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레슬링 자유형의 양정모였다.
그후 1984년 LA올림픽에서 획득한
두 번째 금메달도 레슬링이었다.
김원기가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난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의 밭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던
어머니와 큰형이 버는 돈으로는 먹고살기
빠듯해 농고(함평농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레슬링부 최경수 감독은
전 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모집했다.
“레슬링을 하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감독의 말에 레슬링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체력적 조건은
레슬링 선수와 거리가 멀었다.
씨름, 태권도, 육상 등으로
몸을 단련한 학생들이 레슬링에 입단했다.
그는 레슬링부의 또래 아이들과 달랐다.
신장 1m 67cm에 몸무게 68kg
나갈 정도로 뚱뚱했다.
체력도, 기술도 항상 뒤쳐졌다.
성적을 내지 못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감독과 선수들에게 소외를 당했고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거기다 가난 때문에 항상 누군가가
사온 음식을 얻어먹어야만 했다.
김원기는 “집에서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정말 여기서 못하며 죽는다는
마음뿐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전국체전 금메달을 받고 전남대
체육교육학과 레슬링 팀에 들어갔다.
1983년 러시아(당시 소련) 키예프
세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 도전했다.
하지만 3월 1차전 예선전에 탈락했다.
그는 “한번 지고 나서는 자신감이 없어졌고
벽이 높았다”고 말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는 길은
오로지 훈련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매트도 없는
운동장 흙바닥이나 집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훈련에 임했다.
5월 2차전이 시작됐다.
겨우 3등을 했지만 결국 6월 최종 선발된다.
생애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출발 1주일을 앞두고
대한항공 피격사건이 터지면서
대회 참가가 무산됐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그는 레슬링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도전했다.
1984년 LA올림픽의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국가대표를 정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그는
동아대 배역 선수에게 2:1로 뒤지고 있었다.
“후배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공격할 찬스인 밧데루로
옆구리를 잡았지만 돌아가지 않았죠”
30초 남은 시간은 금방 이었다고 한다.
승패는 단 ‘1초’에서 정해졌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상대 선수가
돌아갔고 3:2로 역전했다.
“그 1초가 금메달로 갈 수 있는 의지였다”
고 말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를 보며 꿈을 키운 소년은
결국 그처럼 올림픽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는 “LA하늘에 태극기를 올렸다.
나는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후배 안대현에게 패한 뒤 은퇴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삼성생명 레슬링 트레이너로 활약한 그는
1989년 5월 삼성생명의 보험 세일즈맨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레슬링과 달리 보험판매를 시작하려는
그를 보고 주위의 우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야생마처럼 뛰어 놀던 운동선수가
봉급을 받으면서 사회를 배우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체계적인 보험 모집과정,
상담, 체결 관계 등 보험에 관련된
훈련을 해나갔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운동만 하던 그에게는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영업현장에서
최우수 타이틀을 받고 있었다.
“운동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직장도 마찬가지다. 나를 이기려면
나를 강하게 만들어야한다”고 말했다.
세일즈맨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어느 날 급여압류가 들어왔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써준 보증이 문제였다.
“급여 압류가 들어오는 순간 영업에
몰두 할 수 없었어요. 죽고 싶었습니다”
보증을 써준 곳은 한군데가 아니었다.
6~7개의 연대보증은 10억 원이 넘었고
결국 16년 9개월의 보험 세일즈맨
생활을 끝내게 했다.
직원이 아닌 NS하이텍(주)의 CEO로
그는 새로운 길을 시작했다.
국가대표출신답게 태극기가 달려있는
그의 회사는 벌써 5년차다.
직원 5명으로 시작해 8명으로 늘었고
올해는 40억원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93년 12월 삼성생명 세일즈맨으로
재직 중 결혼했다. 행복할 것 같던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시험관 아이를 9번 시도 후
끝내 포기했어요. 집사람이 고생했죠”
하지만 그는 가슴으로 낳은
8명의 아이들이 있다.
1998년 ‘전라남도 내 고장 인재 키우기’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의 첫째 아들
강래구를 만났다. 처음에는 후원인 관계였다.
그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에게
매달 일정금액을 통장으로 보내주는
후원을 했지만 어느 순간 아버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16년이 흐른 지금.
그는 8남매의 아버지다.
전라남도 함평, 영광군은 물론 제주에도 있다.
첫째 아들 강원도 체육회 강래구는
작년 10월에 열린 제 94회 전국체전
그레코로만형 84kg급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막내 임금별은 올 4월에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서 태권도 은메달을 땄다.
작년 11월 결혼한 큰아들 강래구의
결혼식 축의금 중 일부는 아프리카 가나에
2개의 우물파기 비용으로 보냈다.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가
향년 55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가운데
그의 이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씨는 전남 함평 출신으로
함평농고 1학년 때 레슬링을 시작해
지난 1983년 처음 국가대표가 됐다.
그는 그해 터키 국제레슬링대회에서 준우승,
다음해 미국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2kg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 한국 선수로서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기록했다.
이러한 공로로 김원기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86년 현역에서 은퇴한 김씨는
1989년 전남대에서 운동생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9년 경희대에서
체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함평군청 레슬링부 명예감독,
서울시장애인체육회 홍보대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 2017년 7월27일
강원 원주시 치악산에 오른 뒤
하산하다 심정지로 사망했다......
첫댓글 아쉽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김원기 참피언의
가족에게 무언가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안타갑습니다.
한창 후배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나이에..
고인의 뜻을 이어갈 레슬러를 응원합니다..
네, 생각이 납니다, 모두~
안타까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