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
虛窗 朴籌丙
다산의 매화 그림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또 하나의 매화 그림이 2009년 6월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크기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것과 똑 같고 구도는 아주 닮았다. 그림의 3분의 2가 넘어 뵈는 아래 부분의 여백이 여백으로 남지 않고 시와 그 옆에 덧붙인 작은 글씨로 꽉 채워진 것도 전의 그림을 빼닮았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서 약간 아래로 처지면서 왼쪽으로 뻗은 가지는 전의 그림보다 훨씬 성기고 단조롭다. 활짝 핀 백매화 꽃이 여덟 송이 가량 되고 봉오리는 열 개쯤으로 보인다. 드문 착화(著花)를 보면 고매(古梅)가 분명하다. 전의 것은 두 마리의 새가 서로 어긋매껴 있지만 이번 그림에는 한 마리뿐이다. 새가 바라보는 방향도 전의 그림은 왼쪽인데 반해 이 그림은 오른쪽이다. 둥치 쪽이다. 보관상태가 좋아서 그런지 전의 그림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상하다. 풍기는 느낌이 전의 그림과는 판이하다. 전의 그림은 아늑한 기분이 드는데 반해 이번 것은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외롭게 보이는 한 마리 새 때문인 것 같다.
시와 그 옆의 글을 옮겨 본다.
묵은 가지 쇠하고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古枝衰朽欲成槎)
뽑아낸 푸른 가지가 꽃을 피웠네(擢出靑梢也放花)
어디서 날아온 채색 깃 작은 새(何處飛來彩翎雀)
다소곳이 머무는 한 짝이 천애에 떨어졌구나(應留一隻落天涯)
가경 계유 팔월 십구일 자하산방에서 써서(嘉慶癸酉八月十九日書于紫霞山房)
혜포 터앝에 씨 뿌린 늙은이에게 주려고 한다(擬贈種蕙圃翁)
자하산은 다산이란 산의 다른 이름이니 자하산방이란 다산초당이다. 계유년이면 1813년이니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매조도와 같은 해에 그린 것이다. 7월 14일에 딸에게 줄 그림을 그리고 불과 한 달 남짓 후에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다산이 1801년 동짓달 추운 날에 강진에 와서 거처를 못 정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동문 밖 한 노파의 주막집에 거소를 정한 뒤 한때는 절간으로 한때는 제자 이청(李田靑)의 집으로 이리저리 떠돈 세월이 8년, 마침내 다산의 외족 윤단(尹慱)의 산정인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흐른 세월이 10년, 회고하면 참으로 스산한 유락(流落)의 세월이었다. 처음 8년은 떠돌이 생활로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산초당 시절은 신변이 비교적 안정되어 학문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제자의 수가 아들 둘을 비롯해서 18명에 이르렀고 혜장이며 초의 같은 승려들도 무시로 들락거렸것다, 다산초당의 살림살이는 번다할 대로 번다해졌다. 세 끼 식사만 해도 그렇고 빨래며 청소도 그랬다. 초당에 정착하고부터 혜장의 배려로 어린 중 하나가 수발을 들었으나 일이 벅차서 나중엔 종을 들였는데 이 녀석이 워낙 게을러서 쫓아냈다. 저술에 바쁜 사내들만으로는 갈마들며 번을 들긴 했지만 감당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해배는 이미 물 건너 간 것 같고 다산은 지병인 중풍이 악화되어 폐인이 되다시피 되었다. 다산은 죽어서 강진 땅에 묻힐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살림을 맡아 할 여자를 들여야겠다고 윤단의 아들 윤규노(尹奎魯)가 간곡하게 권했다. 다산은 듣지 않고 한두 해 더 배겨내다가 마침내 산궁수진처(山窮水盡處)에 이르자 도리 없이 주위의 권유에 응하고 말았다. 1812년경, 강진 포구의 남당(南塘)에 살던 정씨 여인을 들였다. 이 여인이 속칭 ‘홍임(弘任) 모’이다. 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딸이 홍임이다.
줄기 하나에 두 개 이상의 꽃이 피는 것을 혜(蕙)라 하고 줄기 하나에 한 개의 꽃이 피는 것을 난(蘭)이라 하지만 통상 둘 다 난이라 한다. 또 여기의 포(圃)는 정(庭)의 뜻이다. 둘 다 담장 밖의 텃밭이 아니라 담장 안의 터앝이다. 혜포(蕙圃)는 난정(蘭庭)과 같은 말인데 자식을 뜻한다. 종(種)은 ‘씨를 뿌린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자식을 낳는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종혜포옹(種蕙圃翁)’ 즉 ‘혜포 터앝에 씨 뿌린 늙은이’란 말은 ‘자식을 낳은 늙은이’란 말이 된다.
혜포가 자식(子息)을 뜻한다면 딸을 시집보낸 뒤 한 달 만에 자식을 둔 셈이 되겠는데 그 자식은 누군가. 새로 들인 소실의 몸에서 태어난 홍임이 말고는 없다. 따라서 ‘혜포 터앝에 씨 뿌린 늙은이’란 다산 자신이다. 농와지경(弄瓦之慶)을 은유했다고나 할까. 이 그림은 새로 태어난 어린 딸을 위해서 그렸으니 응당 딸에게 줘야겠지만 딸이 아직 어리니 그 어미에게 줬어야 마땅할 텐데 주지 못한 모양이다.
전의 그림은 딸에게 준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 그림에서는 딸에게 준다는 말 대신에 ‘혜초 터앝에 씨 뿌린 늙은이’(種蕙圃翁) 곧 다산 자신에게 ‘주려고 한다’(擬贈)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홍부인이 보내온 다홍치마를 잘라서 아들에게 교훈을 써서 만든 「하피첩」(霞帔帖)을 보낸 3년 뒤 그 자투리로 시집가는 딸에게 매조도를 그려 보내고도 남은 천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 태어난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으나 홍임이는 아직 어리고 홍임이 모에게 이 그림을 주려했으나 그녀는 이 그림을 받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의 바탕이 된 천은 본처인 홍부인의 치마이기 때문이다. 전처가 쓰던 가구는 모조리 치워버리는 것이 후처의 마음이라 하는데 하물며 홍부인이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지 않는가. 같은 여자로서의 미안한 마음과 투기, 그리고 두려움 같은 것이 뒤엉켜 홍임이 모는 그 그림을 얼른 받을 수가 없었던 거다.
이 그림에서 다 썩어가는 둥치는 다산이요, 새는 홍임이다. 이때 다산은 3년 전에 장자 학연의 격쟁(擊錚)으로 해서 임금으로부터 해배 약속을 받고 통보만 기다리고 있던 때이다. ‘내가 여길 떠나고 나면 저 어린 것은 천애의 고아처럼 되겠지…’라는 애틋한 심정이 왜 안 들었겠나. “다소곳이 머무는 한 짝이 천애에 떨어졌구나!”라는 시구는 바로 다산의 그런 심정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9년 동안 다산 자신이 갖고 있다가 다산의 과거시험 동기인 이인행(李仁行)에게 주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 무렵 홍임이가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되었을 텐데 그때 홍임이가 죽었거나 홍임이의 신상에 큰 변고가 생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은 해배 후 18년의 세월이 귀양살이 하던 18년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