 소릴 해서 친구들이랑 감독님을 걱정시키냐”고 막 야단을 치시는 거야. 난 일본 메이지대 갈 생각을 했고 부모님은 그걸 몰랐으니 역정을 내실 만도 하셨지.
그런데 괜히 화가 나는 거라. 연대 원서를 찢었지. 그리고 다음날 메이지대 입학통지서를 들고 고대 학생처장님 집을 찾아갔네. 그분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알았다면서 도와주겠다고 하시는 거야. 물론 부모님한테는 이런 내용을 숨겼지.
대학 입시날이 딱 됐어. 영문도 모르는 부모님은 “인천이 시험 잘 치고 와라”하시지. 연필 두개 셔츠 주머니에 꽂고 집을 나왔어. 그런데 이건 수험장으로 가기도 그렇고 어디 갈 때가 있나. 자주 가던 북한산 흔들바위에서 시험 끝날 때까지 있다 집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이거 집안 분위기가 이상한 거라. 형이 날 보고 “시험 잘 봤냐”그러는 거야. “뭐 그저 그랬지”하니까 갑자기 주먹을 날리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수험장에 갔는데 내가 없는 거야. “이거 백인천이 어디로 납치된 거 아니냐” “돈에 팔려 실업팀으로 입단한 게 아니냐”하는 소문이 순식간에 돈 거지. 그때 처음 메이지대 입학통지서랑 초청장을 부모님께 보여드렸어. 그러니까 아버님이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
“지금 세상에 이게 가능하기나 하냐. 이런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맞는 말이었지. 어떻게 갈 수 있었겠어. 그래도 그때는 어린 마음에 집 기둥에 주먹질을 하면서 자학을 했지. 그때 우리집으로 기자들이 쫓아왔는데 내가 뛰쳐나가면서 그랬다고. “일본에 못가면 야구고 뭐고 다 그만두겠다”고.
형이 따라 쫓아왔는데 보니까 손가락 두개가 부러졌지 뭐야. 야구는 이제‘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다 때려치우고 겨울에 스케이트 열심히 타서 인스부르크동계올림픽에 나가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나 가자는 결심을 했어. 그때가 1960년 겨울이야.
그런데 다음해 봄이 되니까 겨울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 거라. 이거 참 놀 수는 없고. 어차피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로는 뽑혔으니까 여름, 가을에는 운동 삼아 야구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농협 야구단에 찾아갔어. 입단하겠다고 하니까 당시 농협 김영조 감독이 깜짝 놀라는 거야. ‘이게 왠 떡이냐’싶으셨겠지.
그때 내가 조건을 하나 달았다고. 김감독님이 처음에는 무슨 돈을 달라고 할 줄 알았나봐. 먼저 선수를 치대.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입단 10년 차가 되면 대리를 시켜주고 사택을 내주는 거다”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난 돈도 필요 없고 야구나 열심히 하겠다. 단 내가 그만 둘 때 아무 말 없이 보내 달라.” 김감독이 “왜 그러느냐”고 묻더라고. “공부해서 대학에 가겠다”라고 했더니 바로 OK를 하셨어.
대학에 미련이 있던 건 아닐세. 솔직히 또래 대학생들 보면 부러웠지. 하지만 난 처음부터 그네들과는 목표가 달랐거든. 대한민국 최고의 교수보단 우리나라 야구 1인자가 목표였다고 앞에서도 말하지 않았나. 농협 입단하고 9월 NBC(국제야구연맹)배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어. 지금은 잊었는데 어느 경기 1회 내가 안타를 치고 2루까지 갔다고.
발이 빨랐으니까 2루에서 3루로 슬라이딩을 했는데 상대 수비수 무릎에 발이 걸려서 발목이 부러진 거야. 그때는 아픈 줄도 몰랐어. 경기가 끝나고 스파이크를 벗으려는데 발이 빠지지가 않는 거라.
박현식 선배가 “인천아, 이리 와봐”하고 내발을 보더니 “이거 큰일이다. 발목이 부러진 모양이다”하는 거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부러진 발목으로 어떻게 경기를 했냐”고 혀를 차는 거야. 그때 또 생각했지. “이제 내 야구인생은 끝났구나." 부상이야 늘 있을 수 있지만 내가 크게 낙담한 이유가 있네.
그 대회에서 잘해야 다음해 1월 1일 타이완에서 열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뽑힐 수 있었거든. (한숨을 내쉬며)3개월 만에 나을 리도 없고. 그래도 별짓 다했네. 의사 몰래 기브스 풀고 배팅연습하다가 붙었던 뼈가 떨어지지 않나. 나중에는 휠체어에 앉아서 배팅연습을 하고 그 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다네.
미친 듯이 연습한 게 주효했는지 국가대표팀에 뽑혔어. 사실 그때 대표팀 포수가 영 시원치 않았거든. 정말이지 그 대회 끝나면 야구 그만두려고 했어. 야구인생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지. 박현식, 김양중(백구회 회장), 김응용(삼성 사장), 김성근(SK 감독) 등 당시 대표팀 멤버는 화려했어. 우승을 노릴 만도 했지.
타이완에 도착하니까 송산야구장이 보이더라고. 지은 지 얼마 안 된 구장이라 시설이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좌우, 중앙 펜스가 무척 멀었어(주:좌우 98m, 중앙 122m). 게다가 타이완은 1월이면 장마철이라 비도 비지만 바람이 센터에서 홈플레이트로 불었다고. 당연히 홈런이 나올 수가 없지.
최종전을 필리핀이랑 하는데. 태풍이 몰아치고 뭘 해도 갑자기 바람이 멈출 때가 있지 않나. 그때 우연찮게 내가 타석에 섰는데 “딱”하고 받아친 공이 “슝”하고 날아가 담장을 넘은 거야. 송산야구장 개장 1호 홈런에다 대회 1호 홈런을 친 거지(주: 대만야구협회(CTBA)에 따르면 송산야구장 공식 4호 홈런. 국제대회 1호 홈런).
일본에 져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배수찬 씨와 내가 대회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고. 응? 필리핀전 홈런이랑 대회 베스트 나인에 뽑힌 게 일본야구 관계자에 눈에 뛴 계기가 아니냐고? 아니야. 그것보단 일본전의 활약이 컸네.
그때 일본 선발투수가 사회인야구팀 니혼 칼텍스 소속의 사사키 고이치로(1965년 일본프로야구 사상 8번째 퍼팩트게임 달성)였어. 당시 일본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대단한 투수로 꼽혔거든. 그런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2개나 얻어내니까 일본신문에서 난리가 난 거지. 마침 예전 일본프로야구팀에 입단할 뻔한 기억도 있으니까 내 이야기를 대서특별 했나봐.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야구대표팀을 타이완야구협회장이 환영하고 있다. 백인천, 김정환, 김성근, 김응용, 박현식, 김영조(오른쪽부터)이 나란히 서 있다 |
타이완에서 대회를 마치고 한국으로 오는데 그때는 직항이 없었다고. 도쿄로 반드시 들러야 해. 이틀인가 도쿄에 있는데 재일한국인야구협회 최태환 부회장이 갑자기 나더러 “일본프로야구팀이랑 계약을 하자”는 거야. 새까맣게 잊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지. 내가 뭐라고 하겠어. 좋다고 하지. 알고 보니까 퍼시픽리그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날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의사를 최부회장에게 전했던 모양이야. 일본에서 도에이와 가계약을 했어.
몸값? 처음에는 1960년이랑 똑같이 3천만 엔을 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게 잘 안됐어. 자네도 겪었을 테지만 우리나라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하지 않나. 도에이에서 “백인천은 어차피 2년 뒤면 귀국해 군에 입대해야 하는데 3천만 엔은 너무 많다”고 나오는 거야. 그래서 2년 치로 2백만 엔을 받기로 했지. 그 돈도 큰돈이었지.
그런데 어디 내 야구인생이 일사천리로 풀리는 거 봤나. 귀국하니까 대한야구협회 간부들이 “너 절대 일본으로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어디 가서 일본 간다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마라"고 하는 거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이대로 은퇴하나 싶었지. 정말 이대로 끝나나 싶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