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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9월 들어서자, <인터넷 다음 까페 염화실 영상일기방>에 보살님들과 큰스님께서 문수선원 의 큰 창가에 서서 뭔가를 내려다 보고 계신 사진이 올라왔다.
마침내 문수선원 전용 주차장이 생긴 것이다.
한달 쯤 전인가, 금요법회를 하고 있는데 주차문제로 화가 난 거사님(불교 신자가 아니시겠지만)이 법문중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벼락을 치고’내려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보살님들이 또 하시는데 큰스님께서 “그 사람이 선지식이라”고 하셨다.
큰스님께서 ‘저 자리가 주차장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라고 일러 주셔서 스님들이 그 자리에 서서 주차장을 내려다 보셨다. 작은 발전이지만 그 변화에 모두가 기뻐하셨다.
큰스님께서 큰방을 둘러보시자, 대구에서 자원봉사를 하러 오신 보살님들이 며칠 전 동화사에서 열린 승시축제 때 뵙지 못해서 섭섭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날 내가 갈까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어요. 날이 너무 더웠어. 보살님들은 안 오시길 다행이라.” 큰스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보살님 중에 한 분이 그날 큰스님께서 쓰신 양산이 모자처럼 작게 보였다고 하셔서 모두가 깔깔 웃었다.
큰스님은 차 한모금을 드시고 숨을 돌리신 다음에 “한 달에 한 번씩 축제다. 큰 축제라.”하시면서 “화엄축제라고 들어봤나? 화장세계다.” “스님들이 이렇게 모이는 게 희유하다.”고 하셨다. 승시축제는 옛날 스님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시를 재현한 축제라고 했다. 우리들의 화엄축제는 항상 현재형이니까 재현한 축제는 ‘별거 없어’ 하신 거라고 짐작했다.
지리산 대원사에서 오시고 여수에서도 오시고 스님들이 멀리서 오신 것을 큰스님께서 고마워하셨다. 모처럼 추석을 맞아 대만에서 연구원으로 공부 하시다가 잠깐 귀국하신 스님도 계셨다. 큰스님께서 얼마 전에 그 스님의 은사스님과 통화를 한 이야기를 하셨다. 함께 오신 스님에게 “스님은 요즘 무슨 공부해?” 하고 물으셨다.
“스님은 어디 갖다놔도 성실한 건 기본이고. 뭘 하나 연구 성과물이 나오나 기다리고 있지.” 하셨다. 옆에 있던 도반스님에게 “스님이 자꾸 독려를 해”라고도 하셨다.
지난 호 염화실지를 가져오라고 하셔서 스님들에게 수진스님 인터뷰 기사를 설명해 주셨다.
‘화엄경 청량소초’를 번역하시는 수진스님은 육필로 원고를 쓰시는데 그 원고 높이가 스님 키만 하고, 사용하신 볼펜들도 굉장히 많다고 하셨다. 그중에 어떤 펜이 제일 잘 써지는지 들으신 정보도 일러주셨다. 또 사진 속에 참고로 펼쳐놓았다고, 큰스님 지으신 화엄경 책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셨다.
“이 스님은 어려서 출가해서 학교 문턱에도 안가보고 오직 강원에서 전통 공부만 했어. 지금은 대학교 교수야.” 라고 하셨다. 집필 소식은 벌써부터 알고 계셨는데, ‘골동품’처럼 육필원고를 쓰고 있다니 궁금해서 ‘맑은 소리 맑은 나라’ 대표와 함께 직접 찾아가 보셨다고 했다.
큰스님은 또 얼마 전 TV채널을 돌리시다가 ‘EBS 수능특집 입시 설명’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 강의를 잘해서 끝까지 다 보셨다고 하셨다.
“학원강사들이 그렇게 똑똑해. 귀에 쏙 쏙 들어오게 해. 우리는 뭐 공부 많이 해야 되겠더만.”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卷第七
世界成就品 第四
二, 世界海 十種事
8, 世界佛出現
(1) 十種差別
爾時에 普賢菩薩이 復告大衆言하사대 諸佛子야 應知一一世界海에 有世界海微塵數佛出現差別이니 所謂或現小身이며 或現大身이며 或現短壽며 或現長壽며 或唯嚴淨一佛國土며 或有嚴淨無量佛土며 或唯顯示一乘法輪이며 或有顯示不可思議諸乘法輪이며 或現調伏少分衆生이며 或示調伏無邊衆生이라 如是等이 有世界海微塵數하니라
그때 보현보살이 다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불자들이여, 응당히 알아라. 낱낱 세계바다에 세계바다 미진수의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차별이 있느니라. 이른바 혹은 작은 몸을 나타내며, 혹은 큰 몸을 나타내며, 혹은 짧은 수명을 나타내며, 혹은 긴 수명을 나타내며, 혹은 오직 한 부처님 국토만 엄정하며, 혹은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를 엄정함이 있으며, 혹은 일승(一乘)의 법륜만 나타내 보이며, 혹은 불가사의한 여러 승(乘)의 법륜을 나타내 보임이 있으며, 혹은 적은 중생을 조복함을 나타내며, 혹은 그지없는 중생 조복함을 보이나니,
이와 같은 것이 세계바다 미진수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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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세계성취품의 중간, 163쪽(민족사 刊) 밑에서부터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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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취품’에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이 보는 이와 같은 세계를 넘어서 화엄경에서 본 화장장엄세계이다. 물론 이 세계를 벗어나서 따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로되 깨달음의 안목에서 볼 때의 세계인 것이다.
궁극에 가서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계도 화장장엄세계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세계성취품에서 세계가 성취되고 난 다음에는 그 성취된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설명하는 화장세계품이 나온다. 품의 연결이 그렇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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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출현(世界佛出現) : 세계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차별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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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장엄 세계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모습이다. 어떤 부처님이 어떻게 출현되어 있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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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차별(十種差別): 열 가지의 차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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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그 때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부고대중언(復告大衆言)하사대 : 다시 여러 대중들에게 고해 말하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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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자(諸佛子)야 : 모든 불자들이여
응지일일세계해(應知一一世界海)에 : 응당히 알라. 낱낱 세계에
유세계해미진수불출현차별(有世界海微塵數佛出現差別)이니: 세계해 미진수와 같은 부처님의 출현에 대한 차별이 있다. 차별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세계도 다양하지만, 그 다양한 세계에 따라서 부처님의 출현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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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스님의 현담에는 출현차별(出現差別)이라고 해서 경전마다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 다른 것을 이야기 한다.
통현장자의 화엄론에는 부처님은 같은 분인데 보는 사람의 소견에 따라서 각각 차별하다는 뜻으로 견불차별(見佛差別)이라는 표현을 쓴다. 소승경전에는 부처님을 어떤 모습으로 보았고, 대승시교경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았으며, 아미타경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았고 결국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을 어떻게 보았다. 등등 견불차별(見佛差別)을 그렇게 여러 각도로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도 일종의 그러한 내용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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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혹현소신(所謂或現小身)이며1: 아주 작은 몸을 나타내는 세계도 있다. 부처님인데 아주 작은 몸으로 부처님이 나타난다.
혹현대신(或現大身)이며2 : 큰 몸으로 부처님이 나타나 보이는 것도 있고
혹현단수(或現短壽)며3 : 부처님의 수명이 아주 짧다. 사람의 수명이 짧은 세상에서는 부처님의 수명도 짧을 수밖에 없고, 또 사람의 수명이 긴 곳에서는 부처님의 수명도 역시 길 수밖에 없다.
혹현장수(或現長壽)며4 : 혹은 아주 오래 사는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혹유엄정일불국토(或唯嚴淨一佛國土)며5 : 부처님이 한 불국토만을 청정하게 장엄한다. 화엄경에서는 꼭 엄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에게는 청정 장엄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일불국토만을 청정하게 장엄하며,
혹유엄정무량불토(或有嚴淨無量佛土)며6 : 혹은 한량없는 불국토를 엄정하는 경우도 있고,
혹유현시일승법륜(或唯顯示一乘法輪)이며7 : 혹은 오직 일불사상 하나만 이야기 한다.
팔만대장경에는 초기경전에서부터 부파불교 경전, 소승경전, 초기대승, 중기대승, 후기대승, 밀교경전 등 다양한 경전이 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어떤 경우는 일승법문만을 나타내 보이는 부처님도 계신다는 것이다.
혹유현시불가사의제승법륜(或有顯示不可思議諸乘法輪)이며8: 혹 어떤 불국토는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법륜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사람의 근기와 수준에 맞춰서 하근기에게는 하근기에 맞는 법륜을 보이고 상근기에게는 상근기에게 맞는 법륜을 보이는 등 각양각색의 법륜을 나타내 보인다.
혹현조복소분중생(或現調伏少分衆生)이며9 : 혹은 중생들을 조금 밖에 조복하지 못하는 부처님도 계시고. 그것이 소분중생이다. 설사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중생을 그저 한 백 명 이 백 명 겨우 교화하고 열반에 드는 부처님도 계시고.
혹시조복무변중생(或示調伏無邊衆生)이라10 : 혹은 가없는 중생들을 조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처님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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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등(如是等)이 : 이와 같은 등이
유세계해미진수(有世界海微塵數)하니라 : 세계해 미진수와 같이 각양각별하게 차별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시고 그 후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중생들을 제도했다. 여기는 부처님이라고 했지만 선지식이라고 해도 좋고, 도인이나 법사라고 해도 좋다. 그들의 인생도 역시 각각 차별하다.
그중에는 겨우 자기 한 몸만 제도하고 평생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가르치지 못하고 간 도인들도 많다. 혹 어떤 사람들은 그저 한 두 서너 명을 제도하고 가거나 혹은 2천명 3천명의 큰 총림을 거느리고 왕성하게 교화를 하고 간 선지식도 있었다.
심지어 마조 스님 같은 경우는 중생의 번뇌를 다 밟아 죽였다는 뜻으로 ‘천하 사람들을 망아지가 다 밟아 죽였다’[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라는 표현을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간 분들도 있다.
우리가 포교당을 경영하든지 사찰을 경영해도 그렇다.
토굴에서 혼자 사는 분, 둘 사는 분, 셋 넷이서 사는 분이 있고, 경우 따라서는 신도대중들이 몇 천 명씩 모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은 다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우수하고 어느 쪽이 하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님 역시 소분중생만 조복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무변중생을 제도하는 분도 있다고 경전에 나오는데 이것은 각자 그 사람이 살아온 인연일 뿐이다.
피나는 고행을 겪어서 도인이 됐다손 치더라도 자기 한 몸 겨우 제도하고 간 경우도 부지기수로 많은데 소산스님 역시 그런 분 중의 하나다. 소산스님은 도를 통해서 그 지견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지만 부엌에 불 땔 나무가 없어서 겨울이 되면 군불도 못 때고 덜덜 떨면서 지낼 정도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 스님이 사는 산에 나무가 듬성듬성 있었다고 해서 성글 소(疎)자 뫼 산(山)자를 써서 그 이름이 소산(疎山)스님이다.
우리 스님들 역시 포교당을 하든지 절을 하든지 신도가 많고 적음에 마음을 쓸 일이 아니다. 물론 대중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전부 인연소치이다. 인연에 순하여 그 인연을 따라서 순리대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째서 부처님인데 단명한 부처님도 있고 장수한 부처님도 있는가, 왜 부처님인데 소분 중생만 제도하는가,그런 것이 우리들 마음에 안들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우리가 잘못이지 부처님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도 이러한 구절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2) 重頌
爾時에 普賢菩薩이 欲重宣其義하사 承佛威力하사 觀察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諸佛種種方便門으로 出興一切諸刹海하사대
皆隨衆生心所樂하시니 此是如來善權力이로다
諸佛法身不思議여 無色無形無影像호대
能爲衆生現衆相하사 隨其心樂悉令見이로다
或爲衆生現短壽하며 或現住壽無量劫하시니
法身十方普現前하사 隨宜出現於世間이로다
或有嚴淨不思議한 十方所有諸刹海하며
或唯嚴淨一國土하사 於一示現悉無餘로다
或隨衆生心所樂하사 示現難思種種乘하며
或有唯宣一乘法하사 一中方便現無量이로다
或有自然成正覺하사 令少衆生住於道하며
或有能於一念中에 開悟群迷無有數로다
或於毛孔出化雲하사 示現無量無邊佛하시니
一切世間皆現覩라 種種方便度群生이로다
或有言音普周遍하야 隨其心樂而說法하사
不可思議大劫中에 調伏無量衆生海로다
或有無量莊嚴國에 衆會淸淨儼然坐어든
佛如雲布在其中하사 十方刹海靡不充이로다
諸佛方便不思議여 隨衆生心悉現前하사
普住種種莊嚴刹하야 一切國土皆周遍이로다
그때 보현보살이 그 뜻을 거듭 펴려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을 설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방편으로
온갖 모든 세계바다를 일으키사
다 중생들의 마음에 즐김을 따르시니
이것은 여래의 좋은 방편의 힘이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 부사의함이여
빛도 없고 형상 없고 그림자도 없으나
능히 중생 위해 온갖 형상 나타내사
그 마음에 즐김을 따라 다 보게 하도다
혹은 중생 위해 짧은 수명 나타내며
혹은 한량없는 겁의 수명을 나타내시니
법신을 시방에 널리 나타내사
편의에 따라서 세간에 출현하시네
혹 어떤 때는 부사의한
시방에 있는 모든 세계바다를 엄정하며
혹은 오직 한 국토에만 엄정하되
한꺼번에 남김없이 다 나타내 보이시네
혹은 중생들의 마음에 즐겨함을 따라
생각하기 어려운 갖가지 승(乘)을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때는 일승법(一乘法)만 펴사
하나 속에 한량없는 방편을 나타내도다
혹은 자연으로 정각(正覺)을 이루사
적은 중생에게 도(道)에 머물게 하며
혹은 한 생각 속에서
무수한 중생들을 깨닫게 하네
혹은 털구멍에서 변화한 구름을 내어
한량없고 끝없는 부처님을 나타내 보이시니
모든 세간이 다 환하게 봄이라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네
혹은 말소리가 널리 두루해서
그 마음에 즐겨 함을 따라서 법을 설하사
불가사의한 큰 겁 가운데서
한량없는 중생바다를 조복하도다
혹은 한량없이 장엄한 국토에
대중들이 청정하여 엄연히 앉았는데
부처님이 구름 펴듯 그 가운데 계시사
시방의 세계바다에 다 충만하도다
모든 부처님의 방편 부사의함이여
중생들의 마음 따라 다 나타내사
갖가지 장엄한 세계에 널리 머물어
온갖 국토에 다 두루하였네
*
중송(重頌): 그 뜻을 게송으로 거듭 펴다
*
이시(爾時)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욕중선기의(欲重宣其義)하사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관찰시방(觀察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1
제불종종방편문(諸佛種種方便門)으로 :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방편문으로
출흥일체제찰해(出興一切諸刹海)하사대 : 일체 모든 세계에 다 출현했다.
역사적으로 1600여 년 전 석가모니가 인도에 출생했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화엄의 안목으로 보면 현재 이대로가 일체 모든 찰해에 부처님이 출흥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개수중생심소락(皆隨衆生心所樂)하시니 : 다 중생들의 마음에 즐겨하는 바를 따라 제도한다.
그렇다고 뭐든지 중생 욕심 다 따라준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성향을 따라서 제도한다는 것이다.
차시여래선권력(此是如來善權力)이로다 : 이것이야말로 여래의 아주 훌륭한 방편의 힘이다. 이럴 때 권(權)자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2
제불법신부사의(諸佛法身不思議)여 : 부처님의 법신은 불가사의 해서
무색무형무영상(無色無形無影像)호대 :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그림자마저 없다. 그렇지만 그런 없는 가운데에서
능위중생현중상(能爲衆生現衆相)하사 : 능히 중생을 위해서 온갖 모습을 나타낸다. 관세음보살만 하더라도 32응신이라 해서 중생을 위해 별의별 몸을 다 나타낸다.
수기심락실영견(隨其心樂悉令見)이로다 : 각각 그 사람의 마음에 즐겨하는 바를 따라서 능히 다 보게 한다.
사실 깨놓고 솔직하게 다 표현하기로 하면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신기할 정도로 다 다르다.
여기에 스님들이 200여 분 이상 있지만, 부처님이 어디에 시현했다고 해도 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승속을 막론하고 2천만 불자라면 2천만 불자가 이해하고 있는 부처님이 다 다르다.
다 나의 성향대로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이고, 내가 이해한 대로 부처님은 나에게 시현한다.
그것이 바로 수기심락실영견(隨其心樂悉令見)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옳다. 부처님이 똑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위대한 분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어떤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역시 그렇다. 그 사람에 대한 안목도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3
혹위중생현단수(或爲衆生現短壽)하며 :혹은 중생을 위해서 아주 짧은 목숨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현주수무량겁(或現住壽無量劫)하시니 :어떤 데는 아주 한량없는 세월동안 생명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법신시방보현전(法身十方普現前)하사 :법신은 시방에 널리 우리 앞에 나타나 계시사
수의출현어세간(隨宜出現於世間)이로다 : 마땅함을 따라서 이 세상에 출현한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뜻이다.
*4
혹유엄정불사의(或有嚴淨不思議)한 : 혹 어떤 부처님은 불가사의한
시방소유제찰해(十方所有諸刹海)하며 : 시방에 있는 모든 찰해를 청정하게 장엄하며
혹유엄정일국토(或唯嚴淨一國土)하사 : 한 국토만을 엄정하여
어일시현실무여(於一示現悉無餘)로다 : 그 한 국토에서 나타낸 것이 한량없고, 남음이 없이 다 나타낸다. 시방소유 제찰해에서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한 국토 속에 다 나타내 보인다.
*5
혹수중생심소락(或隨衆生心所樂)하사 : 혹은 중생의 마음 즐겨하는 바를 따라서
시현난사종종승(示現難思種種乘)하며 : 생각하기 어려운 갖가지의 법을 시현하며. 승(乘)은 가르침이나 법을 말한다.
법화경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해서 ‘삼승(三乘)을 일불승(一佛乘)으로 귀결시키는 가르침’이다. 삼승을 자주 이야기 하지만, 사실 지금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다양하다. 말세가 될수록 방편이 늘어나서 천승만승(千乘萬乘), 천만승의 종종 방편이 있다. 그런 것이 다 중생이 좋아하는 바대로 불법이 출현하는 것이다. 다 부처님 이름하에 만들어진 방편들이다.
혹유유선일승법(或有唯宣一乘法)하사 :혹 어떤 이는 일승법만 오직 선양한다.
*
나는 특히 법화경을 좋아하고 절을 운영할 일도 없으니 다른 방편을 쓸 까닭도 없다. 물론 화엄경은 그보다 차원이 높지만 나는 주로 내가 아는 대로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일불승을 자주 이야기 한다.
법화경에는 부처님 앞에서 손 한 번 번쩍 들면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라고 해서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고 하였다. 부처님께 손 한 번 드는 것, 혹은 나무불 한 마디 하는 것, 꽃 한 송이 올리는 것이 무슨 수행이며, 성불하는 조건이 되겠는가. 그것은 바로 꽃 한 송이 올릴 줄 아는 그 사실, 그 능력이 부처라는 뜻이다. 손 한 번 들 줄 아는 것이 부처이다. 부처님도 꽃을 들 때가 있었고 구지선사는 손가락 하나 세워서 중생을 제도하였다. 법화경도 바로 그런 차원이다.
어린 아이들이 모래를 쌓아놓고 불탑이라고 장난치는 것, 그렇게 할 줄 아는 그 사실 그 능력이 부처이다. 그러한 사실이 납득이 안 된다면 불교가 어렵다. 그러나 사실 불교는 쉬운 것이다. 더 이상 수행이 필요치 않은 불교가 최상승 불교이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나는 그것을 신대승불교라고 하고 최승불교라고 표현한다. 최승불교는 가장 수승한 불교라는 뜻이다. 기존의 불교 안에서 그런 이론만을 집약시켜서 일승법, 신대승불교, 신불교, 최승불교라고 하는 소리를 지어서 요즘 내가 자꾸 이야기 하고 있다.
*
기존의 불교는 오매일여가 되면 확철대오를 하고 견성성불을 하여서 그때사 비로소 부처가 된다는 등 수많은 조건을 달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뭐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답이 없는 문제이고 가정일 뿐이다. 평생 가정만 늘어놓는 것이다. 그 조건을 충분히 달성해서 부처가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사실은 본래 부처님이니까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이 담겨있는 가장 수준 높은 답이 이미 경전 상에 다 설명되어져 있다. 답도 없이 끊임없이 문제만 내놓고 달려갈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그 답을 찾아서 부처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번뇌가 다 사라진 뒤에 부처다,라고 하는 것은 저급한 불교에서 하는 소리이다. 오매일여가 되어야 부처가 된다는 것도 아주 저급한 불교에서 하는 소리이다.
고급 불교, 최상승 불교, 신대승 불교는 그런 조건이 없다.
법화경에서 말한 대로 ‘망상심이 가득한 대로’ 손 한 번 들 줄 알면 그것이 부처이다. 망상은 망상 그대로 불성의 작용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망상 따로 있고 불성의 작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망상 이외의 불성의 작용을 언제 또 따로 본다는 말인가. 있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일승법 하나만을 주로 이야기 하는 입장이니까 혹유유선일승법(或有唯宣一乘法)이라는 구절이 나온 김에 우리가 화엄경을 앞에 놓고는 이러한 최상승 불교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
일중방편현무량(一中方便現無量)이로다 :그 일승법에서 또 그 방편을 한량없이 또 나타내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 근기 따라서 방편은 얼마든지 활용을 하되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일승법 하나라는 것,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손 한 번 들 줄 알고, 꽃 한 송이 꽂을 줄 알고, 절 한 번 할 줄 알고, 어린아이들처럼 모래 장난할 줄 알면 바로 거기에 부처의 작용이 나타나 있다.
*6
혹유자연성정각(或有自然成正覺)하사 : 혹 어떤 이는 자연히 정각을 이룬다. 참선하고 기도하고 간경하고 위파사나하고 그런 것을 안 해도 된다. 자연성정각이다.
영소중생주어도(令少衆生住於道)하며 :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도에 머물게 한다.
혹유능어일념중(或有能於一念中)에 : 혹 어떤 이는 능히 한 생각 가운데
개오군미무유수(開悟群迷無有數)로다 : 무수한 미혹한 중생들을 개오하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7
혹어모공출화운(或於毛孔出化雲)하사
시현무량무변불(示現無量無邊佛)하시니
일체세간개현도(一切世間皆現覩)라: 일체 세간이 다 거기에서 나타내서 볼 수 있음이라.
종종방편도군생(種種方便度群生)이로다 :갖가지 방편으로 군생을 제도하더라.
*8
혹유언음보주변(或有言音普周遍)하야 : 혹 어떤 이는 설법하는 소리로 널리 두루두루 하게 해서, 언음(言音)은 설법하는 소리이다.
수기심락이설법(隨其心樂而說法)하사 : 그 마음에 즐겨하는 바를 따라서 설법하시사
불가사의대겁중(不可思議大劫中)에 : 끝없는 세월 속에서
조복무량중생해(調伏無量衆生海)로다 : 한량없는 중생바다를 조복하는 도다.
*9
혹유무량장엄국(或有無量莊嚴國)에 : 혹 어떤 이는 한량없는 장엄국에
중회청정엄연좌(衆會淸淨儼然坐)어든 : 대중들의 모임이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데 의젓하게 앉아 있다. 청정은 훌륭하고 뛰어난 것이고 엄연좌라고 하는 것은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중회가 청정한데 의젓하게 앉아 있다.
불여운포재기중(佛如雲布在其中)하사 : 부처님은 마치 구름이 펼친 듯 그 가운데 떡 계셔서
시방찰해미불충(十方刹海靡不充)이로다 : 시방찰해에 충만하지 아니한 데가 없더라.
*10
제불방편부사의(諸佛方便不思議)여 : 모든 부처님의 방편이 불가사의함이여
수중생심실현전(隨衆生心悉現前)하사 : 중생심을 따라서 다 이미 나타나 있다.
부처님이 우리가 법당에 모셔놓은 모습과 유사하게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것은 소승적인 편협한 안목이다.
화엄경의 안목으로는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전부 부처다. 그렇게 알면 된다. 부처님은 중생심을 따라서 다 앞에 나타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특정한 모습이나 아니면 법당에 계시는 모습을 가진 어떤 이가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답이 없고 해결이 안 된다. 화엄경을 백 날 읽어도 화엄경 맛을 제대로 못 본다.
내 앞에 청산이 있으면 청산이 이대로 부처이고, 내 앞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내 앞에 싸움판이 벌어져 있으면 ‘아 부처님들 싸움 잘 한다’ 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화엄경의 안목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좁은 마음에 얼른 납득이 안 된다.
우리의 눈이 열린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주종종장엄찰(普住種種莊嚴刹)하야 : 가지가지 장엄한 세계에 두루두루 머물러서
일체국토개주변(一切國土皆周遍)이로다 : 일체국토에 다 두루두루 펼쳐져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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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서 말하는 화장장엄 세계를 유마경에서는 불국세계라고 하고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세계라고 한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이상세계가 동일하다.
유마경의 불국품에는 사리불이 부처님에게 ‘부처님은 과거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서 정말 훌륭하고 청정한 국토에 계셔야 하는데 어찌 우리하고 똑같이 이렇게 척박한 땅에 계시는가’하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부처님은 자꾸 화장장엄세계와 같은 아름다운 불국토를 이야기 하지만 사리불의 눈에는 우리들의 세상이 잡다하고 척박하며 온갖 가시덩굴과 낭떠러지, 사나운 짐승이 있는 땅으로 보였고, 우리는 미혹한 중생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땅에 살지만 부처님이 어찌하여 이러한 땅에 나게 되셨는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 의심을 풀어주느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그것은 세상에 태양이 이렇게 환하게 비추는데 맹인이 그 태양빛을 보지 못해서 이 땅이 왜 이렇게 캄캄한가, 이 세계가 이렇게 캄캄한가를 한탄하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비유이다.
‘그대의 눈에는 이 땅이 돌이나 자갈이나 똥오줌이 넘쳐나는 아주 형편없는 인도의 척박한 땅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야말로 화장장엄세계로 보인다. 그대는 눈을 감고, 아니면 맹인이 되어서 태양이 이렇게 강렬하게 비추는데도 어둡다고 하고 있고, 나는 태양빛도 밝게 비추고 눈도 밝아서 환하게 빛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그대의 열리지 못한 눈을 한탄할지언정 절대로 세상이 어둡다 세상이 추하다 더럽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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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소견을 바꾸고, 내 안목을 바꾸는 것이다. 내 안목을 바꾸면 현재 이대로가 화장장엄 세계이다. 어느 경전이든지 불교의 세계관은 그러하다.
결코 세상을 바꿔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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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2009년 1월 20일) 용산 철거민 사건이 나서 사람들이 여섯 명이나 죽었다. 서울에서 법회를 할 때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사람을 그렇게 죽게까지 하면서 철거를 하여서 거기 아무리 새로운 집을 잘 지은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경제를 부흥시켜서 설사 서울시내 전체를 황금으로 지었다손 치자, 그래놓고 사람에 대한 가치를 모른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때 그런 이야기들을 법회에서 하였다.
사람을 사정없이 살해하고 무시하고 서로 반목하고 서로 뒤통수에다 칼을 들이대고 서로 속이려고 하고 서로 사기 치려고 하게 된다면 황금으로 집을 지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설사 황금으로 집을 지었다한들 사람 관계가 그렇게 되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 그렇게 경제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우리 종교인이 볼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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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설명한 화장장엄 세계라든지 하는 것은 우리 안목으로 볼 때 정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이다.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지만 그 얼토당토 않는 것이 결국은 이해되어져야 한다. 우리 눈에 이 세상은 그대로 화장장엄 세계로 비춰져야 되는 것이다. 무언가가 바뀌어서 그렇게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해서 그렇게 비춰져야 된다. 거기에 답이 있지 달리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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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십종 차별을 이야기 했다.
9, 世界劫住
(1) 十種劫住
爾時에 普賢菩薩이 復告大衆言하사대 諸佛子야 應知世界海에 有世界海微塵數劫住니 所謂或有阿僧祗劫住며 或有無量劫住며 或有無邊劫住며 或有無等劫住며 或有不可數劫住며 或有不可稱劫住며 或有不可思劫住며 或有不可量劫住며 或有不可說劫住며 或有不可說不可說劫住라 如是等이 有世界海微塵數하니라
그때 보현보살이 다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 모든 불자들이여, 응당히 알아라. 세계바다에 세계바다 미진수의 겁의 머무름이 있느니라. 이른바 혹 아승지(阿僧祗) 겁 동안 머물며, 혹 한량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 끝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같을 이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셀 수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일컬을 수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생각할 수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머물며, 혹은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머무느니라. 이와 같은 것이 세계바다 미진수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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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겁주 (世界劫住) : 세계에 겁(劫)의 머무름이 있음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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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머무는 것, 한 세계가 얼마만치 머무는가 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끔 우주에 가득히 떠 있는 많고 많은 별에 대한 비유를 든다.
별들 중에는 지금 생기는 것도 있고, 지금 막 형성이 된 과정에 있는 것도 있고, 한참 살기 좋은 환경에 있는 것도 있고, 벌써 늙어서 소멸로 가거나, 이제 완전히 소멸한 과정의 별도 있다.
그 과정이 여러 수천만 단계로 쪼개진다. 수천 단계로 쪼갤 수 있는 과정의 별들이 지금 이 우주에 다 있다. 혹 어떤 것은 생기고, 혹 어떤 것은 머물러 있고, 혹 어떤 것은 무너지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다 그 내용이다.
화엄경은 이미 지금 천문학에서 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하나도 틀리지 않게 이야기 해 놓았다. 화엄경이 위대한 경전이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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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겁주(十種劫住) :열 가지 겁의 머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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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십종겁주를 이야기 하고 결론에 가서는 이러한 경우가 세계해 미진수가 있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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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그 때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부고대중언(復告大衆言)하사대 : 다시 대중들에게 고해 말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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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자(諸佛子)야 : 모든 불자들이여
응지세계해(應知世界海)에 : 응당히 알라. 세계해에
유세계해미진수겁주(有世界海微塵數劫住)니 : 또 세계해 미진수 겁주가 있으니,
겁주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지구라는 별이 있다 하면 그 지구가 지구로써 머물고 있는 시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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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혹유아승지겁주(所謂或有阿僧祗劫住)며 1: 소위 혹 어떤 별은 아승지라고 하는 정도의 길고 긴 겁 동안 머물러 있는 별도 있고
혹유무량겁주(或有無量劫住)며2 : 혹 어떤 것은 무량겁주이고
혹유무변겁주(或有無邊劫住)며3: 혹 어떤 것은 무변겁주이고. 아승지나, 무량, 무변에 줄을 그어 놓기 바란다.
혹유무등겁주(或有無等劫住)며4 :혹 무등겁주가 있다. 이것이 인도에서의 숫자 단위인데 97개 단위가 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조, 경, 해 등등 숫자단위가 기껏해야 열 댓 개 밖에 안 나온다. 그래 봐야 쓰는 것이 조까지 이고 경도 어쩌다 한 번 쓸까 말까다. 인도에는 숫자 단계가 97단계가 있다. 그 중에 여기는 가장 큰 마지막 숫자들만 열 개를 나열한 것이다.
아승지, 무량, 무수, 무변, 무등,
혹유불가수겁주(或有不可數劫住)며5 : 불가수겁주
혹유불가칭겁주(或有不可稱劫住)며6 : 불가칭겁주
혹유불가사겁주(或有不可思劫住)며7 : 불가사겁주
혹유불가량겁주(或有不可量劫住)며8 : 또 불가량겁주
혹유불가설겁주(或有不可說劫住)며9 : 불가설겁주
혹유불가설불가설겁주(或有不可說不可說劫住)라 10: 그 다음에 최고 마지막에 불가설불가설겁주.
97개 숫자단위 중에서 제일 높은 단위가 불가설 불가설이다.
글자대로 해석하더라도 불가칭 불가사 불가량까지 하다가 ‘더이상 말할 수 없다’고 해 놓고 그 다음엔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다’라고 표현하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인도 사람들이 뛰어난 수학적 머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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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등(如是等)이
유세계해미진수(有世界海微塵數)하니라 : 세계해 미진수가 있다.
화엄경의 제 30품인 아승지품은 결국 숫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가면 97단계가 다 나온다. 여기는 마지막 열 단계만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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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추측한 바에 의하면 우리 지구나이가 45억년 쯤이며, 좀 길게 잡으면 60억 년 쯤으로 잡는다. 그런데 여기 아승지만 하더라도 60억년 가지고 될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근거 없는 나의 추측이지만, 지구는 지금까지 보다 더 오래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60억년 정도 가 지나면 그 수명이 다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사람의 수명이 서로 다르듯이 별들의 수명도 다 다르다.
지구의 최대 나이가 120억년 정도라고 하는 것은 아무데도 근거가 없는 순전히 엉터리 나의 학설이고 나 혼자 말하기 좋으라고 하는 임시 소리이니까 그렇게 알기 바란다.
그런데 이 지구가 120억년만 산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숫자이다.
이 대목은 그렇게 세계해의 수명이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2) 重頌
爾時에 普賢菩薩이 欲重宣其義하사 承佛威力하사 觀察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世界海中種種劫이 廣大方便所莊嚴이라
十方國土咸觀見하야 數量差別悉明了로다
我見十方世界海의 劫數無量等衆生호니
或長或短或無邊을 以佛音聲今演說이로다
我見十方諸刹海가 或住國土微塵劫하며
或有一劫或無數하니 以願種種各不同이로다
或有純淨或純染하며 或復染淨二俱雜이라
願海安立種種殊하야 住於衆生心想中이로다
往昔修行刹塵劫하사 獲大淸淨世界海하시니
諸佛境界具莊嚴하야 永住無邊廣大劫이로다
有名種種寶光明이며 或名等音焰眼藏이며
離塵光明及賢劫이니 此淸淨劫攝一切로다
有淸淨劫一佛興하며 或一劫中無量現하사
無盡方便大願力으로 入於一切種種劫이로다
或無量劫入一劫하며 或復一劫入多劫하야
一切劫海種種門이 十方國土皆明現이로다
或一切劫莊嚴事를 於一劫中皆現覩하며
或一切內所莊嚴이 普入一切無邊劫이로다
始從一念終成劫이 悉依衆生心想生이라
一切刹海劫無邊을 以一方便皆淸淨이로다
그때 보현보살이 그 뜻을 거듭 펴려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설하였다.
세계바다 가운데 갖가지 겁이
넓고 큰 방편으로 장엄하였네
시방 국토를 다 살펴보고
수량과 차별을 다 밝게 알도다
내가 보니 시방세계바다의
겁수(劫數)가 한량없어 중생과 같음이라
혹은 길고 혹은 짧고 혹은 끝없어
부처님의 음성으로 지금 연설 하도다
내가 보니 시방의 모든 세계바다가
혹은 국토의 미진 겁 동안 머물며
혹은 일 겁 혹은 셀 수 없으니
서원으로서 갖가지 같지 않도다
혹은 순전히 맑고 혹은 순전히 물들었으며
혹은 또 맑고 물든 것이 함께 섞였네
서원바다 세운 것이 갖가지로 달라서
중생의 생각 속에 머무는도다
지난 옛적 세계 미진 겁 동안 수행하사
크고 청정한 세계바다를 얻으시니
모든 부처님의 경계가 장엄을 갖추어서
끝없는 광대한 겁 동안 길이 머무네
어떤 것은 이름이 종종보광명(種種寶光明)이며
혹은 이름이 등음염안장(等音焰眼藏)이며
이진광명(離塵光明)이며, 현겁(賢劫)이니
이 청정한 겁이 일체를 거두었네
청정한 겁에 한 부처님이 일어나며
혹은 한 겁에 한량없이 나타나사
다함없는 방편과 큰 원력으로
온갖 여러 가지 겁에 들어갔네
혹은 한량없는 겁이 한 겁에 들어가며
혹은 또 한 겁이 많은 겁에 들어가서
모든 겁 바다의 갖가지 문이
시방 국토에 다 밝게 나타났네
혹 모든 겁의 장엄한 일을
한 겁 가운데 다 나타내 보이며
혹 한 겁 안에 장엄한 것이
모든 끝없는 겁에 널리 들어가네
처음 한 생각에서 마침내 겁을 이룸이
다 중생의 마음을 의지해서 나옴이라
온갖 세계바다의 끝없는 겁을
한 방편으로써 다 청정하게 하네
*
중송(重頌): 그 뜻을 게송으로 거듭 펴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욕중선기의(欲重宣其義)하사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관찰시방(觀察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1
세계해중종종겁(世界海中種種劫)이 : 세계해 가운데 갖가지 겁이
광대방편소장엄(廣大方便所莊嚴)이라 : 광대한 방편으로 장엄한 바라
시방국토함관견(十方國土咸觀見)하야 : 시방국토를 다 보아서
수량차별실명료(數量差別悉明了)로다 :한량없는 차별을 다 안다. 누가 아느냐? 세계가 세계를 안다. 지구가 지구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엉터리가 아니라 틀림이 없다.
내가 지구의 수명이 120억년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그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고 지구가 지구를 아는 것이 하루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
화엄경은 늘 말씀드리지만 상설변설(常說遍說)이다.
이 우주가 우주를 설하는 것이다. 우주가 우주를 설하는 것이 화엄경이다 보니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항상 설하고 어디서든지 설한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세계해가 세계해를 보는 것이고 세계가 세계를 아는 것이다. 지구가 지구를 알고 내 몸이 내 몸을 아는 것이다. 내 마음은 내 몸을 모르지만, 내 몸은 내 몸을 알기 때문에 이것은 틀림이 없다.
*2
아견시방세계해(我見十方世界海)의 : 내가 보니 시방세계해의
겁수무량등중생(劫數無量等衆生)호니 :겁수가 한량없는 것이 중생수와 같은 것을 내가 본다. 아견(我見)이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는 보현보살이 설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보현보살인들 어느 특정인은 아니다.
혹장혹단무변(或長或短或無邊)을 : 혹 길고 혹은 짧고 혹 가없는 것을
이불음성금연설(以佛音聲今演說)이로다 :부처님의 음성으로 지금 연설한다. 낱낱 사물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3
아견시방제찰해(我見十方諸刹海)가 : 내가 보니 시방제찰해가
혹주국토미진겁(或住國土微塵劫)하며 :혹은 국토미진겁 동안 머물고 있다. 이 국토를 부수어서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작은 먼지 숫자와 같은 겁 동안 머문다.
혹유일겁혹무수(或有一劫或無數)하니 : 혹은 일 겁 동안 머물기도 하고 혹은 무수 겁 동안 머물기도 한다.
이원종종각부동(以願種種各不同)이로다 :그것은 원력으로써
가지가지 같지 않더라.
여기 원력도 사람사람이 세운 어떤 특별한 원력이 아니다. 여기 원력은 바로 그 존재 자체를 말한다. 지구가 됐든 꽃 한 송이가 됐든 나무 한 포기가 됐든 그것이 가진 그 자체의 생명력이 바로 원력이다. 그것으로써 종종이 각각 부동하더라.
*4
혹유순정혹순염(或有純淨或純染)하며 : 혹은 순전히 깨끗하고 순전히 더럽기도 하며
혹부염정이구잡(或復染淨二俱雜)이라 : 혹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다 섞여서
원해안립종종수(願海安立種種殊)하야 :원력의 바다로 안립해서 안치되어 있다. 거기 그대로 있다.
그러니까 책 한 권, 종이 한 장, 물건 하나, 사람의 수명 하나도 다 각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그 힘을 다 각자가 가지고 있다. 그것이 원해(願海)이다. 원해가 있어서 그것이 갖가지로 다 다르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도 그렇다. 잠깐 말뚝신심을 내면 며칠 하다 마는 경우도 있고, 몇 달 하는 경우도 있고, 몇 년 하는 경우도 있고, 평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고자 하는 의욕, 원력에 따라서 그렇게 다르다.
주어중생심상중(住於衆生心想中)이로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머물고 있더라.
*5
왕석수행찰진겁(往昔修行刹塵劫)하사 :왕석에 찰진겁 동안 수행하사
획대청정세계해(獲大淸淨世界海)하시니 :아주 크고 청정한 세계해를 얻었으니
제불경계구장엄(諸佛境界具莊嚴)하야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함께 장엄해서
영주무변광대겁(永住無邊廣大劫)이로다 :무변광대겁 동안 영원히 머물더라.
*6
유명종종보광명(有名種種寶光明)이며 :혹 이름이 종종 보광명이며. 그런 이름을 가졌다.
혹명등음염안장(或名等音焰眼藏)이며 :혹은 등음염안장이라고 하는 이름도 가졌다. 이것도 하나의 이름이다.
이진광명급현겁(離塵光明及賢劫)이니: 이것이 다 겁의 이름이다. 우리가 과거 7불을 이야기 할 때도 현재 겁인 현겁과 그 이전의 겁인 장엄겁을 이야기 한다. 화엄경의 관점에서 보면 겁마다 다 이름이 있는 것이다.
마치 짧게는 조선시대에도 ‘광서 몇 년’이니 하는 연호(年號)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차청정겁섭일체(此淸淨劫攝一切)로다 :이 많은 청정한 겁들이 일체 다 포섭되었더라.
*7
유청정겁일불흥(有淸淨劫一佛興)하며 :어떤 청정한 겁에는 한 부처님이 출흥하기도 하고
혹일겁중무량현(或一劫中無量現)하사 :혹 일 겁 중에 무량부처님이 나타나기도 하며
무진방편대원력(無盡方便大願力)으로 :무진 방편과 대원력으로
입어일체종종겁(入於一切種種劫)이로다 :일체 갖가지 겁에 다 들어갔더라.
*8
혹무량겁입일겁(或無量劫入一劫)하며 : 혹 무량겁이 일겁에 들어가고
혹부일겁입다겁(或復一劫入多劫)하야 : 일겁이 다겁에 들어가서.
이것은 화엄경의 안목에서 본 시간성이다. 이런 구절에서 의상스님이 그 뜻을 추려서 법성게를 만들었다. 이 대목은 법성게의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표현과 같다.
공간성으로써 화엄의 이치를 이야기할 때는 의상스님은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고 하였다. 어떤 물건이 그렇게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먼지 하나 건들지 아니한 상태로 세계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눈이 열리고 깨달으신 분들은 그렇게 다 보는 것이다. 그렇게 비춰지니까 그런 표현을 한다.
우리도 눈이 열리면 바로 앉은 자리에서 그러한 사실을 보게 된다. 그렇게 보고 느끼고 수용하게 된다.
일체겁해종종문(一切劫海種種門)이 : 일체 겁해의 갖가지 문이
시방국토개명현(十方國土皆明現)이로다: 시방국토에서 다 밝게 나타났더라.
*9
혹일체겁장엄사(或一切劫莊嚴事)를 :혹 일체겁 동안 장엄한
그 일을
어일겁중개현도(於一劫中皆現覩)하며 : 일 겁 가운데 다 나타내 보인다.
절에 불사가 있고 행사가 있을 때 우리는 별별 장엄을 한다. 여기 화엄경의 장엄은 그런 차원의 장엄이 아니라 이미 되어져 있는 장엄이다. 봄이 오면 잎이 피고 꽃이 핀다.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하고 짙게 푸르러진다. 다시 가을이 되면 별별 단풍 색깔로 변해간다. 그러한 모습이 가장 훌륭한 장엄이다. 사람이 조금 장엄해 봤자 그것이 무슨 장엄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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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불사를 했다고 하도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무궁화나무를 좀 심어놓고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빙 둘러서 등을 연결해 놓았다. 그런데 그 등이 특별할 것도 없는 길쭉한 네온사인 등이었다. 거기 전기를 연결해 놓고 스위치 올리니까 지도모양의 불이 들어왔다. 그렇게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을 불사라고 해놓고 사람을 오라 가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런 법문을 듣지도 않으니까 아무리 이야기해도 상관이 없다. 들으면 큰일이지만 안 들으니까 나도 마음대로 이야기 한다. 세상에 그런 장엄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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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해봐야 본래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그대로 두는 것보다 더 제대로 강을 관리하는 것은 없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강변 모습은 없다.
인위적으로 무슨 구조물 잔뜩 해가지고 그것 어쩌자는 것인가. 그것이 뭐 보기 좋은 것인가. 인위적으로 시멘트로 만든 구조물이 뭐가 보기 좋은가.
자연스럽게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또 지형도 세월 따라서 지형이 바뀌면 바꾸어지는 그대로, 그 모습이 제일 아름다운 것이다. 마지못해서 건드려야 할 경우도 물론 있지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이런 자리에서 그 소리까지 해버렸다.
이번 여름비에 일제 때 만들었다고 하는 기념해 둬야 할 다리까지 떠내려 가버리고 얼마나 많은 손실이 있었는지 모른다. 일일이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문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불사를 하면서, 장엄이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하면 과연 장엄이 되는가’를 두 번 세 번 잘 생각하고 검토해서 해야 한다.
혹일체내소장엄(或一切內所莊嚴)이 : 일체 안에 장엄된 바가
보입일체무변겁(普入一切無邊劫)이로다 :일체무변겁에 다 들어갔다.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물은 물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그대로 다 시류 따라서 잘 장엄해 주고 있다.
9월에 접어드니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높은 9월 하늘이 얼마나 근사한 장엄인가. 저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장엄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하고 탄복을 한다. 우리 불자들이라도 그런 데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이 되어져야 한다.
*10
시종일념종성겁(始從一念終成劫)이 : 일념으로부터 마침내 겁을 이루는 것이
실의중생심상생(悉依衆生心想生)이라 : 다 중생심상을 의지해서 생긴 것이다.
마치는 것, 이루는 것, 변하고 소멸하고 완전히 없어지는 과정들이 천차만별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전부 중생심상을 의지해서 생기는 것이다.
일체찰해겁무변(一切刹海劫無邊)을 : 일체 찰해의 겁이 가히 없는 것을
이일방편개청정(以一方便皆淸淨)이로다 : 하나의 방편으로써 다 청정하게 하더라.
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방편이다. 인위적인 방편이 아니고 본래 있는 것이며 그대로 무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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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달 중에 가장 기다리던 글, 가장 반가운 글, 혜명화의 글. 화엄경 스케치.
諸佛法身不思議여/無色無形無影像호대/能爲衆生現衆相하사/隨其心樂悉令見이로다
부처님의 법신은 불가사의 해서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그림자마저 없지만, 능히 중생을 위해서 온갖 모습을 나타내어, 각각 그 사람의 마음에 즐겨하는 바를 따라서 능히 다 보게 한다. _()()()_
화엄경의 안목으로는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전부 부처다.
불교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소견을 바꾸고, 내 안목을 바꾸는 것이다. 내 안목을 바꾸면 현재 이대로가 화장장엄 세계이다. 어느 경전이든지 불교의 세계관은 그러하다. 어른스님의 말씀처럼 기다려지는 혜명화 님의 아름다운 글, 고맙습니다_()()()_
화엄축제...화엄의 眼目...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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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햐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혜명화님 정말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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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의 열정...^^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_()()()_ 사이사이 아름다운 모습 모습
푸른하늘 흰
혜명화님 ! 고맙습니다.
내 안목을 바꾸면 현재 이대로가 화장장엄 세계이다...고맙습니다. _()()()_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우리 사는 이대로가 부처의 모습...혜명화 님! 수고하셨습니다.. 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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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장엄 ..화엄의 장엄이 바로 이미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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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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