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외
봄눈 뒤집어쓴 나뭇가지를 흔들자 겨울잠을 깬 작은 눈망울이 드러난다. 나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무의 촉과 눈을 마주친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가 된다. 눈의 세계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외계에서 날아온 파장과 오래 충전된 텔레파시가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 같다. 아니어도 괜찮다. 먼저 누가 기다렸을까, 그 송신과 수신이 사이를 떨리게 만든다. 타박타박 걸어오던 시간이 멈칫멈칫 걸음을 늦추고, 팽팽히 부푼 공간은 더 탱탱해질 것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남수단엔 비가, 우크라이나엔 봄눈 내릴 거라고 한다. 우리 밭 대추나무도 연초록 혀를 쑥 내밀 것이다. 아니어도 정말 괜찮다. 내 의지 밖에서 지구는 돌고, 눈은 눈으로 스밀 것이다. 아프다는 말도 잘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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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치는 세계
손 닿는 곳마다 책을 늘어놓고 동시에 여러 권을 읽곤 한다.지금 방바닥에는 베개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사진 이론과 한시 선집이 있고, 의자 옆에는 소설 두 권이 나란히 포개져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 가벼운 책과, 늦은 밤 읽기 위한 좀 무거운 책도 대기 중이다. 책을 섞어 읽다 보면 새로운 책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 읽던 <풍아송>과 <바다의 선물>을 방금 들추니, 주인공이 바뀌어 있다. 양커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 가서 시경을 연구하고, 베르너폰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침묵하고 있다. <거짓말의 탄생>과 <평범한 인생>을 펼치니, 여긴 더 꼬여 있다. 정한용이 철도역에서 깃발을 흔들다, 아, 지겨워, 무단이석하며 사고가 나고, 원래 복무하던 철도공무원은 보르헤스가 보냈다는 편지를 읽으며, 개새끼들!, 술주정하고 있다. 이해 불가라 여기시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원래 인생이란 뒤죽박죽 비빔밥 같아야 제맛이 날 터. 나는 조심 두 손으로 네 권의 책갈피를 넘겼다.
정한용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1985년 <시운동>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을 시작.
*천상병시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
*시집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흰꽃』 외,
*평론집 『초월의 시학』, 『울림과 들림』 외.
*영문 시선집 『How to Make a Mink Coat』, 『Children of Fire』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