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아오자이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오토바이의 행렬, 그리고 바다와 기암괴석의 절묘한 조화가 압권인 하롱베이가 베트남 풍경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나트랑(Nha Trang)과 달랏(Da Lat)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각각 해변과 고원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 두 도시는 ‘프랑스’라는 공통적인 키워드로 연결되는데, 물론 가장 베트남다운 풍경은 도심 속 재래시장에 담겨 있다.
1 달랏 최고의 호텔인 소피텔 달랏 팰리스 앞에는 멋들어진 클래식 자동차 한 대가 서 있다. 그 뒤로 쑤언흐엉 호수가 보인다.
약간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가해자와 피해자, 상처를 준 쪽과 상처를 받은 쪽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두 진영의 온도 차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는 ‘하나의 진실, 두 개의 기억’이라는 명제를 극명하게 설파한다. 베트남과 프랑스도 한일 관계와 비슷하다. 식민지 베트남이 자국에 들어선 근대적 기반 시설을 ‘베트남 착취를 위한 프랑스의 전략적 술수’라고 기술하는 반면, 제국주의 프랑스는 ‘문명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변한다. 어쨌든 베트남에는 아직도 프랑스가 많이 남아 있다. ‘아시아의 파리’로 불렸던 천년 고도 하노이는 물론이고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진 나트랑과 달랏에도 프랑스의 그림자는 짙게 어른거린다. 두 도시를 함께 여행했던 잡지사 기자들이 다녀와 쓴 기사에 ‘프랑스풍 낭만과 추억’, ‘프렌치 베트남’ 따위의 제목을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달랏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럽풍의 건물들이 수두룩한 것은 물론이고 송전탑조차 파리의 에펠탑을 닮았으니까 말이다.
해변과 유적, 어우러지다 나트랑의 자랑은 해변이다. 베트남 최고의 해변인지는 몰라도 베트남에서 으뜸가는 해변 휴양지로 일컬어진다. 해변 휴양지로서의 개발이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유럽인들을 위한 휴양지로 조성된 것이다.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각별해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야전 사령부와 십자성부대가 이곳에 주둔했다고 한다. 나트랑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6킬로미터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아침과 저녁에는 산책과 데이트를 즐기는 현지인들이, 한낮에는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는 관광객들이 고운 모래밭의 주인이 된다. 해변을 따라서는 다양한 종류의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는데, 빈펄 리조트 같은 곳은 아예 섬 전체를 오로지하고 있다. 섬에는 놀이공원과 워터파크 등 특색 있는 부대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호응이 높다.
담시장은 나트랑에서 규모가 제일 큰 재래시장이다. 부채 모양의 지붕을 얹은 건물 1층에서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잡다한 물품을 판매하고, 2층에는 의류 매장들이 몰려 있다. 가장 흥겹고 정겨운 풍경은 건물 주변의 노점상들이 만들어낸다. 바구니에 과일과 채소와 건어물 등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낙들의 모습은 우리네 시골 5일장을 연상시킨다. 너나 할 것 없이 베트남 전통 모자인 ‘논’을 쓰고 있는데 나름 맵시가 난다. 큼지막한 오렌지를 주문했더니 즉석에서 깎아 준다. 시큼하면서도 상큼한 맛이다. 망고, 망고스틴, 파파야, 두리안, 람부탄, 바나나 등 열대 과일들이 내뿜는 제가끔 다른 색깔과 향기가 시각과 후각을 쉴 새 없이 자극한다.
가냘픈 어깨에 올린 기다란 막대 양쪽에 바구니를 매단 채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는 몸으로 밀고 나가는 인생의 지난함이 읽힌다. 직접 들어보니 균형 잡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장한 사내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상당히 무거웠다.
빈펄 리조트와 놀이공원이 들어선 혼트레섬까지 연결하는 전용 여객선
해변 도시지만 나트랑 시내에는 참파 왕국 시절에 세워진 포나가르탑 같은 유적도 있다. 참파는 2세기 말엽 지금의 베트남 남부에 참족이 세운 나라인데,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해상 교역으로 번성했다.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과 아치형의 내부 구조는 참파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다. 팔이 열 개인 참족 여신을 뜻하는 포나가르는 원래 8개의 탑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약탈과 파괴를 거치며 현재는 4개만이 남은 상태다. 힌두교 사원에서 불교 사원으로 쓰임새가 바뀐 포나가르탑의 본당 안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신실한 신자들이 연중 간단없이 찾아와 향을 태우며 소원을 빈다. 탑바 온천은 나트랑의 또 다른 휴양 요소다. 일반 온천욕은 기본이고 진흙 목욕을 할 수 있는 점이 독특하다.
3 나트랑의 5개 섬들을 돌아보는 아일랜드 호핑 투어 중 들르게 되는 트리 응우옌 아쿠아리움. 범선 모양의 외관이 흥미롭다. 4 나트랑의 베트남 해양 박물관에서 직접 만져본 불가사리. 테마별로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전시돼 있다.
베트남 최고의 신혼 여행지, 달랏 나트랑에서 달랏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차로 5시간을 달려야 하는 다소 고단한 여정이지만 몽환적인 안개와 고산지대 특유의 자연이 수놓는 차창 밖 풍경이 수고로움을 넉넉하게 보상해준다.
달랏은 베트남의 다른 도시들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우선 해발 1475미터에 위치한 탓에 공기는 쾌적하고 바람은 삽상하며 기온은 한 뼘 정도 낮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아열대기후는 달랏에 들어서는 순간, 가뭇없이 사라진다. 선선한 날씨 덕분에 커피와 고랭지 채소 농사가 수월하다. 보통 커피나무는 해발 1000~1500미터 사이의 지대에서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랏은 또 화훼 산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5 머드 온천으로 유명한 나트랑의 탑바 온천.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6 포나가르탑에서 유적을 감상 중인 베트남 여인. 전통 복장인 아오자이를 입고 논을 쓰고 있다.
달랏은 베트남 최고의 신혼 여행지로 손꼽힌다.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데, 서늘한 기후와 더불어 프랑스풍으로 대변되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한몫 단단히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파스텔 색조의 목조건물들과 노천카페는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을 연상시킨다. 달랏에 붙여준 ‘작은 파리’라는 별칭이 어색하지가 않다. 도심에 들어선 달랏 최고의 호텔인 소피텔 달랏 팰리스도 유럽의 고급 저택 같은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달랏 역시 프랑스 식민 정부가 유럽인을 위한 휴양지 마련을 목적으로 1912년부터 개발한 곳이다.
광주리 안에 소복하게 담겨있는 담시장의 오렌지
‘껌’과‘퍼’만 알아도 제대로 먹는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제국주의의 부산물에서 이제 정치적 의도와 함의를 거세시킨 채 그 외양과 분위기만을 소비한다. 도시의 상징인 쑤언흐엉 호수도 도시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드리운다. 호수의 명패는 17세기에 문필로 이름을 날리던 여류 시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달랏의 또 다른 ‘물’인 타티엔 호수와 사랑의 계곡에서는 달콤한 맛이 난다. 베트남의 청춘들은 이곳에서 오리배를 타며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
달랏의 중앙시장은 시내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호치민의 통일궁을 설계한 응오 비엣 투라는 사람이 시장 건물을 설계했다는데 특별한 건축 미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장 내 대부분의 상점들은 오전 7시면 문을 열고 밤 9시가 되어서야 판을 접는다. 채소 가게는 더 부지런을 떨어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사이면 어김없이 기지개를 켠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한 주민은 “달랏에는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밖에 없는데 가격에 민감한 일반 서민들은 재래시장을 주로 이용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도 시장에서 해결한다”고 귀띔해주었다. 건물 2층에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이 모여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알아두면 유용한 단어가 바로 껌과 퍼다. 베트남어로 ‘껌’은 밥이고, ‘퍼’는 국수다. 밥과 국수에 어떤 재료를 얹는가에 따라 요리 이름도 달라진다.
껌보는 쇠고기 덮밥, 껌가는 닭고기 덮밥이다. 당연히 퍼보는 쇠고기가 들어간 국수, 퍼가는 닭고기를 올린 국수다. 덮밥을 파는 음식점을 껌빈전이라고 하는데, 빈전은 서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덮밥은 서민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대중 음식이고, 전국 어디에서나 껌빈전을 손쉽게 찾을 수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밥과 함께 먹는 고기나 생선, 생채, 국 등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더욱이 우리처럼 간장과 마늘, 고추를 즐겨 먹는다.
달랏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들이 유난히 많다. 도시를 화사하게 물들인다.
검고 진하고 달콤한 유혹 나트랑의 담시장과 마찬가지로 달랏 중앙시장에도 수많은 영세 상점과 노점상들이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양파, 마늘, 생강, 고추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을 비롯해 과일 행상과 플라스틱 통에 갖가지 절임 음식들을 담아 놓은 반찬 가게들이 시장을 활기차게 만든다. 손님들이 물건을 담아 가는 비닐 봉투마저 다양한 빛깔로 구비돼 있어 시장을 알로록달로록하게 물들인다. 과일이 워낙 풍부하다 보니 말린 과일, 설탕에 절인 과일, 과일 잼, 과일 술 등을 판매하는 곳도 많다. 메기, 새우, 게, 조개 등을 해산물 가게도 빼놓을 수 없다.
7 XQ자수박물관에 가면 정물화나 인물화 못지않게 아름다고 정교한 자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베트남에서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 중 하나가 바로 커피다. 태국에 이어 세계 제2의 쌀 생산국인 베트남은 커피 생산량에 있어서도 브라질에 이은 세계 두 번째 국가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때 달랏을 비롯한 고원지대에 커피 농장이 많이 만들어진 탓이다. 수출액 면에서는 오히려 커피가 쌀을 능가한다. 우리나라가 사들이는 커피 물량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는 국가도 다름 아닌 베트남이다. 품질은 뛰어나고 가격은 상대적으로 헐한 편이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쑤언흐엉 호수 주변의 르다이한 거리와 응우옌치타인 거리 주변에 카페들이 밀집해 있다.
커피를 주문하면 보통 양철로 된 1인용 드리퍼가 딸려 나온다.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검고 진한 커피가 한두 방울씩 아래 잔으로 떨어진다. 카페는 물론이고 길거리 노점상에서도 이 커피를 마실 수가 있다. 베트남 커피는 유난히 달고 진하다. 연유를 듬뿍 넣기 때문이다.
8 고도의 집중력으로 수를 놓고 있는 XQ자수박물관의 숙련공. 흡사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9 중앙시장 건물 2층에는 덮밥과 국수 전문 식당들이 몰려 있고, 시장 거리의 노점상들은 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판매한다. 10 중앙시장에는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열대 과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과일만 판매하는 행상들도 많다.
카페 뚱은 달랏의 카페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이다. 1950년대 사이공의 지식인들은 이곳을 아지트 삼아 우국충정을 나눴다. 타이베이에도 이와 비슷한 유서 깊은 찻집 쯔텅루가 있다. 쯔텅루에서는 1960~70년대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유학생과 소장파 학자, 문화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시국 토론회가 활발히 열렸다. 쯔텅루를 두고 ‘조그만 사회주의 공간’이라 일컫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오늘날 카페 뚱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올드 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지천명을 넘겼음직한 사내들이 무연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일 뿐이다. 시간이 흘렀고 세월은 변했다. 시침과 초침 앞에 마모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