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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시집 리뷰| 센텐스(sentence), 스탠스(stance), 성큰 오렌지(sunken orange) 김청우(문학평론가)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자인가? 시인에게 ‘진리’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시인에게, 그리고 시에 모종의 ‘깨달음’, 특히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어떤 메시지를 얻고자 하지 않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깨달음’이란 것도 과학적인 지식과는 또 달라서, 시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삶의 기술(技術)’이 될 수 없고 다만 ‘삶에 관한 기술(記述)’일 따름이다. 기술(技術)이 특정 가치를 옹호하는 데 바쳐지는 반면, 기술(記述)에는 모순적 가치들이 공존할 수 있다. 시가 후자에 속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통상적으로 시에 기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답’의 형태지, ‘질문’은 아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시인들은 시에 ‘의미’를 탈각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2: 시인의 문장은 과연 모이를 쫄 수 있는가. “의미 있는 시가 하도 지겨워/ 의미 없는 방정식을 푼다 (중략) 그런데 아무리 풀어도 해답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방정식/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나의 삶”(「파스칼 아저씨네 과자 가게」)이라고 함기석 시인은 시집 뽈랑공원에서 말한 바 있다. 저 “의미 있는 시”가 우리의 시에 관한 ‘표준값’은 아닐까. 시인에게 ‘의무’ 따위는 없다.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꼭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만, 시인은 더더욱 그렇다. 앙드레 브르통(A. Breton)이 말했듯, ‘자유’와 ‘상상’이 ‘의미-의무의 세계’ 한쪽 구석에 놓인 시인의 심장을 뛰게 하는 말이라면, 그는 ‘자유’의 실현을 위해 ‘상상력’이 부르는 대로 받아쓸 때 비로소 시인일 수 있다. 이는 함기석을 설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논리가 아닐까. 그는 상상력의 무한동력을 탑재한 21세기형 자유의 시인이다. 그리고 시에 ‘표준’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는 실험시인이 아닌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새의 생일이다/ 케이크에 촛불을 달고/ 소녀 이크는 기다린다 (중략) 케이크를 뒤덮은/ 하얀 생크림 빛들이 없어지자/ 노을의 발자국만 남은 지평 끝에서/ 날아온다/ 가/ 먼저 날아온다/ 새는 아직 오지 않는다 (중략) 그러자 새가 날아온다/ 하늘을 버리고/ 지평을 버리고/ 날개를 버리고/ 새는 새마저 버리고 어둠 속을 날아온다 언어에 절망하는 시인은 모더니스트다. 모더니스트로서 시인은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향수(鄕愁)까지는 어쩌지 못한다. 함기석은 어떤가. 「낱말 케이크」는 ‘케이크’에 관한 설명이 아니며, ‘새’와 ‘소녀’에 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새의 생일을 맞아 소녀는 기다리고, 혼자 케이크를 먹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던 중 새는 도착하고, 웃음 속에서 파티는 시작된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의 ‘기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드는 서사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케이크’가 소녀의 이름인 ‘이크’로, ‘이크’는 날개도 버리고 “새마저” 버린,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새’라고 볼 수 없는 새가 ‘웃/우는’ 소리라는 사실이다. ‘새’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서사의 등장인물로서도 실체를 갖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관계로서만 관계를 맺을 뿐이다. 3: 연기(緣起), 이것이 일어나니 저것이 일어나네. “수학자는 시선의 중심을 관찰 대상인 사물에게도 관찰자인 자기 자신에게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과 사물, 관찰자와 관찰자, 현상과 기호, 기호와 논리 사이로 시각을 이동시켜 그것들의 관계와 틈을 그 결과물을 추상기호로 일반화한다.”(함기석, 고독한 대화, 193~194쪽) 수학식이 나타내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다. 숫자 기호 하나는 아무것도 가리킬 수 없다. ‘2’라는 의미는 ‘1’과 ‘3’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규정되기 때문이다. 수학이 세계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영ㆍ재현하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를 계산해낼 수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사정이 언어기호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도 또 없다. 언어는 우리 사고의 반영ㆍ재현이지 세계의 그것이 아니지만, 언어는 우리의 눈을 가린다. 언어 문장이든 수학식이든, 그저 ‘체계’일 따름이라는 것, 더군다나 그것은 ‘죽음’을 실어 나른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쉽지 않은 까닭일까. 4: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feat. 이상李箱) 언어가 다만 죽음만을 실어 나른다는 것을 깨달은 자에게 시란, 시와 현실이란 무엇일까. 함기석의 이번 시집 디자인하우스 센텐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코코 곁에서 그녀의 예쁜 코를 바라보다/ 나는 2차원 경계가 없는 3차원 다양체(manifold) 속에서/ 목이 꽈배기처럼 580도 돌아간 채 창밖을 본다/ 목련 공원, 열 세 개의 종이 무덤이 보이고/ 치즈피자처럼 구워져 둥글고 맛있게 부풀어 오르는/ 세계, 유령이 깃든 시계의 방들이 보인다/ 무수한 방마다 무수한 당신의 유령들이 색색으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를 읽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의 구성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우리가 흔히 아는 ‘기승전결’,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시집의 첫 시가 「낱말 케이크」, 그리고 마지막 시가 「시가 창턱에 기대어 혼잣말하다」라는 것은, 결국 언어가 내적 체계와 자율성을 가지고─그래서 함기석의 시는 독자는 물론 시인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혼잣말’을 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기-규정의 시도는 오히려 그러한 규정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며, 시인은 그러한 불가능성조차 유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신이 주인입니까?” 「타임커피숍 센텐스」의 ‘나’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푸엥카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아닙니다, 저는 이 센텐스의 주어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주인”과 “주어”가 교차하고, “주어”와 “주검”이 교차(「디자인하우스 센텐스」)한다. 도대체 어떻게 무엇인가의 ‘주인’이, ‘주어’가 될 수 있겠는가. 사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물은 죽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각을 ‘허무(虛無)’라고 한다면, 그렇다, 함기석의 시는 허무를 시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허무는 곧 무한(無限)과 다르지 않음이 밝혀진다. 5: 그래서 그는 계속 변이한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배다 점심에/ 나는 파도가 일렁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저녁에/ 나는 떠난다 막 태어나 울음을 터트리는 지진/ 나는 어둠 속에서 실눈을 뜬다 새벽에/ 나는 쏟아지는 빛이다 날개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 틀린 센텐스”(「디자인하우스 센텐스」)로 지금-여기를 떠돌고 있다. 그를 만나러 나는 이 유쾌한 여정을 계속하는 ‘함기석의 움직이는 커피숍’의 문을 두드린다. 김청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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