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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왔습니다.” 5월 20일 제주 핀크스골프장에서 만난 김민성(43)씨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언제 이런 데 오겠어요. 지금이 아니면.” 김 씨의 아내 오정미(39)씨도 들떠 있긴 마찬가지였다.
19일서부터 이곳에선 ‘SK텔레콤 오픈’이 열리고 있었다. 원아시아투어와 한국프로골프투어(KGT)가 공동 주관하는 SK텔레콤 오픈은 총상금이 9억 원이나 걸린 국내 두 번째 메이저대회였다. 특히나 제주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KGT 메이저대회라, 언론과 골프팬의 관심이 매우 높았다. 오 씨의 말대로 ‘지금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대회였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이 대회를 보러 온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꼭 이 대회를 보러 온 것만은 아니에요.” 부부는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주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탱크를 보러 왔습니다.”
그때 그린 한가운데로 분홍색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구릿빛 얼굴의 사내가 나타났다. 탱크처럼 단단한 체구의 그는 북극곰처럼 차갑고 멀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대형 할인매장의 안내원처럼 친절하고 매력적인 미소로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최경주입니다.”
탱크의 주인, 바로 팬이다 SK텔레콤 오픈 내내 최경주는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한국 스포츠가 낳은 최고의 스타이자, 한국인이란 게 자랑스런 모범적 시민이기 때문이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날 핀크스골프장 노스코스 1번 홀에선 최경주(41·SK텔레콤)가 진행하는 ‘아마추어 필드레슨’이 예정돼 있었다. 레슨은 최경주 재단에서 후원하는 선수들과 제주지역 골프 유망주들, 그리고 일반 골프 애호가들을 최경주가 직접 지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SK텔레콤 측은 “레슨은 1시간 정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1시간이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최경주의 일정을 보면 사정은 달라졌다. 시쳇말로 ‘살인 일정’의 연속이었다.
5월 16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폰테베드라 비치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연장전을 포함해 하루에 27개 홀을 돌고 우승을 차지한 최경주는 17일 저녁 SK텔레콤 오픈에 참가하려고 제주에 도착했다.
그는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대회 전야제에 참가했고, ‘제주-세계 7대 자연경관선정' 홍보대사 위촉장을 전달받느라 밤늦게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다음날 밝은 표정으로 프로암을 마쳤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연습라운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최경주는 19일부터 바로 대회 1라운드를 치렀다. 1라운드에서 5언더파를 치며 2위로 선전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강행군이 끝난 건 아니었다. 레슨이 예정된 이날엔 새벽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2라운드 티오프가 오전 6시 50분에 예정됐기 때문이다. 골프전문가들 사이에서 “탱크도 시차와 피곤 앞에선 버티기 힘들 것”이라 우려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2라운드에서 최경주는 2오버파를 치며 주춤했다. 퍼트가 문제였다. 최경주는 퍼팅 라인을 세심히 살피고 정성스레 퍼트했지만, 공은 번번이 홀 앞에서 멈추기 일쑤였다. 피곤도 피곤이지만, 플레이어스챔피언십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린이 얼음장처럼 매끄러운 미국 골프장에 적응해 있던 최경주로선 오랜만에 접하는 한국 골프장이 다소 생경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유망주와 일반 골프팬들을 상대로 열린 '최경주와 함께 하는 필드 레슨'를 진행하는 최경주. 그는 3시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열성적으로 골프팬 지도에 나섰다. 그에게 팬은 친구이자, 가족같은 존재였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레슨을 위해 노스 1번 홀에 도착한 최경주의 표정은 그래서 다소 어둡고 피곤해 보였다. 자신도 “코스에선 몹시 피곤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최경주는 스타가 아니라 슈퍼스타였다. 그는 팬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 아는 이였다.
“코스에서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은 여러분과 저만의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골프를 하면서 궁금했거나 고민했던 점이 있으시면 주저하지 말고 제게 물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변하겠습니다.”
이어 질문이 이어졌다. 최경주는 코스에서 쏟았던 열정만큼이나 유망주들과 골프 동호인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언뜻 그가 ‘세계적인 골프 스타’가 아니라 ‘세계적인 레슨 코치’로 보일 정도였다.
최경주는 말로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골프채를 들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을 호명해 스윙폼을 교정해주며 자세한 조언을 들려줬다. 1시간 동안 드라이버와 아이언 그리고 퍼트와 벙커샷을 레슨하기로 돼 있었지만, 드라이버 샷 레슨에만 1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결국, 레슨은 애초 시간을 넘겨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최경주의 유머와 진정이 가득한 레슨에 청중이 매료된 까닭이었다.
최경주는 “사내 동영상을 촬영할 시간”이라는 메인스폰서 SK텔레콤 관계자의 귀띔을 듣고도 레슨을 멈추지 않았다. 되레 빙그레 웃으며 “지금 이 시간이 중요합니까, 사내 동영상이 중요합니까”하고 되물었다. SK텔레콤 측은 “당연히 지금 이 시간이지요”하며 흔쾌히 레슨을 이어가도록 했다.
따지고 보면 최경주의 타인을 향한 세심한 배려는 이 레슨만이 아니었다. 그는 경기 중에도 동료 선수가 좋은 플레이를 선보이면 갤러리가 된 것처럼 ‘굿 샷!’, ‘좋았어!’하며 기뻐했다.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디보트 자국은 스스로 메웠다. 갤러리가 환호하면 손을 들어 답례했고, 곳곳에서 사진 촬영을 해도 밝은 표정을 잊지 않았다. 레슨 도중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골프는 과학이 아닙니다. 수많은 경험과 훈련이 두뇌에 저장되고, 그것이 체화할 때 비로소 골프가 완성됩니다.”
그의 배려와 팬 서비스가 그랬다. 그것은 연기도, 강박관념도 아니었다. 필드 위의 선수들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인식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세계적인 골프가 될 수 있도록 응원해준 팬들에 대한 고마움과 진정성이 두뇌에 저장되고, 그것이 체화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었다.
3시간에 가까운 레슨이 끝나고도 최경주는 참석자들의 사인에 모두 응했고, 마지막 한 사람과 사진촬영을 했다. 최경주는 '프.로.골.퍼'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진짜 프로였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한 골프해설가는 “마흔이 넘고도 최경주가 PGA투어를 주름잡는 건 그가 늘 감사한 마음으로 골프와 삶을 대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때 레슨을 듣던 골프 유망주가 손을 들어 최경주에게 질문했다. “골프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최경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연습밖엔 답이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하며 자신의 노력에 절대 마침표를 찍어선 안 됩니다. 정말 앞으로 세계 골프계를 이끌 선수가 되고 싶다면 잊지 마십시오. ‘하루에 천 개 이상의 드라이버 샷을 연습하고, 천 개 이상의 퍼트를 할 용기가 없으면 골프에 인생을 걸지 말고, 그저 즐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 연습해서 어느 정도 입지에 도달하면 멈추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도전해야지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최선을 다한 훈련은 의미가 없다. 죽을 힘을 다한 훈련과 도전이 있을 뿐 2007년 타이거 우즈가 주최한 AT&T 대회에서 우승한 최경주가 우즈로부터 트로피를 받고 있다. 독실한 신앙인인 최경주는 가족 사랑이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신앙이 자신의 안위와 안락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용되는 세상에서 그는 말과 실천이 일치한 신앙인이다
최경주는 ‘골프 불모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역도선수였다. 그러나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골프는 독학으로 익혔다. 골프 만화책, 비디오가 그의 스승이었다. 프로 테스트를 준비할 때도 지원군이 없었다. 장안평의 연습장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혼자 준비했다. 당시 최경주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훈련했다. 손에 물집이 잡히는 건 상처도 아니었다.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한 덕분에 그는 1993년 프로에 입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최고의 골퍼로 성장했다. 1997, 1998년 2년 연속 국내골프 무대에서 최고 상금왕을 차지했을 때도 그가 골프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경주의 최대 강점은 도전 정신이었다. 국내 무대를 평정했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1998년 10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PGA 퀄리파잉(Q)스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을 떠나 더 큰 무대에서 자신을 시험하기 원했던 최경주는 “결국 실패할 것”이란 주변의 만류에도 미국행을 고집했다. 결과는 주변의 예상대로였다.
Q스쿨 1차 예선 탈락이었다. 그러나 최경주는 실망하지 않았다. 1999년부터 주로 유러피언 투어에서 뛰며 PGA 진출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해 Q스쿨 최종전에서 풀시드가 주어지는 35위에서 공동 35위를 차지해 턱걸이로 다음 해 PGA투어 출전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000년 투어 카드를 유지하기 위한 PGA투어 상금 랭킹 125위 안에 들지 못하며 컨디셔널시드(조건부 출전권)를 받게 된다. 당장 2001년부터는 풀시드를 가진 선수가 출전하지 않을 때만 투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당시 최경주는 ‘실패를 인정하고 귀국하느냐, 컨디셔널시드로 투어에 잔류하느냐, 아니면 풀시드를 받으려고 다시 한번 지옥 같은 Q스쿨에 참여하느냐'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다.
지인들은 귀국과 잔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조언했다. 누구도 Q스쿨 참여는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했다. Q스쿨 통과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경주는 가장 어려운 길에 도전했다. 3년 연속 Q스쿨에 응시한 것이다.
결과는 통과. 탱크의 저돌적인 현실 돌파가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성공이 뒤따른 건 아니었다. 반대였다. PGA 공식 데뷔전이었던 20001년 1월 소니오픈부터 3개 대회 연속 컷오프를 당했다. 4월 말까지 참가한 9개 대회에선 6번이나 컷오프되는 치욕을 맛봤다.
그때마다 탱크는 비탄에 잠기는 대신 연습에 한층 몰두했다. 그가 믿을 거라곤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행 4년 만인 2002년 5월 컴팩클래식에서 감격스런 PGA 첫 승을 거뒀다. 한국인 최초의 PGA투어 우승이었다. 최경주는 그해 총상금 220만 달러로 상금 랭킹 17위에 올랐다. 2003년에도 좋은 성적을 내며 2년 연속 총상금 2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최경주는 이후 5번 더 우승했다. 특히나 2008년 1월엔 PGA 데뷔 첫 컷오프의 상처를 줬던 소니오픈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후 3년 4개월이 넘게 우승이 없었다.
지난 5월 '제5의 메이저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경주가 환하게 웃고 있다 |
2009년 3월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한 골프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묘한 말을 했다. “2008년 PGA의 약물검사가 도입된 이후 많은 골퍼가 예전의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과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경주도 계속 부진하다. 최경주의 얼굴이 아시아인치고 매우 검은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선 완전히 연관이 없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최경주의 그간 우승이 의심스럽다는 뜻이었다. 대개 근육강화제인 스테로이드제를 장기복용하면 얼굴이 검게 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야구계에선 어느 시점부터 얼굴이 검게 타면 금지약물 복용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 골프기자가 모르는 게 있었다. 최경주의 얼굴이 애초부터 구릿빛이었고, 그가 햇살 아래서 무수히 많은 공을 쳤다는 것을.
무엇보다 최경주는 약물검사가 일상이 된 올 시즌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것도 41살의 나이로 말이다. 어쩌면 그 기자 말이 맞았는지 모른다. 최경주는 약물을 복용했을지 모른다. ‘훈련’과 ‘자기 절제’란 약을 말이다.
이웃과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은 최경주
최경주는 골프 레슨 때처럼 기부금 전달식에서도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최경주는 국내 스포츠 스타 가운데 기부에 가장 열성적인 이다. 2002년 5월 컴팩클래식에서 PGA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81만 달러의 상금 가운데 10%를 떼 국내 자선단체와 미국 현지 교회에 기부한 일이었다.
2003년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도 최경주는 우승상금 1억 원의 50%를 자선기금에 기부했다. 그해 수재민 돕기에 2억 원을 쾌척한 것은 더는 생경할 일도 아니었다.
급기야 최경주는 2007년 주니어 선수였을 때부터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온 삼정 피홍배 회장을 재단 이사장으로 위촉하고 12명의 사회 저명인사로 이사진을 구성한 ‘최경주 재단’을 설립했다. 최경주 재단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최경주가 개인적으로 벌였던 자선 활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간 벌어들인 상금 등 약 100억 원을 출연해 시작한 ‘최경주 재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지원과 장학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재단을 이용해 돈벌이에 나서거나 타인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재단을 운영하는 여타 재단과는 처음부터 차원이 달랐다.
특히나 2008년부터 ‘아름다운 동행’이란 이름의 선행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2008년 ‘신월 지역 아동센터’ 건립에 1억 7천500만 원의 기부를 시작으로, 2009년에도 최경주는 SK가 운영하는 행복도시락센터 청주점 건립을 위해 1억 원을 쾌척했다.
단일 최대 우승상금(171만 달러)을 받은 플레이어스챔피언십 우승 직후에도 최경주는 최근 미국을 강타한 토네이도 복구 지원금으로 20만 달러를 냈다. ‘우승에만 혈안이 돼 있고, 기부엔 인색하다’란 평을 들었던 한국 골프 선수들의 이미지를 단번에 뒤엎는 기부였다. 미국 언론이 앞다퉈 최경주의 기부를 보도한 건 그만큼 그의 기부가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최경주의 ‘아름다운 동행식’이 열리고 있을 때 한 기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골프에서 번 돈을 저렇게 다 쓰면 뭐가 남느냐”는 것이었다. 기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최경주의 생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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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최경주의 진짜이야기
최경주 선수의 말 중에 온갖 역경에도 항상 제자리에 있는 그런 푸른 소나무가 되고싶다는 말 저도 잘 새기겠습니다. 정말 잘 보고 갑니다.