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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인물설교]세리 출신의 사도 마태
마태복음 9:9~13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신약성경의 인물은 예수님의 12사도 중 하나였던 마태입니다.
먼저, 사도 마태의 출신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는 오늘 동일한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 2장에서 보면,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레위’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 그는 이미 자기의 어엿한 큰 집을 가지고 있으니 아마도 결혼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그가 일하는 곳은 가버나움의 세관이었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으로서 다메섹으로부터 예루살렘이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교통로에 위치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통관세금을 걷는 일로 매우 분주하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세리들에 의하여 거둔 세금들은 헤롯 왕가의 사치와 정치 자금에 주로 사용되었고, 나아가 그 세금 중에서 상당한 분량이 로마 정권으로 보내졌을 것입니다.
당시에 이러한 세리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삼중적으로 미움을 받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그 당시 세리들이 몹시 높은 세금을 부여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금을 징수하는 세금쟁이들은 로마 정권이나 헤롯 정권에게 가장 놓은 세금을 바치겠다고 입찰 경쟁을 통과하여 그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세금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액수를 채워 바치기 위해서 자기들이 고용한 세리들에게 혹독하게 세금을 많이 거두라고 재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세리 공무원들은 백성들로부터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업자’라는 악명이 높았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세리들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세리들은 세금 징수권을 이용하여 개인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세금 징수권자에게 일정 액수를 바친 후에는 자기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해서 개인적인 주머니를 채울 수 있도록 합법적인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허가받은 도둑질인 세금 강탈권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용하지 않을 만큼 청렴한 세리가 그 당시에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세리들은 백성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자기 뱃속을 기름지게 채우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세리들은 궁극적으로 당시 식민지를 다스리던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했기 때문입니다. 일제 때에 우리나라의 쌀과 보리 등을 공출해가는 데 앞장선 일본 앞잡이들을 좋아할 농민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민족반역자라고 손가락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는 그들은 당연히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상대해주는 유대인들은 없었습니다. 세리들은 자기들끼리나 어울려 지낼 수밖에 없었고,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세리들은 악한 자들이기 때문에 재판에서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은 그 당시에 몸을 팔아 살아가던 거리의 여인들인 창기들 곧 죄인들과 한 패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비록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늘 비참하고 철저히 외면받는 신세에 처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마태였던 것입니다.
그런 마태에게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날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것은 세금을 계산하거나 세금 정산 서류를 기록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하던 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향하여 주시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신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앞에 서 계시며 자기를 향하여 지긋히 눈을 주시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심이 분명하였습니다. 이미 이 때쯤에는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유명하신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시골 출신인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나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심으로 모든 가버나움 사람들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셨지만 그 입술에서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매한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그 말씀은 신성한 하늘의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듣는 이들의 마음을 깊이 뒤흔들고 변화시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세리 마태 역시 예수님의 집회에 멀찌감치 몇 번 가서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리 마태는 그 마음 속에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볼 때에 한없이 낙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죄인 중의 괴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말씀을 돈을 주고 사서 집에서 읽고 있지만 회당에 나가서 랍비들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된 처지입니다. 자기는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질 것이 너무나 분명한 자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라고 스스로도 믿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멀찌감치 듣고 마음에 감동이 들면 들수록 자기 같은 사람은 감히 가까이 뵐 수 없는 분이라고 더 마음이 괴롭고 힘이 들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바로 자기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마태는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인자하신 얼굴로 입을 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마태는 즉각적으로 알았습니다. 그 말씀은 자기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상상조차 못할 일이 자기에게 닥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자기같이 비천한 자를 제자로 불러 주시는 이 복된 초청의 말씀을 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관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마태의 이 즉각적인 순종은 놀라운 결단입니다. 이 결단은 그 동안 자기 삶을 지배해오던 물질 숭배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내려놓는 결단입니다. 그 동안 온갖 수모와 멸시와 냉대를 무릅쓰면서도 세리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대신 자기 삶을 채워주는 재물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난세에 무엇보다도 돈이 제일이라고 믿었던 마태는 젊은 시절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고 악착같이 노력해서 세리 공무원의 자격을 따려고 밤잠을 설쳤습니다. 세관에서 인정받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갖은 꾀를 다 써서 높은 세금을 붙여서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원하던 돈을 다 벌었고 큰 집과 자녀들을 얻은 중년의 때에, 자기 내면에 순간 순간 찾아오는 공허감과 심판의 두려움과 영혼의 갈증들 때문에 남모르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의 말씀을 남몰래 들으면서 더욱 이러한 고민이 커져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때에 자기 앞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는 마침내 결단을 확실히 내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옛날과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겠다는 확실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돈과 재물만을 주인 삼고 살아가는 삶은 끝임을 확실하게 알고서 그는 세관의 앉은 자리를 단호하게 떠나 주님의 뒤를 따라나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미적거리면서 차일 피일 미루고 돈과 재물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면 그의 사후에 몇십년 후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돈 많은 세리로 살다가 지옥불에 떨어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관을 담대하게 떠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마다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술에서 늘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19세기 위대한 전도자 디엘 무디가 순회 여행을 다니다가 한 젊은이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YMCA 집회 장소에 나와서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직업도 세무직무에 종사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에 디엘 무디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소? 18년 동안이나 당신을 기다려 왔소.”
이 위대한 복음전도자 디엘 무디에게 찬양사역자로 동역해주기를 초청받았던 젊은이는 유명한 아이라 생키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30살이었던 이 청년은 결단하고 이후 삼십 년을 무디와 동역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감격을 안겨주고 사람들의 영혼의 천국의 노랫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그 때 그 결단이 아니었다면 생키라는 청년은 무명 세무 직업을 가진 채 사라졌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물질은 필요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물질이 공급되어지기를 원하시고, 이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더 큰 부르심 앞에서 물질이 방해물이 된다면 그 물질을 얻는 것, 물질을 의지하는 것조차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우리 삶에 필요합니다.
물질 앞에서 사람은 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믿음의 길을 택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부자 청년도 영생의 길을 찾는 구도자의 마음은 가졌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부르심을 받고도 물질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슬픈 빛을 띠고 뒤로 물러감으로써 천국 문 앞까지 달려왔다가 돌아간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물질 때문에 천국 길을 찾다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 마태처럼 됩시다. 지난 날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았지만 이제 주님의 초대를 받고 난 후에는 즉각적으로 주님을 내 삶의 전적인 주인으로 삼았던 마태처럼, 우리도 주님께 내 삶을 맡기고 예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복된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세리 마태는 자기만 비밀리에 과거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이제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음을 자기의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공표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이 잔치에 자기의 모든 친구들 곧 가버나움의 모든 세리들과 세리들의 유일한 친구들인 죄인들 곧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창기들까지 다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하여 기뻐함을 표현했습니다. 잔치로써 예수님이 자기를 불러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요 축하받을 일이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잔치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주의 종들이 핍박받으며 죽임을 당하던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로부터 선지자로 부름받았던 엘리사가 큰 부잣집 풍족한 삶을 뒤로 한 채 고난하고 외롭고 힘든 선지자 사역으로 나서야 할 때에 도리어 그는 기뻐하며 잔치를 벌인 후에 엘리야를 따라 나선 것도 선지자의 사역이 비록 목숨이 위태롭고 외로운 사역이었지만 그 영광이 영원한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기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시작한 것은 참으로 잔치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감추고 숨길 일이 아니요 도리어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공표하면서 이 즐거운 은혜의 잔치에 함께 동참하자고 즐겁게 초대할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를 섬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크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 친구들, 직장 동료들, 가족들, 친척들까지 다 알릴 때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신앙의 행복과 축복과 영광을 중히 여기게 되고 동참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그들을 잔치에 초대한 뜻은 세상 친구들이던 동료들에게 이제 자기가 더 이상 과거의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돈을 제일주의로 살아가고 남의 호주머리를 털고 거짓말과 욕심과 이기주의로 살지 않겠고,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답게 그의 제자답게 살아갈 것을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함께 술마시며 함께 밤새 고스톱 치며 함께 일요일에 사방에 놀러다니는 일에 휩쓸리지 않더라도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분명한 선언이 이 잔치에 담겨 있는 줄 믿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말씀따라 살아갈 것이니, 내가 너희들과 이전에 함께 지내던 것처럼 못해준다고 해서 서운해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선언대로 달라진 삶을 살았고, 그의 동료들이 변하여 마태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진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 말씀에,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렘 15:19)고 말씀하였습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당부하기를 주의 제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해야지,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우리가 세상 사람의 삶의 방식에 맞추어 옛 생활에 동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마태처럼 분명하게 옛 동료들에게 선언하십시오. “우리는 달라졌다. 내가 너희들의 옛 생활에 돌아가는 일은 다시 없다. 이제 너희는 나의 변화된 삶을 따라오라”고 확실하게 삶을 통하여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마태의 집 잔치에 참여했을 때 예상된 비난이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와 친밀한 교제권 안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 당시의 관념을 뒤집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러한 비천한 자들까지 품으시겠다는 분명한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제자단의 일원으로 부르심으로써 세간의 비난을 받을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왕의 제자들의 직업이던 어부 출신으로서도 마뜩치 않았던 사람들은 이제 세리 출신의 제자까지 예수님이 제자단에 포함시킴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들의 품위는 땅 바닥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세간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비천한 자일지라도 은혜의 세계 속에서 새로워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예수님은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확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위대한 열매를 맺었으니, 곧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서가 그 열매입니다. 전통적으로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로서 다른 복음서 중에서 최초의 복음서라고 전통학설은 주장합니다. 물론 마가복음이 우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은 최근 3백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학설이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마태복음이 최초의 복음서로 믿어왔습니다.
이 마태복음서는 매우 조직적인 책으로서 예수님의 행하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 10장의 전도헌장, 13장의 7개의 비유 말씀, 24,25장의 종말론에 대한 감람산 강화, 28:20에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라는 지상 명령으로 맺음말을 이르기까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태복음이 가장 주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남겨서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게 만듭니다.
마태가 세리로서 늘 기록하는 습관, 자세히 분석하고 분류하는 습관 등을 통하여 훗날 복음서를 쓸 때에 이러한 장점이 잘 활용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마태의 귀한 능력을 마침내 선용하여 그의 가르침들과 행적들이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져서 교회의 큰 기촛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가장 비천한 자였지만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기에 합당한 자였던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받게 한 은총의 아들로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비록 비천하고 숱한 약점들이 많이 있지만,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심히 부족하지만 마태처럼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지극히 적은 달란트를 가진 우리지만 주님 손에 올려 드려지면 주님은 부족한 우리들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들이 됩시다.
참으로 마태와 같은 비천한 세리조차 자기의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의 관용과 사랑을 생각할 때 참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도 동일한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항상 처음 부름받은 그 때를 기억하면서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또한 마태가 재물에 대한 욕망을 과감하게 내려놓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주님 다음으로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결단을 내립시다. 더 이상 세상 친구들과 같은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나의 변화된 삶을 바라보며 주님께 다가서는 자가 됩시다. 동료들을 복음의 잔치로 초대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이끈 마태처럼, 우리들도 심령의 잔치를 항상 벌이는 기쁜 삶을 통하여 주위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자가 됩시다. 비록 적은 달란트일지라도 주님의 손에 내어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는 저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