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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영혼의 사후세계를 말하는 성경구절
과연 사후(死後) 세계에서 영혼의 의식적인 활동이 있을까 없을까? 기독교에서는 살아 생전에 육체와 영혼은 전인적(全人的)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사후(死後)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며,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 곁으로 가서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고 한다. 그곳을 우리는 낙원이라고 부르며, 그러나 카톨릭에서 말하는 사후영혼이 가는 중간장소의 개념과는 다르다. 카톧릭은 영혼도 시간이 있어서 일정한 시간을 중간기를 거쳐야 천국간다고하는 영혼정화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나 소위 영혼수면설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특히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같은 곳은 사후(死後) 영혼은 의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며 무의식 상태로 무덤에 머문다고 주장하며, 그곳을 음부라고 한다. 즉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은 고통받는 음부는 없으며, 누구든지 사후(死後)에 가는 무덤이 음부이며, 부활까지 무의식상태로 머물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병원의 응급실에서 한달만 근무한다면 금방알 것이다. 죽는 사람들이 무슨말을 하고죽는지를 확인하면 될것이다. 산 체험을 해보라.
물론 성경에서는 몇몇구절은 죽은 자는 도모(계획)가 없다든지, 의식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잠을 잔다는 표현은 성경에 몇구절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146:4)를 들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사후 "영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자각적인 입장에서 말할 때에 죽은 시체는 당연히 도모(계획)가 없으며 의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사후 영혼의 무의식을 말하는 성경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욱이 그러한 기록이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여 그것을 성경전체가 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교리로 채택하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또 죽은 자에게 잠을 잔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금도 세계 어느 나라의 언어에서도 사용되는 문학적인 표현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모습은 마치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문학적인 표현으로 죽음의 상태를 "잠을 잔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더군다나 잠을 잔다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고 하여, 그것이 안식교가 말하는 사후영혼의 무의식상태를 의미하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잠을 자는 것은 무의식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사후(死後) 의식적인 영혼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성경에서는 육체는 땅(무덤)으로 돌아가지만, 신(spirit)은 무덤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즉 신(spirit)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또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 창세기35장18절에도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창35:18)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5)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2-24)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또 성경은 음부라고 하는 무덤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예수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 곁에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20: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3-24)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또 성경은 내세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15:19)
물론 영혼의 사후세계와 의식적 활동이 존재한다는 성경적인 증거는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2장26절에는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시체는 영혼이 없는 것이며 이것은 사후에는 영혼이 시체와 함께 무의식상태로서 함께 존재한다는 안식교의 교리와 다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말씀하셨다.(눅24:39)
물론 그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의 부활체가 영혼이 아닌 신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져보라"고 하셨던 것이지만, 만일 영혼의 존재가 실제로 없다면, 예수님이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영혼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영혼은 살과 뼈가 없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여야 한다.
또한 스데반은 죽임을 당하기 직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부르짖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의 주장과 같이 영혼의 사후세계가 없고, 사후 영혼이 무의식 상태로 무덤에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달라고 말하며, 스데반은 주님께 내 영혼을 받아달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곡식과 물건이 풍족한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간다는 누가복음12:20 역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여 가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지만,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떠나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혼은 무의식상태로 사체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 나거늘...."(눅8:55)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와 그 아내가 사도들의 발 앞에 팔았던 밭의 값을 속이었을 때에도 "혼이 떠나갔다"(행5:5. 5: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 다윗은 그의 어린 아이가 죽자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사후에 다윗이 어느 "장소적인 곳"에
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12:23)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2-6)
▶ 십자가 강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안식교회의 교리를 따르자면, 십자가의 강도는 그 영혼이 그 시체와 함께 무의적인 수면을 취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안식교의 교리대로라면, 예수님이 강도에게 말씀하신 낙원이 곧 의식없는 무덤(음부)이 되어진다. 이에 대하여 본인과 토론한 적이 있는 어느 안식교의 목사는, 헬라어 원문에는 콤마가 없으며, 그 성경구절은 "내가 <오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고금 세계각국의 모든 번역성경이 잘못된 번역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안식교의 주장대로 번역된 성경은 세계 모든 성경을 찾아 보아도 단 한 권도 없다. 다시 말하자면 안식교의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먼저 만들어진 안식교 교리의 틀에 성경을 짜맞추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교리가 성경과 다르면 성경번역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라면 어떤 이단과 사이비도 모두 변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개역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번역본을 살펴보자.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 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표준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KJV] 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NIV]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RSV] And he said to him,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즉 당대의 언어전문가들이 번역한 고금 세계각국의 모든 번역성경이 잘못된 번역을 하였다는 주장인데,
안식교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안식교는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안식교 교리는 번역된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안식교교리는 어떤 성경을 근거로 만들어진 교리란 말인가? 안식교는 성경원본을 갖고 있는가? 안식교가 성경을 무시하면서까지 엘렌화잇의 주장을 무조건 추종한다는 움직이지 못하는 증거이다. 안식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엘렌화잇이 아래와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현존하는 세계의 성경이 다 틀렸지만, 엘렌화잇의 주장은 무조건 옳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교리를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고, 안식교의 엘렌화잇은 "오늘 네게 이르노니"라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엘렌화잇의 살아남는 이들, 시조사 201쪽) 엘렌화잇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잘못된 것이다.
1. 강도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구하였다. 즉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라는 미래의 불확실한 시간적 부사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불확실한 장래를 말하는 <나라에 임할 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그 강도가 낙원에 있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성경구절 중에서 "내가 오늘 말하노니....."라는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사람이든지 "내가 말한다"는 구절에 대해 "오늘 내가 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러한 말투는 내용도 문맥자체도 매우 이상한 것이다. 즉 현재 말을 하는 사람으로서, 말을 언제 하겠다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3. 눅23:43과 매우 유사한 문맥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마태복음26;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구절을 만일 "내가 닭이 울기 전에 진실로 네게 오늘밤 이르노니...."라고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로 옮기는 해석도 옳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오늘밤에 말하셨는가? 아니면 닭이 오늘밤에 울었는가?
4. 역대 이래로 성경번역본은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와 신학자들이 번역해 온 것이다. 안식교회는 성경원본을 가진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번역본의 성경이 다 틀렸다고 하여야만 하는 이상한 해석을 진리이며, 원본적인 해석이라고 당연히 믿는가?
안식교회의 교리는 알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성경원본으로부터 유래된 것인가, 아니면 번역성경이나 사본으로부터 유래된 것인가? 적어도 엘렌화잇은 현존하는 번역본 성경과 틀린 교리를 주장하였다는 것은 인정하는가?
엘렌화잇이 그러한 주장을 할 당시에도 성경은 지금과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왜 번역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야만 안식교교리가 인정되어지는가?
▶부자와 나사로
나사로와 부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안식교회는 그것은 단지 실제로 있지 않은 이방종교의 설화라고 주장하며, 정말로 음부와 낙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비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실제로는 없는 이방종교의 설화를 말씀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경을 교리에 짜맞추기도 모자라는지,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마저 왜곡, 변질시키는 안식교회는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성경대로"의 교회인지 의심스럽다.
서양의 신데렐라와 우리나라의 콩쥐팥쥐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듯이, 고대 이집트의 민간전승의 유사한 설화가 있기는 있다.
이집트의 설화는 유대교 진영에서 전승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은 다음에 많은 사람이 참석한 호화스러운 장례식을 치른 부자 "세리 바르 마얀"과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도 없었던 가난한 학자의 이야기가 이집트의 설화이다. 설경 예수님이 흔히 떠도는 설화적 이야기에 자신의 독특한 의미를 전달하였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적인 사후의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그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맹목적이었다고는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후 영혼에 대한 많은 성경적인 근거와 일치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와 그 이집트의 설화는 큰 차이점이 있다.
"나사로"라는 헬라어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으로 이집트의 설화와 다르다.
이 명칭은 히브리어 "엘리에제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집트의 설화가 말하는 단순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후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의 결론이 되는 내용인 "회개"(30절)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지며, 성경으로 일컬어지는 "모세와 선지자"(31절)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살아 생전의 "회개"와 모세와 선지자로 표현되는 "성경말씀"을 사후세계의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천국으로 분류되는 조건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부자와 나사로의 성경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사후세계의 존재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기준은 모세와 선지자라고 표현된 성경을 읽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사후세계에서는 결코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성경의 표현을 보면,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눅16:22절)
그렇다면 안식교회의 교리와 같이 죽은 자의 영혼은 그 사체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후에도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는 결론이 되어질 것이다.
▶ 지옥
자유진보적인 신학자같이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는 구약에서의 음부는 불신자나 신자나 누구나 죽으면 가는 "무덤"이라고 주장하며 즉 고통받는 지옥이 없다고 한다.그렇다면 부자와 나사로에서 부자가 고통받는 음부는 무엇인가? 부자와 나사로에서 언급되는 음부는 헬라어 "하데스"로 구약에서 말하는 "쉐올"과 그 개념이 다르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아주 흥미있는 성경의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있다.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하데스)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31)
이 "음부"의 헬라어 단어는 "하데스"이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2장31절은 구약의 시편을 인용한 것으로 시편 16장10절을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쉐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그런데 이 시편 16:10의 구절에서 "음부"는 히브리어 "쉐올"이며, 신약 행2:31에서 그 쉐올은 헬라어 "하데스"로 번역되어졌다.
즉 누구나 죽어서 가는 무덤이 쉐올이라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가 주장과 달리, 구약의 히브리어 "쉐올"은 신약에서 헬라어로 "하데스"로 번역되어진 것이다. 즉 부자와 나사로에서 말하는 "고통이 있는 음부"인 "하데스"는 구약의 "쉐올"과 같은 뜻이라는 이야기이며, 구약의 "쉐올"은 신약에 들어와서 헬라어 "하데스"로 번역되어짐을 의미한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16:23)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음부는 "하데스"이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음부"로 번역하였는데, kjv와 niv 영어성경은 모두 이것을 hell 이라고 번역하였고, 공동번역은 "죽음의 세계"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이 부자와 나사로 외에 "하데스"란 용어가 사용된 다른 구절은 없을까? 그 하데스는 다른 구절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는데, "고통의 음부"를 의미하는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불못"이라고 성경에서 설명되어 있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20:13-14)
즉 구약의 히브리어 "쉐올"은 헬라어 "하데스"로 번역되어지며, 그 개념은 고통을 받는 음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쉐올이라는 구약의 음부가 악인이 가는 장소가 아니라, 누구든지 가는 무덤을 가르키는 것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시9:17)
시편9:17은 분명히 누구나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악인이 죽어서 가는 곳>이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열방>이 가는 곳을 말하는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쉐올"이다. 또,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와 아주 유사한 경우를 말한 구약의 구절도 있다.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음부(쉐올)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 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사5:11-14)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는 귀한 자는 주리게 되며, 무리는 목마르게 될 것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가야할 곳은 음부라는 장소적인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가는 곳이 쉐올이라면 위 성경구절은 이상하게 된다.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잠15:24)
이 구절도 매우 구체적인 음부의 개념을 설명하여 주는데, 잠언에서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말하므로, 음부를 떠나 위로 향한 생명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물론 이 "음부"도 "쉐올"이며, 특히 떠나다라는 뜻의 동사는 "쑤르"이며 이 단어는 "피하다. 외면하다"라는 뜻이다. 즉 지혜로운 자는 음부를 피하여 위로 향한 생명길로 간다는 뜻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8)
음부이든 하늘이든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라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는 구절이지만, 이 구절 역시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고, 음부에 자리를 펼 수도 있음을 선택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든지 음부라고 하는 무덤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안식교의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지 않는가? 또 마5:22 "지옥 불", 마23:33 "지옥의 판결" 등에서 사용되는 지옥은 헬라어 "게헨나"인데 이 단어가 언급하는 고통받는 장소적인 표현은 제법 많다. 물론 이 단어를 어원적으로 보면, 게힌놈 혹은 힌놈의 골짜기를 유래하는 단어를 말한다고 하지만, 이 단어는 분명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개념이며, 심판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며 하데스와 게헨나가 다른 장소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특히 이 단어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며 가르키시는 구절에서 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시되어질 이유가 없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지옥"이 다른 헬라어 단어로 사용된 예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 이 단어는 헬라어 "탈타로오"로서 지옥에 던지다는 동사이다. 다만, 이것은 불신자가 고통을 받는 곳이 아니라, 사단과 마귀들이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지는 무저갱을 가르킨다.
다음은 신약에서의 지옥에 관한 성경말씀이다.
마태복음 5:22 지옥불
마태복음 5:29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유익하며
마태복음 5:30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8:9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마태복음 23:15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가복음 9:43 지옥 꺼지지 않는 불
마가복음 9:45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7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누가복음 12:5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야고보서 3:6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베드로후서 2:4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마태복음 3:12 꺼지지 않는 불
마가복음 9:43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마가복음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누가복음 3:17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누가복음 16:22 부자와 나사로
마태복음 25:41 영영한 불
요한계시록 14:1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마태복음 25:46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13:42 풀무불에서 이를 갈며(마13:50)
어떻게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많은 구절을 상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옥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만일 그 개념이 상징적이며 현실적으로 없는 곳이라면, 이렇게 많은 구절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가? 이렇게 성경과 반대되는 교리라면 당연히 취소하여야만 할 것이며, 그러한 비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하던 엘렌화잇은 거짓선지자가 아닌가? 몇몇 오역의 소지가 있는 부분적인 구절만을 택하여 교리가 만들어졌다면, 그 교리는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또 모든 성경번역본이 다 잘못되었음을 전제하는 교리라면 결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리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고통받는 지옥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의 인위적인 교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연 지옥이 없는데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기인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출처: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