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벌포(伎伐浦)는 백제(百濟) 때 충청도(忠淸道) 장항(長項)일대의 지명으로 금강(金剛)하구에 위치하며, 사비성(泗沘城)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반도 대한민국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네이버 인용)
2.
화랑도(花郞徒)를 통해 나라의 강건한 전투정신과 용맹함을 길러낸 신라(新羅)의 정치세력은 대륙의 서쪽 현 감숙성(甘肅省)의 기련산(祁連山, 당시 태행산)을 중심으로 웅비하고 있던 당(唐)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의 통일을 시도하게 된다.
역사통설은 마치 당(唐)나라가 신라(新羅)를 끌어들여 패권을 다툰 듯이 날조된 기록으로 후세를 농락하고 있으나, 고구려 멸망(668)후 신라(新羅)와 당(唐)사이의 마지막 패권전쟁(670-676)을 통해 신라가 675년 매소성(買肖城)전투, 그리고 676년의 기벌포(伎伐浦)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당(唐)나라를 여지없이 분쇄해 버린 역사적 사실로 판단해 볼 때, 신라(新羅)라는 역사의 실체는 당(唐)의 군사력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강군(强軍)을 보유한 정치체제로 북방의 강자 고구려(高句麗)와 대륙 중앙의 강력한 백제(百濟)를 홀로 상대하기에는 도저히 불가한 상황에 따라 당(唐)나라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신라(新羅)의 위치가 반도로 축소,변조됨에 따라 신라(新羅)중심의 역사가 당(唐)나라 중심의 역사로 둔갑되어 버렸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중국으로 가는 길-Cathay and the way thither: being a collection of medieval notices of China(1866)>2002.-사계절- 이란 역작(力作)을 저술한 영국인 헨리 율(Henry Yule,1820-1889)은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로 로마에 알려진 세레스(SERES)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신라(新羅)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다.
“세레스인들이 사는 곳은 광활하고 인구가 조밀한 나라이며, 동계(東界)는 대양에 면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의 끝이며, 서계(西界)는 이마우스(Imaus)와 박트리아(Bactria) 변경 근처까지 뻗어 있다. 사람들은 매우 유화(柔和)하고 검약한 기질을 가진 개화인이며, 이웃과의 충돌은 삼가지만 친밀한 교제에는 좀 소심한 편이다. 그러나 生絲를 주산품으로 한 견직물이나 모피, 그리고 양질의 철 등 자신들의 생산품을 처분하는 데는 결코 인색하지 않다.
고지도(古地圖)를 보면 지금의 카자흐스탄 북동쪽을 중심으로 세레스(SERES)라는 단어가 쓰여져 있다. 물론 후대에는 이 지역이 케세이(CATHAY-거란)으로 표기됨에 따라, 역사의 거란(契丹)이란 나라의 강역이 현 카자흐스탄의 북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또한 알 수 있기도 하다.
신라의 독창적 비단인 조하주(朝霞紬)의 직조방식이 카자흐스탄 지역에 남아서 이캇(ikat)이라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교류만이 아니라, 신라의 통치가 이 지역에까지 이르렀었다는 과거를 보여주고 있다.
3.
의자왕(義慈王, 재위641-660)때 이르러 나당(羅唐)연합군이 공격해 들어오자 좌평 성충(成忠)은, “만일 외국 군대가 백제를 침범하는 경우 육로에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하며, 그만큼 기벌포(伎伐浦)는 백제 수도방어의 최전방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벌포(伎伐浦)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모두 백강(白江)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록하면서, 백제의 군사적 요지로 사비성(泗沘城)근처의 나루터 라고 역사기록은 말하지만, 이는 반도백제를 강제함에 따라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의 기록이고 이를 대륙에 존재했던 강대한 백제로 옮기면 이야기는 완벽히 달라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4 김인문조에는 “(당군이) 웅진구(熊津口)에 이르니, 적군(백제)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延之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고 기록함으로써 당군(唐軍)이 백제군을 맞아 싸운 장소를 신라본기에서는 “기벌포”라 하고 김인문전에서는 “웅진구(熊津口)”라 하여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으며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기벌포를 백마강(白馬江)이라고 말하고 있다.
웅진(熊津)은 우리 고어(古語)로 고마나루 또는 고마나리 라고 불리며, 고마는 ‘곰’을 뜻하고, 나루와 나리는 ‘물가’를 뜻하므로 바로 곰나루가 되는데, 현 반도 한국의 공주(公州)에 위치하면서 사비성(泗沘城)이 강제된 부여(扶餘)의 북쪽 금강가에 위치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조선사오천년 역사를 반도에 강제하면서 반도의 지형을 맞추어 새롭게 규정한 것들로, 일제가 준 돈 1만원에 나라의 역사를 팔아먹은 조선역사의 반역자 이병도(李丙燾)는 역사상의 기벌포(伎伐浦)를 한반도의 금강하구인 장항(長項)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장항(長項)!
기다란 목덜미 쯤으로 해석이 되는 단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반도한국의 충청도 금강하구에 위치한 장항(長項)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대륙의 부여(扶餘)위치를 밝혀 사비성(泗沘城)과 낙화암(落花巖)을 찾아내게 되면 기다란 목덜미 모양을 형성한 장항(長項)과 기벌포(伎伐浦)를 밝히게 되고 조선사의 충청도 남쪽을 명확히 고증해 낼 수 있게 되며, 또한 계백(階伯)장군과 오천결사(五千決死)의 영웅담이 살아 숨쉬는 역사속의 황산(黃山)벌을 짚어낼 수 있는 일이 될 터이다.
바로 장항(長項)이라는 단어를 통해 기벌포(伎伐浦)를 찾아가는 중요한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바로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 정책으로 장강(長江)이북을 포기하고 현 동정호(洞庭湖)의 서남쪽 장항(長項)이라 불리울 정도로 기다란 강의 하구 목부분에 새로운 도읍지 웅진(熊津)을 건설(백제 文周王,475)하고, 이후 다시 더 남하하여 사비성(泗沘城)을 축성(成王,538)하여 요새와 같은 지역에 터전을 잡게 되고, 668년 신라(新羅)의 대륙통일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이 아름다운곳에 삼천궁녀(三千宮女)의 슬픈 이야기가 꽃처럼 날아 낙화암(落花巖)에 전해져 말없이 역사의 슬픈 일들을 간직한 채 서 있고 , 그 앞으로 역사의 백마강(白馬江)이 무상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4.
이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위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百濟)의 부여(夫餘)는 현 대륙 호남성(湖南省) 사오양시(邵陽市, Shàoyáng Shì)가 되겠다.
충신 성충(成忠,?-656)이 간했던 기벌포(伎伐浦)는 당군(唐軍)이 현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에서 출발해 양자강(揚子江)을 타고 동정호(洞庭湖)에 도착한후 백제(百濟)의 심장부로 들어가기 위한 중요 인입구로 현 이양(益陽)시 부근으로 볼 수 있으며 기다란 목덜미처럼 생겼기에 이를 또한 장항(長項)이라 불렀음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협곡(峽谷)으로 이루어진 장장 400km거리인 기다란 강의 초입인 기벌포(伎伐浦)만 막으면 아무리 막강한 당군(唐軍)이라 할지라도 어쩔수가 없을 만큼 천연의 요새(要塞)로 형성된 금강(錦江)의 하구 기벌포(伎伐浦)- 장항(長項)이다.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의자왕(義慈王)은 그 먼 거리를 당군(唐軍)이 배를 타고 들어오기에는 불가하다 판단하고 이의 방비를 게을리 했고, 나당(羅唐)연합군은 이의 허(虛)를 과감하게 돌파했던 것이다.
현재 중국 바이두(Baidu)에서는 대륙의 중요지형에 대한 일부사진을 게재하고 있는데, 작년 필자가 바이두에서 뽑아온 낙화암의 사진을 우리 카페에 올리고 난 후 지금은 바이두에서 소양시(邵陽市)를 들어가 보면 제일먼저 올라있던 낙화암비정 사진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 후예 대한민국이 불과 100년전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밝혀 선조(先祖)의 유허(遺墟)를 찾기 위한 다물(多勿)의 역사시작을 벌벌떨며 두려워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삼천궁녀(三千宮女)의 꽃다운 넋이 어찌 이 반역의 땅 한반도 부여(扶餘)에 있을 수 있으며, 황산벌의 웅대한 영웅담이 어찌 이 초라한 친일파들의 땅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두 주먹 불끈 쥐고 푸른 창공에 한마디 외치지 못하는 이 비겁의 시대에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大陸朝鮮史硏究會)는 오직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올곧은 정신으로 선조(先祖)의 위대한 숨결을 찾아감에 주저함이 없을 뿐이다!
몽환적인 안개속에 희미하게 조성되어 있는 낙화암 자리가 보인다.
2022.06.18. 松溪
첫댓글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혹시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빠졌다는 사서의 기록을 알 수 있겠습니까?
대륙의 거대했던 백제의 궁성에 거주하는 사람이 3천명은 되지 않았을까요? 구한말 조선의 궁궐에도 3천명이상이 거주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에 빗대어 후대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송계 왕궁에 있던 모든 궁녀들은 대왕포가 있는 암석 즉 바위위에서 모두 떨어져 죽었다. 세칭 사람들은 낙화암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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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궁녀가 삼천명쯤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습니다. 좀 많긴 하지만요.
隆熙 元年 丁未(續)(1907년) 궁내부 관원 3,200여 명, 隆熙 2년 戊申(1908년)內官이 500여 명, 內人, 武監, 別監, 別軍官, 員役 등의 축출된 사람은 3,500여 명이나 되었다.-출처 매천야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